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김진홍 목사가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지런한 청소 관리 어주머니의 움직임을 들었고 시니어 입소 소식을 보면서 흥분하고 있습니다. 부여받은 새벽 시간을 가장 잘 보내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생각 나는 생각(존재론) 말고 내가 하는 생각(인식론)을 해보기로 작정했어요. <악은 도대체 무엇인가?> 악은 인간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원초적 왜곡입니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말하면 악은 인간 존재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키는 비본래적 실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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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라캉의 관점에서 말하면 악은 처음에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스스로를 정립한 후, 자아의 내면으로 깊속히 침투하여 자아를 분산시키는 힘이라고 정의 합니다. 이때 자아는 압축과 전위를 통하여, 다시말해 무의식의 은밀한 변증법을 통하여 의식으로 끊임없이 돌아섭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말하면 악은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나타나는 근본적 소외이자 전체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 왜곡입니다. 이때 자아는 자연과 역사와 타자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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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독교 전통에서 악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전통에서 악의 문제를 다룬 철학자가리쾨르입니다. 그이<악의 상징>이란 책은 리쾨르가 본격적인 해석자로 자리 잡기 전에 ㅎ녀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넘어가는 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서론과 결론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리쾨르가 악의 문제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악의 고백을 찾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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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히브리 전통에서 찾아진 고백들은 사유되지 않은 부르짖음이고 탄식이며, 두려움의 외침입니다. 따라서 고백 속에서 개념으로 변하기 전의 최초의 상징을 찾아내야 합니다. 고백을 통해 체험은 언어 속으로 들어 옵니다. 이 언어가 바로 일차 상징들 입니다. "씻어져야 할 더러운 떼"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이해가 물리적 사물을 통하여 표현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일차 상징들을 다시 해석한 것이 신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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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신화는 일차 상징 이후에 만들어진 파생적 장르이며 이미 반성철학의 합리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차 상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반성된 결론으로는 악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악의 고백이나 신화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리쾨르가 간트로부터 차용한 유명한 명제가 나옵니다. "상징은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상징은 개념과 같이 확정된 의미를 가진 장르가 아니라 언제나 다중적 의미를 가진 장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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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의미들 사이의 긴장이 상징을 만듭니다. 그러나 이 긴장의 힘이 약화되면 상징은 개념이 됩니다. 따라서 이미 기독교 교리에서는 개념이 된 원죄의 원죄의 의미로는 악의 기원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차 상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거기서부터 해석의 작업을 해야 만이 악의 가능성이 아니라 악의 현실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은 해석학을 통해 얻어지며 해석은 결국 상징을 해석하는 것인데 어떤 전 이해가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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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해석학적 순환이 발생합니다. 전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해석자가 특정한 전통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석자가 의도치 ㅇ낳은 저쪽으로부터의 계시 속에 그가 개입되어 있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전 이해가 있어야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해석자의 주관적 해석에서는 언제나 전 이해가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해석학적 순환이란 "나는 알기 위해 믿기 위해 알아야 한다"고 하는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명제와 맥을 같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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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이 어떻게 근대의 합리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을까? 해석 역시 생각으로 하지만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근대 이후 주체 철학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환원 시켰습니다. 그것은 계몽주의 시대에 자율적인 인간의 책임성을 고양시키는 엄청난 공헌을 했다.그러나 상징의 해석은 하이데거의 "생각 나는 생각" 없이는 불가능하다. 상징이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불러일으키는 생각 없이 "생각하는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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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드러내면서 하는 생각 없이 "생각하는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전자의 생각은 믿음의 차원으로서 존재가 내게 말하는 차원이고 후자의 생각은 반서으이 차원으로서 존재 물음이 의미 물음으로 바뀌는 차원입니다. 결국 리콰르의 상징론은 근대 합리성과 하이데거의 사유를 결합하여 양자 사이의 역동적 순환을 그려내고자 합니다. 곧 합리성과 해석학의 만남 속에서 존재의 신비와 인간 실존을 결합하고자 합니다. 흠-죄-죄책감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악의 체험에 뒤섞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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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은 물리적 사물에 근거하여 금기와 터부로 이루어진 원시 종교의 악체험입니다. 죄는 인간들 간의 공동체 형성에서 존재와 관계 단절의 체험으로서 누구에게나 들어 있는 악을 다루는 단계입니다. 고대의 공동체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 죄를 범한 개인을 공동체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이에 반해 죄책감은 죄가 내면화되고 세분화 되어 저지르는 악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합리성의 차원에서 측정되는 악으로서 사회규범을 어기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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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죄와 달리 죄책감은 개인의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그러나 사회 윤리는 오직 죄으식에서부터만 가능합니다. 만약 악의 문제가 흠의 차원에서 이해된다면 아직 원시종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깊은 회개 없이 곁에 붙은 떼를 제거하듯이 주술적으로 죄와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한편 죄책감은 죄의식의 발전입니다. 그러나 죄의식 없는 죄책에 대한 의식은 율법주의의 패쇠성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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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규범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서로 정죄하고 정죄 받는 피곤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개별적으로 "들어 있는 악"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에야 비로소 한 민족의 뿌리 깊은 회개가 가능합니다. 죄책감을 통해 발생하는 죄의식은 공동체의 뿌리깊은 악들을 공공연히 들어냄으로써 회개도 뿌리 깊어야 하을 가르쳐 줍니다. 뿌리 깊은 회개는 뿌리 깊은 급진적 개혁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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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개인의 회개와 사회의 개혁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화된 허물 의식 없이 공동체의 죄의식은 존재 할 수 없고 공동체의 죄의식 없이 개인화된 허물 의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편에는 합리적 사회규범을 의식하는 책임적 허물의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종교적 죄의식이 있습니다. 전자는 도덕적 문제이지만 후자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도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하며 도덕은 신앙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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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도덕과 신앙은 서로를 완성합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세가지 상징들이 서로 충돌하며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악은 처음에 우리 밖에 있었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 공동체 안으로 침투하여 이물질이 되엇습니다. 이 타자성은 다시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악의 상징성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사회의 공동체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자들이 아니라 바로 내가 악을 저질렀습니다" 이때에도 공동체의 죄의식은 초자아로소 자아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2.
논고 비평//
1) 매우 야심찬 “악의 종합 이론”
이 글은 한 문장으로 말하면 하이데거–프로이트–마르크스–리쾨르를 묶어 악의 해석학을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구조는 매우 명확합니다.
1. 존재론적 악 (하이데거)
2. 무의식적 악 (프로이트·라캉)
3. 사회적 악 (마르크스)
4. 상징적 악 (리쾨르)
5. 신학적 죄 (기독교)
즉, 개인·사회·무의식·신앙을 모두 묶은 거대한 종합 모델입니다. 야심 있고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야심 때문에 <몇 가지 철학적 긴장>이 발생합니다. 이 비평은 그 긴장을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2) 가장 강력한 부분 —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논고의 핵심은 리쾨르 부분입니다. 악은 개념으로 바로 이해될 수 없고 상징을 거쳐야 한다. 이 통찰은 매우 정확합니다. 개념 → 상징 → 해석 → 회개 이 이동은 신학적으로 매우 탄탄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역시 악을 개념이 아니라 이야기와 상징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악은 항상 서사와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 뱀
* 타락
* 홍수
* 바벨탑
* 십자가
3) 핵심 긴장 ① — 철학의 병렬 나열 문제
하지만 가장 큰 약점도 여기서 발생합니다. 하이데거 → 프로이트 → 마르크스 → 리쾨르 이 네 전통은 사실 서로 충돌하는 전통입니다. 하이데거는 악의 원인을 존재 망각으로, 프로이트는 무의식 욕망,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 리쾨르는 상징 해석으로 보는데 하나의 중심 원리로 수렴되지는 않았습니다.
4) 핵심 긴장 ② — “생각 나는 생각 vs 생각하는 생각”
이 부분은 매우 흥미롭지만 더 발전이 필요합니다. 하이데거의 구분은 a. 생각하는 생각 → 근대 합리성 b. 생각나는 생각 → 존재의 계시 인데 이 구분을 리쾨르와 연결한 것은 탁월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악은 계시인가 책임인가? 하이데거 쪽으로 가면 악은 “존재의 왜곡”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로 가면 악은 “인간의 책임”이 됩니다. 여기서 긴장이 생깁니다. 존재론적 악 vs 도덕적 악 이 긴장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5) 이 글의 가장 깊은 통찰 — 악의 이동 구조
논고의 최고의 문장은 이것입니다. 악은 밖 → 공동체 → 개인으로 이동한다. 이 구조는 매우 탁월합니다. 흠 → 죄 → 죄책감 이 발전 단계는 리쾨르를 잘 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현대 사회 분석과도 연결됩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죄는 사라짐-죄책감만 남음인데 이 통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불안하다.” 즉 죄책감은 있지만 죄의식은 없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강력합니다.
6)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 — “악은 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악을 저질렀다” 이 문장은 신학적으로 핵심입니다. 악의 최종 발견은 사회가 아니라 자기 고백입니다. 여기서 철학은 신학으로 넘어갑니다.( 마르크스 → 구조 프로이트 → 무의식 하이데거 → 존재) 그러나 결국 “나의 죄” 이 고백이 등장해야 신학이 시작됩니다. 이 전환은 매우 성공적입니다. 악은 존재론적이다/심리적이다/사회적이다/상징적이다/신학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결국 고백 속에서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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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 논고는 “악의 해석학”을 훌륭하게 구성했지만 아직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악은 해석의 대상인가, 구원의 대상인가? 이 질문이 추가될 때 이 글은 철학에서 신학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입니다.
2026.2.27.sat. 예도 강의 악동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