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범죄 영화들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대중들이 약속한 최소한의 법을 어기는 범죄자들과 그들을 뒤 쫒으며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려는 형사들을 등장시켜서, 대중적 재미를 주는 것과 동시에 규칙적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본질적 문제를 제기한다.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삶인가? 그들은 왜 범죄를 저질러야 했을까? 질문은 간단하지만 대답은 간단하지가 않다. 쫒고 쫒기는 팽팽한 긴장관계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속도감 있는 전개와 날카로운 편집, 힘의 절제에 의한 응축과 폭발은 필수적이다.
1930년대 금주법과 대공황 시절을 배경으로 형성된 갱스터 무비가 대중들을 매료시킨 것은, 금기의 영역에 속하는 범법자들의 세계를 세밀하게 조명해서 대중들 앞에 드러낸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속성들 즉 대중적 재미를 줄 수 있는 선 굵은 서사구조, 쫒는 자와 쫒기는 자가 형성하는 긴장과 이완의 드라마,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한 대립적 구도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범죄 자체에 면죄부를 주어서는 절대 안 되지만, 범죄자들의 행동은 규칙적 질서를 벗어나고 싶은 대중들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는 부분이 있다. 또 갱스터 무비의 범죄자들은 일방적으로 사악하게만 그려져 있지 않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내면적 이유가 대중들의 공감을 살 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호소력 있게 대중들의 정서를 사로잡는다. 범죄자들보다 합법적으로 더 악랄한 죄를 짓고 사는 권력계층을 등장시켜 대비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갱스터 무비에는, 비록 범죄자지만 대중들의 사람을 받는 이른바 반영웅, 안티 히어로(anti-hero)가 등장한다.
한국은행 50억 강탈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최동훈 각본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은, 의심할 바 없이 2004년의 걸작 중 하나이다. 관객과의 지적 두뇌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경직되지 않게 씨줄 날줄로 교직된 정교한 시나리오, 매력적으로 구축된 다양한 캐릭터들, 속고 속이는 그들의 관계를 속도감 있게 끌고 가는 편집, 마치 능수능란하게 볼을 장악하여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고 문전 앞으로 드리볼하는 국가대표 축구 선수의 개인기를 보는 것 같은 현란한 즐거움이 있다.
범죄용의 차량을 경찰 순찰차가 뒤 쫒으면서 벌어지는 복잡한 도로의 차량 추격전, 용의 차량은 터널을 지나면서 공중으로 날아오르다가 추락한다. 그리고 폭발하면서 불타오른다. 우리는 오프닝 씬의 이러한 격렬함에서 빠져나올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매력적 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국은행을 사기 쳐서 50억원을 빼내려는 프로 사기꾼들의 이야기 [범죄의 재구성]에서, 사건을 끌고 가는 것은 현란한 입담으로 다른 사기꾼들을 제압하면서 사기 계획을 세우는 최창혁(박신양 분)이다. 보통 때 현란한 꽃무늬 셔츠나 빨간색 가죽 쟈켓을 입고 노란색으로 염색한 삐침머리를 하는 그는, 독고다이 그러니까 단독으로 활동한다.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그 사람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라고 말하는 지능범인 그는, 이번 사건을 위해 사기꾼계의 전설로 통하는 김선생(백윤식 분)과 제휴를 맺는다.
김선생은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전과가 전혀 없는 사기꾼계의 대부, 살아있는 전설이다. 김선생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떠벌이 얼매(이문식 분), 여자 킬러인 제비(박원상 분), 대한민국 최고의 위조기술자 휘발류(김상호 분) 등을 끌어들인다. 이렇게 다섯 명으로 짜여진 팀은 위조된 수표를 한국은행의 진짜 현금과 바꿔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은 성공직전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경찰이 출동하면서 주모자 최창혁의 차가 쫒기게 되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은 크게, 사기꾼들이 범죄를 꾸미고 집행하는 범죄 시퀀스와 그들의 뒤를 추적하는 강력계 형사 차반장(천호진 분)의 추격 시퀀스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범죄의 전과 후는 시간적 순서로 명료하게 배치되어 있지 않다. 현재적 시간을 따라 범인을 추적하면서, 범죄가 구성되는 그 이전 단계는 잦은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오프닝씬부터 감독은 이 사건의 중요한 정보를 노출시킨다. 차반장은 체포된 얼매를 추궁해 차량 폭발로 죽은 최창혁을 제외한 다른 범인들을 추격한다. 이 과정에서 고서를 수집하고 판매하는 서적상인 죽은 최창혁의 형이 5억원 보험금의 수혜자로 밝혀진다. 최창혁 주변에 있던 구로동 샤론스톤, 서인경(염정아 분)은 보험금을 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최창혁의 형에게 접근한다.
[범죄의 재구성]에는 다섯 명의 사기꾼들과 그들을 추격하는 형사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범죄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런 장르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야기의 얼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도입부 시퀀스에 등장하는 터널의 비밀이라든가, 쌍둥이의 정체는 쉽게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이다. 제작진들 역시 그것을 결말까지 악착같이 숨기려고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즉 [식스센스][유주얼 서스펙트]류의 반전에 승부를 거는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을 재미있게 해주는 것은 이야기 구조의 놀라운 직조력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적 뛰어남이다. 최동훈 감독은 내러티브의 전개에서 꼭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 관객들에게 제공하면서 화면을 장악한다. 또한 그는 뛰어난 영화적 테크닉을 이용해서 자신이 표현하려는 내용을 최대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놀라운 테크니션이다. 1시간 55분의 런닝타임 동안 우리는 잠시도 한눈팔지 못하고 화면에 시선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역시 이야기의 새로움이거나 표현의 새로움이 있어야만 관객들과 승부를 걸 수 있다.
1인 2역의 연기를 보여준 박신양은 그의 연기인생 중에서 최대치의 역동감과 활기를 보여준다. 생각 많은 떠벌이, 최창혁이라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은 전적으로 그가 구축해서 표현한 캐릭터의 생동감 때문이다. 삐침 머리의 공격적 이미지라든가 화려한 외양과 빠른 말투로 형성된 그의 카리스마는, 사건을 끌고 가는 힘의 집약처로서 손색이 없다. 또 김선생 역의 백윤식은 묵직하면서도 신중한 언어와 동작으로 캐릭터에 무게를 부여하고 있고, 염정아는 푼수 같은 팜므 파탈로서의 구로동 샤론 스톤을 매력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범죄의 재구성]은 최동훈 감독의 영화다. 발로 뛰며 현장의 전문용어와 생생한 활력을 채집한 시나리오, 각 캐릭터들의 개성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서로 충돌하며 형성되는 파장까지 계산된 배우 조련술, 너무나 완벽한 테크닉으로 그것을 형상화 한 연출력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역량이 너무나 많은 것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신인 감독이 탄생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