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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전 졸업과 동시에 헤어진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42년이 지난 지금 동창회 모임에서 만나는 감격,흥분을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다 다닌 학교가 몇 개 되어 동창회 모임이 있지만 그 모임에 한번도 나가본 일이 없는 사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42년이 지나면서 동창회 모임을 16번이나 했는데도 무심했던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런 사람은 용서받기 어려울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뭐 그리 대단한 삶을 산 것도 아니고 그리 생활이 바빴던 것도 아닌데 동창회 모임에 나가지 못했다. 무슨 선거나 행사가 있으면 동창회에 모여 ‘우리가 남이가’하면서 패거리를 짓거나 아니면 무슨 학교 동창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이런 것이 싫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지만 동창회 모임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동창회에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내가 다닌 시골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회의 경우는 다르지. 하지만 같은 반을 6년이나 해서 철식이 말대로 ‘누구 집 숟가락이 몇 개인 줄 다 알 정도’ 의 초등학교 동무 관계, 도시 학교와 달라 학생들이 가족처럼 지내는 울릉도 지역 학교의 정서와 문화, 바다 건너오는 동무들이 있어 동창회 모임에 한밤을 같이 지내야하는 사정을 도시에서 나서 자란 가족들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실제로 몇 년전 동창회 모임에 나가려다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 포기하기도 했다. 이유같지 않은 이유지만 내 기억 속에 있는 예쁘고 맑은 소년,소녀들을 42년이 지나서 보면 실망할지 모른다는 생각, 동무들을 보는 감격은 있지만 이렇게 늦게 보게 되어 밀려올 후회 같은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동창회에 가서 동무들을 보는 것이 두려웠음을 고백한다.
작년 7월 명숙이 아버지 초상 때 몇몇 동창생을 본 후 동창회 모임에 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올해 2월 4일 모임이 정해지고 유철이로부터 동창회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꼭 가야지. 유철이 본인도 10년 동안 동창회모임에 나오지 못했다. 유철이도 10년만에 나오는 동창회인데 남다른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병마를 물리치고 건강을 되찾은 상태이고 이번에 꼭 보자는 이야기가 너무 절실했다. 이번 동창회 모임이 병마와 싸워 이긴 유철이를 환영하고 격려하는 뜻깊은 자리를 겸해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며칠 전부터 가슴 설렜다. 소풍을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새옷을 사서 내일 학교에 입고가기를 기다리는 소녀처럼. 2월 4일 오후 2시 드디어 집을 떠났다. 2시 50분 쯤 지하철 신천역에서 진근이 차에 동승했다, 미리 유철이와 상현이가 타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반갑고 그리운 얼굴들. 상현이는 다행스럽게 육지에 볼일이 있어 대구에 온터라 오늘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동해해상에 파도가 높아 울릉도에 사는 동무들은 모임에 오지 못했다. 운전자 진근이가 동창생들이 자기 차에 탔다고 기분이 좋아 오버(over)해서 너무 세게 달릴까 은근히 걱정했다. 3시 50분 경 모임 장소인 경주 율동 명숙이 집에 도착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경희, 인숙, 정순 1등. 경희는 작년 7월 보았고. 며칠 전 진근이에게 누가 모임에 오는지 묻다가 “인숙이 오느냐”고 물었다. 이 전화를 아내가 들었다. (“인숙아, 너는 내 아내가 처음으로 이름들은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이란다. 이 모임에 오려고 애쓰는 너거 남편 내년에는 꼭 데리고 오너라.”) 정순이는 대번에 알아봤다. 중간 마을과 웃구역을 가르는 길에서 웃구역 쪽으로 있었던 첫 번째 집에 살고 있었던 동무였다. 우리보다 10살 쯤 많았던 잘 생긴 오빠를 기억한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후 속속 동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기만, 재석, 상호, 일란, 복용, 재만, 성우, 상기, 영옥, 복용, 태숙, 순자. 기만이 소식이 참 궁금해서 철식이에게 소식을 물어본 적 있다. 부산에서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 들었다. 크게 변하지 않아 알아봤다. 재석이는 옛날 모습 그대로고. 동창생들 중 제일 변치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4학년 때 전학와서 처음 같이 앉았던 상호도 대번에 알아봤다. 조금 장난기가 있어 보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상기는 몇 년전 통화한 바 있다. 어릴 때 귀엽게 보이던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어른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신포구와 살강터 가는 쪽 언덕에 집이 있었던 복용이도 알아봤다. 카페사진을 통해 미리 예습한 결과다. 재만이는 울릉도 근무시절 봤으니까 낯익었고. 태숙이는 어릴 때는 홀쭉했는데 나이에 걸맞게 살이 좀 붙어 중년여성의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지난 7월 카페에 올린 글에서 ‘순자는 기억이 나고 알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당장 알아 맞추지는 못했지만 2분 쯤 지나 알아봤다. 모임에서 순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했다. 키가 좀 작았던 영옥이는 나이에 맞게 훌쩍 커져 있었다. 영옥이는 작년인가 자부님을 보았다 들었다. “아이구, 시어머님”. 어둠이 깔려서 해분, 명희가 KTX 열차편으로 도착했다. 명희는 성남에서 먼길을 달려왔다. 해분이는 지난 7월 보았고. 명희는 오랜만에 보았다. 명희 자신은 20년 전 쯤 나를 봤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간의 관계는 참 묘하다. 학교 졸업 후 42년만에 만났는데도 어제 보고 오늘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끊어진 42년 세월은 없었다. 지금 경주 명숙이 집에 모인 것이 마치 학교다닐 때 유철이 집에 모인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유철이 집에 많이 모였으니까. 만나서 조금 있으면 그냥 옛날 학교시절로 돌아간다. 체면이나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고 상대에 대해 긴장하거나 견제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오래 같이 산 부부관계보다 더 편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4시 30분 경 부터 부엌 옆, 바람 통하는 공간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다. 숯불과 석화탄에 삼겹살을 구웠다. 음료수와 약주가 곁들여지고. 음료수와 약주를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저녁은 정식 만찬수준으로 풍성했다. 다 좋았지만 일란이 가져온 오징어 내장국이 특히 좋았다. 과메기,회,떡,호박죽이 나오고. 언제 이렇게 준비했는지. 동창생들이 한자리에서 앉아 저녁식사하는 것이 나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애정 표시의 극치는 같이 식사하는 것이 아니던가. 먹으면서 이야기해보라. 같이 식사하는 상대방이 얼마나 예뻐보이는지. 얼마나 이야기가 잘 풀리는지.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준비한 사람들의 노고를 기억한다.
저녁 식사 후 7시 30분부터 총회를 했다. 총회가 끝난 뒤 본격적인 환담이 시작되었다. 성우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흉내를 내어 분위기를 돋구었다. (“성우야, 내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흉내네다오. 연습하면 안되겠니.”) 진근이가 웃기려고 질펀한 말을 꺼내자 일란이가 ‘이렇고 저렇고’하면서 응수하자 모두 웃고. (“일란이, 말 잘하네. 학교다닐 때도 그랬니.”) 진근이가 일란이에게 전화길게 한다고 일란이 자신은진근이에게 “전화비 내 놓아라”하고 이야기듣고 있던 동창생들은 ‘무슨 관심이 있네 마네’하면서 둘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진짜 무슨 관계나 있는 듯 얽어매고 골려주고 웃고 재미있게 지켜 보았다. 전부 할말이 많으니까 이야기 차례를 잡기 어려웠다. 지방방송이 생기고. 누가 번호표를 뽑아 차례로 이야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모임 장소에서 본 경주 쪽 야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밤공기는 한없이 상쾌했다. 밤이 깊어지자 사정이 있는 동무들은 귀가하기도 했다. 꼭 자고 가야만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인데.
이런 자리에 당연히 나오는 것이 추억담이다. 4학년 때 있었던 ‘집단결석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사정상 집단결석에 가담할 수는 없었다. 누가 나보고 집단결석에 가담하자고 꼬드겼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없다. 다만 교장사택인 우리 집에 가담한 학생들이 사과하러 온 것만 희미하게 기억한다. 풍금을 잘치고 실력 있었던 선생님 이야기도 있었고. 6학년 때 철식이가 선생님께 뺨을 맞아 입안에 피가 나서 입안에 피릉 머금고 있었던 이야기도 나왔다. 피를 뱉으면 선생님이 미안해할까봐 숨도 못쉬고 입에 피를 머금고 있었던 초등학생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어른도 갖지 못할 마음크기를 초등학교 6학년짜리 학생이 가지고 있었다니. 교사에게 꿀밤이라도 한 대 맞으면 경찰서에 신고하는 요즘 학생들과 비교하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람 수준이 다른 것이지. 내가 철식이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어쩌랴. “철식아, 여자동창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희들이 고무줄 놀이할 때 너가 고무줄을 가장 많이 끊었던 사람이라 하더구나”.
같은 사건인데 한사람은 기억하고 또 한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20대 초반에 내가 남양에 살 때 도동에 가면서 사동 일란이 집에서 물 얻어먹고 잠시 쉬어 간 것을 일란이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기하고 학교 복도 옆 통로에서 있었던 일을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기는 기억하고 있었다. 유철이가 졸업식날 같이 사진을 찍었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무슨 청문회가 있어 증인들이 기억이 없다고 말하면 발뺌한다고 욕하는데 진짜 기억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명희 너는 기억하겠지. 5학년 때 올림픽경기 입장식 라디오 중계방송을 담임선생님이 교탁에서 들었는데 내가 앞에 나가 담임선생님과 같이 중계방송을 들었던 것을”. 그날 모임에서 명희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 같이 기억을 맞추어보지는 않았다. (“명희야, 잠시 이야기하다 말았는데 인터넷 닉네임을 만들려거든 ‘섬백리향823’으로 해라. ‘섬백리향’은 울릉국화에 해당하고 ‘823’은 현포리 우편번호 뒷자리 숫자다.”)
우리가 6학년 때 육상,핸드볼 경기에서 군내 우승을 차지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5학년 때 우산중학교 교장기 타기 핸드볼 대회에서 저동초등학교에게 3:2로 지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때 체육선생님은 배가 있었는데도 현포까지 걸어갈 것을 지시했다. 일종의 벌인 셈이었다. 배는 고팠다. 비를 맞으면서 체육선생님과 함께 하염없이 걸었다. 걷는 도중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내년을 기약했다. 그 후로 이어진 연습,훈련은 상상을 초월했다. 육상도 그렇고 핸드볼도 그렇지만 다른 학교 연습량(시간)의 4배, 연습세기(강도)의 4.5배로 연습했다. 아침에 비오기를 바랬다. 비오면 연습을 안할 수 있으니까. 비가 와도 체육선생님은 우리를 교실에 데리고 들어가 패스 연습을 시키거나 칠판을 이용하여 공격수비 전술을 가르쳤다. 요즘 실내 체육관에서 연습하거나 농구경기 중계방송에서 감독이 선수들 앞에서 작전을 설명하기 위해 무슨 판을 들고 바둑알을 이동시키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영규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운동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그 기억은 나에게 없다. 그런 말이 있었는지 아니면 모래주머니를 차고 하루 정도 연습을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준비운동(워밍업)으로 노인봉 너머까지 뛰어가기도 하고 세상에. 핸드볼 공격수비 연습을 하는데 공격측이 득점에 실패하면 수비측이 공을 운동장 저멀리 힘껏 던져버린다. 그러면 득점에 실패한 공격측 선수들은 모두 뛰어가서 공을 가져와야 했다. 이런 식으로 훈련을 했으니 주력과 체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면 시합에 들어가서 전반전에서 후반전까지,예선전에서 결승전까지 똑같은 체력과 주력으로 전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한국 축구국가 대표팀을 세계 4강까지 올려놓은 히딩크 감독이 한 것이 바로 우리가 학교시절 한 것이다. 무슨 우리가 히딩크식 훈련방법의 원조니 히딩크 감독이 우리를 본받았느니 하는 것은 아니고. 과거 언제 여자 배구 국가 대표선수들이 훈련이 힘들어 태능선수촌을 집단 이탈한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연습이 힘들어 우리가 그때 연습을 거부하고 집단행동을 할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감히 못했지. 5학년 때 하도 연습이 힘들어 어느 날 체육선생님께 숙제를 면제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체육선생님은 그렇게 해주겠노라 했다. 당연히 우리 담임선생님과 의논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의논이 없었거나 체육선생님이 의논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같았다. 숙제검사가 있었던 어느 날, 숙제를 안하고 바보같이 담임선생님께 “체육선생님이 숙제를 하지 말라고 해서 숙제를 안했습니다.”하니까 담임선생님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담임선생님이 “그러면 너는 체육선생님께 가서 글 배워.”하셨다. 맙소사. 참 부끄러웠다. 내가 어리석었지. 담임선생님께서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까. 그 후로 이날까지 살면서 이런 실수는 잘 하지 않는다.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알고 있었던 것인데 하면서 안타깝게 여긴다.
그때 체육선생님은 국가대표감독을 해도 될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 생각했다. (선생님은 안동분이신데 1968,1969년 당시 선생님의 안동집 주소를 기억한다.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주하동>) 도동에 시합을 나가면 선수들이 잠자리가 바뀌어 잠을 자지 못해 내일 시합을 망쳐 놓을까봐 낮잠을 재우셨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울릉중학교 밑 약수식당 자리에 있었던 여관방에 담요를 쳐서 어둡게 해 잠자게 했다. 밤 같은 환경을 만들려고 한 것이지. 낮에 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촌놈들이 읍내에 갔는데 모든 것이 신기해서 어떻게 낮에 자겠는가. 핸드볼 연습을 할 때 운동장을 반으로 나누어 공격수비 연습을 하는데 공격하는 측이 슛찬스도 아닌데 무리하게 슈팅을 날려 득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선생님은 "볼을 아껴라", "무리하지 마라"하셨다. 지금까지 살면서 안되는 것을 억지로 무리하게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리대로 여유를 가지고 살거나 일한다. 이것은 그때 핸드볼 연습하면서 모두 배운 것이다. 400m 이어달리기 연습을 할 때 1번 주자가 왼손에 바통을 쥐고 바로 2번 주자 오른손에 전달하고 2번 주자는 오른손에 쥔 바통을 바로 3번 주자 왼손에 전달하고 3번 주자는 왼손에 쥔 바통을 바로 4번 주자 오른손에 전달하는 것이 당시 육상지침서에 나와 있는 방법이었다. 간결하고 빠른 방법이었다. 현재 올림픽 대회 이어달리기도 다 그렇게 한다. 하지만 체육선생님께서는 바통을 떨어뜨리는 순간 400m 이어달리기 우승은 물건너 간다보고 이런 방법보다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구식 방법)을 선택했다. 즉 2,3번 주자는 오른손에 바통을 받아 왼손으로 바꿔 달리다가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안전하게 전달하는 방법. 스피드보다 안정을 택한 것이다. 우리는 이 방법으로 바통터치를 눈감고도 할 수 있도록 연습을 했다. 이 부분에 대해 영규와 기억을 맞춰보니까 영규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군민체전에서 우리가 400m 이어달리기에서 우승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산국민학교인가 바통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용의주도함, 준비성, 열정,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체육선생님은 국가대표감독을 했어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준 높은 이론을 배웠고 과학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런 과정에서 몽둥이(빠따) 한 방 맞아 본 적 없다. 다른 학교 운동연습 방법은 주먹구구식이었던 것 같고 연습도 우리만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핸드볼 시합에 나가보니 당시 저동초등학교 선수들의 무식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리는 '주장토스'(시합에 앞서 심판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장선수가 뭘 던져 자기편 진영을 결정하는 것.)라 배웠는데 저동국민학교 선수들은 "장쪼하자"하고 했다. '장쪼'라니 웬말? ('장쪼'는 '장깸보'라는 국적불명의 말을 또한번 제멋대로 바꾼말. '장깸보'는 우리말 '가위 바위 보'에 해당한다.) 작은 시합에서는 주장토스 대신 간편하게 '가위 바위 보'로 진영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쪼'가 뭐니 '장쪼'가. 우리는 후보선수 혹은 교체멤버라 배웠는데 그들은 ‘보결’이라 했다. 무슨 장애가 있어 대신 들어가 메꾸어준다는 의미가 강한 말. ‘보결’이 대체 뭐니. 말을 사용해도 무식하기 짝이 없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경기하는 것도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힘은 있고 덩치는 컸는데 전혀 준비 안된 오합지졸 같은 모습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우산국민학교 6학년 핸드볼 선수로 이준희(원래 의성사람인데 국민학교 5,6학년 때 울릉도 도동에 이사와서 살았다. 나중에 씨름천하장사가 되었다)가 있었다. 이준희, 남희철, 김균식 이 세 선수가 장군 같은 덩치였다. 조광혁 선생님의 아들로 덩치가 좀 컸다는 쌍둥이인 성용,경용이는 이 세 사람에 비교하면 한참 작았고. 그들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그때 우리는 우산국민학교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우산국민학교에 졌다. 1년 후 우리가 6학년 때는 핸드볼경기에서 15:1로 우산국민학교를 이겼으니 한마디로 묵사발을 낸 것이지. 5학년 때 빚을 갚은 것이지. 읍내 두 학교가 울릉도에서 가장 촌에 있는 현포국민학교에 핸드볼, 육상경기에서 졌으니 두 학교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우리학교에 진 저동초등학교, 우산국민학교 체육선생님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분들의 이름과 얼굴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으나 여기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
저녁에 이야기하는 도중 선희가 전화를 해왔다고 했다. 삼척에서 전학온 동무가 있었지. 정숙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명숙이가 맞는 이름이었다. (늘 우리에게 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경주 ‘본동마님’ 명숙이는 ‘명숙A’, 삼척에서 전학온 명숙이는 ‘명숙B’라 하자.) ("본동마님 명숙A야, 해마다 동창회 모임 장소를 제공해주어 고맙다. 한번 쯤 거절해도 될텐데. 우리는 너 덕분에 참 좋은 곳에서 모임을 할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단다. 남편되시는 분에게 우리들의 정중한 인사를 대신 전해 주었으면 한다.") 거리에서 지나가다 보면 선희와 명숙B를 알지 못하겠지만 동창회 모임 같은데 오면 알아볼 자신 있다. 이 두 사람에게 내가 잘못한 일은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혹시 나와 공통적인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 두 사람의 손을 꼬옥 잡아 주면서 따뜻한 말을 전해야 한다.
밤 12시가 지나자 한사람씩 자기 시작했다. 새벽 3시가 지나서까지 이야기는 이어 졌다. 명희, 진근, 영규, 내가 남았다. 고무줄 놀이하고 말타기 놀이하던 소년,소녀들이 어느새 반100살이 넘어 자녀들 혼인 걱정을 하다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구나. 명희, 진근, 영규에게 1등 신부감인 따님이 있는데 이들이 아직 혼처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 하다 거제도에 있는 삼성중공업이나 대우조선 근처에 방 얻어 피켓을 들고 “신랑감 나오라, 신랑감 나오라”하면서 자녀들 신랑감을 찾자는 말이 나왔다. “그 생각 아직 유효하니. 너희들이 실행에 옮기면 같이 동참할 수는 없지만 주말에 치킨이나 족발을 사들고 위문,격려차 방문할께. 힘 보태줄께. 흔들리지마.”
새벽 6시까지 한잠도 자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만 밤을 세운 것이다. 명희, 유철이가 6시 50분 신경주역에서 출발하는 KTX 열차를 타고 떠났다. 경주,건천 들녘의 시원한 새벽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두 사람을 신경주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운전자 영규, 조수 겸 네비게이트 진근. 바람잡이 겸 환송객 나. 아침 먹고 가는 것이 주인집에 폐끼치는 것을 알텐데 기어이 아침까지 얻어 먹은 사람들이 있었다. 엉덩이 무거운 사람들-나, 인숙, 정순, 진근, 성우, 영규. 상호는 마침 그날 생일이라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가족이 기다리는 울산으로 먼저 떠났다. 묵채가 대표선수로 나온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임 장소를 하나하나 떠났다. 9시 50분 경 진근이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고 12시 경 집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1박 2일 일정의 동창회 모임을 끝냈다.
바둑기사들이 바둑을 둘 때 뒷맛이 좋은 부분이 있으면 당장 결행하지 않고 아껴서 뒤로 남겨둔다. 어린 아이는 맛있는 과자는 먹지 않고 아껴서 뒤로 남겨두고 덜 맛있는 과자를 먼저 먹는다. 바둑기사나 어린아이는 뒤에 남겨둔 것이나 과자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갖는다. 바둑기사는 바둑에 이길 것같은 자신감을 가질 것이고 어린 아이는 뭔지 모를 뿌듯한 느낌을 가질 것이다. 앞에서 ‘어쩌다 동창회 모임에 일찍 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수정하고 싶다.- 나에게 동창회 모임은 뒤로 남겨둔 뒷맛 좋은 부분, 아껴둔 맛좋은 과자같은 것이었다고.그런 동창회 모임에 나갔던 것이다. 아끼고 남겨두었던 것을 나중에 맛보거나 결행했다=늦기는 했지만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나갔다. 모임 전 설렜다. 동무들과 만남은 감격과 흥분 자체였다. 동창회 모임 동안 내내 들떠있었다. 추억은 소중했다. 동창회 모임의 여운은 오래 갈 것이다. ( 2012년 2월 7일 화요일 10시 15분. 최지중 )
첫댓글 좋은글 잘읽었다. 지중이는 기억력도 좋네 구구절절 옛생각이난다. 이번일로 다음부터 모임에 자주만나자 아직까지 못다한 이야기가 나올끼다. 암튼 친구야 고맙다. 우리 다음을 기약하자 ? 한편의 소설같은 이야기 잘읽었다.
격려해주시어 고마버. 그런데 내 기억력은 이것 까지야. 더 나올 이야기는 없는디.
지금부터는 지어내어야하는데, 걱정되네. 나날이 행복하길..
친구들 댁에는 잘 들어갔나요? 얼굴 보게해준 친구들 모두~~ 감사해!
!친구는 좋은 기억 많이 하고 있구나! 사느라 늘~ 마음뿐인데 절~절~이 생각나네~ 우리 모두 오래도록 지난 추억 꺼내보면서~ 다음 만남 기약합시다.
그리고 아직 우리부친댁에 다녀 오지못했네 ~ 숙제하고 연락할께~~!
닉네임이 참 이쁘고 좋구나. 언제 닉네임의 뜻과 어떻게해서 그렇게 지었는지 가르쳐줘. 부친께 드려라 한 글이
살짝 부담을 주었구나- 급할 것 없어. 천천히 해. 글이 길어 읽느라고 고생했지. 고마워. 늘 행복하기를 빈다.
삼봉604님! 기억도 가물가물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주변인물들에 제제는 힘들엇지만 ~~ 생락 라임은 희망과 위안이되어주고 나중에 베어지지만~~ 생략``
사람은 누구나 어린시절 성장의 아픔이 제제와 같지는 않치만 있지않을까!-=- 나의 가까운 누구에게도 희망이 되어주리라 ~~주제넘게 나도 모자라면서 ~~~ 질문주어 고맙고 초등학교 1학년된기분이네 ``잘지네!~~
(라임 12.02.10. 16:43에 대한 답글) 예쁜 닉네임에다 뜻까지 예쁘구나. 그것 역시 라임 친구의
마음, 생각, 삶과 같을 것인데='희망과 위안을 주고'. / <나중에.....>는 아니고, 필요없는 말이고.
네가 지어 준 닉네임으로 처음 글 쓴다.^^ 글이 생생해서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구나. 오랜만에 얼굴 보고 지난 이야기들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 닉네임 지어 줘서 고맙다 친구야. 항상 건강하고 늘 좋은 일들만 함께 하길 바란다. ^^
니 마음에 안들 수 있는데도 받아주어 고맙구나. 자꾸 사용하다보면 익숙해져 내 닉네임이구나
싶을 것이다. '823'이 붙는순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닉네임이 된다. 구별되니까. 글이 길어
읽는다고 잠 왔지. 하고싶은 말이 하도 많아 길어져 버렸어. 만나는 것이 감동이고 대화하니 즐
겁고. 늘 건강하시고. 날마다 좋은 일많고 늘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삼봉604가 섬백리향823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