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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 | 曾祖 | 祖 | 父 |
지하 | 찬우 | 순인 | 경(褧) |
자(字) 방무(邦武), 호(號) 성재(醒齋)
중종 1558년 생원(生員) 진사(進士) 모두 합격
선조 1568년 문과(文科) 급제, 헌납(獻納), 한림(翰林) 역임
정주목사(定州牧使), 직어사(直御使), 어진관리 첨렴으로 칭송(稱頌)
졸후(卒後) 증(贈)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제학(大提學)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책훈(策勳)
추증(追贈)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영의정(領議政)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막역지교(莫逆之交) - 장유(張維) 사재(事載)
명신록(名臣錄), 동국호보(東國號譜) 간쟁편(諫諍篇) - 행적(行蹟) 기술
배(配) : 동래정씨(東萊鄭氏) 부사과(副司果) 응서(應瑞) 녀(女)
묘소(墓所) : 동두천시 안흥동 마차산 아래 유좌(酉坐) 합조(合兆)
지명(誌銘) : 상촌(象村) 신흠(申欽) 찬
신도비(神道碑) : 간이(簡易) 최립(崔岦) 찬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전서(篆書)
판서(判書) 정사호(鄭賜湖) 서(書)
묘지(墓誌) : 10세손(世孫) 익수(翊洙) 찬
ㆍ子 사호(賜湖) 見下
ㆍ子 명호(明湖) 見下
ㆍ子 운호(雲湖) 見下
ㆍ女 정회(鄭晦) 온양인(溫陽人)
1601년에 진사, 1610년 문과급제,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들 3형제 정두경, 정익경, 정인경은 문과에 급제하고 특히 정두경 정익경은 형제 동방으로 유명하다.
정두경은 장원 당대 최고의 시인(詩人)으로 평가 받고 계곡 장유(張維)의 신도비를 썼으며 조영당 정현원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바 있다.
가묘 와빈사
[실록자료]
◈ 명종실록 1권, 부록 /
편수관 명단 봉훈랑(奉訓郞) 행 예조 좌랑(行禮曹佐郞) 정이주(鄭以周), 통덕랑(通德郞) 행 병조 좌랑(行兵曹佐郞) 신 권징(權徵) .......
◈ 선조 2년 1569년 6월 9일
문정전에서 기대승 등이 김개의 말이 소인의 말이라고 논박하다.
상이 문정전(文政殿)에 나아가자 한림 정이주(鄭以周)·이산보李山甫)가 입대(入對)하였다.
◈ 선조 6년 1573년 6월 6일
이현배(李玄培)·정이주(鄭以周)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 선조 6년 1573년 8월 24일
정이주(鄭以周)를 지평으로, 강섬(姜暹)을 판윤(判尹)으로, 유경선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 선조 7년 1574년 3월 1일
경상도 군적 경차관 정이주(鄭以周)가 병으로 면직되다.
◈ 선조 7년 1574년3월 14일
"경상도 군적 경차관(慶尙道軍籍敬差官) 정이주(鄭以周)는 데리고 간 얼속(孼屬)들을 한정(閑丁) 추쇄(推刷)에 참예하게 하고는 뇌물 받는 짓을 방임하여 공공연히 뇌물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 선조 7년 1574년3월 15일
헌부가, 일의 처리를 전도되게 한 경상도 군적 경차관 정이주(鄭以周)의 파직을 청하다.
◈ 선조 7년 1574년 4월 3일
경상도 군적 경차관 정이주(鄭以周)가 병으로 사직하니 체직시키다.
◈ 선조 7년 1574년 5월 6일
정이주(鄭以周)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 선조 7년 1574년 7월 23일
정이주(鄭以周)·한백후(韓伯厚)가 정언이 되었다.
◈ 선조 7년 1574년 12월 16일
정언 정이주(鄭以周)가 간원과 헌부를 체직하라고 청하다.
◈ 선조 7년 1574년 12월 17일
정언 정이주(鄭以周)가 다같이 행행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처음에는...
◈ 선조 7년 1574년 윤12월 1일
정이주(鄭以周)를 정언으로 삼았다.
◈ 선조 8년 1575년 1월 7일
빈전 낭청(殯殿郞廳) 민충원(閔忠元)·정이주(鄭以周)·이현배(李玄培)·박충간(朴忠侃)과 공조 좌랑(工曹佐郞) 유몽학(柳夢鶴)과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가 모두 파직되었다.
◈ 선조 9년 1576년 3월 19일
경기 어사(京畿御史) 정이주(鄭以周)가, 초지 만호(草芝萬戶) 이원우(李元祐)가 군기(軍器)를 수리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서장을 올렸는데 잡아다 추고하고 고신을 빼앗으라고 명하였다.
◈ 선조 11년 1578년 2월 28일
순무 어사(巡撫御史) 정언신(鄭彦信)·허봉(許篈)·정이주(鄭以周)·임식(林植)·한준(韓準) 등을 양계(兩界)와 하삼도(下三道)로 나누어 보냈다.
[정이주 비명(碑銘)]
작성자 최입(崔岦)
공(公)의 휘(諱)는 이주(以周)이고, 자(字)는 방무(邦武) 또는 유성(由盛)이며, 호(號)는 성재(醒齋)이다. 정씨(鄭氏)는 광주(光州)에서 나와 저명한 씨족이 되었는데, 근원이 멀어지자 파(派)가 더욱더 나뉘어졌다. 공의 선조(先祖) 중에 족보에 기록할 만한 분으로 7대조 정신호(鄭臣扈)는 고려 때 전직(殿直)을 지냈고, 6대조 정윤부(鄭允孚)는 조선조에 개성윤(開城尹)을 지냈고, 5대조 정귀진(鄭龜晉)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고 저술한 문장이 세상에 전해졌다. 고조(高祖) 정지하(鄭之夏)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고, 증조(曾祖) 정찬우(鄭纘禹)는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 정순인(鄭純仁)은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정경(鄭褧)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학문을 높이 수립하여 동료들의 표상이 되었으나 일찍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강호(江湖)로 유랑하면서 벼슬할 뜻이 없었다. 장인 의정(議政) 유순정(柳順汀)과 표형(表兄) 의정(議政) 윤개(尹漑)가 번갈아 추천하여 금오랑(金吾郞)으로 의망하자, 공이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 나머지 심지어 문전을 지나가면서도 찾아보지 않았으며,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는데, 고려 판전의(判典儀) 채연(蔡淵)의 후손이자 성균 진사 채순(蔡恂)의 딸로 가정(嘉靖) 경인년(庚寅年, 1530년 중종 25년) 정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데다 학문에 주력하여 문학의 이름이 있었으나 유독 진취에 뒤늦어 무오년(戊午年, 1558년 명종 13년)에 비로소 생원ㆍ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 무렵에 태학생(太學生)들이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처벌을 요청할 적에 올린 상소의 글이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고 요청을 받아들였을 때의 상소도 공이 지은 것이었으므로 모두 공이 임금의 마음을 만회하는 힘이 있다고들 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에 임명되었고, 몇 개월 있다가 추천을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다. 이는 7품에 해당되므로 본디 극도로 선발된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우회하여 사국(史局)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런 사람은 조선조 이래로 겨우 두 사람뿐이었는데, 공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전직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긴 다음에 공조 좌랑(工曹佐郞)ㆍ형조 좌랑(刑曹佐郞)ㆍ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올 때 전대에 향 한 가지나 책 한 권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말하기를, “서적 같은 것은 구매해도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있는 서적도 다 읽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는 날 행장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꺼내어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여러 고을에서 제공한 것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만리 길에 의외의 비용이 들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지금 다행히 무사하게 돌아왔으니, 어디에다 쓸 것인가?”라고 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자못 간쟁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외척 한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이 바야흐로 친히 임하여 이름을 부르려고 할 때 대소 신료들이 앞을 다투어 뒤로 가서 절을 하려고 하였기에 반열이 텅 비어버렸으나 공만 혼자 단정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미움을 사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부름을 받고 들어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그때 조정에서 붕당(朋黨)이 조성되고 있었다. 어떤 전랑(銓郞)이 공을 끌어들여 자신의 붕당을 중하게 만들려고 세 번이나 찾아왔으나 공이 답례로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내비쳤다.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ㆍ형조 정랑(刑曹正郞)ㆍ예조 정랑(禮曹正郞)ㆍ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전직되었다.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군적(軍籍)을 정비하였는데, 영남(嶺南)은 본디 토호의 소굴로 일컬어져 장정을 추쇄(推刷)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경차관(敬差官)을 특별히 간택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공이 가서 과연 임금의 뜻에 맞게 하니, 강하고 교활한 토호들이 엎드려 있었고 숨기거나 빠진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본도(本道)에서 어떤 한 인사가 그때 간관(諫官)이 되어 조정으로 돌아가면서 공을 방문하여 자신의 집을 보호해 줄 것을 희망하니, 공이 면전에서 책망하기를, “임금과 가까이 있는 그대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단 말인가?”라고 하자, 그 사람의 안색이 변하여, 즉석에서 자기 집 양정(良丁) 몇 명을 써주고 떠나면서 앙심을 품었다. 이에 그 사람이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사실을 날조하여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연석(筵席)에 나와 대신(大臣) 노수신(盧守愼)에게 묻기를, “정 아무의 강직은 그대가 아는 바인데, 지금 논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탄핵하였다. 경은 남쪽의 사람이니 들은 바가 있는가?”라고 하니, 노수신이 대답하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그가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여 한가하게 있는 장정을 많이 얻었다는 것뿐이고 다른 것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럴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오니, 일이 결국 질서를 잃어버렸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애석해 하였다. 이윽고 또 순무 어사(巡撫御使)의 임무를 띠고 본도로 나가니, 장수와 관리들이 지레 매우 떨었고 토호들은 제도에 지나치게 지은 가옥을 스스로 철거하기도 하였다.
조정으로 들어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다. 그때 마침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서로 대립하여 더욱 소요의 사단을 일으키자, 공이 대사간(大司諫) 정지연(鄭芝衍),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와 의논하여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내기로 하였는데, 이는 그 뜻이 소요를 진정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거세게 논의하여 한쪽을 공격하는 자가 극력 저지하였기에 그 일이 중지되었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승진하였다가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ㆍ사성(司成),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역임하였다. 다시 명을 받아 경기 순무어사(京畿巡撫御史),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 및 강원도 경차관(江原道敬差官)으로 나갔는데, 이르는 곳마다 정사가 깨끗해졌다.
정언(正言)을 세 번 하고 지평(持平)을 네 번 하고 장령(掌令)을 여섯 번 하였으니, 조정에서 정말로 언론의 책임을 공에게 맡긴 것이었고 공도 회피한 바가 없이 직무를 수행하였다가 결국 곧은 도리가 당시에 용납되지 않아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나갔다. 부임하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벼슬살이를 물처럼 깨끗이 하였으며, 절약하여 넉넉하게 하고 거두어들이는 것을 모두 줄이니, 아전과 백성들이 노래하고 춤추었다. 세시(歲時)에 오직 친구 중에 외롭고 빈한한 사람을 찾아 선물을 주고 요직이나 드러난 가문은 주지 않았는데, 애당초 일반 정서를 거스르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수를 풀어놓고 돌아올 때에 행장 속에 새 의롱(衣籠) 둘이 있는 것을 보고 노하여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렸고 집에 도착한 날 이웃집에서 양식을 꾸어다가 비로소 밥을 지었다. 춘천(春川)에 있는 옛날 전답이 매우 척박하였으나 여유롭게 살면서 일생을 보내려고 필마(匹馬)에 올라 동쪽으로 돌아갔는데, 집안에 아무 것도 없어 소연(蕭然)하였으나 태연히 살았다. 만력(萬曆)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2월에 병으로 졸(卒)하니, 향년 54세였다. 그해 5월 모일(某日)에 가평군(嘉平郡) 원남면(遠南面) 간좌(艮坐)의 묏자리에 묻히었다.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인 부사과(副司果) 정응서(鄭應瑞)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 정사호(鄭賜湖)는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처음에 진사(進士) 채무외(蔡毋畏)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어 참봉(參奉) 유필영(兪必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측실에서 1남 정장원(鄭長源)을 낳았다. 둘째 아들 정명호(鄭明湖)는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사예(司藝) 김사섬(金士銛)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정두원(鄭斗源)을 낳았다. 셋째 아들 정운호(鄭雲湖)는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처음에 충의위(忠義衛) 이순인(李純仁)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어 유학(幼學) 강윤(康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현감(縣監) 정회(鄭晦)에게 시집가 2남을 낳았는데, 정팽동(鄭彭仝)ㆍ정두동(鄭斗仝)이다. 정두원은 판관(判官) 심제겸(沈悌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부인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피하기 위해 온양(溫陽)의 정회(鄭晦) 집에서 살다가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5월에 병환으로 졸(卒)하였는데, 상여(喪輿)를 모시고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청주(淸州) 지역 산외(山外)의 간좌(艮坐)의 묏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위인이 단아하고 엄숙하며 간이하고 묵중하여 젊어서부터 벗들과 있을 때 희롱하는 말과 지저분한 말을 입밖에 꺼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일소(一笑)를 얻으면 금옥(金玉)보다 더 중히 여겨 존경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때 누차 사화(士禍)를 겪었기에 이학(理學)을 기피하였다. 그런데 공만 혼자 ≪대학장구(大學章句)≫와 ≪근사록(近思錄)≫, 성리(性理) 등에 관한 여러 서적을 매우 깊이 터득하였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공과 같이 다 읽고 나서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세상에 다시 이런 선비를 볼 줄 생각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집에 있을 때 제삿날을 만나면 목욕 재계하여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제기를 씻거나 고기를 자르고 삶을 적에 반드시 친히 살펴보았는데, 비록 병환을 앓아도 거르지 않았다. 벼슬살이할 적에 대소사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공무에 충실하고 털끝만큼도 사정을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공이 다른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청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감히 공에게 뇌물을 주어 더럽히지 못하였다. 공청에서 물러나오면 조용히 방안에 앉아 좌우의 도서(圖書)를 펼쳐보면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금 송죽(松竹)을 심어놓고 기르면서 서로 어울려 초연히 살뿐이었고 왕래하며 쫓아다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집안일에 마음을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집이 기울어지면 버팀목을 세워놓아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고 자손을 위해 한 두락의 전답도 마련해놓지 않았으며, 평소에 잡기(雜技)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만년에 거문고를 배워 자못 취미를 붙이었다.
공이 이처럼 학문이 있고 지킨 바가 있고 위엄이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정신의 지주가 되고 국경에서는 방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공을 아는 사람은 드물고 공을 시기하는 사람은 많았는가 하면 운명도 불우하여 십분의 일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후손에게 돌아가 이루어질 것이다. 부인은 자애롭고 돈후하여 음덕을 많이 쌓았으므로 사람들이 또한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아들이 이조 참판의 지위에 이르렀기 때문에 추은(推恩)을 받아 공에게는 자제의 직질을 적용하였고 부인도 더불어 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한창 복록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관찰사가 나 최입(崔岦)이 일찍이 공의 부자(父子) 사이에서 노닐었다고 하여 묘갈명(墓碣銘)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의리로 사양할 수 없기에 가장(家狀)을 근거로 삼아 본말을 서술하고 이어 명(銘)을 썼다. 그 명에 대한 시(詩)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모난 것을 깎아 둥글게 만들었지만 나는 혼자 모난 대로 유지했도다. 냄새를 쫓아다닌 자들은 서로가 경쟁을 하지만 꽃다운 향기를 바꾸지 않았도다. 흐린 물이 발을 물들이려고 하니 버리고 떠나 맑은 물로 갔도다. 아! 그 거처에다 성재(醒齋)라 이름을 붙었으니 고인이 남긴 깨어 있는 분이었도다. 이것으로 세상에 나가 시험하였으매 그 이른 곳이 계획에 딱 맞았도다. 후손에게서 나머지를 거두어들이니, 나는 그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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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위 정회 아들 3형제 문과,정두경,정익경,정인경
정두경 정익경 형제 동방
정두경 장원 당대 최고의 시인.계곡장유의 신도비를 쓰다.조영당 정현원의 시재를 인정함
정두경 추가 기록 함
호가 화곡으로 되어 있네요.-->성재
충보조공신을 순충보조공신으로
순충 --- 수정 삽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