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집
2019. 11. 20.
여기에 오신 모든 분 경주 최부자의 정기를 받아 부자되십시요
경주 최부자댁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씨 최부자의 종가로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최부자의 집안은 도덕적 의무와 관용을 몸소 실천해 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 힘을 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 이 가옥은 조선 중기 무렵 최언경(崔彦璥)대에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1779년경에 건립되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전해지며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곳간으로 구성되어있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ㅡ”자 모양이다. 사당을 안채의 동쪽에 배치하지 않고 서쪽에 배치한 점, 기둥을 낮게 만들어 집의 높이를 낮춘 점, 집터를 낮게 닦은 점 등은 성현을 모시는 경주향교에 대한 배려로 최부자댁의 건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독립유공자 최준(崔浚)선생 생가
경주시 교동 69번지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1970) 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大地主)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우너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朴尙鎭)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獄苦)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서 백산(白山) 안희재(安熙濟, 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햐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한다.
경주최부자집 작은 쌀통 이야기
경주 최부잣집은 가훈에도 있듯이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렇게 과객을 잘 대접하는 가풍이 있다 보니 많은 손님들이 경주 최부잣집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최부잣집 사랑채는 항상 손님들로 넘쳐나 과객들을 집근처 하인집에 머물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최부잣집의 작은 쌀통에서 쌀을 한 줌 집어 들고 하인집으로 가면 하인들은 과객들에게 잠자리와 식사가 제공되었다 이 쌀통을 가로 세로 석 자에 높이가 넉자 정도 되는 나무로 만든 상자로, 위쪽에 지름이 다섯 치 정도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다. 손님들이 욕심을 부려 두손을 넣어 쌀을 많이 움켜쥐면 손이 빠지지 않아 적당량을 집을 수 밖에 없다, 쌀을 쥐어 빼내는 것은 한 번만 허용되었다.
육훈(六訓)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가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