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고령(高靈)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우가야는 중국 동북부지방에 자리를 잡았던 태양신앙족 가운데서 끝까지 태양숭배사상을 버리기를 거부한 무리를 이끌고 남하해 오다가 낙동강 유역에 정착한 우두머리 집안이다.
시초에는 지금의 함안(咸安)지역에 자리잡은 아라가야(安羅伽倻=下伽倻)만을 작은 집(分家)으로 거느리고 있었지만 해를 거듭함에 따라 작은 집의 수는 점점 많아져서 우가야가 신라에게 멸망당한 서기 562년쯤에는 11개나 되는 작은 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가실왕(嘉實王)의 분부를 받들어 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이 12가야를 노래로 불러 남긴 것과 ‘일본서기’ 긴메이천황(欽明天皇) 23년조(서기 563년)에 남겨진 12가야의 이름이 그런 수효를 확인시켜 준다.
중국 동북부지역에 정착한 무리들 사이에 농경재배가 보급되어 가자 사람들 사이에 비가 내리기를 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고 그 때문에 곰숭배신앙은 한층 더 힘을 얻게 됐다.
맹렬한 속도로 증대되는 그 세력에 밀려 태양숭배신앙을 고집하는 가야족이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온 시기는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가야가 일본 열도에 왕조를 세운 때를 지금으로부터 약 3800년 전이라고 기록한 일본의 여러 고문서 때문이다.
근년에 이르러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고사서가 일본에서 발견됐다.
그 중에는 아직 위서(僞書)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츠가루외삼군지(東日流外三郡誌), 다케우치문서(竹內文書),우에츠후미(上記) 등의 여러 책은 황실의 후예를 포함한 유서깊은 문중에서 비장해 온 문서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기록 속에는 마치 미리 서로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즉위하기 전에 우가야왕조가 72대 계속됐었다"고 적혀있다.
앞으로 차차 이야기 하겠지만 진무천황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것은 서기 420년경이니 지금부터 약 1600년 전이다.
따라서 우가야왕조가 72대 계속됐었다면 한 세대를 줄잡아 30년으로 볼 때 2100년이니까 지금부터 약 3700년 전에 왕조를 일으켰다는 계산이 된다.
동해를 건너 시네마현 쪽으로 이동해 온 우가야 사람들이 지금 나라(奈良)라고 불리는 곳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육지와 연결돼 있던 승문시대와는 사정이 달랐다.
많은 사람이 무리를 져서 도보로 일본 열도로 옮겨갈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배를 이용한 이동이 반복됐다.
더러는 후쿠오카현(福岡縣)이나 사가현(佐賀縣) 쪽으로, 또 다른 무리들은 시마네현(島根縣) 쪽으로 일본 열도에 상륙했는데 시마네현 쪽으로 건너간 수효가 훨씬 많았다.
경남 해안에서 대마도(對馬島) 쪽으로 건너가려는 배는, 서쪽으로부터 동해로 흘러드는 해류에 밀려 직진하지 못하고 시마네현 쪽으로 다다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를 저어 나가거나 돛을 단 배로 바람을 이용하던 시절에 항해는 대마도와의 사이에 역류해 오는 빠른 해류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시마네현 지방에 존재했던 이즈모국(出雲國)을 네노구니(根國), 즉 열도를 개척한 사람들이 거쳐온 (뿌리의 나라(根國))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 유역까지 이른 가야족이 큰 집(宗家)인 우가야와 작은 집 아라가야로 나뉘어 나라를 세웠지만 이 시기에 두 집안은 서로 형제애가 두터웠다.
저들이 일본 열도를 개척해 나가던 시기의 우애 좋은 정경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神代) 기록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다만 한가지 유의할 점은‘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 기록은 우가야왕조의 신대와, 진무왕조의 신대를 뒤섞어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불화스러운 장면도 다소 있다는 점이다.
어쨋든 가야족의 대부분은 시마네현에 있는 소노하마(園浜)라는 해변에 상륙했다. 한자로 '園浜' 이라 적고 (소노하마)라 읽고 있는 이 해변의 이름은 (첨=처음)과 (하마=海邊)이 결합된 것으로‘가야족이 처음 상륙했던 해변’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우리말 (첨=처음)을 일본어로 (소)라고 발음하는 것은 파열음과 받침을 표기할 문자가 없는 탓으로 (조메) 또는 (소메)라고 하거나 받침이 없는 (조) 또는 (소)로 기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가 바뀐 다음 처음으로 붓글씨를 쓰는 것을 일본말로는 (가키조메)라 하고 낮 모르던 사람이 얼굴을 처음 익히는 것을 (나레소메)라고 하는데 그때에 씌어지는 (조메)나 (소메)가 바로 우리말 (첨=처음)을 뜻하는 말이다.
일본 황실이 해마다 봄 가을 두차례 모시고 있는 가라가미마츠리(韓神祭)는 한반도로부터 이 해변에 도착한 (스쿠나히코)와 (소노가미(始祖神))를 받드는 제사이다.
그렇게 소중히 모셔지고 있는 (스쿠나히코)라는 신은 석탈해(昔脫解)의 후예로서 신라 제16대왕 석흘해(昔訖解)의 아들 보(甫) 또는 손자 념(恬)이나 성(性)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스쿠나히코)에 관해서는 수로왕의 후예가 혁명을 일으켜 우가야왕조를 쓰러뜨리고 황위에 올라 진무천황이라 일컫게 되는 이야기를 할 때 자세히 말할 것이다.
여하간, 약 4000년 전쯤에 시마네현을 거쳐 지금 나라현이라고 불려지는 지역에 다다른 우가야족은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현재 그 지역 일대를 (나라)라고 부르며 그 현청(縣廳) 소재지를 나라라고 하는 것도 그런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근의 나라현 덴리시(天理市) 나가라(長柄)로부터 가이치(海知)에 이르는 일대를 경북 고령에 있었던 우가야족의 나라이름을 그대로 본따서 나리이름을 (야마터)라고 했다.
그들이 도성(都城)을 쌓았던 곳은 현재 교토부중(京都府中)과 교토부(京都府) 남부에 이르는 일대이다.
옛 사람들이 그곳을 (야마시로=야마(國)의 재(城))라고 불렀으므로, 서기 794년부터 한자로 (山城)이라고 표기하고 (야마시로)라고 부르고 있다.
우가야왕조는 서기 420년경에 수로왕의 후예인 진무천황에게 굴복할 때까지 약 2100년 동안 유지됐다.
그 사이 도성을 꽤 많이 쌓았을 테지만 지금 알려져 있는 곳은 단 둘 뿐이다.
그중 하나는 (이가루가(斑鳩))라 하고 또 하나는 (가츠라기(葛城))라 부른다.
일본학자들은 ‘그 일대에 (이가루)라는 산새가 많이 몰려와 울었던 것에 연유해 그곳을 (이가루가)라 부르게 됐다’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그건 억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게 틀렸느냐 하면 (이가루)라는 새는 일본전국 어느 곳에나 많은데 왜 굳이 그곳만 골라서 (이가루가)라고 불렀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가루)의 원형은 원래 (우가라(=우가야))였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모음교체되어 (이가루)라고 발음하게 된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우고쿠=움직이다)를 (이고쿠)라고 발음하고 있는 게 그것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이가루가)는 우가라(우가야)의 가(곳)이라는 뜻임을 알게 된다.
(가츠라기)라는 이름의 어원은 (가라(加羅) 기(城)), 즉 가야족의 재(城)다.
그런데 처음에 그것을 한자로 표기한 사람은 (가)소리를 한자 (갈(葛))로 나타냈는데, 후세사람이 (갈(葛))의 받침(ㄹ)까지 발음한 탓으로 (가츠)로 표기하게 됐다.
왜냐하면 받침을 표기하는 수단이 없는 일본어에서는 받침(ㄹ)은 (치) 또는 (츠)로 표기하는 게 통례이기 때문이다.
일본말로 (달(達))을 (다치) 또는 (다츠)라고 표기하고 (돌(突))을 (도츠)라고 읽는 것도 그 예다.
▲아라가야(安羅伽倻=下伽倻) 종가(宗家)인 우가야 사람들은 나라현 쪽으로 이동해 갔지만 아라가야(安羅伽倻=下伽倻) 사람들은 그곳에서 멀지않은 하가와(@川) 유역에 자리잡았다.
저들은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에 정착한 옛 조상들의 지혜로움을 본 땄을런지도 모른다.
결과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훗날 벼농사 기술이 전해졌을 때 이곳이 곡창지대가 된다.
이 지역은 한쪽은 동해를 바라보고 삼면은 주고쿠(中國)산맥에 둘러 쌓인 관계로 (이두모)라는 별명으로 불렸었다.
(이두모)의 (이)는 우리말 (이다지),(이토록)할 때 쓰이는 부사로서 뜻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모)는 모음교체가 되어 요새 (두뫼)라고 발음되는 말의 옛 꼴인데, (산에 둘러 쌓인 곳=산골)을 뜻한다.
즉 (이두모)란 (산에 둘러 쌓인 산골)이라는 뜻으로 부쳐진 별명이었는데 어원을 알지 못하게 된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이 고장 이름으로 삼게 돼 버렸다.
일본 고대사에는 그것이 모음교체된 (이즈모(出雲))로 표기돼 있다.
우가야 사람들이 이곳을 마다하고 다른 곳을 찾아 이동해 간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고장은 이름 그대로 두뫼 산골이었을 뿐 아니라 면적도 매우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아라가야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한 후 제일 먼저 시작한 사업이 영토확장이었다.
그때 상황은 이즈모풍토기(出雲風土記)에 재미있게 묘사돼 있다.
이즈모풍토기는 서기 753년에 김태리(金太理)라는 사람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다. /박병식 한-일어원 연구가
2003-10-14 오전 12:00:01 www.focus21.com 에서 퍼온글(일월선인 수정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