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아의 대항해 시대
페니키아인들이 거래하는 지역이 이렇게 많고 품목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도 놀랍지만, 실제로는 엘바 섬에서 채굴되는 철광석,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잉글랜드 남서부 콘월 지방의 주석과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해안의 모피와 호박을 입수하여 거래할 정도였기에 더 광범위 하였다. 이는 기원전 4세기 로마의 시인 아비에누스가 그의 시 <오라 마리타마에>에서 기원전 6세기 페니키아의 기록을 인용함으로써 확인되었는데, 히밀코라는 카르타고의 항해사가 영국으로 가는 항로를 알아냈고, 실제로 그곳에서 교역을 행했다는 내용이다.
일부에서는 홍해를 통해 인도, 심지어 중국까지 진출하여 무역로를 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믿기 쉽지는 않지만 페니키아인들이 아메리카까지 진출했다는 ‘설’까지 있다. 위에서 언급한 히밀코의 항해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히밀코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바다는 항해하는 데 무려 넉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다가 너무 넓어서 바람의 힘으로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없었고, 바닷물은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울 사이에 해초들이 튀어 나왔는데, 그 해초가 마치 덤불처럼 우거져서 배가 걸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 바닷물이 깊지 않아서 바닥에는 얼마 안 되는 물이 간신히 차 있을 뿐이었다. 바다의 야생동물들이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출몰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배 사이로 바다괴물들이... '
일부 학자들은 바하마 제도의 얕은 사구가 기록의 묘사와 비슷하고, 항해에 넉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아마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 아닐까? 라고 주장한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는 환각제나 마취제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선 미량이긴 하지만 담배와 코카인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담배와 코카인은 근대 이전까지는 신대륙에서만 자생했다는 상식을 상기해보면 묘하게 성분이 비슷했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카나리아 제도가 아메리카로 가는 일종의 기항지로 사용되었다고도 하고, 발굴된 카르타고의 주화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묘사되었다고 한다. http://phoenicia.org/america.html
당시의 항해술로는 대서양을 건너는 게 무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도 당연히 있겠지만 노르웨이의 탐험가 헤위에르달이 현대 장비의 도움 없이 일엽편주에 불과한 콘티키 호로 태평양을 횡단하고 갈대로 만든 라 호로 대서양을 건넜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BC 600년경,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는 아프리카가 완전히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풍문을 듣게 되었고, 페니키아 선원들을 고용해 이를 확인해보려고 했다. 그는 고대의 이사벨라 여왕이나 엔리케 항해왕이라 해도 될 것이다. 역발상을 해서 홍해 해안선을 따라 항해를 시작한 페니키아인들은 약 1년 이상의 긴 항해 끝에 리비아로 귀환하는 인류 최초의 아프리카 일주 항해를 완수했지만 그냥 묻혀버리고 말았다.
페니키아 쪽의 기록은 사라지고 당시 그들과 경쟁했던 그리스의 학자나 역사가들의 기록만 남았고, 그리스인들이 이들의 주장을 거짓말이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이었다. 이 항해에 대한 ‘소문’을 기록한 헤로도토스는 '해가 오른쪽에 떠있다는 게 말이나 되나?' 라는 소감까지 남겼는데, 역설적으로 이런 기록 때문에 현대에 와서 페니키아인들의 항해가 진실로 규명된 셈이다. 적도를 지나 남반구로 들어가면 해가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팔방미인’ 페니키아인들의 단점 중 하나는 문학적 재능의 부족인데, 이 항해를 ‘오디세이아’처럼 이야기로 잘 엮었다면 일부라도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이 항해에 큰 감명을 받은 네코 2세는 홍해와 나일강을 잇는 대운하를 뚫으려 공사까지 시작했지만 중단하고 말았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제들의 반대였다. 이 사업이 완성된다면 가장 이익을 볼 집단은 페니키아 인들이었고, 이방인들을 위해 이런 사업을 하지 말라는 ‘신탁’이 내려졌다는 사제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역시 기록에는 없지만 이 사업에 페니키아 인들의 자본과 기술이 투자되었음은 거의 확실할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기항한 적이 있는 포구, 별과 바람, 조수 따위의 항해상의 비밀과 지식을 철저하게 지켰다. 해도나 항해기구가 없었던 당시에 노련한 항해자들이 실제 관측했던 것들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전승이 항해술의 기초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들은 오랫동안 육지를 안표(眼標)삼아 주간에만 항해했으나 머지않아 ‘작은곰자리’ 성좌를 이용하여 야간에도 항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 성좌를 ‘마차’라고 불렀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안내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성좌와 관련된 많은 신화를 가진 그리스인도 당연히 별을 항해에 이용했고, 그들이 작은곰자리를 ‘포이니케(페니키오)’라고 부르는 이유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천문학 지식은 분명히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것이겠지만, 전래된 경위와 그들이 이를 항해술에 활용한 경과는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