"돈 천 석, 사람 천 석, 글 천 석이라는 뜻으로 '삼천 석 댁'으로 불리며 호의호식하고 살 수 있는 집안이었지. 그래도 나라를 되찾으려고 가문의 사람들을 다 이끌고 추운 겨울 망명을 떠나지... 그게 시작이었어."
서울 대림동에 있는 낡은 연립주택에서 지난 6월 2일 기자를 맞이한 김시진(78)옹은 깊이 주름진 얼굴과 손에 힘을 주어가며 집안 어른들의 독립투쟁을 설명했다. 김옹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이끈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4)의 종증조손(從曾祖孫)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종증조부 등이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중국에서 태어나 나이 육십 넘게 살다가 지난 2001년 한국에 돌아와 국적을 회복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 중국으로 떠난 일가
그의 뿌리는 경북 안동의 내앞마을(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이다. 보통 안동 하면 하회마을을 떠올리지만 내앞마을은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의성 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서 항일투쟁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김씨의 종증조부인 백하 김대락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 선생의 후손 김시진옹.
ⓒ 박세라
"백하 할아버지는 근대식 교육시설인 협동학교를 세우기 위해 50여 칸의 집을 내놓고, 자신은 작은 집으로 옮겨갔다고 < 황성신문 > 에 보도되기도 했어요."
1907년 봄에 설립된 협동학교는 신민회와 더불어 신교육운동에 앞장섰다. 일제는 사립학교령을 통해 학교설립과 운영을 통제했고 역사교과서 편찬을 금지했지만 협동학교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이끌어갈 재목을 키웠다. 단주(旦洲) 유림(柳林) 선생 등 졸업생 대다수가 만주로 망명해 활동하거나 국내에서 3·1만세의거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의성김씨 가문의 독립운동가들이 받은 훈장을 어루만지고 있다.
ⓒ 박세라
1910년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백하는 문중의 청장년들과 함께 서간도(현재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망명을 결심했다. 그 해 12월 24일 66세의 나이로, 만삭인 손부까지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엄동설한에 일가족 38명이 안동에서 서울까지 걸었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가서는 다시 걸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백하는 고향을 떠나면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1913년 12월 31일까지 만 3년의 일을 모두 기록했다. 이 '백하일기'에는 만주를 다녀갔거나 머물렀던 인사들의 활동상이 모두 기록돼 있어 역사적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모자라면 백하는 사람을 보내 고향땅을 팔았다. 그렇게 거듭 재산을 처분하다 보니 고향에는 후손을 위한 땅 한 뙈기 남지 않게 됐다. 항일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헌신은 백하로부터 자식과 손자대까지 이어졌다.
"김대락의 조카 김조식이 제 친할아버지입니다. 남만주에서 일본군이 쳐들어와 (독립군을) 체포하고 총살, 감금하니 견딜 수가 없어 할아버지는 제 아버지인 김문로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대조선독립단의) 박용만 장군과 사탕수수밭을 경작하며 수입의 일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셨대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취원창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 박세라
김문로는 15살 나이에 북만주 반일운동의 근거지인 '취원창'(현재 중국 흑룡강성 아성현)으로 갔다. 18살부터 농장과 군사기지를 개척했고 20살에는 구장(區長)이 되어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을 이끌었다. 김옹은 "아버지가 고국으로 돌아오길 희망했지만 김구·김좌진·김일성과 함께 하얼빈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월송 김형식을 돕느라 취원창에 머무르다 돌아올 때를 놓쳤다"고 말했다. 중국 땅에 남은 김문로는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69년 억울하게도 친일파로 몰려 3일간 모진 고문을 겪다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들에게 피맺힌 유언을 했다.
"독립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었는데 고국 땅에 발길도 한 번 못 돌려보고 죽는구나. 백하 할아버지부터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남은 것은 죽음이구나... 앞으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터지면 무조건 고향으로 가라. 내앞마을에 가서 문로의 아들이라 하면 그래도 알아줄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 안고 빈손으로 돌아온 조국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에 안고 살던 김옹은 한중수교와 경제협력 등으로 한국에 갈 길이 트이자 주변에 빚을 얻는 등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다. 처음 고향 안동을 찾았을 때 '퇴계 학맥의 독립운동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무심코 받아든 안내 책자에서 늘 가슴에 품고 살았던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독립, 독립하시더니 세상은 떴어도 이름은 남기셨다는 생각에 영광스러웠다"고 말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기념탑에서는 1000명의 독립운동가 이름 중 6번째 칸에 선명하게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항일활동으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탓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김옹은 중국에서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았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고국에 와서 확인할 수 있었다.
▲기념비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을 만지며 눈물을 참는 김시진옹.
ⓒ 김시진
그러나 빈손으로 온 김옹의 한국 정착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노년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폐지를 줍거나 일용직으로 가끔 노동을 하는 것이 다였다. 아내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며 셋집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다. 다행히 기초수급자로 선정돼 정부에서 생계비와 노령연금 등 한달 50만 원 남짓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서울시가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배려로 임대주택을 지원해줘 이사 다닐 걱정을 덜었다고 좋아했다.
생활은 힘겹지만 고국에 돌아온 후 '영광의 순간'도 여러 번 경험했다고 김옹은 말했다. 지난해 현충일에 서울 여의도 물빛무대에서 열린 '충혼의 불꽃 승리의 빛'이라는 행사에서 그는 애국지사 후손 대표로 12분 동안 연설했다. 아버지가 취원창에 살면서 숨질 때까지 고생했던 일과 가문의 역사를 얘기했다. 순간순간 설움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하는 김옹과 함께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 광복절에는 서울시청의 타종행사에 참여했다. 처음엔 '타종'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동사무소의 기초수급 담당자에게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단다.
"동사무소에 가서 그 의미를 알았지만, 나는 생전 종도 안 쳐보고 칠 줄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어요. 그래도 거기 가면 어떻게 하는지 다 지도해준다는 말을 듣고 영광스럽게도 그런 행사에 참여해보게 됐지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바지 밑단이 다 젖었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는 11번 타종하는 동안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을 떠올렸다. 그 옛날의 재산과 명성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 종소리는 천국에서도 선조들이 들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를 잘 배웠으면"
그는 중국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북흥촌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조들이 목숨을 던져 지킨 이 나라가 잘 됐으면 하는 열망은 강렬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과 재벌은 재산에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세금을 제대로 안 내려고 이리저리 방법을 찾고 부패는 끊이지 않으니, 지금 이 좋은 세상에 왜 저렇게 욕심을 내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들이 독립 후에도 단죄 받기는커녕 출세가도를 달리고 그 후손들은 조상이 남긴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나라에서, 가난한 독립투사의 후손은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남북한이 대립하고 싸우는 현실이 속상하다며, 조국의 통일을 보고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서, 불행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앞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를 잘 알아야하고 그 속에서 잘못된 점은 깨우치고 잘된 것은 배워야합니다. 우리나라에 어떤 험한 역사가 있었는지 학생들이 제대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지금처럼 나라가 안팎으로 시끄러울 때 현명하게 앞일을 도모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