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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24년 8월 26일에 가진 루터칼빈신학회 제2회 공개신학세미나에서 '십자가 신학과 신앙'이란 주제로 발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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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신학과 신앙
목 차
Ⅰ. 서 론 : 들어가는 말
Ⅱ. 루터의 십자가 신학
1. 십자가 신학이 등장하게 된 시대의 배경
1-1. 십자가 신학이 형성된 사상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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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십자가 신학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
십자가 신학이 대두된 시대의 배경에는 사상적 배경과 함께 또한 역사적 배경을 말하게 된다. 사상적 배경은 십자가 신학이 형성되게 된 시간이 걸리며 사상의 흐름이 조성되는 걸어온 걸음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배경은 십자가 신학이 표면화되어 촉발하게 된 당시 시대적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요인이다.
루터 당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이 개혁주의 신학이 태동하는 배경이 되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공인(B .C. 313)1)되고 또한 국교(B.C. 380)2)가 된 후 동서교회의 분리(B.C. 1054)3)를 겪는 과정에 있으면서 이어온 1,200년간이라는 교회의 역사를 안고 있으면서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정문에 내건 ‘95개조의 항의문(반박문)’4)이다. 이 항의문은 당시 대학에서 토론회를 개최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서 도전에 응하는 자가 있으면 정한 시일에 토론회가 열리게 되는 것인데, 응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토론회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장은 두 주일이 못되어 독일 전국에 전해지고 4주간 이내에 서유럽 전체 지역에 널리 펴져나갔다. 그럼으로써 유럽 전역의 교회에 종교개혁의 깃발이 나부끼게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항의문에는 당시 부패한 교회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발표되어 있다. 그것을 하나로 정리하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면죄(속죄) 권한은 그리스도께만 있으며 죄를 회개한 자는 이미 사죄를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면죄부가 속죄할 수 없으며, 연옥에 있는 자에게 면죄부는 필요 없다는 것이요, 선행, 공로, 보화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니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르친 복음뿐이라는 것이다.
‘95개조의 항의문’을 통해 보게 되는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의 상태는 구원 얻는 의에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청은 ‘95개조의 항의문’을 수용하지 못했으며, 이후 계속된 신학적 논문의 발표5)를 인해 교황청과 극도의 대립에 있으므로 루터의 책은 이단설을 가르친다며 그 반포를 금지하고 태워버리도록 하였는가 하면,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파문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는 12월 10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와 학생을 모아놓고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과 교황의 법령집을 불태움으로써 부당함과 불의에 항거하였다. 이에 교황청은 2차 파문장을 보내며 루터를 정죄하고 처형하고자 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고자 했다. 1521년 4월 17일에 개최된 보름스(Worms) 회의는 종교개혁사에서 역사적인 날로, 이곳에서 루터의 문제를 처리하고자 루터를 출두시킨 자리는 보름스의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루터가 보여 온 싸움의 의지가 결연함과 그 싸움을 하나님이 도우실 것임이 천명됨으로써, 루터가 종교개혁가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당시 보름스 회의를 주관한 황제 찰스 Ⅴ세(A.D. 1500-1558)와 심문에 임한 루터 간에 주고받은 대화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찰스 황제 : “너는 이 책의 내용을 취소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고집할 것인가?”
마틴 루터 : “나는 굳게 여기 섰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 님이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아멘.”
루터는 이처럼 본격적으로 종교개혁가의 길을 걷게 되지만, 당시까지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박차고 나올 생각은 없었고 교회 내부에서의 개혁을 바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를 개혁할 의지는 물론이고 생각조차 전혀 갖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동안 사상의 배경 속에서 보아온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은 첫 번째 시편 강의, 로마서 강의, 히브리서 강의에서 보는 성경 강의에 의해서와 95개조 논제 해설문의 논제 58, 하이델베르크 논제 19-24에서 발전적으로 개진되었다. 그 중에서 루터의 신학 사상으로 표면화되는 중요한 세 가지의 일이 1518년에 집중적으로 있어왔다. 그것은 루터의 신학 강의에서 시작되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강의로 1517년 4월부터 1518년 3월까지 히브리서 강의를 하였는데, 이 강의에서 ‘십자가 신학’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1518년 4월에 쓴 하이델베르크 논제에서와 1518년 5월에 쓴 95개조 논제 해설문에서 ‘십자가 신학’을 논증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것이 루터의 신학으로 중심되는 주제임이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된다. 하이델베르크 논제에서는 특히 논제 19-24에서 십자가의 신학의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95개조 논제 해설문에서는 특히 논제 58에서 십자가의 신학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에 루터의 강의6)를 비롯하여 그의 논제에 의해서 ‘십자가의 신학’이 사용되어 온 내용을 살펴보는데 루터가 교수가 되어 강의한 첫 번째 시편, 로마서 강의, 히브리서 강의, 95개조 논제 해설문의 논제 58, 하이델베르크 논제 19-24에 의해서 본다.7)
1-2-1. 첫 번째 시편 강의에서의 ‘십자가 신학’의 배경이 되는 그리스도 중심 사상
루터는 슈타우핏츠의 추천을 통해 비텐베르크 대학8)에서 공부를 하게 된 후 1509년에 신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512년인 28세의 나이에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그런 그는 교수로서의 첫 강의를 시편을 강의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1513년부터 2년에 걸친 이 강의에서 다윗의 시편에 관한 어거스틴의 주해를 사용하였는데 문자적, 역사적 의미에 입각하여 그리스도를 시편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르킨다”는 성경해석의 원리였는데, 이것이 그의 시편 강의에 잘 나타나 있다. 루터는 시편에서 복음을 발견하였고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그는 시편 서문에서 시편을 성인들의 모범이나 열전과 대비하여서 이야기하다가 다음 문단에서 곧바로 시편이 그리스도의 시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시편에서 성인 한두 사람의 행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聖徒)의 머리이신 그분의 행적을 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시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서 매우 명백하게 약속”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시편에서 뿜어내는 고상하고 고귀한 향기의 근원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닫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루터의 구약성경 시편 강의에서 보는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은 이후의 신약성경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강의를 거치면서 점차 ‘십자가 신학’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1-2-2. 로마서 강의에서의 ‘십자가 신학’
루터는 첫 번째 강의인 시편에 이어 1515-1516년에 로마서를 강의하였다.9) 그는 이 강의를 점차 정밀하게 준비하여 진행해 나가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과 새로운 의인(義認) - 의롭다 인정하심 - 의 교리가 성경에 중심 교훈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지원용은 이러한 루터의 로마서 강해에 대하여 빌헤름 포크(Wilhelm Pauck, 1901-1981)는 다음과 같이 관찰하였다고 말한다.
최근에 행해진 루터 연구에 있어서 그의 로마서 강해는 그의 많은 업적들 가운데서 하나의 가장 크고 중요한 것으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강의에 의하면 루터가 한 개혁자로 나서기 이전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근본이념이 그의 마음속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2년 후인 1517년 10월 31일에 저 유명한 95개조 논제를 공개하여 면죄증의 권위와 용도를 비판함으로 종교개혁의 발단의 계기를 만들어 놓은 그가 이미 영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성장하여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루터의 로마서의 강해의 바탕에는 복음의 새로운 이해와 종교개혁 원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암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의인(義認)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신앙에 의한 의인과 하나님의 활동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이 중심이 되어 있어 ‘의인(義人)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역설적인 명제가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의인인 동시에 죄인’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한 전적 주권의 구원 사상이 깔려 있다. 그는 로마서 강의에서 로마서 9:15인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를 주해하는 것에서 “이 말은 매정하고 잔인한 듯하지만, 감미로운 위로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만이 전적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시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도움과 구원을 스스로 떠맡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로마교적인 구원론과 대치되는 새로운 구원론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의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여 칭의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인 십자가에 근거하는 것으로 ‘십자가 신학’을 말함에 있게 되는 중요한 이유이다.
1-2-3. 히브리서 강의에서의 ‘십자가 신학’
루터의 히브리서 강의는 그의 첫 번째 시편 강의(Dictata, 1513-1515년)와 로마서 강의(1515-1516년), 그리고 갈라디아서 강의(1516-1517년) 다음에 위치한다. 이러한 순서에 의한 강의는 루터에게서 ‘십자가의 신학’이 말해지는 길목이 된다. 첫 번째 시편 강의에서는 중세 신학자로서의 루터와 종교 개혁자로서의 루터가 함께 공존해 있고, 로마서 강의에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나타난다. 그는 율법에 의한 인간 심판과 복음을 통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를 중심으로 로마서를 해석해 나갔다. 여기서 루터는 중세 후기의 ‘Via Moderna’(새로운 길)의 신학의 틀을 깨고 자신의 새로운 신학(Nova Theologia)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루터의 신학적 혁파(Breakthrough)가 시작된 것이다. 첫 번째 시편 강의에서 잠재적으로 배태되었고, 로마서 강의에서 하나님의 의 사상의 촉매 작용으로 마침내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이 히브리서 강의에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십자가의 신학이라는 표현은 루터의 히브리서 강의 12:11 주석에서 나타난다.
히브리서 12:11 주석(gloss) : 성경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개념들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심판과 의, 진노와 은혜, 죽음과 생명, 악과 선 등이 그러하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의 본연의 일은 비상한 일에 의해 이루어진다(An alien work is done by him so that he might effect his proper work, Isa. 28:21).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막 14:38). 왜냐하면 시편 4편 1절에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In tribulation thou hast made me greater)라고 표현된 것처럼,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양심을 기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뜻은 ‘당신은 나를 중요시하셨으며 나를 향상시키셨습니다(thou hast made more of me, improved me)’ 이다. 바로 이것이 은총의 주입(infusion of grace)이 의미하는 바다. 그것은 로마서 5:4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고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한다. 동일하게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다”(고전 1:18, 23)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의 도가 그들의 눈에 완전히 감추어져(hidden)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가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hidden) 있음을 의미하며, 고난 가운데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시편 80:8에 “내가 감추어진(hidden) 고난 중에 당신께 귀 기울입니다”와 시편 50:8에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알려지지 않고 감추어진(hidden)것들 가운데서 나에게 알리셨습니다”라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루터가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한 것은 곧 ‘십자가의 도’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된 것에 다름 아니다. 루터에게서 ‘십자가의 신학’은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이방인에게도 ‘십자가의 도’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함에 있다. 그에 따라서 유대인은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며, 이방인은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여 믿음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십자가의 도’에서 고난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죄 용서에 의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영광을 추구한다. 그러나 루터에게서 ‘십자가의 도’는 고난의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은폐되어 있는 새로운 개념을 갖는다. 베르쿠제(Vercruysse)에 의하면 이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믿음 안에 ― 예를 들면 십자가와 고난 안에 ― 둔 신자들만이 이해한다.
1-2-4. 하이델베르크 논제 제19-24논제에서의 ‘십자가 신학’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1515년에서 1518년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보는데, 이 시기에 있은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성경 강의와 함께 두 작품이 큰 기여를 하였다. 1518년 4월에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논제’와 그해 5월에 작성된 95개조 논제 해설이다. 작성된 순서에 의해서 먼저 하이델베르크 논제에 나타내지고 있는 십자가 신학에 대한 이해를 갖는다.
‘하이델베르크 논제’는 이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글의 성격은 토론 형식에 의한 논증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내건 ‘95개조 항의문’ 사건으로 인해 이를 문제 삼고 공격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논쟁에 있게 된다. 그에 따라서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두 번째 날인 4월 26일에 루터가 작성한 논제에 대한 공개토론이 열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공개 토론이다. 이 토론의 내용인 『하이델베르크 논제(Disputatio Heidelbergae habita)』에서 루터는 무려 40개의 논제를 제시하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자신의 신학을 주장하였으니,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을 비판하면서,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주장한다. 루터는 참된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하는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십자가’ 자체가 신학의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학하는 자는 ‘십자가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하이델베르크 논제 제19-24논제10)에서 보게 되는 바, 다음과 같다.11)
제19논제 : 하나님의 피조물을 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
제20논제 : 그러나 하나님의 보이는 사역과 하나님의 뒷모습을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바라보는 자는 깨닫는 자이니, 이들이 진정한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제21논제 : 영광의 신학자(theologus gloriae)는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자(theologus crucis)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
제22논제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그분의 (보이는) 사역을 통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지혜는, 교만하고 눈을 어둡게 하고 완악하게 한다.
제23논제 :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고”(롬 4:15), 죽이고 저주하고 고소하고 심판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을 정죄한다.
제24논제 : 그런데 그러한 지혜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며 율법도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을 모르는 사람은 가장 선한 것을 가장 악한 것으로 오용한다.
십자가를 모르면 어떠한 하나님의 지식도 오류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에는 십자가가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아는 지식에 있는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십자가를 믿으므로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그 십자가에 우리도 함께 달린 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멸망당함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6:10-13에서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누구든지 고난을 통해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자는 자신이 선한 행위를 할 수 없으며 반대로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일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선을 행한다고 해서 자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시지 않을 때에도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절망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고통 받고 낮아져서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자기가 낮아지고(죽고), 자기를 비우는 것에 있으며, 자기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 고난 받고 멸망하는 것, 즉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다. 이것은 중생을 의미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 모든 신학은 영광의 신학으로 배격해야 할 것이다.
1-2-5. 95개조 논제 해설 제58논제에서의 ‘십자가 신학’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항의문’이 발표된 이래 그를 반대하는 측의 사람들이 적지 않은 오해를 하며 비난하는 것을 알게 된 루터는 1517년 말에 95개조 항의문에 대한 해설문을 쓰기로 마음먹고 준비한 끝에 1518년 ‘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논제 해설’(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95개조 조목마다 근본 동기와 진의를 해명하면서 루터 자신의 중심 사상을 신학적인 견지에서 논술한 것으로, 전체로 보아 통일성 있는 내용을 전개시켰다. 이 해설은 95개조 논제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독립성을 띤 중요한 종교 개혁적, 신학적 논설이기도 하다. 여기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계속적인 회개와 고백의 복음적인 삶이 그의 일상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생애를 가져야 될 것을 호소한 ‘십자가의 신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95개조 논제 해설문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 사상이 나타나고 있는 곳은 제58논제이다. 여기서 루터는 자신의 십자가 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이로부터, 당신은 이제 스콜라 신학 – 즉 속이는 신학(왜냐하면 이것이 그 단어의 희랍어 의미이기 때문이다) - 이 시작된 이래 얼마나 십자가의 신학이 폐기되었으며 모든 것이 전적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자(즉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숨겨진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자)는 형벌, 십자가, 죽임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보배이며 가장 성스러운 유적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신학의 주님께서는 이들을 친히 그의 가장 성스러운 육체의 접촉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지극히 거룩한 신의와 포괄에 의해 성화하고 축복하셨으며, 여기서 이 유적들을 입 맞추고 찾고 포옹하도록 놔두셨다. 진실로 하나님에 의해 이 그리스도의 유적의 보배가 수여되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 아니 그것들이 그에게 수여된 것을 이해하는 자는 행복하고 축복된 자이다.
스콜라 신학에 근거한 영광의 신학에는 십자가 신학에서 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 십자가에 숨겨진 하나님이 없다. 영광과 능력과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헤매며 그의 행동 또한 그러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반면에 십자가 신학에서는 영광의 신학에서 말하는 영광스럽게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근거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남용하는 것이 없다. 루터는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낮아지심과 수치 속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엄함 안에서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루터는 더 나아가 이것을 “쓸모가 없다”라고 한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남용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본 모습인 십자가를 지고 대속하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그분을 단지 하늘의 보좌에서 좌정하고 계신 영광스러운 분이라고만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분의 십자가와 수치 속에서 깨닫는다면,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다스림이 올바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루터가 “진실로 하나님에 의해 이 그리스도의 유적의 보배가 수여되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 아니 그것들이 그에게 수여된 것을 이해하는 자는 행복하고 축복된 자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자는 진정한 십자가 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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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C. 313년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로마 제국의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되었다.
2) 그리스도교는 B.C. 380년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황제의 선포에 의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3)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는 화상예배를 비롯한 성령의 발출 이해인 필리오케((Filioque)의 교리적 이견, 서방의 교황과 동방의 콘스탄틴 대주교간의 교권쟁탈에 의해 서로 파문에 있은 교황수위권의 정치적 문제로 1054년에 동방교회(동로마제국교회)와 서방교회(서로마제국교회)로 분리되었다. 모든 주교는 수좌(首座)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화상예배의 반대와 성령의 성부 발출을 주장한 동방교회는 정교회(Orthodox Church), 오직 교황만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수좌(首座)가 된다고 주장하며 화상예배의 찬성과 성령의 성부와 성자 발출을 주장한 서방교회는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로 불린다.
4) ‘95개조의 항의문(반박문)’은 사죄와 면죄부의 유효성에 관한 95개조의 내용에 대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입장(견해)을 묻는 것으로 함께 토론해 보자는 것에서 제시하여 내건 것이기 때문에 ‘95개조의 논제’, 또는 ‘95개조의 변증’이 보다 정확한 표제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입장을 표명하였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를 해명하려는 열정을 근거로 비텐베르크의 신부이며, 인문학부 및 신학부 교수 겸 비텐베르크 대학 정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논쟁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구두로 토론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직접 찾아오지 않더라도 서신을 통해서 토론에 참여해 주기를 당부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5) 루터는 ‘95개조의 항의문’을 작성한 이후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교회 회의에 대해 자기 입장을 폭넓게 밝힐 필요성을 느끼고 1520년에 세 개 의 중요한 논문을 썼다. (1) 첫 번째 논문인 ‘독일의 크리스찬 귀족에게(To the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라는 논문에서는 ① 신자들은 모두 다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교황권이 속권보다 우월하지 못한다. ② 신자들이 다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교황만이 성경 해석권을 갖지 못한다. ③ 신자들이 다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교황만이 교회 회의 소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여 신자의 ‘만인제사장론’을 말함으로써 교황의 절대 권위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이 외에 교황의 월권, 성직자의 독신, 교회의 사치 등을 비판하고 신학교육의 개혁을 주장했다. (2) 두 번째 논문인 ‘교회의 바빌론 포로(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은 라틴어로 쓰인 것으로, 로마가톨릭교회가 칠성례에 의해 성례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성례는 오직 세례와 성찬 두 가지 뿐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증명하는 표시이며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며, 신자에게 분잔의 참여에 있지 못하게 거절함은 잘못이라는 것과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부인하고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 세 번째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인이 된 사실과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스스로 이웃을 섬기기 때문에 ‘자유로운 종’임을 말하였다.
6) 루터의 강의에서 성경 주해의 강의는 1513-15년 첫 번째 시편 강의를 비롯하여 1515-16년 로마서, 1516-17년 갈라디아서, 1517-18년 히브리서, 디도서(분실), 역대서(불분명), 1518-21년 두 번째 시편, 1523-24년 신명기, 1524-26년 소선지서, 1526년 전도서, 1527년 요한일서, 디도서, 빌레몬서, 1528 디모데전서, 1528-30년 이사야서, 1530-31년 아가서, 1532-35년 세 번째 시편, 1534-44년 이사야 9장, 1544년 이사야 53장을 강의하여, 30년을 성경 해석과 그 설명에 힘썼다. 그런 그는 시편을 모두 세 번에 결처 강의하였다. 루터는 1546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7) 루터의 성경 강의는 첫 번째 시편 강의에 이어 로마서 강의, 그리고 갈라디아서 강의, 히브리서 강의의 순서로 이어지는데, 본 글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등장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는 시편 강의, 로마서 강의, 히브리서 강의만 다룬다. 이는 갈라디아서 강의에서는 율법과 복음이 주요 이슈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로마서에 없었던 새로운 신학적인 주제 곧 율법과 복음의 양자 간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다. 루터에게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칭의론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루터는 1531년의 본 강의에서 이 둘을 바르게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그도한 신학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쓰고 있다.
8) 비텐베르크 대학은 1502년에 설립되었다.
9) 루터는 로마서 강의를 1515년 가을부터 준비하여 동년 11월 3일부터 시작하였으며 다음 해인 1516년 9월 7일까지 모두 10개월 동안 하였다.
10) 조병하(백석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는 하이델베르크 논제의 40개조에서 십자가 신학 사상이 나타난 논제의 조항을 19-28논제로 본다. 그는 19-22논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과 ‘하나님의 보이는 것들’,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에 대하여, 23-28논제는 정리로 '율법', '십자가 신학', '의인', '그리스도의 행위', '하나님의 사랑'을 논증하고 있다고 보았다.
11) 하이델베르크 제19-24의 논제의 번역 글은 송다니엘, “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제 해설,” 「루터칼빈신학회」 창간호 (광주: 형람서원, 2023)에서 발췌하였다.
*발제자 : 이 천 우(개혁성경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