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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 2:18-26
18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5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 2:18-26 / 내가 이 세상에서 수고하여 거둔 모든 것들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 주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괴롭다. 19) 게다가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그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런데도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그의 것이 되고 만다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내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은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는가? 선왕들이 이미 오래전에 한 일밖에 무슨 일을 더 하겠는가? 20)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애쓸 명분도 의욕도 다 잃어버렸다. 21)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하여 내 평생 이루어 놓은 일을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도 전혀 보상도 없이 넘겨 주어야 한다는 것은 허무하고도 아주 잘못된 일이다. 22) 사람이 일평생을 수고하여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23) 낮에는 슬픔과 걱정에 쌓인 채 살고 밤에조차 쉬지 못하고 괴로워 몸부림을 친다면 세상사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24) [누가 인생을 즐길 수 있는가] 결국 나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자기의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하나님께서 주실 때만이 누릴 수 있다. 25)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 누가 기쁨으로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2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들에게는 지혜와 지식도 쌓고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다. 그러나 죄인은 아무리 재물을 모으느라 애를 쓸지라도 그것을 누리게 해주시기는 커녕 그 재물을 빼앗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자들에게 주신다. 그러니 재물을 쌓는 일 또한 얼마나 바람을 잡듯 어리석은 일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유한하고 허무한 인생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지혜는 이 비밀을 깨닫고 영원한 것을 향한 관심으로 인도합니다.
이것도 헛되도다(18-23) 사람이 죽으면 해 아래서의 모든 수고는 그치고, 그가 남긴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가 관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은 육체의 관계를 모두 단절시킵니다. 자신을 위한 수고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돌아간다면 그 수고는 아무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전도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큰 악으로 여겨집니다. 더구나 자신이 남긴 것을 관리할 자가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더욱 허무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온 모든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이렇게 끝난다면 그의 수고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해 아래에서 근심하며, 수고하고, 애쓴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수고가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지혜는 현실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갖게 합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24-26) 전도자가 허무함 속에서 발견한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이 일상에서 먹고, 마시는 기쁨과 맡은 일에서 오는 만족입니다. 허무하게 끝나는 일들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리는 자연스러운 만족과 즐거움도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전도자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른 데 있습니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보았으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으로 주어집니다(25).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에게 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는 먹고 즐기는 일이 빼앗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죄인들의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돌아가고 지혜자의 것도 죽음 이후에 다른 이들의 관리로 넘어가기에 이 둘의 차이가 없습니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제한된 것에 마음을 둘 때, 결국은 허무함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현재의 누리는 기쁨도 허무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사람을 하나님과 영원을 사모하는 것으로 이끌어 줍니다.
적용: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한 것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복이지만, 당신이 더 크게 생각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무괴아심(無愧我心) 이란 ‘내 마음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한다’는 뜻으로,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멋진 삶이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물가에 비친 석양도 아름답고 아침에 뜨는 해 또한 아름답다. 청춘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흰머리에 얼굴 주름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상대가 실수하고 잘못을 하여도 눈감아 주고 포용해 주자. 내가 옳을 지라도 너무 강하게 말하면 상대는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된다. 나눈 것은 잊고 받은 것은 기억하며 눈 감을 줄 알고 용서할 줄 안다면 세상 살아가는데 적은 없을 것이고 인생 마무리는 멋지게 될 것이다.”
< 설 교 >
가장 좋은 것
전도서 2장 18~26절 / 염두철목사(한마음교회)
우리는 어린 시절 ‘개미와 베짱이’이야기를 통해 개미처럼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개미는 여름 내내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겨울을 준비합니다. 반면에 배짱이는 노래하며 즐기면서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베짱이는 게으르고 의지가 약하고 불성실한 곤충인 반면에 개미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준비할 줄 아는 지혜로운 곤충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야기대로라면 베짱이는 굶주리고 얼어서 모두 죽어 없어져야 하는데, 해마다 배짱이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개미와 베짱이’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개미같이 일만하는 인생보다 베짱이처럼 아름다운 노래로 예술로 삶에 지친 인생을 즐겁게 하는 인생이 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해서 공부를 강조했지만 요즘은 ‘노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세상은 잘 노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인기도 얻고, 유명해지고, 돈도 잘 법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미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배짱이와 같이 사는 사람을 보면서 얼마나 허무함을 느끼겠습니까? 솔로몬은 왕이 되어 20년 동안 건축 사업을 벌이며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보람이 있었다, 만족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수고를 미워한다는 말로 시작하여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18-19 내가 해 아래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솔로몬은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수고를 미워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노년에 직면한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죽게 되면 모든 수고의 혜택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을 자, 즉 후대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솔로몬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죽도록 일합니다. 안전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하여 쉬지도 못하며 한밤중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닥칩니다. 그러면 죽도록 일하면서 쌓아놓은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만약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놀기만 하던 사람에게로 넘어간다면, 또 어리석은 사람에게로 넘어간다면 모든 수고가 얼마나 헛된 일이며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솔로몬은 자기의 후계자가 지혜로운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그 한탄은 더욱 짙어졌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탄식에는 자신이 일을 시작할 때 계획했던 뜻을, 후대가 잘 관리하지도 못하고 물거품을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들어있습니다. 만일 후대가 어리석은 사람이어서 일의 원래 취지를 잃어버린다면 자신의 수고가 허무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걱정은 과연 쓸데없는 걱정이었을까요? 솔로몬의 후계자인 르호보암이 어떻게 했는지 알면 솔로몬의 걱정과 탄식이 당연했었음을 알게 됩니다.
솔로몬이 죽자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대관식을 위해 세겜에 갔다가 북쪽 지파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북쪽 지파사람들은 솔로몬 당시 건축 사업을 하면서 부과되었던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르호보암은 3일 후에 그 요청에 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아버지 솔로몬을 모셨던 장로들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들은 백성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왕의 명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지혜로운 조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조언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적인 경험이나 지혜가 없는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다시 구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백성에게 솔로몬 때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우라고 충동질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노인들의 조언을 배척하고 자기와 친한 젊은 사람들의 말을 쫓다가 나라를 둘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솔로몬이 염려한 대로 왕국의 번영을 위한 모든 수고가 헛되이 되고 말았습니다.
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솔로몬은 자신의 후계자가 지혜자이든 우매자이든 자신이 이룬 것이 후대로 넘어가게 되는 일로 인해 허무함을 느꼈고, 그로 인해 자신이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실망했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해 아래서 가치 있는 것을 찾아보고자 했던 솔로몬의 시도는 헛될 뿐이었습니다. 솔로몬이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라는 말은 실망하여 일할 의욕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헛될 뿐입니다.
기대가 없는 인생은 너무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떠한 순간에도 인생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막연하지만 인생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뭔가를 기대를 하면 대개 실망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 국민들은 8강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큰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승을 기대하던 브라질은 준결승전에서 독일에게 7:1로 패하여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입니다. 특히 사람에게 기대를 걸면 실망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기대를 걸면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전도자는 무엇 때문에 실망하였을까요? 본문 21-23절에서 실망한 내용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21-22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전도자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여 많은 것들을 얻었다 할지라도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수고한 모든 것들이 수고하지 않은 자에게 합법적인 몫으로 넘겨지는 일로 인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깨달은 모순된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전도자는 이것이 헛된 것이며 큰 악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악이 될까요? 수고하지 않고 물려받은 사람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에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 그 모든 것들을 의지하며 헛된 결과를 향해 달려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수고하지 않고 물려받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님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결과물에 대한 진정한 주권은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후손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모든 것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해서 수고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목표를 이루어도 결국에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도자는 교훈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성취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기쁨입니다. 잠시 잠깐의 기쁨을 얻기 위해 밤에 잠을 자면서도 그 마음이 제대로 쉬지 못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전도자는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자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큰 야망과 욕심이 오히려 인생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벌려놓은 일 때문에 걱정이 돼서 밤에도 쉼을 얻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늙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밤낮으로 걱정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해에 풍년이 들어 그 부인은 밭에서는 감자를 많이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목사님이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걱정하지 않겠지”생각하면서 그 부인을 길에서 만나자 “감자가 잘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얼마나 좋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감자는 잘 되었습니다만 작년에는 썩은 감자가 많아서 돼지를 먹였는데 올해는 썩은 감자가 없으니 어떡해야 합니까?” 하고 또 걱정을 했습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안식은 밤입니다. 밤에는 쉴 수 있어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염려 없이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 살아야 합니다.
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솔로몬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며’라는 말은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며 일하는 즐거움은 인간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함 속에서 기뻐하며 살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특별해야만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고, 특별한 옷을 입고, 특별한 집에서 살며, 특별한 음식을 먹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평범한 삶 속에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행복도 조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우리나라의 순위는 중위권 내지는 하위권입니다.
2013년 세계 1인당 국민소득 1위는 바로 룩셈부르크가 차지했습니다. 무려 11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억 2천만 원 가량 됩니다. 4인 가구면 연간 소득이 5억 원 정도 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룩셈부르크의 행복순위는 어떨까요? 19위였습니다. 잘 사는 것과 행복은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떻까요? 1인당 국민소득은 23,837 달러로 33위이고, 행복순위는 41위입니다. 일본은 42위, 대만은 43위입니다. 우리가 일본, 대만보다는 아주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대한민국 직장인의 행복을 말하다’라는 보고서에서 따르면 직장인 849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평균 행복도는 100점 만점에 55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잘 살고 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한국 직장인도 그다지 즐겁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잘 살게 되었는데, 왜 그럴까요? 잘사는 것과 행복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맛있던 고기도 배가 부르면 맛이 처음과 같지 못합니다. 행복이라는 감정도 그렇습니다. 선진국의 경우 물질적 포만도가 일정 수준을 지나면 소득 상승이 더 이상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구는 바닥없는 항아리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크게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우리는 특별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평범함 속에서, 심지어는 불행한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지선은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학과 졸업을 앞둔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주 운전자가 사고를 내고 도망가던 중에, 빨간불에 정차해있던 이지선이 타고 있던 차를 친 것입니다.
이지선은 사고당시 충격이 컸기 때문에 사고 후 상황을 정확히 기억을 하진 못하지만, 이지선 오빠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지선의 몸에 불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지선을 오빠가 차에서 꺼냈을 때는 불이 상반신 전체에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이지선은 전신 55퍼센트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들도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십여 차례의 수술 끝에 간신히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고 살게 되었으나 그녀의 모습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지선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환경을 받아들이고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한 조건이 아무리 많아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은 아니고 아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누구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족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크고 중요한 것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5-26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해 보았으랴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누구일까요? 시편 147편 10-11절을 보면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본문에서는 그들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큰 고통과 계속되는 수고로 부를 축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애써 모은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게로 넘기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프랑스의 잔 칼망이라는 할머니가 122세의 나이로 1997년 8월 4일에 죽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90세가 되던 해에 47세 된 이웃집 사람이 이 할머니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자기가 매달 2천 5백 프랑, 우리나라 돈으로 약 40만원을 할머니에게 주기로 하고 할머니가 돌아가면 할머니의 집을 받기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생각은 90세 된 할머니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싶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잔 칼망 할머니는 10년이 지나고 100세가 되었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20년이 지나고 110세가 되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웃집 사람이 먼저 죽었습니다. 30년을 기다리다가 77세에 자기가 먼저 죽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돈만 날리고 집도 못 얻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 죽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의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끝없이 모으는 것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후손을 위해서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배고픔과 불행을 외면하면서까지 과도하게 재산을 모아놓고 살다가 그것을 후손에게 물려주어 자기 손으로 수고하지 않은 후손으로 그것을 누리게 하는 것은 결코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이며, 그 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쌓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하루하루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릴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가 됩시다.
인생의 참된 낙
전도서 2장 24~26절 / 이동아목사
인생의 낙을 누려보기 위하여 솔로몬이 시험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웃음을 통하여 진정한 희락을 찾아 보았으나 미친 짓이요 미련한 짓이라 돌아와 앉아있으면 웃음이 고독으로 외로움으로 고통으로 돌아오는 공허를 경험하엿습니다.
세상에 좋은 술 다 수집하여 마음 껏 마시고 무희들의 노래를 들으며 몸을 흔들어 춤을 추어본들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더욱 쾌락을 추구하게 되어 인생이 황폐케 된 것을 솔로몬은 몸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을 벌려서 일에 몰두하고 많은 공사를 통하여 많은 공적을 쌓아도 그 모든 공적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게 되고 일하는 사람 소비하는 사람 누리는 사람 다른 것을 알고 이것도 헛수고요 실망스러운 것을 고백합니다.
부동산에 손을 대고 양과 소와 토지를 넓혀 당대의 모든 물질을 소유한들 그것으로 배부름이 없고 눈은 보아도 만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않는 것을 솔로몬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모자라 처를 두고 첩을 두어 육체의 욕망을 채우면 행복하고 만족함이 있을 줄 알고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여보아도 그 결국은 실망,근심,슬픔,수고 뿐일 것을 인생의 쾌락의 전도자로서 오늘 우리앞에 서서 그의 결론을 듣고 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당대에 먹고 즐기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인 인생이 이 땅에서 누리고 소유할 것은 다 경험하고나서 그의 결론입니다.
전 2:25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인생의 낙을 찾고 누리는 사람 중에 솔로몬을 능가할 할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솔로몬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고백이며 전도서의 key sentence입니다.
전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일중에 심령의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쾌락은 탐욕적이고 퇴폐적이지며 순간적인 즐거움이요 찰라적인 기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인생의 낙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사업/술/섹스/물질/명예/지혜/지식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낙은 기쁨은 희락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진정 여러분의 심령속에 샘솟는 기쁨이/행복감이/만족이/ 있습니까? 아직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생의 갈증이 많은 분들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희락을 얻어 일평생 누리고 복된 생애를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심령의 낙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 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지식/희락/모든 필요/을 채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지혜/지식/희락/보화를 주신 다는 것입니다.
1. 온전한 지혜를 주십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지혜를 다 만나보고 연구하였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도 없고 이지러진 인격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이길려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시대들 사는 것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지식은 부분적이지만 지혜는 종합적이란 것입니다. 또는 지혜는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무엇입니까?
어떤분은 "모든 사물과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부를 향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깨닫게 되면 모든 문제가 눈녹듯이 해결됩니다.
또한 사업의 문제로 얼키고 설킨 문제가 있다면 주님의 지시와 주님의 뜻을 찾으면 매듭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늘 다투고 늘 인간 관계가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의 교제의 원칙을 적용하면 화평의 사람,겸손한 인격으로 변화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란 자신의 갖고있는 자아의식과 교만이 깨어지고 주님의 지혜앞에 머리숙여 겸손할 때 주님의 지혜를 덧입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지혜와 안목이 필요합니다.
지혜는 오직 하나님이 주십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이 지혜로 내가 당하는 시련과 환난을 보면 이것은 나를 연단하는 도구이며 나
의 믿음을 높이는 기회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고통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지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심령의 낙을 누리게 하시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얻은 바울은 환난중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참 지혜의 낙인 것입니다.
바울은 환난을 당하나 즐거워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비울처럼 환나을 통해 인내를 연단을 소망을 기대하며 바라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2. 참 지식을 주십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지식을 더하는 것은 근심을 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이 세상이 주는 지식이 아닙니다. 인생에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지식 영원한 기쁨의 근원이 되는 지식을 주십니다.
그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이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것 이것은 인생의 최대의 쾌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인생의 최대의 업적입니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기를 구하는 바울의 마음속에서는 주님의 지식으로 충만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번민을 더하고 알면 알수록 더 공허하고 무지함을 깨닫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모든 지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으로 모든 담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아는 지식을 통하여 모든 것을 초월하여 세상의 차원의 지식에서 신령한 나라의 지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원리를 터득합니다. 어떻게 이세상에서 얻은 지식과 철학과 모든 유물적인 가치를 깨고 가장 큰 가치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되고 주님으로 영접하여 인생의 전적인 신뢰의 대상으로 가장 첫자리에 주님을 모신 것이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당신은 세상의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쁨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의 지식을 추구하면서 불만족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안고 구름잡은 생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알아가십시오. 주님을 알면 알수록 마음이 풍성해지며 주님으로 충만하면 할 수록 세상의 가치있는 것들이 시시해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지식에 까지 새로움을 입게 될 것입니다.
3. 온전한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희락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희락이 당신의 마음에 있습니까? 솔로몬은 말하기를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중에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에 물질이 많고 명예가 있고 모든 것을 다 누렸다고 할지라도 심령에 낙이 없이 늘 불안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충만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온전한 희락을 주십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육신의 정욕을 통한 평안이 아니라 안목의 정욕을 통하여 얻는 순간적인 기쁨이 아니라 이생의 자랑을 통한 있다 없어 지는 그런 기쁨이 아닌 환경과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부어주시는 평안을 주십니다.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의 말씀 안에 주님의 기쁨이 넘치며 그 기쁨을 충만하게 주신다고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감옥속에서도 감옥 밖에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4.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전 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잠 28:8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주님이 물질을 주실 때는 근심과 함께 주시지 않습니다. 죄인들의 노고를 통하여 물질을 쌓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불노소득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들을 주님이 물질로 축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을 붙드는 사람은 오늘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희락입니다.
결 론
어떻게 주님이 주시는 낙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에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과 모든 보화가 감취어져 있습니다.
골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기 바랍니다.
그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안에 모든 심령의 낙을 누릴 지혜 지식 기쁨 물질 모든 보화가 감취어져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전도서 2장 24~26절 / 문기태목사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 ?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은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 2:24-26)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정말 행복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아직 행복하지 않다면 전도하지 마십시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전도를 받고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에 관심이 많고 행복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해야 불신자에게 전도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솟아나고 안 믿는 가족이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복에 무엇보다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계명을 주셨습니다. 신 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사람을 가장 불행하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덮어 주십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6-7)
저는 우리교회의 교인들이 전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소원입니다.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도 교회와서 모두 행복해져서 돌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순간만 행복한 것이 아니고 항상 행복이 넘쳐서 싱글벙글하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열심히 믿는 사람일수록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학교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각 목장의 목자들은 목원들을 행복하게 해 줄 사명이 있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은 새신자들을 행복하게 해 줄 사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행복하니까.... 그리고 먼저 진정한 행복을 맛보았으니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어야 하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오늘 최고로 행복하게 해 드릴 생각입니다. 어떻게? 최고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오늘 제목이 무엇입니까?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최고로 좋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좋으면 부정을 통하여 강조하겠습니까?
1.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을 때 행복합니다.(26)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생명, 자연..아주 많습니다. 본문에 슬기, 지식, 기쁨 그리고 재산도 주신다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눈밖에 난 사람은 애써 많은 재산을 모아서 쌓게 하는 수고를 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그 재산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십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11-12)'
사람은 애써 수고한 모든 것을 잃게 될 때 불행을 느낍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실수하여 낙방을 하면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열심히 일을 하여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잃어버리면 얼마나 낙심이 됩니까? 몇 년씩 사랑하여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쏟아 주었는데 버림을 당하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우리는 이처럼 열심히 수고하여 내것이 된줄 알았는데 잃어버릴 때 가장 큰 불행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수고를 헛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밖에 난 죄인들은 모아서 쌓는 수고만 할 뿐 제 것이 되질 않습니다. 다 잃어버립니다. 그런데도 몇 번씩이나 헛수고를 하면서도 왜 그런지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하루종일 바람을 손으로 잡아 보십시오. 잡힙니까? 백이면 백 번 다 헛수고입니다. 그런데도 못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는 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밖에 난 채 헛수고만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하십시오.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고하지 않은 것까지도 선물로 가득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믿음을 보이라고 말슴하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퀴리 부처가 순수한 라듐을 제조할때까지는 4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마리 퀴리는 창고같은 실험실에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이기에 앞서 아이를 키우고 가사를 돌보는 주부로서의 역할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 피에르 퀴리의 애정은 그녀가 이 두가지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힘이 됐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좋은 남편을 갖고있어 행복해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신 겁니다]
2.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릴 때 행복합니다.(25)
하나님께 선물을 많이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즐거움으로 누리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개역24절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많이 받으려고만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받은 것을 누리는데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개 한마리가 고기 한 덩어리를 물고 다리위를 지나다가 물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 속에 개 한 마리가 큰 고기를 한 덩어리 물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입에 고기를 물고 있는 것을 잊고 물속에 자신이 비친 것인줄도 모르고 그 고기를 빼앗으려고 "으... 앙!" 하고 짖자 입에 있는 고기마저 물에 떨어져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축복을 누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것에만 눈독을 들이고 으르렁거리다가 자신의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만 다 누려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공연히 남의 것 비교하다보면 내 것은 다 작아 보이고 시시해 보입니다. 그래서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최선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만족하고 감사하면 얼마든지 행복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저는 16년전에 결혼하여 처음 창원에 왔을 때 단칸방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큰 아들 네식구가 살았습니다. 그래도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그래도 신혼인데 단칸방에서 살려니 불편해서 소원이 반송아파트 10평 임대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어렵게 반송아파트 128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 춥고 좁은 집에 살아도 하늘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니 다들 넓은 집으로 이사가고 우리만 남았습니다. 넓은 집에 심방을 가서 보니 10평이 좁아 보이고 슬슬 짜증이 나더라구요. 그렇게 그렇게 여러번 이사를 해서 지금은 30평에 살지만 몇 년 살으니까 시들해요. 이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금 주신 것을 기쁨으로 누리고 사는동안 만족하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다락방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동화를 쓰던 가난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일곱살 때 구두수선공인 아버지를 잃고 나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며 컸으나 가슴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차 그 어떤 환경도 젊은이를 불행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젊은이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작은 다락방을 광대한 행복의 생산지로 여긴 이 사람이 세계적인 동화 작가인 안데르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 하나님게서 주신 인간관계,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 하나님게서 주신 능력 셀 수 없이 많지 않습니까? 오늘부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소중히 여기고 최대한 감사하며 마음껏 누림으로 배나 더 행복해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낄 때 행복합니다.(24)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누려도 보람을 느끼며 살지 못하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식물은 다 익은 열매들을 드러내며 한결같이 향기를 풍기고 완숙한 빛깔을 나타내며 추수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식물이 느끼는 보람일 것입니다. 비단 식물 뿐 아니고 사람도 성숙하고 여물게 되면 이같이 보람이라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미성숙할 때는 얻어먹는데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받는데서 상당한 기쁨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철이 들고 성숙하게 되면 주는데서 보람을 느끼고 나누는데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소유함으로써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누고 베푸는데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성숙도에 따라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양상을 보입니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성숙한다는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괴테의 [앉은뱅이 꽃의 노래]라는 시를 보면 이 [보람]이라는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조그만 앉은뱅이 꽃 한 송이가 들에 피었습니다. 어느 날 이 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박한 시골 처녀의 발에 밟혀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앉은뱅이 꽃은 조금도 서러워하거나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추잡한 사내 녀석의 손에 무참하게 꺾이지 않고 청순한 시골 처녀의 발에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앉은뱅이 꽃은 죽어 가고 있었지만 꽃으로 태어난 보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죽을 지라고 억울해 하지 않고, 꺾일지라도 슬퍼하지 않고, 밟혔을지라도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해 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보람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평생 가정을 가져 보지 못했고 안락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평생 동안 고생을 자초해서 살았고 고난도, 수난도, 매맞음도, 죽음의 위협도 마다하지 않고 전도의 길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더 행복했고 기뻐했고 만족해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주께로부터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그 한가지 사실에 그토록 만족해했고 그 생활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람은 참으로 위대한 정신적 가치이고 사람으로 사람되게 만들어 주는 양식이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명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맛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수고를 통해서 보람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하는 일을 통해 보람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가족들을 섬기는 생활을 통하여서도 보람을 느기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보람을 크게 느끼고 행복해 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전도를 통하여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고 여러분의 섬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이 믿음이 자라가며 여러분의 사랑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참 된 보람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뜨거운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좋은 선물을 충분히 받아 누리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행복한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면서 보람을 느끼며 사는 사람만큼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 날마다 보람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2장 24~26절 / 박봉수목사
인생의 허무
우리 인간이 철들면서 한번쯤은 심각하게 사로잡히게 되는 심리 현상의 하나가 허무감입니다. 특별히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인생을 보면 그 덧없음에 허무하다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옵니다.
중국의 유명한 두보라는 시인은 맹자와 논어에 심취해 있다가 공자의 무덤을 본 뒤에 이렇게 말했답니다. "공자도 죽고 맹자도 죽었는데 유학은 공부해 무엇하나?" 유학의 길을 연 공자도 유학을 집대성한 맹자도 다 덧없이 죽어갔는데 그들이 남긴 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허무감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실재하는 구체적인 현상으로 우리에게 절실하게 느껴질 때 인생을 죽음이라는 안경을 쓰고 다시 보게 됩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음의 길로 가게 될 것을 실감하고 나면 인생이 그토록 쓸쓸하고 그토록 허망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인생이 이토록 덧없는 것인가? 땀흘려 돈을 번들 다 놓고 갈 것인데 그 무슨 소용인가? 애써 권력을 잡은 들 언젠가는 물러나야 할 텐데 또한 그 무슨 소용인가? 다 헛된 것 아닌가?' 이런 허무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스위스의 저명한 심리학자 칼 융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심한 노이로제는 허무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현대라는 이 시대는 우리를 무엇엔가 쫓기듯이 바삐 뛰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상의 무미 건조한 생활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쁘게 뛰다가 잠시 멈추면, 같은 일상을 반복하다가 잠시 멈추면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 이 허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에 스며듭니다.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정신없이 뛰고 있는가? 이렇게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친다고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마음이 현대인들 마음속에는 하나의 노이로제처럼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허무감이 밀려올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개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잠시 가슴앓이를 하다가 이내 잊어버리는 경우입니다. 허무감에 안타까워하고 쓸쓸해 하다가 툴툴 털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그런 거지 뭐 다 그런거야...' 묻어두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어두고 넘어가면 어느 순간에 또 다시 똑 같은 허무감이 밀려오게 되고 또 그 쓸쓸함에 그 허망함에 시달리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고 뒤로 미뤄둔 것일 뿐입니다.
둘째는 이 허무감에 사로잡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은 이 허무한 생각으로 인생 전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소위 허무주의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다가 정말 큰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초인을 이야기하면서 이 허무감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 이 허무주의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허무주의의 늪에 사로잡혀 자살의 길을 택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니체가 그랬고, 헤밍웨이가 그랬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같은 고민에 빠져 이들의 길을 따라나서고 있습니다.
셋째는 이 허무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고 이겨내는 경우입니다. 그 대표가 오늘 본문을 쓴 전도서 기자, 바로 솔로몬입니다.
우선 솔로몬은 이 허무감을 정말 심각하게 느꼈습니다. 삶 전체로 이 허무감과 씨름했습니다.
전 1:2를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을 헛되다고 본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이 헛되다라는 말을 36번이나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하발'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증기 또는 김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창틀에 서리는 김과 같고, 끓는 주전자에서 뿜어 나오는 증기 같다는 뜻입니다. 인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전자에서 뿜어 나오는 증기가 순식간에 공중에 퍼져서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그렇게 잠시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틀에 서린 김이 햇볕에 자취도 없어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있는가 하면 어느새 사라지는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전 1:14을 보면 "내가 해 하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불어오는 바람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들 그 바람이 손에 잡힙니까? 헛수고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이 땅에서 몸부림치는 그 모든 수고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려고 몸부림쳐보지만, 권력을 잡으려고 몸부림쳐보지만, 성공하려고 몸부림쳐보지만 다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잡은 것 같으나 실상은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 쥐고 있을 수는 있지만 이내 내 손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렇게 심각하게 허무감을 느꼈지만 그 허무감을 이겨냈습니다. 그 허무감을 훌훌 털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어떻게 그 허무감을 떨쳐 버렸는지 그 비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길 오늘 본문을 자세히 묵상해 보면 솔로몬이 허무감을 떨쳐 버릴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에 보면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인간이 나오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죄인으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라는 깨달음을 갖게 되면서 이 허무감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인생의 허무감을 떨쳐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을 잘못된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가을에 떨어지는 잎새를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합니다. '내 인생도 저 떨어지는 잎새처럼 죽음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마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허무감에 빠져버립니다. 자신의 인생을 낙엽이 떨어지는 관점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단계에 들어서면서 과학자들은 우리 인간의 DNA 지도를 속속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를 보면 우선 우린 인간의 염색체 수가 체파리의 염색체 수의 2.5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DNA 구조도 원숭이나 유인원의 DNA의 구조에 비해 부분적으로는 복잡하고 나아 보이지만 그렇게 월등히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일리노이 대학의 해부학 교수 해리 멘센트 박사는 인체를 화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칼슘이 2.25 kg, 인산염이 5백 g, 칼륨이 52 g, 유황이 168 g, 옥소. 철. 동이 28 g, 그리고 체중의 65%가 산소, 18%가 탄소, 10%가 수소, 3%가 질소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화학약품 값으로 따져보았더니 합이 7달라 28센트 우리 돈으로 겨우 5천 원 남짓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물질적 가치로 볼 때 5천원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우리 존재를 파악하고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과학자가 보여주는 인간 존재의 모습은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체파리의 2.5배의 수준이고, 화학약품 값으로 치면 5천 원밖에 안 되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정말 우리의 가치가 그것밖에 안 됩니까? 우리에게는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정말 비교할 수 없는 영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학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 번 가면 그만인 존재입니까? 낙엽이 땅에 떨어져 흙 속에 썩어지면 다 분해 돼서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보면 허무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자신이 너무도 귀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 인간 창조 기사를 읽어보면 우리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27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창 2: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에게는 다른 피조물에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 주셨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엽과 같을 수 없고, 우리는 체파리와 같을 수 없고, 원숭이와 같을 수 없습니다. 과학자의 눈에는 이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학가의 눈에도 이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신앙인의 눈에만 보입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생기를 볼 수 있을 때만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창 3:9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름을 부르셨고, 인간에가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그 어디를 봐도 하나님께서 인간 아닌 다른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든지, 그들과 대화하셨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을 하나님께서 대화의 파트너로 삼으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이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서는 우리 인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낙엽과 같다든지, 체파리와 같다든지, 원숭이와 같다 라는 말을 하게 되고 허무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하 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신 존재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며 기뻐하시는 존재들입니다.
저는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습 3:17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저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안 하셔도 잠잠히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때문에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서 어쩔 줄 모르시는 분들이십니다. 결코 우리는 안개처럼 허망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떨어지는 낙엽과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둘째, 삶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을 보면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솔로몬이 땀 흘려서 일하고 그 대가로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보람을 찾아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도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깨달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만 그것을 이루기도 쉽지 않고, 이룬 후에 보람을 느끼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보니까 이 또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키츠는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유명인이 돼 있더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서양 사람들 치고 이 키츠의 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유명한 시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25살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되는데 죽기 전에 자기가 직접 자기 묘비에 글을 남겼습니다. "물위에 그 이름을 써 남긴 자 여기 잠들다"
그는 정말 이 세상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명성을 얻은 것입니다. 남들이 그렇게 갖기를 바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막상 얻고 보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성이라는 것도 단지 물위에 써서 곧 잊혀질 것이고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무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머슬로우는 인생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양의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질의 인생입니다. 양의 인생은 일단 손에 잡으려고 애를 쓰는 인생입니다. 먹을 것을 더 많이 갖고자 하고, 돈도 더 많이 벌고자 하고, 권력도 더 많이 넣고자 하는 형태의 인생입니다. 이에 반해서 질의 인생은 소위 삶의 질을 운운하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뜻 있게 살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며 사는 인생의 형태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국민소득 5천불을 넘어서면서 양의 인생에서 질의 인생으로 넘어가는 현상이 급격히 늘어간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살기가 힘들 때는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손에 많이 넣고자 하며 살았는데 이제 먹고 살만하면 행복하게 살고자 하고,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질의 인생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사람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문제가 인생의 의미 문제입니다. 이제 먹고 살만해서 눈을 들어 세상을 보니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거든요? 도대체 지금까지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그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니 허무감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 많은 돈 내가 지고 갈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뭐하자고 그 고생하며 돈은 벌었는가? 그 많은 권력 내가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욕먹어가며 쟁취했던가? 새삼 허무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바람 잡이오.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땀흘리고 애를 써 모아 논 재물 안고 갈까 지고 갈까 헛수고로다.
적신으로 왔으니 또한 그같이 빈손 들고 갈 것이 명백하잖나
그러나 솔로몬은 그 의미를 바로 찾았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보람도 주시고, 기쁨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보람도 주시고, 기쁨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 43:21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우리 삶은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하나님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 2:16에 보면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행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자기는 주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밀려오는 허무감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보람을 느끼고 기뻐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있으면 결코 헛되지 않고, 바람잡는 것도 아닙니다. 보람되고 의미가 있습니다.
행복, 하나님의 선물
전도서 2장 18-26절 / 목회 아카이브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탄생이 있으면 언젠가 죽음이 온다. 무엇을 시작했든 그것이 마치는 날도 반드시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일도 언젠가는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18절) 미래의 일은 알 수 없다 내가 어떠한 일의 책임자로 있을 때는 나의 지혜나 노력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으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결과를 도출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내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19절) 나의 뒤를 이어 나의 모든 것을 관리하게 될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 알 수 없다. 미래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수고는 머지않아 그 사람의 손에 좌지우지될 것이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미래의 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은 내일에 대해 기대할 수 없다. 오늘의 현실도 불완전하지만 내일과 미래는 오늘과 현재의 삶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21절) 하나님의 선물 전도자는 지금까지 인간의 삶이 헛되다는 명제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지혜를 얻으려는 노력(전 1:12-18), 쾌락을 추구하는 삶(전 2:1-11), 모든 사람의 동일한 운명인 죽음(전 2:13-17) , 그리고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전 2:18-23) 등이 그것이다. 이제 전도자는 지금까지의 논쟁에 대한 중간 결론을 내리려 한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4절) 전도서의 행복론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된다면 인생의 행복은 단 하나의 조건에 좌우된다. 곧 하는 일의 보람이다. 그런데 참된 행복의 출처는 "하나님의 손", 곧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26절) 위의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와 "죄인"이 대조를 이룬다. 죄인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을 주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를 의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고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보상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계속되었던 전도자의 논증과 조화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위의 구절에서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라는 표현에 집중하며 '죄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노고를 주시는데, 그 모든 것이 인간의 행위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의적인 판단에 좌우된다는 의미가 된다. 전도자가 제시하는 인간의 참된 행복, 곧 먹고 마시며 수고하며 보람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기쁨
전도서 2장 18~26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남겨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가 뛰어난 솔로몬이라도 그가 가진 탁월한 지혜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미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르호보암의 우매한 정책 때문에 이스라엘은 두개로 나누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남과 북의 끊임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게 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아비지만큼만 지혜로웠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지금과도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을 미리 알기라도 했다는 듯이,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 왕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 곧 후계자에게 자신의 수고를 물려주는 것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솔로몬 왕은 자신이 평생토록 열심히 수고를 하여도 결국에는 죽음으로 인해 그 열매는 자신이 다 누리지 못하고 자기 뒤를 이을 자에게 넘겨주게 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이것도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요. 첫째로 자신의 유산을 이어 받을 자가 지혜자인지 우매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혜자라면 다행이지만, 우매한 자가 이 엄청난 부를 물려 받게 되면 그 많은 재산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고 저주가 될 것입니다. 둘쨰로, 솔로몬은 수고는 분명 자신이 했는데, 그 수고의 열매는 자기 자신이 누리지 못하고 수고하지 않은 자가 누리게 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말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주인이 가져간다고. 수고는 솔로몬이 하는데, 그 수고의 열매는 다른 사람이 다 가지고 간다는 것이죠.
다시 정리해보면, 한 평생 자식들 생각에 밤낮 열심히 일하며 수고하고 애쓰고 근심하고 쉬지도 못하고 살아왔는데, 내가 물려 줄 이 재산이 내 자식에게 복이 될지 해가 될지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게다가 내가 한 평생 일구어 놓은 것이 자식에게 가게 될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만, 사기 당해서 이상한 사람에게 한 순간에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고, 자식이 친구를 잘못 만나서 보증을 잘 못 섰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사업을 크게 확장하다가 부도로 한 순간에 날라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세상의 부조리한 현실을 깨닫고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수고하여 재산을 많이 모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20절에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전 2: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여기서 ‘실망하다’란 말은 ‘소망이 없다’는 뜻 입니다. 즉 솔로몬은 자신이 종신토록 쉬지도 못하고 수고한 일이 우매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이 사실을 깨닫고는 삶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사람이 한 평생 자기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고된 노력을 합니까?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합니까? 그러나 솔로몬은 인생이 해 아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채, 이처럼 열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절망적인 슬픔 밖에 남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3절 보십시오. “(전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기서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낮’은 열심히 일하고 수고해야 하는 시간이라면, ‘밤’은 인간에게 안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쉼의 시간에도 쉬지 못하고 계속 수고해서 자신의 소망을 이루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바를 다 이루지 못해서 고민하는 사람… 재물에 대해 끝을 모르는 집착 때문에 불안해하며 염려하고 사는 사람들… 평안한 안식마저 사라져 버린 이들을 보며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장 1절부터 2장 23절까지 전도자는 인생의 허무함, 공허함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분명 허무함과 공허가 가득한 세상인데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도 기쁨과 만족을 발견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만족과 기쁨은 진실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솔로몬의 답이 24-26절 입니다. “(전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솔로몬은 인간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결국 먹고 마시는 일, 자신의 노동이나 수고의 정당한 대가로 주어지는 즐거움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이러한 것보다 나은 거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노동을 제공함으로서 정당한 보수를 받는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사는 것은 분명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인 셈입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기쁨을 가장 많이 누려본 사람입니다. 25절 보십시오. “(전 2:25)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솔로몬 가족이 하루에 사용하는 밀가루 양만 오늘날 기준으로 14,000명 분량 입니다. 하루에 소를 30마리나 잡습니다. 양은 100마리나 잡았습니다. 솔로몬은 천하산해진미를 마음껏 먹고 마시고 살았습니다.
이처럼 이 유한한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에 지혜와 지식을 주시고 희락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악인들에게 고통을 주시고 수고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이십니다. 결국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죄인에 의해 쌓아지는 재물은 헛된 것이라 말합니다. 또한 재물을 모음으로써 기쁨을 맛보려는 노력 역시 헛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해 재물을 더 쌓으려는 욕망은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과 같이 헛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이 허무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오직 여호와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난 한 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들이 주 안에서 기뻐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주님 없이 기뻐한 것이었습니까? 우리의 삶이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고도 슬픔 뿐!
전도서 2:18~26 / 이장우목사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수고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해 아래 헛된 세상살이에서 그래도 자신이 수고하여 얻는 것들은 기쁨이라고 전도서에서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수고조차 미워하고 실망하고 슬플 뿐이라고 합니까?
우선 수고함으로 얻는 기쁨을 봅니다. 전도서 5:18절 새 번역으로 봅니다.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세상에서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로소득이 아닌 성실하게 수고하여 얻은 것은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8:15절입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5:18절과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 평생 동안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기쁨이라고 합니다.
9:9절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은 수고도 슬플 뿐이라고 합니까?
본문 18~19절을 봅니다.
전도자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수고하여 얻은 모든 것들을 결국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새 번역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는 것을 억울하기 그지없다고 번역합니다.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들을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왜 미워할 일이며 억울하게 여기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의 뒤를 이을 자가 지혜롭게 잘 관리할지 어리석어서 탕진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말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애써서 마련한 재산을 자식들이 탕진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열왕기상 11장을 보면 솔로몬이 바로의 딸 외에도 많은 이방 여인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모세 율법에도 금하고 있지만 솔로몬은 많은 여인들과 연애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쌓은 부를 계속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수많은 정략결혼을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여인들의 비위를 맞추어주기 위하여서라도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함께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다윗을 생각하셔서 솔로몬에 때에는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의 아들 때에 하십니다.
그 심판은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집니다.
북 이스라엘은 10지파, 남 유다는 베냐민 지파만 남았습니다.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심판이 르호보암 시대에 일어났다면 르호보암은 억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죄인들은 억울할 일이 없습니다.
다 똑 같은 죄인입니다.
르호보암도 심판을 받을 일을 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세금을 줄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원로들은 세금을 줄여주라고 했는데 자기 친구들의 말은 세금을 올리라고 한 것입니다.
재벌의 자녀들이 수고와 고생을 모르고 얻은 재산으로 갑질을 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나누어지는 것이 솔로몬의 죄만이 아니라 르호보암도 똑 같은 죄인임을 보여줍니다.
본문 20~23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세상에서 애쓴 모든 수고를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는 실망뿐이다. 수고는 슬기롭고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 하는데, 그가 받아야 할 몫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차지하다니, 이 수고 또한 헛되고,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속 썩이지만, 무슨 보람이 있단 말인가?
평생에 그가 하는 일이 괴로움과 슬픔뿐이고, 밤에도 그의 마음이 편히 쉬지 못하니, 이 수고 또한 헛된 일이다.”
솔로몬이 사후의 일들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지혜로 연구하여 세상살이의 결론을 보니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수고는 슬기롭고 재능이 있고 성실한 사람이 하였는데 그 결과물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자가 다 차지하고 그것도 허랑방탕하게 사용한다면 앞선 사람의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온갖 수고를 다 하느라고 밤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는데 그 수고를 아무 수고도 없는 자들이 차지하기에 수고도 실망과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도 알고 목격하는 내용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수고하며 애써서 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자신의 노후만 생각하면 그렇게 죽도록 수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힘들게 살았기에 내 자식은 좀 덜 힘들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한 것으로 물려줄 것이 많겠습니까? 적겠습니까? 물려줄 것이 거의 없는 것이 서민들의 세상살이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물려주려면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해서 벌어들인 것이라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게 복일까요?
1994년에 박한상 군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부모는 강남의 부자인데 한약상을 하면서 3백억 대의 자산가입니다.
화재가 나서 부부가 죽었는데 조사를 해 보니 수십 군데 칼에 찔려 죽은 것입니다.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소재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집 아들이 미국유학을 하면서 흥청망청 쓰다가 돈이 없으니 부모가 죽으면 자기 재신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죽이고서는 불을 지른 것입니다.
그 다음해 1995년에는 대학교수가 역시 유산문제로 부모를 살해한 뉴스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에 손봉호 교수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1884년부터 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부모가 물려준 집이 있어서 살지만 자기가 죽을 때는 유산을 남기지 않고 사회에 돌려주자는 운동을 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자들이 함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명맥은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수고하고 애써서 재산을 모아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박한상 군의 부모나 대학교수의 부모가 자기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 자기를 죽일 것을 알았다면 재산을 모아두었을까요?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이는 그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수고한 것이 슬플 뿐입니다.
본문 24~26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24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25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
26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자기 수고로 먹고 마시는 것이 보람이며 이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니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악인들이 형통하여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잠언20:17절입니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악인의 먹고 마심은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도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들은 감사로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에 솔로몬보다 더 나은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악인의 수고로 모아 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에게 돌려준다고 합니다.
이런 구절 한 말씀을 목숨처럼 붙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되면 악인들의 부가 자기에게로 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다시 악인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수고가 해 아래서 바람을 잡은 것과 같이 헛되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정당한 수고조차 헛되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새 번역 26절에서는 죄인의 수고가 헛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수고가 왜 헛된지 알아야 하며, 헛되지 않는 수고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시편 39:6절입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욥기에서 고통의 깊이를 알아야 고통 너머의 의미를 알게 되듯이, 전도서에서는 헛됨의 깊이를 알아야 헛되지 않는 것에 눈을 뜨게 됩니다.
헛됨을 모르면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소란합니다.
세상이 늘 소란한 이유는 헛된 재물을 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수고가 헛됨을 아는 자들만이 주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시편 39:4~5절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자신의 종말과 자신의 연한이 언제인지 알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입니다. 로마 장군이 개선하여 올 때에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네가 지금 승리하였다고 우쭐하여 교만해지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고 들은 로마는 타락하고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종말과 연약함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만이 헛된 수고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39:7절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세상에서 재물을 쌓아서 든든하게 여기는 것도 실로 헛된 것임을 안 자가 기도합니다.
나의 소망이 주께 있다고 합니다.
이 시편의 저자가 어떤 고난인지 잘 모릅니다.
제일 마지막 13절에서 병에서 구원하여 달라고 하지만 그러나 병에서 나아도 다시 죽는 인생입니다.
시편 39:12~13절 새 번역입니다.
12 주님, 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 눈물을 보시고, 잠잠히 계시지 말아 주십시오.
나 또한 나의 모든 조상처럼 떠돌면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손과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13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다시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나에게서 눈길을 단 한 번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세상의 수고가 헛됨을 아는 자의 기도입니다.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에게 눈길을 단 한 번만이라도 돌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눈길을 한 번만이라도 돌려주시면 미소 지을 수 있겠다고 합니다.
시편 90:10~12절입니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39편처럼 우리의 연약함과 종말과 그 연한이 언제인지 알게 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칠팔십을 살지만 그 연수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주의 노여움과 주의 진노인데 누가 이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날 계수함을 알게 하여 주셔서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고의 헛됨을 아는 자의 기도입니다.
시편 90:3~9절입니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티끌로 돌아가야 할 인생이기에 아무리 수고하여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주님께는 천 년이 지난밤의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홍수에 쓸려가는 자와 같고 한 포기 들풀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주님의 분노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이렇게 헛된 것에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는 것은 인생의 헛됨을 아는 자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 헛됨을 아는 과정은 고난입니다.
성도에게는 헛됨을 알게 되는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진리를 구하게 됩니다.
시편 90:1~2절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천지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주님이 자신의 거처가 됨을 알게 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세상의 거처들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것들이지만 영원한 주님이 우리의 거처가 된 자들은 이 세상의 헛된 수고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수고하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7~58절입니다.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은 썩지 않을 것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주 안에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이 성도에게 주신 수고는 헛된 수고가 아닌 기쁜 수고가 됩니다.
헛되지 않은 것을 붙들라
전도서 2:18-26
솔로몬이 인생 말미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 지혜도 헛되고, 지식도 헛되고, 즐거움도 다 헛되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또, 그것을 다 이루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소망하던 것들을 다 이루어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높은 곳에 올라 보니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 구절인 17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솔로몬은 이제는 극단적으로, ‘사는 것도 헛되다. 이제 사는 것도 지겹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특히 자신이 쌓은 재물을 아들에게 물려 주는 것도 헛된 것(18절)이라고 합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 받은 후, 자녀가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그것을 잃어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염려한 대로,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스라엘 왕국을 유지하지 못하고, 두 동강을 내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의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황폐해져 버립니다.
하루아침에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애써 수고해서 물려주었는데 엉뚱한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한 결과가 되고 만 것(21절)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으로 애쓰는 것은 아무 소득이 없다(22절)고 합니다. 그리고,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3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을 알 때, 헛되지 않은 인생이 될 수 있다(24절)고 고백합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기는 하지만,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헛되지 않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을 알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셔서, 참으로 복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이렇게 하시지만, 죄인에게는 즉, 하나님을 등진 채 사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뜻대로 사는 자들이 애쓰게 수고해서 쌓은 것을 빼앗아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심으로, 헛된 인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진짜 복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삷입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님이 하늘에서 누리고 계시던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발버둥을 치면서 노력함으로 많이 쌓고, 높은 곳에 올라가 본들, 예수님이 오셨던 하늘까지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에 누리는 것에는 전혀 미치지 못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잠시 후면 사라질 안개와 같은 헛된 것을 붙들지 말고, 헛되지 않은, 영원하신 예수님만 붙들고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성탄절에 언젠가 다 사라지고 말 헛된 것 붙들기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