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수고 많았습니다. 내년에 경기가 어렵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도전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지난달 말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동관 30층 회의실. 구본무
LG 회장은 3주간 진행된 계열사 최고경영진과의 '컨센서스 미팅(Consensus Meeting)'에서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는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며 "미래 준비를 위해 해야 할 것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일관성 있게 진행하자"고 당부했다. 구 회장은 "경기가 안 좋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고도 했다.
내년에 투자와 고용, 어느 쪽도 줄이지 않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글로벌 경기 악화로 내년 사업환경이 시계 제로 상태로 치닫고 있지만
LG는 오히려 공격 경영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LG그룹이 창사 61주년을 맞은 올해 처음으로 매출액 '100조원 클럽'에 가입한다. 100조원은 지난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9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LG는 지난 3분기까지 누적 매출액 81조119억원을 기록했다.
이 속도대로라면 연초 목표했던 100조원 돌파는 무난할 전망이다. 100조원 매출 달성은 국내 대기업집단 가운데 삼성그룹과 현대ㆍ
기아차그룹에 이어 세 번째다.
LG는
LS(2003년)
GS(2005년) 등이 계열분리하기 전에도 100조원 매출은 달성하지 못했다.
당시
LG가 계열분리와 지분매각 등을 통해 금융과 유통 분야 등에서 손을 떼자 '캐시카우(현금창출원)'를 다 내줬다는 염려 섞인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러나
LG는 지난 3년간 그룹 매출을 20조원 이상 확대하며 세간의 염려를 빠르게 불식시켰다. 매출 100조원은 핵심 계열사별로 고른 성장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분기까지 누적 매출을 부문별로 들여다보면 전자 부문(9개 계열사)이 50조원, 화학 부문(7개 계열사) 15조원, 통신ㆍ서비스(23개 계열사) 부문 15조원 등으로 구분된다. 전자, 화학, 통신ㆍ서비스 등 3대 사업 영역이 어느 쪽도 뒤처지지 않고 적절한 균형미를 보여준 셈이다.
외형 성장 이상으로 수익성이 강화된 점도 눈길을 끈다.
LG그룹은 지난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 7조7000억원(지주회사 포함)을 달성했다. 연초 목표했던 7조원을 이미 뛰어넘은 셈이다. 4분기 성장세는 경기 악화 영향으로 주춤할 전망이지만 8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이 예상된다.
누적 영업이익이 1조원을 넘은 계열사는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 4곳에 달했고, 특히
LG전자 MC사업본부(휴대폰),
LG화학 정보전자소재사업부(전지),
LG디스플레이(LCD 패널), 실트론(반도체 웨이퍼) 등 10개 계열사 또는 사업 부문은 3분기 누적실적 기준으로 두 자릿수 이상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LG전자 휴대폰 부문은 프리미엄 전략이 먹혀들며 영업이익이 120%나 늘었다. 올해 판매량도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1억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LG디스플레이는 대형 LCD 출하량에서
삼성전자를 제치고 1위에 올랐고, 통신 계열사인
LG데이콤도 인터넷전화 시장에서 1위에 올라섰다.
LG의 약진 배경으로는 2년 전에 미리 위기를 거치면서 강도 높은 체질 개선을 한 점이 꼽힌다.
LG는 2006년
LG디스플레이 적자와
LG전자 실적 부진 등이 겹치면서 한때 '유동성 위기설'까지 제기된 적이 있었다. 당시
LG는 전자 부문 핵심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를 전격 교체하며 분위기를 일신했다. 또
LG전자 등은 해외사업 조직을 전면 개편하고 슬림화했다. 그룹 차원에서 계열사에 강력한 '워닝(경고)'을 가하자 조직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위기 영향으로 무리한 인수ㆍ합병(M&A)을 자제하고 재무구조 안정화에 초점을 맞춰온 점도 불황을 맞아 새삼 돋보이는 대목이다.
LG는 대형 M&A딜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덕분에 외환위기 당시 500%를 넘던 그룹 부채비율은 80%대로 낮아진 상태다.
이훈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
LG는 지난 2~3년간 무리한 기업 인수를 하지 않아 재무적 여력이 충분하고 계열사도 질적 경쟁력을 키워왔다"며 "현재 경제위기 국면을 적극적 투자를 통해 성장성 확보의 기회로 활용할 여력과 의지를 모두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용기
메리츠증권 연구원도 "
LG그룹은 최근 5년간 총차입금이 감소한 국내 유일의 대기업집단"이라며 "재무적 안정성이 견고하고 사업 포트폴리오 분산이 잘 돼 있다"고 밝혔다.
LG그룹이 2003년 일찌감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계열사별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한 점도 5년여 만에 본격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고객가치를 맨 앞에 놓는 이른바 '
LG웨이' 등 구본무 회장의 리더십과 용인술도 큰 몫을 했다.
LG그룹 고위 관계자는 "구 회장은 2006년부터 올해까지 3년간 신년사에서 '고객가치'라는 단어를 35회나 사용했다"고 전했다. 구 회장은 최근엔 현장경영 보폭을 넓히며 임직원들을 추스르고 있다.
물론
LG에도 위기의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 등 핵심 계열사 실적 둔화로 내년에는 100조원 매출을 이어가기가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의존도가 높은 전자 부문이 불황기에 직면한 현 상황을
LG가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 눈길이 쏠리고 있다.
[신헌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