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시각장애인 최초로 맨해튼 음대 진학하는 김지선 씨
“장애의 벽 넘어 당당하게 세계 무대에 오를 거예요”
김지선 씨가 처음 악기를 배우려 할 때 주변에선 걱정부터 내비쳤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고 했을 땐 “괜찮을까?”라며 우려했고, 대학 시절 실내악을 앞두고는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김지선 씨는 “왜 안 되지?”라며 편견에 당당하게 맞섰다. 염려와 우려의 눈빛은 곧 믿음과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는 최근 미국 맨해튼 음대 대학원 장학생 입학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맨해튼 음대 대학원에 기악 전공으로 시각장애인이 입학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Q. 맨해튼 음대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A. 감사합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얼떨떨해서 실감이 나질 않았어요.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내가 마침내 해냈구나 싶어요. 많은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 혼자만이 아닌, 모두 함께 이룬 성과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이 순간도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Q. 처음부터 유학을 꿈꿨나요?
A. 유학을 계획한 건 2년 전입니다. 지난 2018년 미국 카네기 홀에서 연주를 끝낸 뒤, 관객으로 오신 줄리아드 음대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 공부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셨죠. 그때 제 연주에 확신이 생겼고, ‘그래, 한번 도전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세계인의 정서와 문화를 더 깊이 느껴보고 싶었고, 동시에 제 음악 세계도 넓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1년 동안 차분히 준비했는데, 정말 이렇게 합격할 줄은 몰랐어요. 물론 유학 생활은 비장애인에게도 쉽지 않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미국은 사회적·제도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터라 크게 걱정하진 않습니다. 학교에선 제 사정을 듣고는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Q. 주변 반응이 뜨거웠겠어요.
A. 난리가 났죠. 같이 음악하는 선후배와 동료, 선생님까지 잘됐다며 축하해주셨어요. 부모님은 기쁘지만 걱정도 큰 것 같아요. 믿어 달라,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마음을 놓지 못하세요. 특히 아버지가 많이 울적해 하세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음악을 하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 한빛맹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당시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대구에 남아 계셨거든요. 아마 그때가 생각나시나 봐요. 안타까운 건 코로나19로 학기가 늦춰졌다는 점이에요. 본래 9월부터 시작인데, 내년 1월로 학사 일정이 바뀌었거든요. 합격 소식 후 ‘어떤 사람과 음악적 교류를 나눌 수 있을까, 어떤 연주를 함께할 수 있을까’ 하며 들떠 있었는데, 조금 맥이 빠지기도 해요. 학교에선 장학금은 물론이고 일상생활 전반에 도움을 줄 친구까지 지원해준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동안 과제나 연주회로 바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들을 연습할 시간이 없었는데, 요즘 그 곡들을 하나하나 연주하고 있어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의 전화 영어회화 수업도 신청했고요.
Q. 언제 처음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나요.
A. 망막색소변성증으로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어요. 어린 시절 동요, 가요, 클래식 등 음악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좋아했고, 장난감 피아노를 치며 놀았죠. 다섯 살 때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학원을 찾아갔는데, 처음에는 시각장애인이라고 거절당했어요. 원장님을 조르고 졸라 간신히 배우게 됐죠. 그런데 제가 손이 작은 편이라 피아노를 치기에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인생의 첫 시련이었죠. ‘정말 좋아하는데 왜 못하게 할까, 잘할 자신이 있는데 왜 안 된다고만 하나….’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서 낯선 악기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반짝반짝 작은 별’이었는데, 마치 저를 감싸 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바이올린이었죠. 그날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반짝반짝 작은 별’은 제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후에는 여러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Q.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겠죠?
A. 장애가 있다고 해서 슬프지는 않아요.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편견과 차별 때문에 위축된 적은 더러 있어요. 우선 시각장애인 음악인이 으레 겪는 어려움이 제게도 찾아왔습니다. 바로 점자악보를 구하는 일이었죠. 이제는 많이 개선됐지만, 그때만 해도 점자악보 구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결국 엄마가 음악 이론을 독학해 직접 악보를 점역해주셨죠.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부모님께서 ‘기회는 있다’, ‘가고 싶은 길을 가라’며 응원해주셨죠. 생각보다 장애의 장벽이 꽤 높더라고요. 대표적인 일화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시절 실내악 연주에서 번번이 제외된 일이었죠.
Q. 실내악이면 협주 형식이겠군요.
A. 맞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이라면 마땅히 참여해야 하는데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계속 제외된 거죠. 실내악은 협주할 때 자신의 연주 파트에서 다른 연주자와 눈을 마주치고 들어가야 해요. 일종의 신호인 셈인데, 제가 눈 맞춤이 불가능하다 보니 실력 이전에 그냥 열외가 된 거죠. “내가 이러려고 이 학교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라며 화도 많이 냈어요. 결국 총장님을 찾아가 부당함에 대해 토로했고, 이듬해서야 실내악 팀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Q. 큰 변화를 이끌었군요.
A. 그런 셈이죠. 협주할 때면 제 연주가 시작되기 전 모든 파트의 선율과 곡 전체의 박자를 외우고 익혔어요. 그 결과 “안 보이는데도 보이는 사람보다 박자를 더 잘 맞춘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사중주단 연주에서 피아노 솔로가 박자를 놓쳤을 때 제가 발 구령을 해서 팀원들이 위기를 넘긴 적도 있어요.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협주가 가능하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준 겁니다. 그 선례로 인해 이후 입학한 한빛맹학교 출신 후배들은 바로 실내악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시각장애인이라서 안 된다”는 말만 듣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지금 돌이켜봐도 참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장애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생긴 차별, 그로 인해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니까요.
Q. 독주와 협주 중 어떤 걸 더 선호하나요?
A. 저는 협주가 좋아요. 여럿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언제나 놀라움을 주거든요. 음악에 대한 공감과 소속감도 크고요. 바이올린은 음역이 넓은 만큼 소화할 수 있는 범위도 큰 악기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분들과 다양한 무대를 만들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슈베르트나 드뷔시의 곡을 좋아합니다.
Q. <손끝으로 읽는 국정> 독자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어린 시절 제가 바이올린 소리에서 희망을 품은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제 연주를 듣고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당당해져야 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어쩌면 우리가 위축된 모습을 보였기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당함은 누군가로부터 배우거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올곧게 꿈꾸길 바랍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시겠습니까”라고 목소리를 내면 좋겠어요. 미래의 자신을 향해 담대하게 걸어가세요. 그 길을 걷다 외로울 때 혹은 상처를 받았을 때, 제 바이올린 연주가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김수정·신혜령 기자
* 손끝으로 읽는 국정 156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