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한테 ‘카톡’이 왔다. 시내서 만나 한잔 마시자는 ‘벙개’다. 약속 시간을 3시간 남짓 남겼기 때문이다.
‘벙개’는 번개에서 파생된 신조어다. 국어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은 생활 속어다. 네이버는 이런 신조어를 오픈사전에
모아둔다. 이 사전에 따르면 ‘벙개’는 ‘동작이 아주 빠르고 날랜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온라인상에서 알아서 번개같이 만나서 헤어지는 일, 또는 그런 만남’이라고 올라와 있다.
을지로, 마포, 합정 등 세 곳을 ‘벙개’ 후보지로 이야기하다가 결국은 가장 익숙한 종로 탑골공원 근처로 정했다.
탑골공원이야말로 운종가로 서울의 한가운데 아니던가. 만나기 편하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 약속 장소로 원만한
곳이다. 탑골공원은 과거 탑공원,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도 불렸다.
‘벙개’ 장소로 최적화된 종로통
탑골공원은 조선시대 원각사 터에 세운 서울 최초 근대식 공원이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공원은 인천 각국 공동조계 안에 1889∼1890년에 개설된 만국공원이다. 탑골공원 터는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란 절이 있던 곳이다, 조선 개국과 함께 조계종 본사가 됐다가 억불숭유 정책으로 폐사됐다.
억불을 외친 조선 왕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불교에 푹 빠져 있었다. 1464년(세조 10) 불교에 심취한 세조가 원각사로 개명하고 중건했다. 세조는 효령대군의 건의로 근방 인가 200여 채를 철거하고 왕실이 주관하는 원각사란 절로 중건했다. 탑골공원이라 불리게 된 원각사지십층석탑도 이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만 해도 억불이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 때부터 강력한 억불정책이 시행됐고 연산군 때는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까지 이르렀다. 연산군은 철거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을 탑골공원으로 옮겼다.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에는 잠시 한성부 청사 일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1514년(중종 9)에 이르러서는 원각사를 헐어 여러 공용건물
수리에 사용했다. 그래서 지금은 비와 10층 석탑만 남아 있다.
일대가 탑골로 불리게 된 연유도 원각사지 10층 석탑 때문이다.
탑골에 지금처럼 서양식 공원이 들어선 것은 대한제국 시기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서울을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탑골공원도 근대화 작업의 산물이다. 탑골공원 정문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1967년 당시 파고다공원이었던 탑골공원은 현대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정문을 지금의 한옥식 삼일문으로 교체했다.
강릉 소재 국보 제51호 객사 문을 본떴다. 삼일문이란 현판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로 소위 각하체다. 뜯어낸 기존 정문은 1969년 3.1절 50주년을 기념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정문으로 기증했다.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서였다. 1975년 서울대 법대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남기고 간 것을 지금은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탑골공원 뒤는 빠져나오기 힘든 먹자골목
▲ 탑골공원 뒤편에 위치한 동대문허파집. 치마살 육회와 등록, 곱창구이가 주력 메뉴다. [사진=필자제공]
탑골공원 뒤편에는 많은 식당이 몰려 있다. 동대문허파집, 초원식당, 선비옥, 유진식당 등이 줄지어 성업 중이다.
1차는 ‘동대문허파집’으로 정했다. 신선한 치마살 육회와 등골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치마살은 치마양지 부위에서 정형한 것으로 소의 뒷다리에 인접해 있는 복부 뒤쪽 부분이다.
소 한 마리에서 약 2~3kg 정도 생산된다. 소가 쟁기질을 할 때 채찍을 맞는 부위다. 그래서 채받이살이라고도 부른다.
치마살은 고기 모양이 이름 그대로 주름치마처럼 생겼다. 치마처럼 외측 복벽을 덮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양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치마살 양지 또는 복부 양지라고도 한다. 육색은 그리 짙지 않은 진홍색이다.
고기 결이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근섬유가 그다지 굵지 않아 육질이 부드럽다.
소고기 부위에서 씹는 맛이 가장 좋기로 소문나 있다. 결대로 잘 찢어지기 때문에 육회로 먹으면 좋다.
육사시미는 보통 기름기가 없는 부위 고기를 주로 사용한다. 후지 부위, 전지와 견갑 사이 꾸리살,
엉덩이 부위 우둔, 설깃, 채끝 등이 육사시미나 육회로 먹는다.
등골은 소 척추에서 나온다. 경추로부터 요추 내부에 걸쳐있는 손가락 굵기의 하얀 호스 모양의 골수다. 지방이 풍부하고 독특한 풍미를 가지고 있다. 취급하는 식당이 많지 않다. 입 안에 넣고 몇 번 씹으면 ‘크리미’ 하단 탄성이 나온다.
‘동대문허파집’은 소주 한잔 마시기 딱 좋은 공간이다. 함께 간 일행과 자리에 앉자마자 육사시미, 등골, 모듬곱창구이를 주문했다. ‘동대문허파집’ 치마살 육사시미는 붉은색이 선명하고 식감이 쫄깃하다. 근섬유 결과 반대 방향을 칼을
넣어 끊어내서 부드러움을 더했다. 다른 메뉴를 이것저것 접하려면 반 접시를 주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종대와 횡대를 갖춰 가지런하게 나온 등골은 선도가 뛰어나다. 모듬곱창은 곱창, 대창, 허파, 간, 천엽 등이 골고루
들었다. 감자를 굵직하게 썰어 넣어서 개인적으로 좋았다. 곱창 기름에 구워 먹는 감자 맛은 가히 일품이다.
돼지기름 사용한 녹두지짐 고소함 폭발
▲ 유진식당은 평양냉면과 녹두지짐으로 유명하다. 이날은 돼지수육도 곁들였다. [사진=필자제공]
2차는 인근 ‘유진식당’으로 옮겼다. 멀리 가지 않고 인근에서 차수를 늘리는 것이 이번 ‘벙개’의 특징이다. 특징을 규정하는 것은 멤버다. 유진식당은 처음엔 국밥 전문점이었다. 그러다 값싸고 맛 좋은 평양냉면이 젊은 층 사이에서 유명해지며 평냉성지가 됐다. 또 돼지기름으로 부친 고소한 녹두지짐과 소·돼지수육, 홍어찜 등이 인기를 누리면서 종로 맛집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지금 대표의 부친인 문용춘 씨가 1968년 낙원상가 골목에서 북한식 순대와 국밥 전문점 ‘대동강’으로 시작했다.
북한 출신 실향민다운 상호다. 1985년 식당을 폐업한 뒤 1988년 현 위치에 ‘유진식당’이란 상호로 식당 문을 열었다. 개업 초기에는 실향민과 노년층이 많이 찾았다. 지금은 젊은 평양냉면 마니아들도 많이 찾는다. 소다 향이 물씬 나는 면발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지만 이를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 좋은 가성비가 매력 포인트다.
연평도 심해 자연 맛 살린 게장 유명
▲ 큰기와집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은 자연의 맛을 고스란히 살렸다고 평가하고 싶다. 마무리는 버섯들깨탕이 좋다.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을 하면서 숨을 돌린 후 3차는 헌법재판소 앞 ‘큰기와집’을 갔다. 게장이 유명한 곳이다.
소금게장, 간장게장, 양념게장 3종이 메뉴판에 있는데 소금게장은 사전 주문이 필요하다. 만들어 놓고 판매가 되질
않으면 살이 흐물흐물해 지기 때문이다. 게장에 쓰이는 꽃게는 서해 연평도 연안에서 잡아 올린 것을 사용한다.
간장게장은 7년 된 조선간장으로 담근다. 약재를 넣고 끓인 간장이라는데 약재 맛이 옅어서 거부감이 덜하고 매우
자연스러운 맛이 난다. 간장은 한 컵 벌컥 마시고 싶을 정도로 짜지 않고 혀에 착착 감긴다.
과거 미쉐린가이드 원 스타를 받은 저력 있는 식당이다. 종로구 소격동에 있다가 현재 자리로 옮겼다. 이전 이유는
임대료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당시 미쉐린은 “청주 한씨 집안의 300년 된 씨간장을 이용해
간장 게장을 담그는데 특유의 깊은 감칠맛으로 유명하다”고 평가했다.
양념게장의 양념은 진심 ‘밥도둑’이다. 고추장과 고춧가루의 절묘한 조합으로 맛이 ‘내추럴’하다. 은근한 매운맛이 천천히 치고 올라오는 맛도 매력적이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한테는 다소 힘든 맛일 수 있지만 도전을 한번 해봄직하다.
다양한 반찬이 제공되는 것도 특징인데, 한정식 한상차림을 능가하는 솜씨와 구성이다. 반찬 하나하나 맛을 제대로
살렸고 재료 또한 좋은 것을 사용했다. 가격이 비교적 무겁지만 맛을 보면 타당한 가격임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음식의 품격을 살린 방짜 기물도 좋았다. 게장에 감춰진 비릿한 맛은 버섯들깨탕으로 마무리하면 좋다.
유성호 맛 칼럼니스트
첫댓글 아침부터 땡기는 안주거리~ㅎㅎ
와ㅡ벙개 멋지게 맛나게 했네요~쩝~^^
종로3가는 언제나 가보고 싶은 골목이지요.
언제 번개코스로 한번 잡아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