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이야기 1002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조선의 인사권자 ‘전랑’
이중환은 ‘살 만한 곳’을 가리는 기준으로 지리와 생리, 인심, 산수의 네 가지를 들어서 조선 팔도의 인심을 논하고자 하였지만, 정작 그가 다루려고 했던 것은 인심보다는 당시 사대부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당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인심에 관한 언급은 극히 짧고, 곧바로 “이것은 서민을 두고 말한 것이고 사대부의 풍속은 또 그렇지 않다”라면서 당쟁의 씨앗이 되었던 ‘벼슬제도’로 초점을 맞춘다.
내외 관원을 임명하는 것 역시 삼공이 아니고, 모든 권한이 이조에 속하였다. 또 이조의 권한이 너무 큼을 염려하여 삼사(三司)의 관원을 추천할 때는 판서에게 맡기지 않고, 오로지 이조의 낭관(郎官)에게 맡겼다. 이러므로 이조의 정랑과 좌랑이 대간(臺諫)을 추천하는 권리를 주장하게 되어, 삼공과 육경이 벼슬은 비록 크고 높지만 전랑(銓郞)이 보기에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불만스러운 일이 있으면, 삼사의 신하들로 하여금 논박하게 하였다.
조정의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명망을 중하게 여겼으므로 한번이라도 탄핵을 당하면 그 자리를 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런 까닭에 전랑의 권세는 바로 삼공과 비슷하였다. 이것은 큰 벼슬과 작은 관직이 서로 얽히고, 상하가 서로 견제토록 한 것이다. 이런 기풍이 3백 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권세를 크게 농간한 신하가 없어, 꼬리가 커서 흔들기 어렵게 된 근심이 없었다. 이것은 조종께서 고려 때, 임금의 권세는 약하고 신하의 세력이 강하였던 폐단을 징계 삼아, 그런 점을 예방하는 작용을 슬그머니 마련한 때문이었다.
- 『택리지』 「복거총론」
여기에서 전랑(銓郎)은 이조(吏曹)의 낭관, 즉 정랑과 좌랑을 말한다. 이렇게 전랑 자리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가는 사이 국정은 붕당의 깊은 골을 만들었다. 이중환이 3백 년 동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 전랑제도가 당쟁을 파생시킨 것은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이중환은 이러한 당파싸움의 시초를 선조 때의 김효원과 심의겸 사이에 벌어진 감정싸움이라 보고 있다. 명문가의 후손에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명망 받던 김효원이 전랑에 추천되었는데, 당시 왕실의 외척으로서 이조참의에 있던 심의겸이 반대했던 것이다.
이에 선비들이 시끄럽게 일어나 심의겸을 가리켜 어진 사람을 거부하여 권세를 농간한다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심의겸은 비록 왕실의 외척이었지만 일찍이 권력을 잡은 간사한 자들을 물리치고 선비들을 보호한 공이 있었다. 그래서 나이가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은 의겸을 옹호하였다. 이에 선배와 후배 사이에 논의가 갈라졌는데, 처음엔 하찮은 일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그리하여 계미년과 갑신년 사이에 동서의 이름이 비로소 나누어졌다. 당시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인이라 하였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인이라 하였다. ······ 이것이 조선시대 붕당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