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처사 무안 박군 묘갈명병서(處士務安朴君墓碣銘幷序)
꽃이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함을 옛사람이 슬퍼하였는데, 나도 무안(務安) 박군(朴君)의 요절한 것을 마음으로 애통하며 슬퍼한다.
군은 이름이 문기(文起)이고 자가 기부(起夫)이다. 고려 때에 전주(典酒)를 지낸 박진승(朴進昇)이 비조이다.
이 이후로부터 우리 조선에 들어와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었다. 고조 박영기(朴榮基)는 용양위 우부장(龍驤衛右副將)을 지내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박세렴(朴世廉)은 연일 현감(延日縣監)을 지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 박의장(朴毅長)은 경상좌도병사(慶尙左道兵使)를 지내고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친박유(朴瑜)는 거제 현령(巨濟縣令)을 지냈고, 모친 숙인(淑人) 월성 손씨(月城孫氏)는 이조 판서 손중돈(孫仲暾)의 증손녀이자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손시(孫時)의 따님이다.
현령공(縣令公)의 막내, 박선(朴璿)은 통덕랑(通德郞)이고 그의 부인 풍산 유씨(豐山柳氏)는 바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의 손녀이자 장령(掌令)에 추증된 유서(柳𥚻)의 딸인데, 아들이 없어 군(君)을 후사로 삼았다.
군은 만력(萬曆) 을사년(乙巳年, 1605, 선조 38)에 태어났는데, 용모가 빼어나 옥수(玉樹)가 바람을 맞아 한들거리는 것 같았고 성품이 영특하고 민첩하였다. 밤에 깊은 잠에 빠졌어도 어른이 부르면 바로 깨어나 응답하였다. 일찍이 여러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에 현령공이 위태로운 곳에 기대어 몸이 기울어진 것을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서 부축하여 보호하였다. 이에 현령공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효자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선영에 성묘하러 갔다가 모두 취해 부축을 받으며 비복(婢僕)에게 노래하고 춤을 추게 하고 돌아갔으나 군은 홀로 먼저 지름길로 돌아왔다. 할머니 이부인(李夫人)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선영은 선대의 체백(體魄)이 머무는 곳으로 성묘하는 날에 마땅히 슬픈 감정이 갑절이나 되는데 도로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는 것을 차마 해서야 되겠는가? 이 아이는 나이가 가장 어린데도 잘못됨을 깨달았으니 천성이 효성스럽지 않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개 부인은 퇴도(退陶)의 가문에서 나고 자라 올바른 도리를 익숙히 들었다. 사람들이 ‘부인이 현명하니 어진 자손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조금 성장하여 밖에 나가 스승에게 배웠는데 학도들이 장난삼아 이웃집의 닭을 훔칠 때에 공만이 피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 상국(相國)이 영해(寧海)에 귀양 오자 군이 나아가 수업하였다. 하담이 특별히 사랑하여 형의 딸을 군의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626, 인조 4)에 집 식구를 데리고 밀성(密城, 밀양) 처가(妻家)에 갔다가 역병에 걸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간절하게 ‘어버이가 그립고, 형이 생각난다.’라는 말을 입으로 끊이지 않고 말하다가 결국 3월 19일에 죽었다.
원근에서 소식을 들은 사람 중에서 놀라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모두 “좋은 선비가 죽었다.”라고 말하였다. 하담공이 당시 본도(本道)의 감사로 있으면서 여러 고을 수령에게 군의 관(棺)을 수호하여 돌아가게 하였고, 영해부(寧海府) 서쪽 저곡(猪谷)에 장사 지냈다. 신묘년(辛卯年, 1651, 효종 2)에 영해부 서쪽 5리쯤의 갈몽(葛夢) 언덕 간향(艮向) 산에 개장(改葬)하였다.
아,하늘이 영걸스런 인물을 낳음은 우연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모두 원대한 포부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갑자기 요절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부인 유인(孺人) 화산 권씨(花山權氏)는 사헌부 감찰 권응생(權應生)의 따님으로 맑은 행실이 있었다.
임인년(壬寅年, 1602, 선조 35)에 태어나고 신축년(辛丑年, 1661, 현종 2)에 죽어 영해부 남쪽 정신방(貞信坊) 도동(陶洞) 갈전(葛田)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군의 묘소와의 거리가 6~7리이다. 외아들 박호(朴滈)는 경자년(庚子年, 1660, 현종 1)에 진사가 되었다.
행실이 순수하고 재주가 빼어나니 조만간에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다. 군이 임종할 때 유언으로 통덕랑(通德郞박선) 공에게 후사로 들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통덕랑 공이 마침내 사정을 진술하고 임금에게 글을 올려서 군을 후사로 삼았다.
아! 덕(德)을 베풀었지만 보답을 받지 못한 사람은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 군은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 장차 군의 가문을 창대하게 할 것이다. 천명이 여기에서 정해졌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진실로 낳아주고 / 天固生之
어찌 갑자기 목숨을 빼앗나 / 何遽奪之
푸른 혜초가 꽃잎을 떨구고 / 碧蕙捐芳
옥수에 가지가 돋았네/ 玉樹生枝
생각건대 목숨이 어긋났으나 / 惟乖於命
향기는 사라지지 않으리라 / 未沫者芬
좋은 비석에 새겨 만대에 고하니 / 鐫貞珉而告萬世
반드시 슬픔과 경사가 사문에 교차하네 / 其必有悲慶交於斯文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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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꽃이 …… 못함을:
재능은 뛰어나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논어》〈자한(子罕)〉에 “싹이 났지만 꽃을 피우지 못
하는 경우도 있고, 꽃이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라고 하였다.
[주02] 전주(典酒):
고려 시대 국학(國學)의 정4품 벼슬이다. 충렬왕 원년(1275)에 좨주(祭酒)를 전주로 개칭했다가 24년(1298)에 다시 좨주로 고치
고 종3품으로 올렸다.
[주03] 박유(朴瑜):
1576~1618.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백헌(伯獻)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에서 곽재우(郭再祐) 의병에 참여하였고, 1603년 무과에
급제하여 거제 현령을 지냈다.
[주04] 박선(朴璿):
1596~1669.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계헌(季獻), 호는 도와(陶窩)이다. 유진(柳袗)ㆍ장현광(張顯光)에게 나아가 공부하였고,
1629년 관찰사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도와
집》이 전한다.
[주05] 김시양(金時讓):
1581~164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초명은 시언(時言)이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 도체찰사 이원
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1627년(인조 5)에 평안도 관찰사, 1631년에 병조 판서에 올라 팔도 도원수와 사도 도체찰
사를 겸했다.
그러나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강화 유수ㆍ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636년에 청백리에
뽑혔다.
[주06] 하늘이 …… 아니겠는가:
박문기(朴文起) 군이 뜻밖의 재앙을 당하여 죽었다는 말이다. 소식(蘇軾)의〈삼괴당명(三槐堂銘)〉에 “도척과 같은 흉악한 인간
이 오래 살고 공자와 안회 같은 훌륭한 인물이 재난을 당했으니, 이는 모두 하늘의 뜻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盜跖之壽, 孔顔
之厄, 此皆天之未定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07] 박호(朴滈):
1624~1699.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자윤(子潤), 호는 용재(慵齋)이다. 1660년 증광시(增廣試) 3등으로 진사에 입격하고, 공조
정랑을 지냈다.
[주08] 푸른 …… 돋았네:
박문기가 세상을 떠나고 박호가 아들이 되어 가문을 잇게 된 것을 말한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