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하나님이 온 세상에 전하시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그 죄를 사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중보자의 신분으로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심으로 율법의 요구에 응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 버리심을 당하는 가장 낮아지신 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 모두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 날은 유대인에게서 안식 후 첫날이었으며, 시각은 새벽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이 서서히 다가오는 이때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무덤의 현장에 있은 증인들인 여러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이 장사된 바위에 판 무덤으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인데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인 마리아, 살로매 외 다른 여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시는 것과 장사되는 모습까지 다 보고 돌아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사되신 예수님에게 쓸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여 갖고서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여자들은 준비한 향품과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가면서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라고 말하며 근심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덤 입구는 여자들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움직여 옮길 수 없는 큰 돌로 막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하여 그 입구를 바라보고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것은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이 굴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들어가 보니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의 시체는 보이지를 않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들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여자들에게 “어째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말씀하여 주신 것 곧,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것을 기억할 거과 예수님께서 그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음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부활의 증거로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여 확인시켜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여자들은 놀라움과 큰 기쁨으로 달려가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비단 몇 몇의 여자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을 지켰던 경비병들은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 있으면서 목격한 사람들이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 매수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백성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으로 거짓 증언하게 하였습니다만, 숱한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포함하여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말하여 주었습니다(고전 15:6). 그리고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40일간 땅에 계시면서 여러 번 사도들에게 나타나 몸소 자신을 보이며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로 보여주시며 그때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행 1:3).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심이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하나님의 중보자의 신분으로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주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율법의 요구에 응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 버리움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죄를 속량하여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고 하면, 그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신 것”(행 2:24)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다윗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시 16:8-11, 행 2:25-28)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이루실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음부에 버리시고 썩음을 당하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예수님을 사망에서 다시 살려 일으키셔서 모든 사람 앞에 생명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주어 살리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산 자’로서 ‘살리는 영’이십니다(요 6:63, 고후 3:6). 그러기에 모든 믿는 자를 예수님 안에 모으게 해서 예수님의 다시 사심과 같이 예수님과 함께 살리시는 일을 하십니다(롬 6:8-9). 이로 인해서 창조 받은 첫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령, 곧 살아있는 자가 된 것 같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지고 죽어 있는 죄인 된 모든 사람은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산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이 함께 하는 자들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그들의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하였으며(롬 8:11),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새생명의 삶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20-22). 이는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있는 속죄의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생명에 있는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서 살아나신 것입니다(롬 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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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죽음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삼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은 사망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는 우리에게도 사망이 다시는 주장하지 못하며,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사망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롬 6:9-11). 우리는 말이죠.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부활의 생명이 주는 기쁨에서 나오는 감사와 감격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느끼며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섬기는 믿음 있는 자로 살아갑니다(롬 6:17-23). 이 믿음에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믿음에 있는 것을 전파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우리의 부활과 이것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이처럼 꽤나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며, 이를 깊이 있게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앙에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이 더욱 견고히 서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교회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목회자이건 신자이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없이도 자신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는 복음에 서 있지 않으면서도 매주 교회를 다니는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중심과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국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두고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구하며 그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신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어 망할 것이요, 예수님 안에서 바라는 것이 고작 금생 뿐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죽음 이후의 생명에 아무런 소망이 없는 참으로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고전 15:1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