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세례 축일 2024년 1월 7일
마르 1:4-11. 창세 1:1-5. 사도 19:1-7.
갈라짐 너머의 진리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실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이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왕이신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메시아가 나타나지만, 사람들에 의해 고통당하다가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즉 세례란 메시아는 영광스러움이 아닌 죽음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지난 일을 버리는 회개이고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을 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강물에 나의 죄를 씻어 흘러가게 하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 전제는 자신의 죄를 철저히 반성하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회개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제 지나간 일에 마음 두지 않고 휩쓸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확신 안에 사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붙들리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받는다는 것이고, 그 전제 조건이 바로 회개 즉 참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죽음”과 연관시키십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루가 12:50), 혹은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마르 10:38) 라고 물으신 것도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과 실천은 그분을 죽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실천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이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듯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기도하는 삶도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실천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기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리셨다.’라고 말합니다.
하늘이 갈라렸다(스키조메노우스. σχιζομένους)는 찢어지다, 쪼개지다의 의미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이야기,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에서 빵을 쪼개신 것과 같은 의미라고 했습니다.
공생애의 첫 시작과 성찬 그리고 마지막이 모두 같은 의미의 동사(스키조.σχίζω)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세례는 요한의 세례와 달리 성령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늘이 갈라지고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소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갈라진 모든 것을 이어주고, 고립된 우리의 담을 헐어 이어주는 분이 성령입니다.
무엇인가 무너져야 그 너머의 진리가 보인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단단한 내 안의 그것이 무너질 때 성령이 활동하시고 진리를 깨닫고 체험할 것입니다.
그 성령은 오늘 창세기에서처럼 한 처음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고 하느님의 기운입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고백하면 성령은 활동하십니다. 숨 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망각하고 넘어가면 체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요한처럼 주님은 우리의 고백에 의해 그분의 정체를 드러내시니,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늘 고백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알아챔과 고백 속에 성령은 비로소 활동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며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 세례는 십자가입니다. 세례의 본질 자체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해 거듭남과 친교와 교회 공동체의 일원, 하느님 나라 백성의 표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세례는 고통이고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말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전부를 걸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완전히 깨끗해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돌아섬의 고백 즉 회개의 삶을 계속하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나의 삶에 매일 매일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일상에 안주함이 아니라 이 험난한 구원의 여정을 비로소 출발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세례는 십자가이고 고난의 쓴 잔이지만 그 길이 마냥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염려하며 우리는 날마다 세례를 체험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도 그 고난의 길에 함께 휩쓸리고 계신다는 그 믿음으로, 그리고 생동감으로 주님 세례의 길, 절대 녹록지 않은 길을 힘을 내서 함께 걸어가기를 청합시다.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며 우리는 혼돈과 두려움의 휩쓸림을 경험했습니다.
세례는 결국 혼돈 가운데서 다시 물 밖으로 나오기 위함이듯이, 우리도 이 혼돈과 불안에서 벗어나 하늘이 열리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무언가 무너져야 진리가 보이듯, 하늘이 열려야 음성이 들리듯, 혼돈의 휩쓸림이 있어야 비로소 물 밖으로 나와 희망을 볼 수 있다는 신비를 기억합니다.
그렇게 성령을 우리 몸으로 살아내면 막혀 보이지 않던 진리가 갈라져 선명해질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는 하늘의 음성을 기억하며, 진리를 향해 걸어가는 한 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