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많은 여행을 다니면서 얻은 습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여행을 가기전에 생각을 한다는 것인데 이번에도 생각을 한번 했다. "내가 과연 가서 자신있게 잘 할수 있을까?"
"과연내가 우리학교로 나가서 잘 하고 올수 있을까?""가서 상이라도 타올수 있을까?"
"더운데도 잘지낼수 있을까?""새로운 친구들을 만날수 있을까?""다치치는 않을끼?"이런 생각인데, 아마도 이런것이 잡생각이라는 것일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앞으로 이 잡생각이 내 생각을 키워 줄것이란걸 말이다. 이번에도 큰 기대를 가지고 짐을 꾸렸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때는 이 가방에 많은 추억을 가지고 돌아올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작년에는 1학년 이라서 쑥쓰럼이 많고 처음본 사람들에게 말을 걸 용기조차도 조금은 모잘랏지만은 이제 2학년이 되고보니 그런게 다 추억인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쑥쓰럽지도 않았고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싶었다. 이렇게 가방을 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차를타고 정읍 시청에 도착하였을때는 많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시청 강당에 다들 모여 있었다. 내가 늦은것도 아니고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도 그런것을 보니 저 사람들도 나처럼 많은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여기에 왔나보다. 그런 이번 역사캠프는 조금 달랐다.
작년에는 가까운 곳에 갔었는데, 이번에는 전남 담양과 여수까지 간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역사캠프가 끌렸는데, 그곳으로 가는 이유를 알고난뒤 부터는 까불던 나도 조금은 엄숙해 졌다. '여순사건' 그냥 대충 듣기만 하던 사건을 내가 알아간다는 것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워낙 큰 사건이 었고, 무서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라는 것에 말이다. 드디어 처음 장소에 왔다. 동학혁명 모의탑이었다. 작년에도 가본곳이라서 가는 차안이 즐거웠다. 내가 아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리로, 저리로 하면서 내가 운전하는것 같처럼 갔았다.모의탑에 도착한후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정말 안됐다고 생각됐다.선생님께서 우리 농민군들은 이 더운날에도 죽창을 들고 싸우러 갔단다. 정말 이해가 안될수도 있었다. 총과 죽창이라니 그러니 더 위대한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동학군을 특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라서 더 흥미가 있었고, 6.25처럼 전쟁이 아니라 그냥 그시대의 하찮게 여겨졌었던 농민들이 군수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한것이었다.
동학의 처음은 위대한게 아니었다. 땅을 달라는 것도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였다. 그저 농민들이 자유롭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된다.
다음에 간곳은 황토현이 었다. 황토현에서도 내가 아는길이 었고, 내가 아는 코너들이 많았다. 거기서 짧은 영화같은 그런걸 보는데 저번에도 본것 같은데도 슬펐다. 초등학교때도 봐서 세번째였지만 그래도 나이를 한살더 먹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나 보다. 예전에는 그냥 눈으로 봤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마음으로 보는것 같았다. 내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농민군의 무기이며 농민군의 표정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무기는 너무 허무했고 또 생활에서 얻어 진것이었다. 그리고 농민군의 표정은 깜한 살속에 주름진 세월과 고통, 고생이 보이는듯 했다. 잠시 눈시울을 붉혔던것 같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농민군이 불쌍하고 너무 편하게 사는 내가 미안하게 느꼐졌다.
다 보고서 모둠장과 부모둠장을 뽑았는데, 이번에는 내가 한번 모둠장이 되보라고 하던 선생님의 충고가 나도 갑자기 하고 싶어 졌고 할수 있는 용기와 잘할수 있게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내가 조금 떨어서 그런지 나는 모둠장이 될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둠장이 될수 있어서 좋았다. 별로 하는건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부모둠장이라는게 왠지 으쓱했던것 같다. 뽑고 자리를 옮겨 계단에서 신발던지기를 했는데, 저번에도 했었다. 그땐 내가 나가서 조금 창피 했는데 이번에는 해보고 싶었지만 기회를 주기위해 다른아이가 한다고 해서 나는 안하기로 했다. 사실은 그 애가 나보다 먼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조가 일등은 하지 않았지만 꼴등을 하지도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생각을 해보면 선생님들께서 이 게임을 하자고 하는 이유는 전에 동영상을 보고 기분이 안좋을가봐 선생님이 만드신것 같았다. 멀리나가는걸 보고 놀라울 뿐이었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잘했다.
동학혁명 기념장에 가서 구경을도 하고 예전에 여기에 와서 글을 써서 상을 받은것도 생각이 나서 조금 많이 좋았다. 그런데 나는 조금 이해가 안갔다. 동학기념장에 왠 전구를 모아서 놓고 거울의 방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거기를 많이 가고 동학에는 별로 관심이 떨어지는것 같아서 난 이것들이 없는게 더 나을듯 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조금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는것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많이 놀랐다. 무슨 이런곳이 있나 하고 말이다. 겉보기는 엄청 좋았는데 안에 들어가자 마자 병원 소독약 냄새가 나고 여름날씨라 땀이 많이 났는데 샤워장도 없고...밥도 맛이 없어서 안먹었는데...저녁에 어떤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이 악기를 들고 사물놀이 같은걸 했는데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많은 우리 악기를 알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말로 하는 음계도 알고 하지만 지금은 다 까먹었다. 그게 조금 아쉽다.
끝나고 시험도 하고 문제도 풀고 피자도 먹고 영화도 보고 좋았다.
이번에는 담력훈련을 안해서 좋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서운했던것 같다. 하지만 역사캠프의 본문은 이런 영화도 담력훈련도 아닐것이라는것에 위로이 됐다.
셔터를 다 보고 숙소에 돌아와 있는데 사람들의 함성소리에 놀랐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저녁이 되도 더워서 우린 한숨도 못자고 남을 꼬박 세웠다. 새벽이 되니 조금은 시원해서 그때 잤다. 밥도 먹으로 가기 싫었다. 너무 맛이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내가 이기적이었던것 같다. 나는 내가 반찬 을 골고루 다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고 동학농민때 농민군은 이런 밥도 못먹었을거다. 몇일을 굶고 또 굶었을 거다.
버스를 타고 여수로 갔다. 가장 인상깊은 점은 세개 였는데, 첫번째는 여수는 바로 앞이 섬이 더 있다는것이었다. 가이드 아저씨가 설명을 잘 해주셔서 여수에 대해 잘 알수 있었다. 여수는 많은 섬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섬이 많다고 한다.
두번째는 바로 일제시대때 일본군이 만든 귀신이 나온다는 터널인데 이건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허무 했다. 그래도 이 동굴은 일본군이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돈을 걷기 위해서 만들고 거기에서 많은 무구한 우리나라 시민을 학살했다고 한다.그래서 귀신이 나온다고 하는가 보다.
세번째는 가장 중요한 여수 형제묘인데 가기도 걸어서 꽤 갔다. 딱 도착했을땐 한숨만 나왔다. 이런곳에 어디 묘가 있는것지?또 형제묘라고 해서 나는 묘가 두개인줄 알았다.
하지만 두개가 아니었다. 하나의 고분같은 형태였는데 거기에 일본군이 말을 안듣고 구중에서 또 똑똑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말이다.
그 사람들을 총으로 죽이고 또 신나를 뿌려 층층히 사람들을 쌓아 불로 처질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일대에서 냄새가 엄청 났다고 한다. 송장썩는 냄새 같은것이 말이다.
그런다음 그 사람들을 하나의 구덩이에 밀어넣고 그냥 묻어 버렸다고 한다. 그만에 나는 정말 일본사람들이 다 싫었다. 불쌍하게 죽으신 이 분들이 너무 불쌍했다. 사랑하는 가족 얼굴도 한번 못보고 그사람들 에게 자신의 죽음도 알리지 못하고 그렇게 말한마디 없이 돌아가신 분들에게 내가 할수 있는건 단지 묵렴뿐이었다. 그리고 여수에서 너무 하찮게 생각하는건 아닌지 이 풀들때문에 더 그렇게 생각됐다.
제주도에도 이런 묘가 하나 있는데 선천지묘라고 한것 같다. 이런 아픈 역사가 너무 많다는 생각에 난 너무 슬펐다. 가족들은 자신의 가족의 생사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그렇게 생각되었다. 묵렴을 하고 다시 내려왔다. 바로 바닷가에 갔는데 나는 운동화라서 물에 들어갈수 없어서 또 새옷이라서 물놀이도 못하고 그냥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물에 발만 담궜다.
그리고 여태껏 다녀온 곳 생각을 조용히 혼자 해 보았다. 왜 이런 역사를 만들수 밖게 없었을까?하고 생각을 했는데 나온 답은 우리나라가 너무 약했다는것이다. 그리고 지형자체가 침략하기 쉽고 위에 중국과 무역을 하려면 우리나라를 지나야 하니까 그런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숙소 갔다가 GS칼텍스에 가는건데 순서를 바꿔서 GS칼텍스 먼저 갔다.
가서 이야기를 잘 들었어야 했는데 운동을 자주 안하던 내가 한번에 너무 무리를 해서 인지 졸음이 밀려 왔다. 자고 일어나니 다 끝나고 식사를 하러 가라고 해서 식사를 하러 가서 식사를 했다. 너무 맛있고 시원해서 좋았다. 식사를 하고 TV를 봤는데 장영란이 나왔다.
앤디가 나오자 저번 월드컵처럼 뜨거운 열기 였다. 환호성이 터졌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 골든벨 준비를 했다. 공부를 안해서 내딴에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하지만 한 반절쯤 올라와서 틀려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고 다시 떨어지고 그래서 결국 상을 받지는 못했다. 우리학교 모두가 상을 못받아서 안타까웠다.
그럼 내일 격문이라도 잘해야지 하면서 열심히 외우다가 또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또 긴장이 풀린덕에 잠들어서 기행문도 격문도 못 외웠다. 그래서 대충밖에 못외워서 예선에서 떨어졌다. 창피했지만 그래도 1학년때와 다르게 내가 도전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격문 시상식이 끝나고 다시 차를 타고 학교 에 와서 선생님과 대화를 하고 선생님께서 맛있는 점심을 사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다녀와서 느낀점은 내가 1학년 때와 많이 다르게 변했다는점이 기분이 좋았고 이 변화가 앞으로의 나의 삶의 기틀을 마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뻣다.
그리고 내가 맘에 안들었던점은 그래도 더 열심히 해서 상하나라도 타올껄. 학교 망신은 시키면 안될텐데 였다. 그래도 다녀와서 우리 역사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이렇게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역사를 바로 알면 일본의 역사외곡같은 말도 다신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다녀와서 가장 큰 변화였는데, 이렇게 힘들게 사신 분들도 있는데 절대로 나는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을거다. 나의 처지를 한탄하지도 않을거다.
내 삶을 즐지기면서 아름답게 가꾸고 우리나라를 이렇게 약한나라로 다신 만들지 않을거다
절대 다시는 여수 형제묘 같은 아픈 상처를 이땅에서 일어나게 하지않을거다.
다녀와서 많은 추억과 많은 친구를 사귈수 있어서 좋았고 엄마의 소중함, 가족의 소중함, 집의 소중함을 알게 되서 좋았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