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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늙어가기 시작한다. 역사를 통해 불로장생의 꿈을 실현코자 했던 수많은 노력들은 이 엄연한 생물학적 사실 앞에 백전백패했다. 하지만 꿈은 좀처럼 사라질 줄 모른다. 성형수술이나 약물을 통해 젊음의 징표를 연장시키려는 시도를 흔히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받아들이기 싫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기에 그것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나이 듦에 대한 태도이다. 물론 여기에서 태도란 개인의 태도와 함께 사회일반의 태도도 의미한다. |
거울을 보면 어느새 중년의 남자가 들어 있다. 앞니가 빠진 작은 아이, 개구쟁이 소년, 세상의 모든 일들을 가능한 상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던 청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거울 속에서 한 중년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젊었을 때의 상상의 대부분은 증발해 흔적 없이 날아가고 겨우 몇 개만 우연한 현실이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 속에는 여전히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상상들을 품고 있다.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이제 막 경기의 후반전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늙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그 속에 붕괴된다는 모멸과 서서히 몰락한다는 수치심을 포함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늙은이는 두려워하고 망설인다. 고약하고 이기적이며 겁 많고 차갑고 자괴감에 빠져 있다.” 플리니우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감각은 무뎌지고 사지는 뻣뻣해지고 시각, 청각, 치아, 그리고 소화기관까지 우리보다 더 빨리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성장을 보호하는 죽음
죽음을 향해 접근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죽음을 피하려고 했고, 삶을 연장하려 했다. 현명한 다윗은 늙어 두 명의 젊은 처녀 사이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세 명의 젊은이들로부터 기증된 피를 마신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도 죽었다. 72세의 나이에 개의 고환 추출물을 자신에게 주사한 프랑스 교수 세카르도 젊음을 찾지 못하고 죽었다. 채플린과 처칠은 양의 태아세포 주사를 맞았지만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진시황 역시 불로초를 그리다 죽고 말았다. 하물며 그들처럼 특별한 묘약과 처방을 써보지 못할 평범한 나나 평범한 당신은 말할 나위 없이 손쉬운 늙음의 포로이며, 죽음의 지배에서 한 발도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언젠가 1세기의 역사학자 A. 팰그레이브 경이 《상인과 수도사》라는 책에서 한 말이 인용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섬유질이 형성되고 모든 기관에 생명이 부여되는 순간에 나타난 최초의 맥박 그 자체가 죽음의 근원이다. 신체조직들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이미 그 조직들이 들어가 묻힐 무덤이 마련되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된다.
대서양 대구는 한 번에 900만 갱의 알을 낳는다고 한다. 생식을 위해 성인남자는 엄청난 정자를 쏘아대지만 하나만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유실된다. 자연은 다산과 낭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쏟아 붓고, 싹틔우고, 꽃을 피운다. 과도하게 주고, 가장 적절하고 강한 것만 남게 한다. 몸이 수십 억 개의 세포를 만들고 채 활동하기도 전에 죽게 만드는 것은 자연이 ‘최선’을 선별하는 방식이다.
1980년대 말 호비츠(Robert H. Horvitz)는 세포의 죽음은 성장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끝내도록 내장된 프로그램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삶을 해체시킬 프로그램, 즉 자살 프로그램 말이다. 그것은 세포의 성장이 손쓸 수 없이 많아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좋은 브레이크는 좋은 액셀러레이터만큼 중요한 것이다. 세포의 죽음을 조장하는 이 유전자는 ‘ced-3, ced-4’로 알려져 있다. 모든 세포의 일차적 꿈은 ‘두 개’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분열하는 세포는 잠정적으로 종양세포이기도 하다. 죽음의 유전자는 손상된 DNA를 가지고 있는 세포가 불완전함을 수리할 동안 세포분열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심하면 자살을 명령하여 암의 씨앗을 숙청해버린다.
1990년대에 인체의 노화를 관장하는 시계가 엉뚱하게도 염색체의 맨 끝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텔로미어(telomere)이다.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텔로미어는 염기쌍을 잃어버리면서 조금씩 짧아진다. 텔로미어가 일종의 시계라면 텔로머라아제(telomerase)는 일종의 태엽이다. 이 효소는 텔로미어에 염기를 첨가함으로써 텔로미어의 길이를 늘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간은 텔로머라아제를 투입하여 텔로미어를 늘림으로써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유전학적 단서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이 방법을 통해 젊은 세포처럼 분열을 계속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는 텔로머라아제를 재활성화시켜 젊은 세포처럼 분열을 계속한다.
‘게놈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는 ‘ced-3, ced-4’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죽는 것은 세포들이 하나의 단일생명체 내부에서 조화롭게 자라기 위해 체결한 협상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협상은 오랫동안 진화의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진 결정물이다. 말하자면 생명체가 스스로를 존속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모색해 온 진화의 과정에서 찾아낸 최선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성장을 보호한다. 죽음은 무분별하고 과다한 욕망을 제거해줌으로써 생명체의 조화로운 성장을 도와준다. 이런 생물학적인 자연의 비밀은 인류의 역사를 움직여 온 원칙이기도 하다.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무르익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야 할 바로 그 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쓴 후에 남의 것을 탐할 수는 없겠지요.”
이러한 죽음에 대한 통찰이 의사나 과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학자나 문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치열한 삶을 살아본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훨씬 더 잘 해석되고 이해되는 것은 이런 동질성 때문인 것 같다.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인류의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흔적들 100만 년 전까지 올라간다. 대략 초기 97만 5천 년 동안은 사냥꾼으로 살았고, 겨우 2만 5천 년 동안만 농사꾼으로 살았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살아온 인생 40년 가운데 39년 동안은 사냥꾼으로 살았고, 농사꾼이 된 지는 겨우 1년 밖에 되지 않는다.
사냥꾼의 시절에는 먹을 것과 짝짓기와 목숨을 위해서 살았다. 미래는 두려움이었다. 짐승이 있으면 배를 채울 수 있고 없으면 굶어야 했다. 아무 때나 짝짓기를 할 수 있고 언제든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한 남자들의 특징이었다. 문명을 위한 최초의 통양은 농업이었다. 비로소 미래는 잠시 예측되었다. 씨를 뿌리면 시간이 지난 후 추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정착했고, 문명은 시작되었다. 문명은 인류가 여성화되는 과정이었다. 문명의 역사 대부분의 주인공은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하고 빛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지면 윌 듀랜트의 지적대로 ‘자궁, 즉 인간이라는 종족의 주류인 여성에게 조공을 바치는 존재’였다. 여자들은 가축을 길들였고, 마지막으로 남자를 길들였다. 남자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이라는 사회적 특질을 배우고 익히도록 했다.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아무 때나 짝짓기를 하고, 음식을 탐내고, 싸움질을 해서는 안 된다. 문명의 본질은 오랫동안 뿌리 깊게 자리잡은 사냥꾼의 습성과 겨우 최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이 개인의 역사도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동물로 태어나 사회 속으로 던져진다. 그리고 자연과 문명 사이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갈등은 그러므로 인간의 숙명이다. ‘멋대로 하지 말라.’고 하는 인간의 재갈, 즉 문명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부모는 최초로 만나는 문명이다. 거역하면 패륜이 된다. 학교와 종교는 그 다음에 만나는 문명들이다. 사회적 가치관을 만들어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사회적 관행과 여론, 그리고 법은 문명이 정한 행동을 넘어서는 것을 제약하는 통제선들이다. 이 선은 대체로 굵고 선명하기도 하지만 군데군데 모호한 구멍이 뚫려 있기도 하고 간혹 희미한 곳도 있다. 인생은 그 속에서 이루어진다.
역사가 인류의 시간의 기록이듯이 개인의 역사 역시 그 삶의 시간적 기록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개인적 역사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은 다양하지만 개인의 역사는 늘 자연과 문명의 갈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때때로 한쪽에 치우치고 때때로 반전하고 이윽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절한 융합과 균형을 잡아가기도 한다. 비유컨대 모든 세포의 욕망은 분열하여 ‘두 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때나 분열해서는 안 된다. 문명은 마치 ‘ced-3, ced-4’유전자와 같이 세포의 욕망이 과도한 탐욕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복제를 시도할 때 제동을 걸어준다. 부모의 이름으로, 학교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법과 여론의 이름으로 말이다.
동양의 역사는 이 부분을 완벽한 상징성을 가지고 극적으로 처리한다. 공자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젊은 나이에 노자를 찾아가 만나는 장면이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온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대하여 묻자, 노자가 대답한다. “그대가 사모하는 그 어진 옛날 사람들은 뼈가 삭아 흙이 되고 말았다. 오직 그 말만 전해져 내려온다. …… 그대의 교만과 끊임없는 욕망을 버려라. 자부심과 야망을 버려라.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말했다.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마치 용과 같았다.”
공자는 젊은이다. 노자(老子)는 말 그대로 ‘늙은이’다. 공자의 젊음과 노자의 늙음은 중국인들에게 고품격의 처세술이었다. 즉 ‘쓰임을 받으면 행하고, 버림을 받으면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 (《논어》<술이>) 유가의 이상은 바라건대 스스로를 닦아 세상에 나가다스리는 것이다. 여의치 못해 버려져 들어와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유가의 목표는 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숨어 있는 것조차 ‘기다림’의 표시였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형태를 떠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자연과 함께 자연을 따라 떠나는 것이다. 나이와 함께 현명함이 자라, 이윽고 극치에 달해, 현명함이라는 언어적 속박을 벗어나 용처럼 구름 속에서 노니는 것이다.
결론
생명을 연장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오래 된 것이다. 삶을 길게 늘리려는 노력은 지속되었고 수명은 늘어났다. 아마 조금씩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하루살이들에게 우리는 신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먹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일지 모르겠지만, 인생 100년도 한숨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결국 노령 때문에 죽는다. 우리의 몸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마모되고, 결국은 함몰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우리를 구성하는 세포가 마모되어 궤멸되든, 세포 속의 생체시계가 마지막 초침을 멈추기 때문이든 결국 시작한 생명은 그 시작부터 끝을 포함하고 있다. 죽음은 모든 생명이 시작과 더불어 반드시 치러야 할 빚이다. 이것은 어떠한 예외도 없었다.
그러므로 여전히 욕심스러운 ‘나이 듦’은 과다한 욕망에 차 여전히 ‘두 개’가 되고 싶은 세포, 즉 암과 같다.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때,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에서 참을 수 있을 만한 짧은 통증 속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것이 좋은 일이다. 삶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시계의 초침을 뒤로 돌리려는 부질없는 노력이 아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천천히 삶의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앞부분, 즉 젊은 시절의 그림이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싱싱하고 발랄하고 모험적인 것이라면, 나이가 들면서 짜놓은 인생의 직물은 차분하고 통찰력에 차 있고 완숙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의 부름에 따라 모두 놓아두고 낡은 껍데기만 남기고 떠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름다운 봄날은 빨리 지나간다. 모두 그리워하고 섭섭해 한다. 그러나 가을 또한 곱게 온다. 나이 먹음은 가을을 즐기는 것이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릴케처럼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신이여, 우리 각자에게 합당한 삶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삶에 걸맞은 ‘합당한 죽음’을 주소서.”
■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낙엽, 겨울, 봄, 꽃, 열매, 그리고 나이테’라는 개념을 연결해서 ‘죽음이 성장을 보호한다.’는
가정을 설득력 있게 재구성해보자.
2. 나이 들어감의 미덕에 대하여 간략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