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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누님이야기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테오9-13)
1, 불쌍한 나의 누님
불쌍하다는 수식어 없이 나는 나의 북쪽의 누님을 생각 할 수가 없다. 나보다 똑똑하고 활달했던 나의 누님은 어린 시절 내게 여왕처럼 군림했고 나는 누님의 눈치를 보고 누님 앞에 주눅이 들곤 했다. 특히 내가 어떤 실수를 하거나 대들기라도 하면 “너 그러면 죄 짓는 거다. 너 죄 짓고 지옥가고 싶니.” 할 때면 정말 속이 상했는데 나는 어릴 때 제일 무섭다고 생각한 것이 지옥이었고 지옥 간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둔촌사랑방243번 “수의를 장만하고”에서 언급)
나의 누님은 왜정 때 일본 큐슈 가고시마의 일본 순심수녀회가 운영하는 고등 여학교를 다녔다. 나는 십여 년 전 아내와 같이 누님 학교를 방문하여 학교에 보관된 졸업사진첩에서 누님의 당시 사진을 복사해 왔다. 여하튼 그 때의 나의 누님을 기억하면 어느 여름 방학 땐가 집에 온 누님이 어느 날 내가 누님 방을 불쑥 들어갔더니 누님은 황급히 무슨 책을 읽다가 책상 서랍 속에 감추는 데 누님의 눈에는 눈물이 촉촉이 젖어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 나는 누나가 외출 나갔을 때 그 책을 찾아 읽어보게 되었는데 일본 “아리지마 유죠”라는 소설가의 “여자의 일생”.이라는 연애 소설이었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연애 소설을 그 때 읽어보게 되었고 요새 아이들 같으면 더 자극적인 것이 많아서 연애소설은 코메디 같겠지만 그 때 나는 마음과 정신이 책속이야기에 빠져들면서 가슴이 쿵당 거리고 식은땀이 막 났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누님은 해방 전 해에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학교 선생을 하게 되었고 또한 당시 고향 본당의 본당신부인 강 방그라시오 신부님이 신부님은 중매 같은 것 서면 안 되는데 좋은 신랑감이 있다고 중매를 서서 일찍 결혼도 하게 되었으나 결국 나의 사랑하는 누님은 불행해지고 말게 된다. 그것은 결혼하고 일 년 후에 해방이 되고 38선이 생기고 남편이라는 놈은 고향이 군산인데 군산 부모를 만나보고 다시 와서 자기 아내, 나의 누님을 데리고 가겠다고 떠나서는 결국 38선이 굳어지면서 나의 누님을 데려가지 못하여 나의 누님은 딸아이만 하나 나아 남편과 생이별한 청상과부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여자로서 이런 불행이 어디 있겠으며 나의 누님을 볼 때마다 누님이 너무나 불쌍하였다.
그러나 더욱 불쌍한 것은 남편을 단념하고 공산치하에서도 학교에 있던 누님이 학교를 떠나 황해도 교육위원회(남쪽의 교육청)로 자리를 옮기면서 누님의 생활에 이변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니 누님은 매일 남자 당원들과 어울리고 마침내 어느 날 나는 성당 친구들과 어울리다 늦게 집에 들어오니 누나 방이 떠들썩한데 직장의 남자 당원들을 집안에 까지 데리고 온 것이 아닌가. 그 다음날 나는 누나가 불쌍하다고 마음으론 생각하면서도 누나에게 대들어 말하기를 “누나 누나의 지금 생활은 죄를 짓고 있는 것 아냐? 그전에 누나가 내게 죄 지으면 지옥 간다고 그랬지 누나 지옥 갈려고 그래?” 이 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누나는 가만히 날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하는데 ”그래 내가 지금 죄를 짓고 있지? 그래서 나는 지옥에 가겠지? 그러나 넌 지옥가면 안 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 속으로 ”안 돼. 불쌍한 누나는 지옥 안 가.“하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죄는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 정말 지옥에 가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었다.
2, 죄에 대해서(대죄와 소죄)
교리서는 죄를. 악인 줄을 알면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범하므로 하느님께 거사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죄는 행위로만 아니라 생각과 원의와 말로도 짓게 되고 죄는 대죄와 소죄로 구분되며 또한 대죄가 되기 위해서는 중대한 악임을 확실하게 지각할 뿐 아니라 온전한 자유의지로 행해져야 하며 이런 대죄는 하느님께 배은망덕과 모욕이며 상존성총(성화은총)을 잃어버리게 되어 영원한 멸망에로 이르게 한다고 가르친다. 한편 소죄는 작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큰 잘못이라도 중대하다는 의식이 없었고 온전한 자유의지의 승낙이 없이 하느님을 거사리는 것으로 이런 소죄는 성화은총을 잃게 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게 하여 대죄까지도 짓게 할 위험을 초래하며 죽어서는 연옥 보속을 받게 한다. 그래서 소죄라고 우습 게 보면 안 된다고 귀가 아프게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나는 죄인이란 생각과 죄의식 때문에 위축되고 주눅이 들 때가 많았다. 게다가 옛날 신부님들은 어찌하여 가끔 죄나 사후 심판 지옥에 대한 강론을 하실 때면 나의 어린 마음에도 아주 무서움을 느끼도록 강론을 하셨던지 그때 나는 이 세상 교회를 “싸우는 교회”라고 배웠고 그것은 신자의 일생은, 마귀 세상 육신과의" 삼구(仇)전쟁"이라 해서 결국 인간은 죄 가운데 살고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나는 죄를 안 지을 자신은 없고 어떻게 천당엘 갈 수 있겠나 하고 걱정했다. 물론 죄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므로 어떤 면에서 신자들을 신앙심 깊고 얌전하고 품행 단정하게 살아가도록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앞장서서 박력 있고 투쟁력 있는 역할을 하는 신자로는 글쎄? 올시다 이다. 도리켜 보면 나부터도 죄가 무서워서 이것도 저것도 죄가 될까 전전긍긍 우유부단하게 항상 소극적으로만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나의 큰 근심거리이었다. 아무리 해도 죄를 안 짓고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어릴 떼부터 젊었을 때는 물론 다 늙은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죄를 많이 짓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근심은 나만의 것이 아닌 것이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하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위대한 사도께서도 죄를 짓게 되는 것을 한탄한 것이다. 이것은 아오스딩 성인도 마찬가지로 그분은 고백록에서 젊은 시절 자기는 정욕의 늪에서 뉘우치고 괴로워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 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도 세 번 주님을 배반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우리는 어째서 죄를 짓는 것일까? 나 자신이 죄 짓는 것을 생각할 때 내 안의 사욕편정이 나를 죄 짓게 한다. 사도 바오로의 한탄처럼 원하는 선을 안 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하는 내 안의 이면성이랄까 모순 때문인데 이것은 원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사욕편정이 온 것인데 우리가 세례로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았어도 사욕편정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니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막 죄를 지으면 안 되고 열심히 기도하며 덕의 길로 나아가도록 힘은 써야 하겠지만 말이다.
한편 우리가 조금 더 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면. 죄란 먼저 말한 대로 악을 악인줄 알면서도 자유의지로 범해야 죄가 된다. 그러나 진실로 누구에게 “극복할 수 없는 악”이라는 어떤 신학자의 말도 있지만 즉 태생적 유전등 요인 때문이거나 살아온 환경 때문에 온전한 지각행위나 자유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상태에서 지은 죄라면 죄로 단정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유죄의 판단은 오직 하느님만이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간음한 여인을 보시고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8-11) 하신 경우가 이런 경우 때문이 아닐까? 결국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지 않아 결코 우리는 죄에서 온전히 벗어난 삶을 살수는 없는 것이니 우리는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어도 상심과 절망에 빠지거나 주눅이 들어 나의 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도망갈려고 하거나 교회로 부터도 멀어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러 나의 죄떼문에, 성경 속의 간음한 여인처럼 하느님께 더욱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죄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래서 "마르틴루터"(1484-1546년, 금년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도 fortitudo pecca,fortitudo crede,즉 포르티 투도 뻭가. 포르티투도 크레데, "용감하게 죄를 짓고, 용감하게 믿어라"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나는 고해성사를 멀리 한 적이 있다. 옛날에는 교회가 백개가 넘는 죄의 카타로그(목록)를 만들어서 고해성사를 볼 때면 당연히 그것을 보고 성찰을 했는데 그 죄목들을 드려다 보고 있으면 결국 모두가 내가 지은 죄로 여기게 되고 나는 대 죄인이다 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대 죄인인 내가 너무 비참하고 고해성사를 본들 또 대 죄인으로 전락할 것을 하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원죄의 결과로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고 정말 죄가 되는지는 하느님만이 판단할 수 있고 아시는 것이니까 자기가 하느님인 것처럼 스스로 대죄를 지었다고 판단해 버리고 고해소에 들어가지 말고 다만 내 양심에 느끼는 잘못에 대하여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고해소에 들어가 잘못이라고 생각된 것의 자초지종을 담담하게 말씀드리면 그것이 좋은 고해성사가 되고 고해성사 보는 것이 마음의 부담이 안 되고 오히려 즐겁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약한 우리 인간으로서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물론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있을 만치 완전한 사람이 못 되며 (죄를 지을 수없는 완전한 사람은 오작 예수님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뿐이다.) 따라서 죄를 짓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니 그래서 어느 피정지도 신부님도 “성인이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그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을 말 한다”라고 하였는데 같은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천만 번을 죄 지어도 그리고 그 죄가 모두 대죄일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께 다가가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죄를 기쁘게 용서하시니까. 나는 분명히 믿는 것이 있는데 내갸 아무리 죄중에 살았어도 죽는 순간에 수십초 만이라도 하느님께 내 죄를 진심으로 통회하고 죽는 다면 나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진실을 믿고 있으며 그래서 죽음을 앞둔 나의 노년이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다.
3. 하느님의 사랑과 죄의 용서
한국에도 “침묵” “예수의 생애” 등이 번역되어 알려진 일본의 가톨릭 작가인 “엔도슈사꾸”는 구약의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었지만 신약의 하느님은 “용서하는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말 했는데 백번 생각해도 지당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6). ”사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마테오9-13).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에페소1-7) 위와 같은 성경 말씀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한 인간이 죄 때문에 죽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상에 혹독한 고통 속에 피를 흘려 죽으신 것이니 십자가로서 인류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순간에 지구위에 모든 인간의 죄도 이미 사해진 것이다. 라고 독일의 신학자"칼 라너" 신부가 쓴 글을 읽은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근간에 새 푸란치스꼬 교황님께서 바띠깐 광장에서의 신자들 알현시에 강론 중 무신론자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셔서 하느님을 부정하는 죄인들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모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흘린 예수님의 피의 효용이 온 세상 모든 인간에게 미친다는 그래서 하느님은 어떤 죄인도 통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여 천국에 갈 수있게 하신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인 것을. ( 나는 전에, 밤에 tv영화 "페르니"감독의 "길"이란 영화에서 "안소니 퀸"이 연기하는 주인공 "잔파노"가 한 덜 된 여자 "젤소미나"를 성적으로 롱락하다 죽게하고 나종에 자책에 빠저 바다 가운데 스스로 빠져 죽게 되는데 그 순간에 하느님은 그를 통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여 천국으로 승천시키는 데,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승리를 말하는 것 아닐까.)
일본 동경교구의 예수회의 “모리 가즈히로” 주교님은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강조하여 일본 작가와의 대담록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천국의 문 앞에 서 계시다가 천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머리를 숙여가며 ”이런 지독한 세상과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게해서 정말 미안합니다.“하고 하느님은 오히려 이렇게 ”사죄하는 하느님“이라고도 했으니 이와같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고 깨달으면 우리는 죄를 지었어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죄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게 깨닫게 해주고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죄인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에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천국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나도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말할 것이며 나는 죄를 짓고 살면서도 천국에 대한 희망을 잃은 적이 없다 . 또한 나 만이 아니라 북쪽의 나의 사랑하는 누님도 오랜 공산치하의 삶에서 무신론자가 되었건 어떤 잘못된 삶을 살았건 천국에서 꼭 만나게 될 것을 믿고 있다. “죄를 용서하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둔촌동 본당 김형보 노렌조 옛날에 지벨라도 신부님괴 강 요한 신부님 밑에 장위동 성당에서 일했던 사람.
##--한 체칠리아님 혹시 장위동 성당 연혁에 대한 책 낸 것 있으면 한 권 얻을 수 있을까요? 내가 일했던 성당의 연혁지는 다 가지고 있는데 장위동 것만 없네요
첫댓글 장위동성당 40년사 책자가있는데,, 남아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에 50년사 책자를 편찬하게 될지 모르나 수소문 해보겠습니다... 꼭 한권 로렌조 형제님께 드릴께요...
찾다가 없으면 제가 가지고 있는 파일로 제본해서라도 형제님께 꼭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누님이야기 가슴이 아파요....
한 체첼리아님 40년사 구할 수 없으면 괜찮습니다. 제본까지 해서 보내지 마세요 50년사 나오면 그 때 하나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