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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왜 조선인가(중원을 찾아서 : 오아시스 크레센트와 소그드 구성 2)
1965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옛 중심지였던 아프라시압에서 벽화가 한점 발견된다. 이는 소그드 미술의 중요한 연구 자료이며 특히 국내에서는 조우관을 쓴 고대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아왔다. 공식적으로는 벽화의 연대를 7세기 중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극동아시아에서 7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으며, 미술고고학전문가나, 사학자들 역시 고구려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현 한반도의 평양에서 사마르칸트까지의 길이는 1만리가 넘는 거리이다. 당을 견제하기 위해 만리도 넘는 길에 사신을 보냈다고 아무런 문제의식과 의문을 접어두고 해설을 한다는 것은 마치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하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들이 고구려왕과 그 대신들을 얼마나 우둔하게 생각할까? 아무리 초원길을 이용해 최단시간 거리를 주파한다고 해도 하루에 갈 수 있는 길이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400km를 넘지 못한다. 400km 는 대략 천리정도이다.
군 복무시절 천리행군을 한 경험이 있다. 통상 5박6일 정도 여정을 잡는다.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길이는 최대 70km를 넘지 못한다. 물론 무리해서 100km 급속행군을 하는 경우도 있다. 완전군장 40kg배낭과 각종장비, 통신병은 통신기를 매야 하므로 더 고된 여정이 된다. 하루에 70km를 갈 수 있다면, 엄청난 체력이다. 한편 말의 속도는 대략 시속 60km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갈 수 있는 거리는 60×20=1200km 이다. 산술적으로는 여러 말과 파발꾼을 교대해서 4일 정도면 만리를 넘게 주파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국제정세와 실질적인 외교절차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 후에 계산을 내려야 한다.
태종 10년 경인(1410,영락 8) 4월5일 (신축)
역마를 발하는 제도를 예조에서 다시 상정하다
예조(禮曹)에서 포마(鋪馬)를 기발(起發)하는 제도를 상정(詳定)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병조(兵曹)에 이문(移文)하면, 병조에서 기마 문자(騎馬文字)를 주고, 출사(出使)하는 인원(人員)은 승정원(承政院)에 나아가서 마패(馬牌)를 받는 것이 구례(舊例)인데, 만일 자문(紫門)에서 기마(騎馬)할 긴급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입직 대언(入直大言)이 친히 왕지(王旨)를 품하여 병조(兵曹)에 내리고, 병조에서는 말을 준 연후에 정부(政府)에 보고하도록 항식(恒式)을 삼으소서.”
하였다.
위와 같이 역마를 써서 보내는 것도 번거로운 절차를 걸쳐야 되는데 동북아시아의 최극단에 있는 지점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굳이 사신을 보낼 필요가 있을까? 또한 도로를 아무 곳이나 휘젓고 다닐 수 있었을까? 고대 도로상에는 성곽이 선상의 한 점으로서 수 많은 도시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고 왕의 전교와 공문서 검토를 반복해야 한다. (현대의 출입국 사무소에서 하는 수속절차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또한 7세기 중엽이라면,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인데 굳이 중앙아시아까지 갈 리유도 없을 것이며, 여력도 없다. 그러나 고구려와 隨․唐이 중앙아시아의 중심지역에서 패권을 다투었다면, 사마르칸트에 고구려사신이 나타나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되지 않는다.
공식적 사절단이 외교적 공무수행을 위해서 몇 사람만 달랑 갔겠는가? 사신들 호위에 필요한 호위병력, 각종 선물, 식량, 마차, 수행비서등이 동행하기 때문에 만리도 넘는 길을 사절단을 이끌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연행기에 한성에서 북경까지 사은사로 가면 석 달이 소모된다고 나온다. 그 거리는 대략 삼천리 1200km의 노정이다. 즉 천리 가는 데 1달이 걸리는데, 만리를 간다면 10달이 걸린다는 단순계산이 나온다. 당시는 高, 唐 전쟁시기로 추정되는데, 한시가 급한 시기에 10달이상이 소모되는 거리를 통해 외교를 했다면, 연개소문을 어찌 당대의 호걸로 볼 수 있을까? 북방민족과 정치, 군사연합을 위해 움직였다면, 고구려가 북방제부족들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전통적으로 친목 및 유대감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연개소문 혹은 고구려왕이 보냈다는 것으로 추정하는 사신들이 접촉한 부족은 돌궐, 철륵이라는 견해에는 큰 이견이 없다. 다만, 그 사신들이 출발한 고국, 고구려의 중심인 평양성의 위치에 이견이 있을 뿐이다.
고구려와 가장 친밀한 북방민족이 있다면, 말갈과 선비가 있다. 말갈은 여진과 몽골로 갈려져 나왔다. 몽골은 또한 흉노의 후예라 하니, 실상은 말갈이나, 흉노나 같은 세력권에서 활동지역만 달랐을 뿐이다.
사서에서는 고대흉노를 훈육, 훈죽이라고 했고, 서양에서는 훈(Hun)이라 했다. 그런 훈족의 후예라는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을 마자르족이라 자처한다. 마자르(Mazar,Magyars)는 곧 말갈의 다른표기일 뿐이다. 마갸르, 마자르. 성경(Vible)에서는 이들을 마곡(Magog)으로 부른다. 아프가니스탄 최북단과 우즈벡키스탄의 접경지인 실크로드의 요충지 발흐(Balch) 옆에 신도시 마자르 샤리프(Mazari sharif) 가있다. 마자르 사리프 , 달리 부르면 달단동(韃靼洞)이다. 마자르는 말갈이고 말갈은 몽골/모굴리스탄/타타르이니.......
이 스키타이/말갈/흉노/몽골/흉노/돌궐/철륵의 활동무대는 중앙아시아의 서북 지금의 볼가강과 동부유럽, 러시아 타타르공화국, 우랄산맥부터 지금의 알타이산맥, 카프카스일대에 걸쳐 넓게 분포했었다. 특히 철륵은 흉노의 후예로 연개소문과 이세민의 고, 당 전쟁 때 당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며 고려 태조 왕건 또한 이들을 부용했다. 철륵은 투르크의 다른 이름이며, 테무친/ 티무르/철목진=(鐵)과 같다. 이들이 활동 지역은 지금의 카자흐스탄의 서쪽 키르키즈 초원일대에서. 북쪽으로는 지금의 모스크바 지역까지. 이들이 몽골이고, 돌궐이다. 말갈이고 여진이다.
성호사설 제 1권 천지문(天地門)
오국성(五國城)
금(金) 나라는 여진의 흑수부(黑水部)로 우리나라의 북도와 가장 가깝다. 송(宋) 나라의 황제가 잡혀 와서 오국성(五國城)에 구금되었으니 반드시 우리 국경과 서로 가까웠을 것이다. 흑수부 지역에서 가장 깊고 들어가기 어려운 곳은 오랄성(烏喇城)이다. 오(烏)와 오(五)는 우리 음으로 비슷하니 ‘오국’은 아마도 오랄의 잘못인 듯하다. 오랑캐족들의 땅 이름이나 사람 이름은 대부분이 음으로 하고 글자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일통지(一統志)》에 보면, “삼만위(三萬衞)에서 1천 리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오랄이 바로 그곳이다. 《성경지(盛京志)》에는, “오랄 지역에는 이름이 없는 성이 많다.” 하였으니 어느 곳이 오국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할 뿐이다.오랄에서 동남으로 토문강(土門江)까지가 7백 30리인데 토문은 곧 두만강(豆滿江)이다. 이것도 음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니 우리나라와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 옛적에 불함산(不咸山)을 백두산(白頭山)ㆍ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년중 언제나 춥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즉 말갈과 여진은 조선의 북방과 서북방을 휘젓고 다니던 옛 숙신의 후예들이다. 이들의 위치는 현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한다.
다산시문집 제13권
서(序)
백두산(白頭山)을 유람하러 가는 진택(震澤) 신공 광하(申公光河)를 전송하는 서 기유년(1789)에 지음.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고, 지지(地志 지리서)에 이른바 장백산(長白山)이다. 그 산맥이 서쪽으로 선비(鮮卑)에서 일어나서, 동북쪽으로 흑룡강(黑龍江)의 위에 이르고, 그 한 가닥이 남으로 꺾이어 우리나라 경계의 북쪽에 이르러 우뚝하게 일어나서 북진(北鎭)ㆍ여진(女眞)ㆍ오랄(烏喇)의 으뜸이 되었으며, 남쪽으로 말갈(靺鞨)이 되고, 서쪽으로 여연(閭延)ㆍ무창(茂昌)이 되고, 서남쪽으로 발해(渤海)가 되었는데, 그 뿌리가 땅에 서리어 수천 리나 뻗어 있다. 그 위에는 큰 못이 되어 주위가 80리나 된다.
또한 백야현상이 이를 증명해 준다.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 온성론(穩城論)
《당서(唐書)》 회흘전(回紇傳)에 이런 말이 있다.
"몽고(蒙古)의 사막(沙漠) 북쪽에 골리간(骨利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가 지고 나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해서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해가 뜬다." 여기에서는 시기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때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의 전후(前後)였을 것이다. 북쪽 끝의 지역에는 여름날이 이렇게 긴데,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보다 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고의 북극(北極)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時期)는 춘분 전과 추분 후로 이때에는 순전히 낮만 계속된다.
신당서(新唐書卷三十五 ,志第二十一, 天文一
http://www.xysa.net/a200/h350/17xintangshu/t-035.htm
若令距陽城而北,至鐵勒之地,亦差十七度四分,與林邑正等,則五月日在天頂南二十七度四分,極高五十二度,周圓百四度,常見不隱。北至晷四尺一寸三分,南至晷二丈九尺二寸六分,定春秋分晷五尺八寸七分。其沒地才十五餘度,夕沒亥西,晨出醜東,校其裏數,已在回紇之北,又南距洛陽九千八百一十五裏,則極長之晝,其夕常明。然則骨利幹猶在其南矣。
올라산성, 키질 오르다. 아랄스크, 우랄산, 우랄강. 오로첩목아........철목진, 테무친, 티무르. 달단동, 타타르. 철륵, 키르키즈, 모두 한 중심 지방에서 기원하고 전파된 지명들이자 이름들이다. 이들을 포함하는 것이 고려, 즉 고구려이다. 고구려가 일찍이 이 중앙아의 서북방에 말갈(타타르)과 복속시켰다면 고구려의 중심 강역은 중앙아시아의 중앙인 우즈벡, 카자흐, 신강지역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이라 본다. 또한 이 지역은 소그드 구성, 즉 소그디아나 지역과 겹치며, 그 중심에는 사마르칸트와 케쉬가 있다.
때는 고구려가 무너진 8세기 초반 이 지역 출신의 당대의 걸출한 간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안록산이다. 천하를 통일한 唐을 전복시키려고 大燕이라는 국호를 세우고 북방의 패자가 되어 중원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허무하게 간 그를 필자는 패망한 고구려의 후예로 본다. 그와 동시대의 온 천하에 명성을 날린 또 하나의 고구려 후예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고선지이다. 그 역시 소그드구성과, 고구려/당 천하패권 쟁탈전에 휘말려 결국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인물이다.
아프라시압 벽화의 고구려 사진과 정사의 기록을 비교해 보자.
‹아프라시압 벽화 복원도›
通典 / 邊防典 / 第 一 百 八 十 六
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皆著幘,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
그 나라의 귀족들은 비단으로 수를 놓은 옷을 입는데, 금은으로 장식을 한다.
대가는 관을 쓰는데 머리를 올려 상투를 튼다. (그 나라)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꼬깔처럼 생겼다.
사진 오른쪽에 즉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차고있는 고구려 사신이 보인다. 신분은 대가이며 귀족으로 보인다. (중간에 머리를 길게 땋아놓은 인물도 환두도를 차고 있다.)
北史/列傳第八十二/高句麗
人皆頭著折風,形如弁,士人加插二鳥羽。貴者,其冠曰蘇骨,多用紫羅為之,飾以金銀。服大袖衫、大口袴、素皮帶、黃革履。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을 쓰는데, 고깔처럼 생겼다. 선비들은 새 깃털 두 개를 꽃아 넣는다. 귀족이 쓰는 관모를 蘇骨(소골)이라 부르는데 주로 보라색 명주실을 써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한다. 의복은 큰 적삼과 소매에, 통이 큰 바지이고, 가죽 혁띠를 차며, 황색가죽신을 신는다.
기록과 아프라시압의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은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도 대가(大加)로 보이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로 보아 당시 사마르칸트에서 중요한 회담이 열렸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사마르칸트로 왔을까? 그것도 소그드 구성 즉 , 돌궐의 영역인 이 지역에……
당시는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시기이다.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구려는 당의 도전을 받게 된다. 정관의 치세를 열었다는 당태종은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안시성에서 발목이 잡혀 목숨만 간신히 건져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당 태종 리세민이 누구인가, 수나라가 고구려에 대패하여 망하자, 혼란해진 세상을 안정시키고 당을 반석에 올려놓았으며, 돌궐과 철륵을 복속시킨 인물이다. 그런 그가 뭐가 아쉬워서 극동의 藩邦(번방)에 목숨까지 걸었을까? 수양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힘을 고구려정벌을 위해 걸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고구려에 집착했을까? 그가 천하의 폭군이라서? 정복욕에 주체를 못해서일까?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 혹은 정치적 입지에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해야 말이 맞는 것 아닌가?
중앙정부, 즉 中國(중국)은 반란이나, 국가에 위협을 주지 않는 세력에 대해서는 절대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 서기 7세기 경, 대규모의 대외 군사작전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세력은 수, 당 세력이다. 그들은 고구려를 대규모의 군대를 수차례나 파견하였으나 모두 패하였는데, 이것은 천하의 주도권이 고구려에 있다는 말과 같다. 천하의 주인이 일부러 국력 낭비하면서 원정을 감행할 이유가 없다. 중조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하는 반란세력이 세력을 통일, 규합하여 천하의 주도권를 빼앗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다. 칭기즈칸의 중원공략, 조선태조의 고려 전복, 토목보의 변, 이시애의 반란. 등등은 中國(중국)에 대한 도전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수․당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에 돌궐과 말갈을 공략하는 패턴을 보인다. 고구려의 오른팔과 왼팔을 쳐내기 위한 전략인데, 실상은 돌궐을 완벽하게 공략하지 못했으며, 돌궐을 철륵이고, 흉노의 후예이며, 말갈, 숙신, 몽골과 같은 뿌리이다. 소그드 九姓 또한 고구려의 諸邦중 하나였으며, 그 지방 출신인 안록산과 사사명이 당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것에도 많은 자극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안록산의 프로필과 출신지인 소그디아나 지방의 연관성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는 중공 바이두백과에 나온 프로필이다.
中文名: 安禄山 国籍: 中国 民族: 粟特
出生地: 营州柳城(今辽宁省朝阳) 出生日期: 703年 逝世日期: 757年
职业: 三镇节度使、大燕皇帝
민족은 속특=소그드. 출생지는 영주,유성(현 료령성 조양)
다음은 한국어 위키백과이다.
안녹산(중국어 정체: 安祿山, 간체: 安禄山, 병음: Ān Lùshān, 703년? ~ 757년)은 당나라의 무장으로 안녹산의 난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이다. 안(安)이라는 성은 소그디아나의 부카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를 가리키는 중국식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녹산(禄山)이라는 이름은 빛을 의미하는 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의 부족의 지도자인 카파간 카간이 716년에 죽게 되자, 일족들은 혼란을 피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영주에서 호시아장을 맡았는데 6개 국어를 잘했다. 30대에는 장수규를 섬겨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742년에는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변경 방비를 잘 맡아서 현종의 신임을 얻었다. 744년에는 범양절도사, 751년에는 하동절도사로 부임하면서 병력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本姓康, 본성 강씨인데, 소그드인 소무구성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는 일설에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데, 이란계 무장 안연언(安延偃)의 양아들이 되었다고도 한다.
(安)이라는 성은 소그디아나의 부카라,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이다. 그들의 부족지도자가 카파간 카간 : 묵철(默綴)이다. 대조영, 이해고, 이진충과 동시대 인물이다. 묵철이 716년에 부하라에서 죽자 일족들이 중국으로 망명했다? 즉 현재의 조양시로? 703년에 태어났으니 13살 때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서 현재의 조양까지 피난을 갔다는 것은 중국지방 혹은 하북 지방이 현재의 중공대륙에 있었다는 기존학설 때문인데 20대에 호시아장을 맡고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그 능력 특히 언어 구사능력 또한 지방 토착민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부하라에서 현 료녕성에 떠돌이 신세로 도망온 사람이 6개 번어에 능통할 수 있겠는가? 안록산이 안국, 즉 부하라에서 사마르칸드나 케쉬 혹로 이주했다면 모를까 1만리도 넘는 생소한 이역 땅에서 정착하여 6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당시의 국제무역의 중심지는 우즈벡 일대의 오아시스 크레센트 지역이다. 각지에서 많은 상인과 이민족들이 드나들며, 무역을 하던 환경 속에서 안록산은 자신의 총명한 머리를 십분 활용하여 출세의 발판을 만든 것이다.
소무구성(昭武九姓)
소그드(Sogdiana)는 중앙아시아의 아무 다리야(Amu Darya)강과 시르 다이야(Syr Darya)강 사이에 위치한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한 자라프샨(Zeravshan, Zarafshan, Zarafshon, Zaraohsan)강 유역의 오아시스 도시(지역)을 말한다. 현재로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qand, Samarkand)주와 부하라(Bukhara)주, 타지크스탄의 소그드(Sughd)주에 해당한다.
이란계 유목민족인 소그드인(Sogd)들이 살고 있었다. 이란 사람들은 이 지역을 “투르(Tur, 인명)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Turan(توران, Tūrān)이라 불렀고, 7세기 이후에는 아랍어로 「강 사이의 땅」을 의미하는 마와란나할(ما وراء النهر, Mā-warā' an-Nahr, Mawarannhr)이라 부름. 유럽에서는 옥서스강(Oxus River, 아무다리야강) 너머의 땅(지방)을 가리키는 트랜스옥시아나(Transoxiana) – 중국에선 하중(河中)이라 부름 - 라 부름.
l 강국(康国, Kang Kingdom): 현재 사마르칸드(Samarqand)일대로 소무구성(昭武九姓)의 중심 국가(도시). Samar는 “비옥”, qand는 “토지’즉 ‘비옥한 토지’라는 뜻. 소그드어로는 스마르칸다(Smarakanda).
l 안국(安国, An Kingdom): 현재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주의 주도인 부하라(Bukhara). 제라프샨강 하류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 때론 Bukharan Soghd로 언급됨. 포갈(捕喝)
l 조국(曹国): 서조(西曺)(Ishtikhan, Ishtikhon)- 사마르칸드 서북의 伊什特汗-, 중조(中曺)(Kaputana) – 사마르칸드 서북의 개포덕(凯布德)- , 동조(東曺)(Sutrushana 또는 Ushrusana/Ustrushana)
l 석국(石国, Shi Kingdom): 현재의 타시켄트(Tashkent). 소그드어로 차치(c'c : Čāč), 페르시아어로 차치(چاچ, Chāch), 아랍어로 샤시(شاش,Shāsh)라 불림. 강거(康居, Kangju)의 중심지로 추정되며, 중국 역사상으로는 『후한서(後漢書)』이후 석국(石国)
l 미국(米国, Mi Kingdom): 현재 타지키스탄의 서부의 소그드주의 자라프샨(Zeravshan)강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인 판지켄트(Panchikat,)
l 하국(何国, He Kingdom). 현재의 Kushanika. Kushaniya로 추정
l 화심국(火尋国): 호라즘(花拉子模).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환잠(驩潛, Khorasmia, Kharism)
l 무지국(戊地国): 위의 안국(安國) 중 서안국(西安國)
l 사국(史国, Shi Kingdom): 지금의 샤흐리사브즈(Shahrisabz). 사마르칸드 남쪽 80km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페르시아어로 ‘녹색의 도시’(Green city)라는 뜻으로 티무르(Timur, 1336-1405)가 태어난 곳. 2000년에 UNESCO문화유산으로 등재됨. 그 전에는 ‘heart-pleasing”이란 의미의 커시(Kesh)라 불림. 《위략(魏略)》 서융전(西戎傳)에서는 갈석국(竭石国),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갈상나국(羯霜那国)(산스크리트어 Kusana)으로 기록됨. 당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는 사국의 수도를 걸사성(乞史城) 즉 Kesh, 《신당서(新唐書)》엔 구사(佉沙)로도 기록됨. 원나라 때는 가석(可石)으로도 불림.
(풀리블랭크의 비정을 기반으로 해서 ß E. G. Pulleyblank, “A Sogdian Colony in Inner Mongolia,” T’oung Pao 41, 1952, pp. 317-56.)
[출처]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diana, Sogd), 소그드인과 소무구성(昭武九姓) |작성자 과유불급
다시 7세기 후반으로 돌아가 보자. 668년 드디어 고구려를 당이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나, 북방제부족 즉 고구려의 잔존세력은 끊임없이 저항한다. 돌궐의 묵철, 거란의 리진충, 고구려 유민 대조영, 대조영은 698년에 후고구려 발해를 건국한다. 716년 동돌궐 가한 묵철이 부하라에서 살해당한다. 이에 안록산의 일족은 이주를 하게 되고, 사사명 또한 사국: 케쉬 출신이므로 강국: 북방 최대 무역중심도시 사마르칸트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舊唐書 列傳 薛仁貴 (구당서 열전 설인귀)
高宗思其功,開耀元年,復召見,謂曰:「往九成宮遭水,無卿已為魚矣。卿又北伐九姓,東擊高麗,漠北, 遼東咸遵聲教者,並卿之力也。 고종이 개황원년에 토번에게 패한 설인귀를 위로 하며 그 업적을 말하는 장면인데 고종왈: 구성궁에 가서 홍수를 만나고도 살아나왔고 경은 또한 북으로 9성九姓을 정벌하였고, 동으로 고려 막북 료동을 공격하니 성교를 따르는 것 또한 그대의 공이다.
설인귀가 소그드 구성을 정벌했다고 한다. 또한 동으로 고려, 막북, 료동을 공격하였다는데 부점을 찍어놓았다. 이 부분은 고구려의 막북과 료동을 공격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고구려의 중심지는 료동이요, 고려에는 막북이 있다는 말과 같다. 중종실록에 평안도와 함경도 사이에 사막이 있다는 표현은 이 고구려의 경내에 있는 사막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당의 북쪽에는 소그드가 있는 것이고 동에는 고구려가 막고 있는 것이다. 그 막북(漠北)이라 함은 소그드를 넘어 북쪽의 몽골, 즉 철륵을 친 것을 말한다. 7세기 중엽 당의 전투지역을 보면, 소정방 설인귀가 타슈켄트와 총령/주구반/소륵에서 작전을 펼쳤다. 모두 중앙아시아의 중심지역이다. 위 지역의 바로 동쪽에 고구려의 중심지가 있다는 말과 같다. 고구려의 서쪽에는 소그드지역이 있고, 그래야 안록산이 소그드 지역의 중심인 사마르칸트 혹은 케쉬에서 움직이고, 대조영의 활동지역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고구려와 유주가 바로 자기 동네 근처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만리도 넘는 지금의 조양시로 간단 말인가!
소그드 지역은 투란지역으로 불렸다. 투르크, 철륵의 땅이란 뜻이며, 이들이 상인집단이라는 것과 돌궐이 유목 군사집단으로 불리는 것은 안전한 무역과 교역을 목적을 위해 군사적으로 무장한 세력임을 말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재산과 보호와 이윤낭비를 피하기 위해 군사력을 활용하는 집단이 돌궐, 투르크제국이라는 것이며, 실상은 소그드가 투르크, 철륵이라는 말과 같다.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제번이자 우방이었으니, 사마르칸트의 벽화에 조우관을 쓴 사신이 온 것은 미스테리로 치부할 사항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비정을 통해 설인귀가 싸웠다는 청해의 烏海城과 瓜州, 沙州의 위치도 제고해 보아야 한다.
여기서 조선왕조에서 고구려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국역승정원일기 > 인조 7년 기사(1629, 숭정 2) > 8월7일 (기미) 맑음 > 최종기사
전략)
고구려가 차지한 땅이 중국보다 넓었는가?”
하니, 홍서봉이 - 3, 4자 원문 빠짐 -
땅이 넓었던 것 같습니다. 삼차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여순구(旅順口)인데 - 5, 6자 원문 빠짐 - 성(城)이 그 경내에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남이공이 아뢰기를,
“안시성(安市城) - 3, 4자 원문 빠짐 -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양만춘(楊萬春)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 3, 4자 원문 빠짐 -주D-014”<[주D-014]3, 4자 원문 빠짐 : 원문은 ‘而出於雜 三四字缺 信實矣’인데, ‘而出於雜’과 ‘信實矣’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굳이 번역하자면, ‘잡사(雜史)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의 뜻일 듯하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고구려가 요동(遼東) 지방을 소유하여 삼국(三國) 가운데 - 3, 4자 원문 빠짐 - 수(隨)나라와 당(唐)나라가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원이 광활하여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지형이 이와 같기 때문에주D-015 씩씩하고 호방한 사람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고구려의 역사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주D-016[주D-015]끝이 …… 때문에 : 원문은 ‘一望 數字缺 形如此’인데, 문맥을 살펴 보충 번역하였다.이라고 일컫는 자는 비록 찬역(簒逆)한 도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수가 없는 효웅(梟雄)입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군신(群臣)들과 당세의 웅걸(雄傑)을 논하였는데 연개소문이 7인 가운데에 끼었으니, 그 인물이 어떠한지 상상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개소문의 재주는 조조(曹操)에 뒤지지 않을 듯하다. 지금 노적(奴賊)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모두 - 1자 원문 빠짐 - 의 땅인가?”
하자, 홍서봉이 아뢰기를,“삼차하 이동이 모두 저들 차지가 되었는데 이 지역은 모두 고구려가 소유했던 땅입니다. 주D-017”[주D-017]이 지역은 …… 땅입니다 : 원문은 ‘此皆高麗 一字缺 有之地矣’인데, 문맥을 살펴 보충 번역하였다. 하략)
인조의 물음에 홍서봉은 고구려의 땅이 중국보다 크다고 하고 있고, 이 지역은 노적 즉 건주위 누루하치가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수, 당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당이 고구려를 멸하고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당이 중국이 되었건 것이고, 그 전에는 중국이 고구려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국가 최고통수권자 회의기록을 잡서에 근거해서 기술하여 밑을 수 없다는 것, 결자가 너무 많다는 것은 누군가의 손을 탔다는 말이다. 고전번역원에서 원문 이미지라고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국역승정원일기 > 인조 9년 신미(1631, 숭정 4) > 6월18일 (경신) 맑음 > 최종기사
전략) 고구려 시대에는 하나의 성 안에 들어간 병사가 10만이고 쌓아 둔 양식이 15만 석이라고 하니,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이 말이 어찌 거짓이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 태종(唐太宗)이 왔을 때에 사방 40리에 걸쳐 결진(結陣)하였다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큰 나라에는 대들 수 없는 법인데 오래전부터 병사를 훈련시켰기 때문에 항거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힘은 비록 강하였으나 의롭지 않은 나라였으니 고구려는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고구려의 영토는 어디에서 어디까지였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금석산(金石山)을 넘고 요하(遼河)를 지났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그렇다면 광활(廣闊)한 것이 아닌가? 하략)
고구려 성 한채에 병사 10만 군량 15만석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인조의 말이 있었다.
이에 이원익은 힘은 강하였으나 본받을 것이 못 된다고 하는데, 조선조에서는 초기부터 고구려에 제사를 모실정도로 고구려를 숭배하였는데 이원익의 발언은 상당히 모순되는 표현이다. 또한 고구려의 영토에 대해 인조가 물어보자 이원익은 별로 크지 않다고 하고 있고, 인조는 광활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유인 즉 근대조선이 천하를 통일했기에 그 영토가 고구려보다 더 크기 때문이며, 인조 또한 고구려의 영토도 그 정도면 대단한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조 1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7월 5일(무인) 3번째기사
민심 수습·제도 정비·강명·예법 등에 관한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吾東方世居遼水之東, 號爲萬里之國。
通典/邊防/ 卷第 一百八十六
高句麗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至隋漸大 ,東西六千里 。
: 그땅은 후한시절 사방 이천리였으며, 북위때 남북으로 점점 좁아져 천여리로 줄었다. 수조때에는 점점 커져 동서 육천리가 되었다.
고구려가 비록 조선보다는 작지만, 동서 육천리의 대국으로서 수․당시절 천하의 패권을 틀어쥐고 있었으며, 력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고구려는 당조에 멸망당해 중조의 입지를 상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 리진충, 묵철, 안록산, 사사명 등등이 망한 자신들의 세력과 주도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 당이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각처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으킨다. 당 조정은 이 반란을 진압하다가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 중심에는 안록산과 사사명이 있었고,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였다. 또한 당시의 전략적 요충지 안시성(安市城)은 화령지방이며, 화림이고, 쌍성총관부가 되며, 달단동지역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 갑술(1394,홍무 27) 1월28일 (무진)
곡산 부사(谷山府使) 전이(田易)가 도평의사사에 상서(上書)하였다.
“가만히 듣건대,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장하여 뜻하지 않은 변고에 대비(對備)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상전(常典)입니다. 그러나 군사가 험지(險地)를 점거하지 않으면 나의 형체(形體)를 감출 수가 없으며, 곡식을 만약 밖에 쌓아 둔[露積]다면 다만 도적의 도움이 될 뿐이니, 반드시 양식을 견고한 성(城)에 쌓아 두고, 진(鎭)을 요해처(要害處)에 설치한 연후에야, 편안히 있는 아군(我軍)으로써 멀리서 온 피로한 적군을 기다리게 되고, 배부른 아군(我軍)으로써 굶주린 적군을 기다리게 되어, 능히 적군의 생명을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이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매,
○谷山府使田易上書于都評議使司曰:竊聞鍊兵積穀, 以備不虞, 守國之常典也。 然而兵非據險, 不可以藏我之形, 穀若露積, 適足爲寇之資。 必也積糧於堅城, 置鎭於要害, 然後以逸待勞, 以飽待飢, 而能制敵之命也。 昔唐太宗攻安市城, 중략)
안시(安市) 한 성(城)만이 홀로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은 까닭으로, 태종이 요좌(遼左)에 추위가 일찍 온다는 이유로써 성 아래에서 군대의 위엄을 과시(誇示)하고 돌아갔으니, 대저 태종의 영명(英明) 과단(果斷)함과 이적(李勣)의 용기와 지혜로써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능히 한 성을 공격해 빼앗지 못한 것은, 어찌 성(城)이 험준하고 양식이 많으며, 군사가 용감하여 굳게 지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安市一城, 獨堅守不下, 故太宗托以遼左早寒, 耀兵城下而歸。 夫以太宗之英果、李勣之勇智, 擧天下之師, 而不能攻取一城者, 豈非以城險而糧多, 兵精而固守歟! 중략)
지난해 겨울에 손실(損實)을 답험(踏驗)하는 일로 인하여 곡산(谷山) 고을의 북쪽 마을에 가서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산천이 험준하고 막혔으며, 가운데에 산성(山城)이 있는데, 군량을 저장할 만하고, 병기(兵器)를 간수할 만하며, 동쪽으로는 화령(和寧)과의 거리가 1백 50리이며, 서쪽으로는 성주(成州)와 연(連)하기를 3, 4식(息)의 노정(路程)에 불과하니, 실로 동북면·서북면 양면(兩面)을 왕래하는 요충(要衝)인 것입니다.
○前年冬, 因踏驗損實, 到州之北村, 觀其形勢, 山川險塞, 中有山城, 可儲資糧, 可藏兵甲。 東距和寧百五十里, 西連成州不過三四息程, 實東西北兩面往來之要衝也。하략)
화령이 어디인가 조선태조의 고향 함흥이며 태조가 국호로 사용하려던 지명이다. 함흥은 한고조의 豊沛이고 周의 豳이고 全州이다. 안시성을 언급하면서 화령과 곡산을 언급한 것은 화령과 곡산 사이에 안시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정의 대신들이 어찌 국조의 고향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환조의 배위(配位)는 의비(懿妃) 최씨(崔氏)이니, 증 문하시중(贈門下侍中)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시호(諡號)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지원(至元) 원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4년(1335) 을해 10월 11일 기미에 태조(太祖)를 화령부(和寧府)【곧 영흥부(永興府)이다.】 사제(私第)에서 낳았다. 태조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龍顔]로서, 신채(神彩)는 영특(英特)하고 준수(俊秀)하며, 지략과 용맹은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어릴 때 화령(和寧)과 함주(咸州) 사이에서 노니, 북방 사람들로서 매[鷹]를 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뛰어나게 걸출(傑出)한 매를 얻고 싶다.”
하였다.
태조가 단주에 침입한 호발도를 격퇴하고 변방을 평안히 할 계책을 올리다
전략<“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 그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양 저들과 무역[互市]하여> 중략
화령(和寧)은 도내(道內)에서도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모두 이민(吏民)의 지록(地祿)인데도,하략)
화령은 태조의 고향이요. 영흥이고, 함흥과 지척이다. 함흥에서 태조가 일어났고, 周의 豳, 岐가 화령과 함흥이고, 무악산 북쪽 관중평야 옥야천리라고 하는 조선 함경도의 중심지이었다. 이 화령과 함흥일대 사이가 고구려의 안시성이요. 안록산이 활동했던 유주, 범양, 료동의 요해처인 것이다. 이 지방을 뚫지 못하면,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다는 것을 당 태종의 고사는 확실하게 보여준다. 실록은 이곳을 달단동이라 불렀고,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경계에 드넓은 발흐 평원과 비옥한 쿤두즈와 바그란 지방이 있으며, 그 아무다리야 북쪽에는 소그드 구성이 거주하는 소그디아나가 있다.
안록산은 소그디아나의 중심 케쉬 혹은 사마르칸트에서 흥기하여 중원을 향해 밀고 들어간 것이다. 그를 막기 위해 당 조정에서는 같은 고구려 출신인 고선지를 潼關으로 보내고는 되려 처형시켜버린다. 만약 고선지가, 안록산과 모의해서 당을 공격한다면, 당 조정에서는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당대 최고의 장수 안록산과 고선지가 연합해 당 조정을 화살을 돌린다면,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들고 일어났을 것이고 당나라는 현종 대에 력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지역은 대대로 수 많은 영웅들을 배출한 지역이고, 북방의 기개가 넘치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 태조 리성계가 그 기운을 이어 받아 세력을 키우고 원조를 무너뜨리고 남쪽 강화에 피난가 있는 고려 조정을 접수하여 근대조선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함주, 함흥, 안시성은 우리의 정신적 고향이자 고려, 조선의 중심지였으며 그곳은 실크로드의 중심지 현재의 발흐, 마쟈르 샤리프 일대이다. 이곳이 이른바 달단동인 것이며, 만주 최고의 요해처인 것이다. 바로 삼봉 정도전이 그 진실을 말해준다.
삼봉집 제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또 함주막 도련포로 가는 도중 [갑자]【안】 도련포는 함흥부(咸興府) 남쪽에 있음.
호수 빛 하늘 그림자 아울러 가물가물 / 湖光天影共蒼茫
외론 성 한 조각은 석양을 띠었어라 / 一片孤城帶夕陽
이때를 당해 차마 옛노래 듣단 말가 / 忍向此時聞舊曲
함주는 본래 이 나라 중앙이라오 / 咸州原是國中央
[주C-001]갑자 : 고려 우왕(禑王) 10년(1384).
첫댓글 선생님의 학설도 일면 수긍합니다만...
그렇다고해서...현재 자신들이 몽골인이라 자처하는 동북아의 몽골인들이 몽골의 후예가 아니라거나 그 강역이 몽골의 강역이 아니였다고할 역사적 근거가 부족합니다.
올라가 조선이 고려를 흡수한 싯점엔 물론 북원이 괴멸돼고 서쪽으로 도주했으니...
조선 함경북도에 편입됐을 것이라 보이나...
조선과 만주(청나라)에 직접 예속돼지 않은 구한말기의 몽골족들 자치구만을 몽골의 원 발상지라 해석하는 방식도 역사해석의 오류는 없을까란 의심도 전 합니다.
지금 몽골에 사는 몽골인들 몽골후예 맞습니다. 현재의 한반도인들처럼 , 서세에 의해 밀려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 조우관을 쓰신 사신들여...
중원 역사가 말한 북방 오랑케 (고구려등)의 복식인 좌임(마지막 옷깃을 왼 쪽으로 여미는 복식)이 아닌 우임입니다.
곧, 고구려(북부여)보단 백제(남부여)나 신라의 복식일지 싶습니다.
저는 백제 신라에 즉 삼국설에 회의적입니다. 조선사 편수회의 편수원칙 중 하나가 조선을 삼국으로 나누고 방식은 편년체로 서술하는 것에 입각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사의 국명은, 조선과 고려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황제가 2이상, 혹은 3이 되어 500년 이상 천하를 통치한다는 것은 고대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