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께
이미 돌아가신 아버님께 이렇게 편지를 쓸줄이야 꿈엔들 생각 했겠습니까?
다름 아닌 오늘 두란노 아버지학교 첫주 강의에서 다음주 제출할 숙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아버님께 편지를 쓰려하니 지나간 생전의 모습들이 주마등 처럼 머리를 스쳐갑니다.
아버지로써 아들에 대한 사랑은 어느 아버님보다 강 하셨고 가정의 화목을 중요시 하시면서
유교적 도리와 예의에 충실하셨던 아버님 이셨지만 경제적으로는 너무 가난하셨습니다.
선하신 아버님은 제 나이 8살때 보증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셨고
우리 가족의 식량 생산처였던 마지막 남은 논은 아들로써 도리를 다 해야 한다며 할아버님 효자비 건립에 다 사용하셨습니다.
당시 동네 어르신들은 아버님의 결정에 부정적 의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생활고에 허덕이셨던 아버님과 어머님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력하셨지만 수년이 지나도 호전되지는 않았습니다.
철 모르던 우리 4남매는 어머님으로 부터 들은바 아버님의 계획은 어머님과 누나는 식모살이로가고 저와 동생둘은 친척집에 맡기기로 하고 효행비 건립을 계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4남매는 할머님과 어머님의 완강한 반대로 친척집에 보내지지는 않았습니다.
농촌에서 살려면 자가땅 한평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있는 것이라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되고 다쓰러져가는 초감삼간뿐 이였습니다.
여름철 비라도 오면 천정 이곳 저곳에서 비가 세고 금방 쓰러질것만 같았습니다.
손위 누나는 초등학교 2학년때 운동복을 마련하지 못하여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저는 운 좋게 초등학교는 졸업 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친구와는 달리 밭일도 하고 나무를 하며 집안일을 도왔습니다..일할 논도 없고 풀먹일 소도 없으니 마땅히 할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님은 그때 어디선가 작은 지게를 만들어 오셨습니다.
제가 할 일은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는것이 전부 였지요.
친구들은 가방을 들고 까만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데 저는 책과 노트 대신 지게을 지고 낫을 갈아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는 것이였습니다.
아버님은 매일 낫을 갈아 주시고 나무를 묶을 새끼를 준비해 주셧습니다.
동네 형들을 따라 다니면서 산을 넘고 넘어 나무를 해 날랐습니다.
서투른 낫질은 매일 손가락을 베고 벤자리를 또 베어 다섯 손가락이 상처 투성이였습니다.
지금도 그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철이 드니 아버님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으며 친구처럼 하고 싶은 공부를 못 한다는것이 제일 안타까웠습니다.
경제적 고통의 휴우증은 중독성 강한 뇌신이라는 약으로 두통을 이기셨고 내일 먹을 양식이 없어도 겉으로 내색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
생계를 책임지셔야 할 아버지로써 타들어가는 속마음은 얼마나 고단 하셨는지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동생들은 상위권 학력으로 공부를 잘하는 집의 아버지이셨습니다.
그 희망만이 우리가정을 재건하는 길이라 여기며 고달픈 생활고와 육신의 아픔 영혼의 갈등을
이겨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당시 14살의 나이로 멀리 부산에서 공장일로 전전하며 지내다가.
1973년 군 입대를 하루 앞둔 전날 친구들과 환송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깊은잠에 빠진 아버님의 초췌한 모습은 지금도 명확히 그려집니다. 곁에서 훌쩍훌쩍 많이 울었습니다.
아버님은 등과 배가 거의 붙은 모습이였지요. 1976년 제대하고 집에 왔습니다.
군에서 주선 해준 원양 어선을 타겠다는 저의 의견에 반대 하시며 다른일을 찾아 보자고 하셨지요. 친척분이 운영한 중소기업에 들어갔습니다. 저의 근면과 성실에 관리자로써 인정을 받아 11년을 근무 했답니다.
그후 안전사를 개업하여 28년째 용산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우리 형제에게 가난하여 물질은 부족하지만 정신만은 살아있어야 한다며
우리에게 가족의 자긍심을 심어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그 한 말씀이 저에게 꿈이 되고 소망이 되어 비록 힘들고 고달프지만
힘든일 참아내고 근면 성실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아버님! 저는 남매를 두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때 10살 8살이던 손자 손녀는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광주 누나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시며. 약간의 치매증상이 있고 거동은 불편하지만 전화 드리면 잘 받습니다. 요즘은 보고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저 또한 비록 힘들고 고달픈 생활 이였지만 아버님의 긍정적인 생각을 본받아
불평없이 세상을 대하여 이제는 여유있는 생활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아버님~저는 2년전 부터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갑니다.
힘들었던 지난날의 피곤함이 주위의 사랑과 교제의장에서 축복과 감사로 변하고 있습니다.
60여년을 한결같이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방 쓰고 제사를 모셨지만 지금은 추도예배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버님, 저의 믿음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시고 너그로이 용서 하십시오.
이 길만이 제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지나온 과거에 대한 회개의 길이며 구원을 받으므로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교회에 나간후 당당치 못하고 항상 뒤쳐졌던 제 자신이 이제는 당당하고 대등함으로 저도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님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셔서 감사 합니다.
남 만큼 못해 주었다고 가슴아파 하셨던 모든일은 이제 다 잊으십시요. 어느분의 아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않고 손색없는 아들입니다.
아버님의 그 힘들었던 과거에 제 능력이 부족하여 도움 드리지 못해 마음만 아팠습니다.
그 힘든 과정이 저에게 채찍이 되어 더 근면하고 열심히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살아생전 교회는 멀리 하셨지만 아들 며느리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이 아버님을 지켜 주실것입니다. 아버님께 편지쓰실 기회를 주신 주 예수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
2016년 6월 19일 장남 영섭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