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때부터 농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
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지내던 곳을 선농단(先農壇)이라 하고 제사하는
것을 선농제향(先農祭享)이라고 합니다.
성북구 안암동 5가 고려대 이공대학 앞 큰길에서 제기동 종암초등학교 사이의 낮으막한 고
갯길을 제터고개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붙인 이름입니다. 마
찬가지로 제기동(祭基洞)이란 동명도 이 제터고개 부근의 제단(祭壇)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매년 곡우(穀雨)날을 기하여 동대문구청의 주관하에 매년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고,
올해도 같은 날 거행됩니다. 조선시대 국가의 제사 중 대사(大祀)인 종묘와 사직제, 성균관
석전제(釋奠祭)와 더불어 올린 선농제향은 중사(中祀) 규모의 제사로 모든 절차가 엄숙하며
옛 법도에도 어긋남이 없습니다(작년의 예로 보아).
4월 20일(토요일) 오전 10시 15분 어가(御駕)가 동대문구청(옛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
궁(出宮)한다고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관(參觀)하시면 좋은 경험이 될겁니다. 어가를 따르
지 않으려면 지하철 1호선 제기역에서 내려 성동천을 건너 선농단으로 오르거나 안암동 로
터리에서 종암초등학교 정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택시를 탈 경우 종암초등학교로 가자고
하면 종암동의 다른 학교앞으로 갈 수 있으니 반드시 안암동 로터리를 말해야 합니다). 제
향이 끝난 후에는 선농탕에서 유래했다는 설렁탕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합니다.
문의는 동대문구 문화공보과(02-2127-4411)로 하시면 됩니다.
2) 선농제향과 친경의식에 대해
선농단(先農壇)은 조선시대 역대국왕이 풍농( 農)을 기원하기 위해, 농업신으로 전해오는 신
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主神)으로 단(壇)을 쌓고 향사(享祀)하던 곳으로 현재
동대문구 제기동 1158-1에 위치하고 있다. 단은 조선 성종 때에 이룩된 것으로, 총 면적이
523평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농(先農)의 기원을 상고해 보면 신라(新羅)때 입춘(立春) 뒤 해일(亥日:돼지날)에 명활성[※
明活城 :경북 경주시 천군동(千軍洞)과 보문동(普門洞)에 걸친 명활산에 있는 신라시대 석축
산성으로 소지왕 10년<488>까지 14년간 궁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의 남쪽 태살곡(態殺
谷)에서 선농제(先農祭)를 지냈으며, 입춘(立春) 뒤 해일에 신성북문[※新城北門:왕성인 월성
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창고지로 통하는 북문]에서 중농제(中農祭)를 지냈으며, 입추(立秋)
뒤 해일에는 산원( 園)에서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성종(成宗) 2년(983) 1월에 왕이 환구( 丘)에서 기곡제[※祈穀祭:기원은 중국에
서 유래한 것으로, 《예기(禮記)》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한국에서도 고려시대부터 한
말까지 지속되었다. 임금이 직접 지냈는데, 사직의 사(社)는 토신(土神), 직(稷)은 곡신(穀神)이
라 하여 반드시 사직단을 이용하였다]를 지내고 몸소 적전[※籍田:지난날, 임금이 몸소 농사
를 짓던 제전(祭田)의 한 가지]을 갈며 신농에게 제사하고 후직을 제향(祭享)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농은 신라때부터 비롯되었으나 신농과 후직을 제향한 것은 고려 성종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농본민생정책(農本民生政策)의 표방
으로 전대(前代)보다 더 빈번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즉 태조(太祖) 때에 이미 적전령(籍田令)·적전승(籍田丞)을 두어 적경(籍耕)과 치제(致祭)의
의례(儀禮)를 관장케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은 『농자만사지본야(農者萬事之本也) 적자권농지
본야(籍者勸農之本也)』라 하여 적전제도(籍田制度) 실시를 주청하였던 것이다.
당시 서적전(西籍田)은 개성부(開城府) 동쪽 20리 지점에 있었으며 동적전(東籍田)은 한성부
(漢城府) 동교(東郊) 10리에 있었으며 이를 전농(典農)이라고도 했다. 현재 동대문구 전농동
일대로 동명(洞名)의 기원이 여기에 유래를 두고 있다.
적전이 설치된 것은 태조 때이지만, 적전에서 처음으로 친경한 것은 성종 때였다. 집권체제
가 정비되면서 한층 농경에 관심을 보인 성종은 적전에 나아가 직접 밭갈이를 해보고자 하
였다. 그리하여 성종 6년(1475) 정월 먼저 선농단에 나아가 적전제(籍田祭)를 올렸다. 적전제
는 선농제라고도 하는데, 적전의례 중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의 적전제는 처음으로 친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관서인 예조(禮曹)에서는 사전에
당(唐)·송(宋)·고려의 의례를 면밀히 검토하고 예행연습도 수차에 걸쳐 행하면서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아울러 적전에서의 친경은 농사를 중히 여기고 권장한다는 이념적 의미가 본질이었기 때문
에 한성부에 명하여 근방 촌민(村民)들에게 두루 알려 그 의례(儀禮)를 구경하게 했다.
제사를 지내고 친경하는 날은 길일(吉日)이어야 하기 때문에 경칩(驚蟄)이 지난 길한 해일(亥
日)을 택했는데, 그리하여 을해일(乙亥日), 즉 음력 정월 23일을 친경일로 하였다. 당사자인
국왕은 행사전에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해야 했다[3일 산재(散齋)와 2일 치재
(治齋)]. 을해일 새벽에 성종은 선농단과 적전이 있는 제기동·전농동을 향하여 동대문을
나섰다.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祭官)으로는 초헌관(初獻官)인 국왕을 비롯하여 아헌관(亞獻官)인 왕세
자, 종헌관(終獻官)인 영의정(領議政)이었다.
적전제는 농업신에게 풍요를 비는 제사로 선농단에 모셔진 신좌(神座)는 3황5제[※三皇五帝:
3황은 일반적으로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또는 泰皇)을 가리키지만, 문헌에 따
라서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들기도 한다. 또는 수인(燧人) ·축융(祝融)
·여와(女)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사마 천이 5제로 든 것은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
(頊高陽) ·제곡고신(帝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 등이
며, 별도로 복희 ·신농 또는 소호(少昊) 등을 드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가운데 농
업신인 신농씨와 주나라 때 농업을 크게 일으켰다는 후직씨였다.
당시의 의식(儀式)을 보면
『신농씨의 신좌(神座)는 남향으로 설치했으며 후직씨의 신좌는 서향으로 설치하였다. 향사
[※享祀:제사(祭祀)]는 경칩 뒤 해일에 행하였다. 매 위(位)마다 변두[※邊豆:변(邊)은 대오리를
결어서 만들고 등나무오리로 아구리에 테를 둘렀으며 굽이 높으며 마른 음식을 담고, 두(豆)
는 나무·놋·도기 등으로 만든 굽이 높은 그릇으로 젖은 음식을 담는다.]를 각각 10개,
소·양·돼지고기를 담은 그릇[조(俎)] 3개를 놓았으나 왕이 직접 제사하지 않는 섭사(攝祀)
일 경우에는 우조(牛俎)가 없었으며 -중략-』라고 되어 있다.
축문(祝文)은 조선국왕의 성(姓)과 휘[※諱:원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삼가 부르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는 생전의 이름 그 자체를 휘라 일컫게 되었다.]를 썼고,
축문(祝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께서는
처음으로 가색[※稼穡:곡식 농사]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의 양식[禾]을 두텁게 하시네
이 제사를 흠향하옵고
풍년이 되게 해 주소서
양식은 백성의 하늘이 되므로
백곡(百穀)을 이루게 하셨네
신이여 굽어 살피소서
서직[※黍稷:찰기장과 메기장]이 오직 향기롭습니다』
적전제[선농제]는 순서에 따라 해뜨기전에 제향을 마치고 해가 뜨면 친경의(親耕儀)에 들어
간다. 친경이란 적전을 임금이 몸소 경작하는 것으로, 때로는 해당 관원에게 대신 밭갈이를
하게 하는 대경(代耕)도 있으나, 원칙적으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친경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친경이 행하여지던 곳은 선농단에서 동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전농동 구 오스카극장
부근으로 그 면적은 약 100이랑이었다. 소는 청우(靑牛:만약 푸른색의 소가 없으면 황색의 소로써 대체하고 청포로 덮고 걸친다)를 썼으며 음악을 연주한다.
친경함에 있어서는 경적사(耕籍使)·적전령(籍田令)·사복시정[司僕寺正:고려·조선 시대 궁
중의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의 長으로 정3품]·봉상시정[奉常寺正:국가의
제사 ·시호(諡號) ·적전(籍田)의 관장과 권농(勸農) ·둔전(屯田) ·기공(記功) ·교악(敎樂)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長으로 정3품]·경기 각 고을의 현령 등이 쟁기질을 도왔다. 즉
왕이 쟁기를 잡으면 사복시정이 소의 고삐를 잡아 밭을 가는데, 다섯 발걸음을 밀고 나면[5
추(推)] 근시(近侍)가 쟁기를 이어 받고, 왕은 인근에 설치한 관경대(觀耕臺)로 가서 쉰다.
이어서 종친과 재상이 일곱 발걸음, 그리고 판서와 대간들이 아홉 발걸음을 밀고서 물러나
면 봉상시판관이 서민들을 거느리고 나머지 100이랑의 밭을 간다.
이윽고 의례를 끝내고 수레를 돌리면 노인·유생·기생들이 풍년가를 부르며, 그 동안 봉사
시정이 곡물의 씨앗을 파종하고, 판관(判官)·주부(主簿)들이 흙을 덮어 뒷마무리를 한다. 이
때 파종하는 씨앗도 아무 것이나 택하는 것이 아니라 구곡(九穀)이라 하여 벼·피·기장·
수수·귀리·밀·보리·콩·팥 등을 고루 갖추게 했다.
이렇게 하여 친경을 끝내고 환궁(還宮)하면 왕은 주연을 베풀어 참여했던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상을 준다. 때로는 특별사면을 하여 죄인을 풀어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친경은 형식적이고 상징적이었을 뿐 실제로 경작에 보탬이 되는 밭갈이는 아니었
다. 몸소 임금이 밭을 갈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임금이 농업을 매우 중히 여
기고 있으니, 백성들 역시 힘을 다하여 농경에 종사할 것을 권장하려는 이념적 행사인 것이
다.
그 뒤 중종 18년(1532), 명종 8년(1553), 선조 5년(1752), 광해군 12년(1620)에 각각 적전에 친
경을 하였으며, 숙종 30년(1704)에는 왕이 선농단에 친림(親臨)하여 기우제(祈雨祭) 의식도 선
농향사(先農享祀)의 의식을 쓰도록 하였으며, 영조 15년(1739) 왕이 하교(下敎)하기를 친경의
예(禮) 가운데 번잡한 문장은 대신에게 물어 삭제하여 거행토록 하였으며, 고종 8년(1871) 단
에 친제하고 그 해 2월에 적전을 친경하였고 동년 5월에 친예(親刈)한 뒤에 나이든 노인에
게 노주(勞酒)하였다.
순종 2년(1908) 7월에 이르러 선잠단(先蠶壇)과 같이 신위(神位)를 사직단(社稷壇)에 배향하고
선농단터를 국유로 이속(移屬)시키고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설립 당시
에 정부의 출자(出資)란 명목하에 빼앗겼다. 그러다가 1979년부터 제기동의 뜻 있는 분들이
「선농단친목회」를 조직하여 1년에 한번씩 권농일에 이 단에서 치제하였고 현재는 동대문
구청의 주관하에 곡우날 『선농제향』이라는 이름으로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재곤, '선농단·선잠단', 서울六百年史
김기빈, 한국의 지명유래
京都雜誌, 권1
東大門區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