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이방주
삼계탕이 배달되었다. 여름감기로 입맛을 잃은 시부모를 위해서 며느리가 보냈단다. 뚜껑 있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서 아직도 뜨겁다. 백김치, 깍두기, 파 송송, 후추소금까지 정갈하다. 새로 담근 열무김치를 꺼냈다. 동치미무가 있었으면 금상첨화겠다. 아삭아삭 풋고추도 내놓았다. 상은 금방 차려진다. 아내가 다른 그릇에 다시 담아 먹자고 하는 걸 그대로 먹자고 했다. 내게는 격식을 차릴 겨를이 없다.
우선 김칫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입안이 얼얼하다. 이 순간을 기다리며 목욕재계하고 얌전하게 엎드린 닭님을 뒤집어 상면했다. 젓가락으로 찍어 가르기에는 등짝이 너무 여리다. 이미 반쯤 갈라진 배를 열었다. 찰밥 덩어리가 얌전히 좌정하였다. 대추, 밤을 건져 잔반통으로 보냈다. 쓴맛은 빨아들이고 단맛을 내보냈으니 제 할 일은 다 했다. 파 송송을 국물에 확 뿌렸다. 그래야 국물이 향기롭다. 시원하다. 구수하다. 깔끔하다. 계륵이 이렇게까지 맛이 있었나 되물어 본다. 열일곱 살 때 할머니 장례를 모시고 나서 사나흘 쯤 오지게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가 잡지 못하는 닭을 큰형이 잡아주어 고아 먹고 바로 일어났던 기억이 났다. 닭님은 헤매고 있는 낡은 입맛을 바로 불러들였다.
닭은 신이다. 이른바 신라의 ‘계신(鷄神)’이란 말이 이를 증명한다. 뜨거운 국물이 부어올랐던 목구멍을 부드럽게 달래고, 한 숟가락 찰밥이 가래를 삭였다. 콧물이 마르자 얼굴이 보송보송해졌다. 기침까지 멎었다. 2키로나 빠진 몸이 바로 회복될 것 같았다. 뼈에 붙은 한 점 살까지 다 빨아먹었다. ‘그대를 치료하는 분은 닭님입니다.’ 닭은 오늘 내 육신의 신이다.
닭은 시작의 신이다. 닭은 하늘과 땅이 열리는 시작을 알려준다. 천지개벽의 신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육사의 시가 아니라도 닭은 지금도 새벽을 알린다. 새벽이 되면 닭은 청주에서도 울고 제주에서도 운다. 인도에서도 울고, 유럽에서도 닭이 울어 새벽을 부른다. 어머니는 닭 울음을 듣고 가마솥에 불을 지폈다. 새벽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일터로 출근했다. 사람들은 닭 울음으로 하루를 준비한다. 역사는 계명(鷄鳴)으로 시작된다.
신라는 닭으로 시작되었기에 ‘계림(鷄林)’이라고 했다. 알로 태어난 박혁거세가 탄생한 우물을 나정 또는 계정(鷄井)이라 했고, 왕비는 알영정(閼英井) 가 계룡(鷄龍)에게서 태어났다고 신화는 전한다. 김알지 탄생신화에도 자줏빛 구름 가운데 황금궤짝이 내려올 때 흰 닭이 울었다고 전한다. 닭은 시작과 탄생의 신이다. 닭은 신라인의 정체성이다.
닭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신라, 고구려, 마한, 가야가 모두 닭을 신성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남 고성군의 3~4세기 고분군 근처 제사 터에서는 닭 모양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닭 벼슬 모양의 새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장식이 달려 있다. 마한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전남 영암에서도 같은 장식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토기나 청동기에 닭을 형상한 장식이 보이는 것은 민족의 공동심의를 반영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유물을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은 내세의 영생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닭은 탄생과 시작의 신이기도 하지만 내세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죽음과 영원의 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닭을 신성시하는 심의는 일본까지 전해진 것 같다. 규슈 지방의 무덤에서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죽음 이후에는 닭이 정령을 관장할 것이라는 사유가 반영된 것이다. 이만큼 닭을 신성시한 것이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서 마을 어귀에 세웠던 솟대에는 새가 소망을 하늘에 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있다. 높은 장대 꼭대기 세 갈래 가지에 세 마리의 새를 앉혔다. 이 새를 봉(鳳)이라고 하지만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사는 닭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새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므로 하늘에 인간의 소망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 가까이 사는 닭을 조류를 대표한다고 믿는다.
새는 인간의 정령을 하늘로 실어 나를 수 있다고 믿었나 보다. 티베트 지방의 조장(鳥葬) 풍습은 시신을 해체하여 독수리나 까마귀에게 먹이로 주는 장례 제도이다. 새가 인간의 영혼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 신사의 입구의 문 역할을 하는 ‘도리이’는 새의 날개 모양을 형상한 것으로 보인다. 죽은 사람이 천상으로 비상하기를 바라는 심사가 담겨있다.
닭을 신성하게 여기는 전통은 인간사와 함께 한다. 혼인식에서도 암탉과 수탉을 상 위에서 마주보게 한다. 닭이 복을 부른다는 의미이다. 길한 곳에 쓰이는 장식품에는 닭이 등장한다. 제사에도 반드시 닭을 제물로 쓴다. 닭은 새벽을 부르는 길조이고 마귀를 쫓아내는 영물이고, 복을 부를 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하늘로 영혼을 실어 나르는 사자이다.
초복이 내일 모레이다. 삼계탕 집에서 수많은 닭이 희생될 것이다. 소망을 들어주거나 영혼을 하늘에 실어 나르던 정령의 신에서 먹거리의 신이 된 것이다. 삼계탕, 닭찜, 파닭, 닭볶음탕, 닭갈비가 되어 사람들에게 육신에 에너지를 보충해 준다. 튀김닭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치맥’은 세계인을 우리나라 불러들이는 한류문화의 신이 되었다.
며느리가 보내준 삼계탕 한 마리로 소진했던 기운이 살아나는 듯하다. 닭은 인간의 소망을 하늘에 이어주는 신성한 신의 모습에서 이제는 육신을 보하는 치유의 신이 되었다.
첫댓글 친근한 닭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 옆 선생님 성함 가운데 글자가 빙이 되었어요. 수정해 주셔요.ㅎㅎ
고맙습니다. 혹 하나 빠뜨렸는데 빙신이 되었네요. 덕분에 바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닭에 대해 격물치지하셨군요.
며느리가 보내주신 삼계탕이 선생님에게 기운을 내게 해주신 육신의 신이 되셨네요.
닭이 아침을 깨우는 시작의 신, 탄생의 신, 죽음과 영원의 신이 라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소망을 들어주거나 영혼을 하늘에 실어 나르던 정령의 신에서 먹거리의 신이 된 닭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결물만 하고 견색에 이르지 못해 지금 후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계간 수필 작품들이 워낙 좋아서 부끄럽기만 하네요.
삼계탕 묘사에 또한번 입이 떡 벌어집니다.
사람에게 있어 닭의 의미와 역사 속에서의 닭의 의미를 배웁니다.
역시 공부를 많이 해야 수필이 탄탄해진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 글을 쓰려고 닭을 많이 공부했는데 공부에 그치고 사유가 빠진 것 같아 후회하고 있습니다.
역시 글은 퇴고하고 티고하고 묵혀서 발효시켜야 묵은지 같은 맛이 나나 봅니다.
삼계탕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감칠맛 나는 묘사에 입안에 군침이 돕니다. 닭의 히스토리를 통해 신분의 변천사를 새삼 생각해 봅니다.
덕분에 역사 공부까지...
고맙습니다.
삼계탕 안 좋아하시는군요.
닭, 새, 봉황으로 연결되는 우리민족의 생각이나 티벳이나 서구의 생각이 같다는 것이 신기하다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