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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프란츠 카프카, 민음사.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프라하 독일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법률 실무를 익힌다. 그는 1908년부터 근로자 사고 보험국에서 근무하다 1922년 은퇴한다. 카프카는 직장생활과 집필을 병행하며 <성>,<소송>,<변신>,<시골 의사>등의 장•단편을 발표한다. 카프카는 보험회사에 다니며 문학적 숙명을 거부하지 못해 퇴근 후에는 단편초안이나 습작을 꾸준하게 연습한다. 그러나 그는 사후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편집자이자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 의해 소설은 출간된다. 그 중 <판결>은 펠리체 B양이라고 부제가 달린 단편이다. 펠리체 B양은 실제로 카프카와 두 번 약혼하고, 두 번 파혼했던 인물이다. 이 작품은 펠리체 바우어에게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고백한 작품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작품세계에서 아버지와의 모티브는 중요한 지점이다. <변신>의 탄생배경도 아버지와의 갈등을 담았으며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아버지를 왜 무서워했는지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 글이기도 하다. <판결> 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판결이다. <판결>은 젊은 상인 게오르크 벤데만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작된다. 게오르크는 고심한다. 이유는 삼년 전부터 고향에 오지 못하는 친구에게 약혼소식을 전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잣집 여인과의 약혼이라면 말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보다 자신이 전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에 편지에는 ‘프리다 브란덴펠트라는 아가씨와 약혼’(p.83)하기로 했으며 지금 행복하다고 적는다. 게오르크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아버지에게 “저의 행복한 약혼이 그에게도 행복일 것이라고.”(p.86)말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는 페테르부르크에 친구가 없어.”(p.88)라며 뜻밖의 말을 한다.
이때부터 둘은 고성이 오간다.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게오르크는 3년 전 친구가 집에 왔을 때 아버지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 않았냐고 기억해보라고 강조한다. 이에 분노한 아버지는 그 친구는 자신과 편지를 왕래하고 있으며 “내가 그 친구의 이곳 현지 대리인이거든!”(p.92)이라는 말을 퍼 붇는다. 아들은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하다. 친구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혼란스럽다. 아버지는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친구와 자기 몰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인가. 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숨겼다 지금 이 시점에서 쏟아내고 있는 것일까.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기법이 이 짧은 단편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독자도 화자도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된다. 그 열쇠는 아버지와 작가가 꽉 쥐고 어디 한 번 풀어보라며 호기를 부리는 듯하다.
아버지는 아내와의 사별 후 사업을 물려받아 일을 확장시키는 것에 못마땅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착각하지 말아라! 아직은 여전히 내가 훨씬 더 강자(强者)다. 혼자라면 내가 물러나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 어미가 나한테 자기의 힘을 주고 갔다.”(p.92)며 여전히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라이벌 의식은 어머니의 부재로 수면 위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너는 본디 순진무구한 아이였지, 그러나 근본을 보면 너는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니 명심하거라! 내가 너를 지금 익사형에 처하노라!”(p.94)라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익사형’의 판결을 내린다. 판결을 듣고 소리치며 체조선수가 되어 난간너머로 몸을 날리며 ‘부모님, 저는 당신들을 그래도 언제나 사랑했었답니다.’(p.95)라며 추락한다. 아버지의 통제는 무의식 속에 억압으로 나타나고 그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선택조차 아버지의 ‘판결’에 의한 것이다.
<판결>에서 아들이 느끼는 아버지는 거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몸이 쇠약해졌지만 언뜻언뜻 그려지는 아버지의 크기는 막강하다. 아들은 자신의 시계끈을 만지는 아버지의 손길에도 섬뜩함을 느낀다. 아버지와 한 집에 살면서 여러 달 째 출입하지 않는다. 여러 요소들을 조합하면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아들은 사업상 아버지가 필요하지만 가족구성원으로 아버지의 존재는 희미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마음먹고 아들에게 몇 마디 하면 아들은 무너지고 만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린 판결은 실로 가혹하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소설 안에서는 알 길이 희박하다. 왜 <판결>에서 아들은 이리도 심약하게 그려지는 걸까.
실제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때린 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가 폭력은 휘두르지 않았지만 욕설은 상당했다고 한다. 카프카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는 미친놈이라고 까지 했다니 말이다. 엄격한 훈육과 카프카의 문학 활동에 반대했던 아버지 앞에 카프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회고한다. 아버지에게 말을 할 때는 더듬거리기 까지 했다. <판결>에서도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다리 밑으로 추락하는 아들. 카프카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판결의 아버지처럼 카프카의 아버지도 늘 상대를 심판하는 투로 말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런 아버지 밑에 카프카는 늘 죄인이었다. 반면, <판결>의 아들 게오르크 벤더만은 섬세하다. 아버지의 방이 햇볕이 들지 않는지 식사량이 적은지 말은 안하지만 다 알고 있다. 린넨 팬티가 별로 깨끗하지 않다는 것도 금방 포착한다. 예민하고 감수성 많은 카프카도 아버지의 세계에서 독립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게오르크처럼 말이다.
카프카는 폐결핵으로 41세에 사망하지만 끈질긴 아버지와의 정념은 그레고르 잠자를 갑충으로 변신시켰고, 게오르크는 익사형의 판결을 받는다. 그는 어리고 약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을 환치시켜 버리는 막강한 존재다. 카프카의 일기에서 자주 ‘자살욕구’(p.519)를 느꼈으며 “<1912년>3월 8일 그저께 공장 때문에 욕을 먹었다. 그다음 한 시간 동안 소파에 누워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에 대해 생각.”(<카프카의 일기>p.325)했다는 부분이 발견된다. <판결>에서 게오르크가 느닷없이 소리치며 다리 위 난간 밑으로 추락하는 지점과 닮은 부분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두고 “카프카적”이라는 용어를 붙인다. 이 뜻은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하고 난해하며 다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판결>에도 “카프카적이다”는 말을 써도 무방하겠다. 짧은 단편이지만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를 심리적으로 파헤친 작품이다. 카프카가 자살욕구를 느꼈지만 게오르크를 통해 실현했고 문학 안에서 여러 가지 변형으로 승화시킨 그의 작품세계. 심해를 유영하는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
<서평-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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