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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 1998년 11월 22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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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작업이 끝났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할머니처럼 인자해 보이는 한 여성이 소리 높여 말했고 전세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일은 1948년 12월 10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습니다. 개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샤요궁에 소집된 국제 연합 총회에서 유엔 인권 위원회의 위원장이 연설을 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前)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인 키가 큰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는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국제 연합과 인류 역사상 중대한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을 승인하는 일입니다.”
루스벨트 여사가 세계 인권 선언의 전문(前文)과 30개 조항에 들어 있는 명확한 어구들을 낭독하고 나서 총회는 그 선언문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엔 회원국들은 “세계의 영부인”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루스벨트 여사의 탁월한 지도력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루스벨트 여사는 그 날 일과를 마칠 즈음에 이렇게 썼습니다. “긴 작업이 끝났다.”
여러 의견에서 하나의 선언문으로
유엔 인권 위원회가 작업에 착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인 2년 전 1947년 1월, 유엔의 모든 회원국을 만족시킬 만한 인권 문서를 작성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18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처음부터 의견 차이가 심해 끝없는 논쟁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중국 대표자는 그 문서에 공자의 철학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톨릭 신자인 한 위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내세웠으며, 미합중국은 미국의 권리 장전을 옹호했고, 소련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을 포함시키고 싶어했는데, 이것은 매우 강하게 표명된 의견을 몇 가지만 열거한 것에 불과합니다!
위원들의 계속되는 언쟁은 루스벨트 여사의 참을성을 시험하였습니다. 루스벨트 여사는 1948년에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중, 이전에 대가족을 부양하면서 참을성의 한계를 시험받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인권 위원회를 주재하다 보니 참을성이 훨씬 더 많이 필요했다”고 말하여 청중을 즐겁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녀를 길러 본 루스벨트 여사의 경험은 요긴하게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한 기자는 루스벨트 여사가 위원들을 다루는 솜씨를 보면, “종종 시끄럽고 때로는 다루기 힘들어서 이따금 단호하게 징계할 필요가 있지만 기본 심성은 착한 사내아이들로 이루어진 대가족을 이끌어 가는”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썼습니다. (「엘리너 루스벨트—사생활과 공적 생활」[Eleanor Roosevelt—A Personal and Public Life]) 하지만 루스벨트 여사는 단호함에 너그러움을 더함으로 반대자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위원회는 2년 동안 여러 차례의 회의, 수백 회에 걸친 수정, 수천 건의 진술, 거의 모든 단어와 모든 구절에 대한 1400회의 표결을 거친 끝에, 세계 어느 곳에 살든 모든 남자와 여자가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인권을 열거한 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 문서는 세계 인권 선언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때때로 불가능해 보였던 사명이 완수되었습니다.
기대감의 고조
물론, 이러한 첫 나팔 소리에 압제의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계 인권 선언의 채택으로 인해 기대감이 고조되었습니다. 당시 유엔 총회 의장인 오스트레일리아의 허버트 V. 에버트 박사는 “파리와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세계 전역의 수많은 남녀와 어린이들이 이 문서로 인해 도움과 인도와 격려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에버트 박사가 그 말을 한 지도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세계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선언문을 길잡이로 보았으며, 인권이 존중되는 정도를 재는 잣대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유엔 회원국들은 이 잣대 즉 표준에 달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세계의 인권 현황은 어떠합니까?
세계 인권 선언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세계 인권 선언을 가리켜 유엔이 이제까지 작성한 문서 중 “가장 훌륭한 문서”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동감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제1조에는 선언문의 다음과 같은 기본 정신이 나타나 있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써 행동하여야 한다.”
선언문 작성자들은 이 기초 위에 두 가지 종류의 인권을 확고히 세웠다. 첫 번째 종류의 인권은 제3조에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나와 있다. “모든 사람은 생명·자유 및 신체의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조항은 제4조부터 21조에 열거되어 있는 공민권과 정치적 권리의 기초를 이룬다. 두 번째 종류의 인권은 제22조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이 조항의 일부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달에 불가결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제23조부터 27조까지의 기반이 되는데, 이 조항들은 사람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해 설명한다. 세계 인권 선언은 이 두 번째 종류의 권리도 기본적인 인권에 포함된다는 점을 최초로 인정한 국제 문서였다. 또한 “인권”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국제 문서이기도 하였다.
브라질의 사회학자인 루트 로샤는 세계 인권 선언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한 말로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어느 인종에 속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느 언어를 사용하든, 어느 종교를 믿든,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든, 어느 나라 출신이든, 어느 가정 출신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그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우리가 세계의 어느 지역에 살든, 우리가 사는 나라가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권리와 자유는 모두가 누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세계 인권 선언은 채택된 이래 20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여러 나라의 헌법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일부 지도자들은 이 선언문을 다시 작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그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유엔 관계자는 그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성서나 코란을 다시 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세계 인권 선언 역시 수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인권 선언의 내용이 아니라, 선언문 신봉자들의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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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인권—세계적으로 보장될 것이다!
“인권 침해의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고, 경험 많은 한 인권 변호사에게 질문하였습니다. 그 변호사는 “탐욕, 즉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에 대한 탐욕”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탐욕은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인권 침해는 결국 정신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원인은 국가주의입니다. 내 나라가 최고라는 식의 철학은 인권 침해를 부추깁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법률학 및 경제학 교수인 얀 베르카우베르는 ‘시행 가능한 조처를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세계 정부가 출현할 경우’에만 인권이 보장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세계적으로 인권이 보장되려면 우선 적어도 두 가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즉 정신의 변화와 정부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입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이중적 이유
유엔 인권 교육 10개년 계획은 이제 막 5년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한 국제적 교육 프로그램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성공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사람들은 현재 동료 인간들을 존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여호와의 증인이 실시하고 있는데, 230여 개 나라와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이유는, 이 세계적 성서 교육 프로그램이 인권의 기원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넓혀 주기 때문입니다. 세계 인권 선언에서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의 기능을 인간보다 우월한 근원에서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13면 “인권의 근원” 네모 참조) 인간보다 우월한 이 신성한 근원을 인정하면, 동료 인간을 존중할 강력한 이유를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단지 양심이 다른 사람들을 존귀하게 대하도록 채찍질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창조주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으로 인해 그분의 창조물을 존귀하게 대하도록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존귀하게 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중적 접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여호와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마태 22:37-39) 창조주를 깊이 존경하는 사람은 동료 인간의 권리를 결코 침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권리는 하느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권을 침해하는 사람은 그 물려받은 것을 강탈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교육
여호와의 증인의 이 성서 교육 프로그램은 인권 침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줄여 나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프로그램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혜는 그 일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증명됩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마태 11:19.
뉴욕 시 국제 연합 광장에 있는 한 벽에는 이러한 유명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유엔은 성서 이사야 2장 4절을 인용한 이 글을 통해 대규모 인권 침해를 줄이는 주된 방법을 지적합니다. 바로 전쟁을 없애는 것입니다. 아무튼 전쟁은 유엔에서 발행한 한 책자에서 설명하듯이 ‘인권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육 프로그램은 돌로 만든 벽에 이사야의 말을 쓴 취지를 한층 더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이사야의 말을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합니다.” (비교 히브리 8:10)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 프로그램은 인종에 대한 성서의 견해, 즉 인류라는 하나의 인종만 있을 뿐이라는 견해를 가르침으로 인종과 민족의 장벽을 허물고 국가주의의 벽을 무너뜨립니다. (사도 17:26) 이 프로그램에 등록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려는 욕망을 키워 나가는데, 성서에서는 하느님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편파적이 아니시고, 도리어 각 나라에서 그분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받아 주[십니다].”—에베소 5:1; 사도 10:34, 35.
성서에 근거한 이러한 교육의 결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않’습니다. 정신과 마음의 변화가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14면 “평화를 위한 교육” 네모 참조) 현재 매일 평균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사회하는 기본 연구 과정을 마치고 평화를 조성하는 이 세계적인 힘의 대열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의 변화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 인권을 존중하려는 정신의 변화에 따른 결심은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까? 매우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 대전 중 특히 나치 독일에서는 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권에 대한 존중심의 깊이가 극심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역사가 브라이언 던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와 화합하지 않았다. 나치가 여호와의 증인에게 반감을 품은 주원인은 증인의 정치적 중립이었다. 이것은 어떤 신자도 무기를 들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대학살에 대한 교회의 반응」[The Churches’ Response to the Holocaust]) 폴 존슨은 「그리스도교사」(A History of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군 복무 거부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 또는, 다하우 혹은 정신 병자 수용소에서 생을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회학자 안나 파벨친스카는 그러한 증인들을 가리켜 “공포에 떠는 민족 가운데서 홀로 불굴의 저항을 한 소수 집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여 ‘더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다면, 세계 전역에서 인권 침해가 얼마나 직접적이고도 극적으로 줄어들 것인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세계 정부—‘이상에 불과한가’?
‘정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세계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고 한 유엔 관계자는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들이 유엔이나 그 밖의 어느 기관에도 주권을 이양하려고 하지 않는 사실은 사실상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해 줍니다. 하지만 베르카우베르 교수가 지적하듯이, 세계 정부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세계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제시해야 할 도의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안이 될 만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초인간적인 해결책은 있습니다. 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성서는 인권의 기초가 되는 기능의 근원이 창조주이시라는 점을 알려 주는 것처럼, 인권을 보장해 주는 세계 정부의 근원도 그분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 하늘 정부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글을 외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아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계 정부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당신의 왕국이 오게 하십시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마태 6:10)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그 왕국 정부의 수장은 평화의 군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이사야 9:6.
이 세계 정부는 무엇보다도 전쟁을 영원히 없애 버림으로, 참으로 세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인권 문화를 성공적으로 창조해 낼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저[창조주]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 46:9.
이런 일은 언제쯤 세계적인 규모로 일어날 것입니까? 여호와의 증인이 제공하는 성서 연구 프로그램에는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관해 알아보도록 권하는 바입니다.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권의 근원
세계 인권 선언 제1조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인권은, 강이 강기슭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듯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흘러가는 선천적 권리로 묘사된다. 이 인권의 강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세계 인권 선언에 의하면,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권리를 갖게 된다. 유엔이 발행한 한 책자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지상의 다른 생물들과는 다르며, 따라서 다른 생물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정한 권리와 자유를 누릴 권한이 있다.” (사체로는 본지에서) 이처럼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권을 소유하게 되는 근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과 양심의 근원은 곧 인권의 근원이기도 하다.
진화론을 신봉하는 인권 운동가들은 인권이 이성 및 양심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접하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진화론을 옹호하는 책인 「생물의 발달」(Life Ascending)에서는 이렇게 시인한다. “[진화] 과정[이] ··· 어떻게 미와 진리에 대한 사랑, 동정심, 자율성과 같은 특성들을 산출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용력이 넓은 인간의 정신을 산출해 낼 수 있었는지 질문해 볼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양심이라는 기능이 이성과 양심이 없는, 인간보다 열등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물이 없는 우물에서 물이 흘러나와 강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양심이라는 기능이 인간보다 열등한 근원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는 일이므로, 그러한 기능은 초인간적인 근원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오직 인간만이 인권과 관련된 특성, 곧 이성과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 성서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세 1:27) 따라서 「인권—정당성의 증명과 적용에 관한 평론」(Human Rights—Essays on Justification and Applications)이라는 책에서 지적하듯이, ‘인간에게 도덕적 권리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타당한 답은 “인간은 고유의 가치 혹은 존엄성을 지니고 있거나 ···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14면 네모와 삽화]
평화를 위한 교육
몇 년 전 발칸 반도가 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을 때, 브랑코는 크로아티아인이 사는 보스니아 지역의 한 진료소에서 무장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곳의 한 의사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브랑코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브랑코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무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후 브랑코는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나서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했고 그 곳에서 슬로보단을 만났다.
슬로보단도 보스니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도 브랑코와 동일한 전쟁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반대 진영에 있었다. 슬로보단은 세르비아인들을 위해 크로아티아인들과 싸웠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슬로보단은 이미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있었으며, 그는 이전에 적이었던 브랑코에게 성서 연구를 제의하였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브랑코는 창조주이신 여호와에 대한 사랑이 자랐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슬로보단도 이전에 적이었던 사람의 도움으로 증인이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슬로보단은 보스니아의 교전 지대를 떠난 후 무요라는 사람의 방문을 받았는데, 무요도 보스니아에서 온 사람이었지만 슬로보단의 종교와는 상당히 다른 종교로 양육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무요가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것이다. 이전에 그들은 적이었지만 슬로보단은 성서 연구를 하자는 무요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 위한 단계를 밟았다.
적이었던 이 사람들이 깊이 뿌리 박힌 민족 간의 증오를 극복하고 벗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은 성서 연구를 통해 여호와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런 다음 “하느님에게서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기꺼이 받았던 것이다. (데살로니가 첫째 4:9) 보이체흐 모젤레스키 교수가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전반적으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증인들이 평화로운 태도를 나타내게 된 주된 요인은, 그들이 성서에 밝혀져 있는 원칙들을 지금 따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론입니다.
깨어라 1998년 11월 22일 호 3-5면의 기사만을 이용하여 홍보를 주장하지만, 결론은 무엇을 시사합니까? 그 기사가 의미하는 의도가 전혀 파악되지 않으십니까? 세계인권선언문은 결코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고, 그 해결은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비롯됨을 깨어라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오직 모든 것들이 여증의 비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기사의 의도 하나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첫댓글 운영자님~ 이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증인분이 영향을 받기전에 다른방으로 옮겨 주시길 희망합니다.
눈으로 글을 읽는다 해도 뜻과 의미를 볼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사고하는 부분이 워치타워에 의해 손상돼 보입니다.
이 글을 객관적으로 읽으면 인권을 존중하며 유엔의 헌장과 인권선언을 지지하는 글로 읽힙니다. 그러나 증인들의 사고로 볼때는 세계정부가 촛점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사고하도록 틀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워치타워는 이 글에서 유엔을 교묘하게 홍보하면서도 증인들에게는 세계정부를 또 한번 각인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있네요. 참으로 아주 치밀하고 교묘하고 정말 대단한 조직입니다. 소름이 끼칩니다!!
이해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결론은 보통 서론과 본론에 입니다. 결론이 어디있나요? 결론은 찾으셨나요? 제가 친절하게 색을 달리했음에도 극단적 흑백논리로 얼룩진 님의 마음은 결코 초등학생 정도의 어휘를 요구하는 문장에서도 이해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댓글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제가 님의 글에 답변하기가 싫은 이유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요지도 전혀 파악되지 않은 상태서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건지...
ㅎㅎㅎㅎㅎ 님도 워치타워에 속고 계시는군요. 결론은 세계정부인듯 보이지만 글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해 보면 핵심단어는 인권선언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시지요.
세계적인 정부를 구상하는것은 이상에 불과하다 이 결론에 동의한다, 인간에게는 해결책이 없다 초인간적인 해결책만 있을뿐이다. 이런말이 증인식 사고만 이해가 되나봅니다.
맞습니다 그런말을 증인식 사고만 이해할수 있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김연아 선수의 기술과 연기는 초인간적 능력앞에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금매달은 줄수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초인간적 능력은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능력이므로 검증도 실천도 비교도 불가능한 능력입니다. 상상속의 능력으로 현실적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님의 사고는 140년 이상 신세계란 상상의 가치만 추구해온 이상현상의 결과입니다. 깨어라의 기사는 내용적으로 유엔의 인권정책을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단 말미의 세계정부라는 사족은 님과 같은 증인식 사고를 가진 사람을 충족시키기 위한 위장용입니다.
의미없는 공방입니다. 일부증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엔가입기준에 동의하고 가입했지만,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 증인개인들은 이렇게 말할수 있겠네요.[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지만 행동은 다르게 했다]...그러면 증인조직에서는 이 전도인을 어떻게 보나요? [타협]으로 간주하여 사법처리하게 됩니다. 모순이 보이십니까.
와치타워가 유엔에 가입한 의도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열람의 목적으로 가입을 한 입장이 표명 된 상태이고 이에 대해 제 3자가 "그것은 아니다,"의 무조건식 비난과 조장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유엔을 홍보한 근거가 전혀 없으며, 단지 참고한 상태에 불과된 사실이 많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나간 UN에 관련된 일을 지금까지 언급하는 행위 자체를 "내가 원하는 것은 여증의 분열이다"라고 입장을 표명하시는 것이 여기 계신 분들의 입장을 말씀하시는데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해, 자신들의 무슨 사명감을 갖고 있길래 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여증을 강하게 비판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올댄뉴님은 지금 워치타워에 의해 사고체계가 무너져 있습니다.... 운영자님~ 이글을 자유방으로 옯겨 주십시요.. 본인이 글쓴거 조차도 무슨말을 하는지 모릅니다...ㅠㅠ
제가 올린 리플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네요. UN의 홍보성 글이라 주장하는 이 기사는 사실가 전혀 다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를 지적한 것입니다. 즉 블루스카이님도 이와 관련된 점에 대해 전혀 이해하시지 못한 답변이라 그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직 문제를 이해하는 능력에 있어 정말 부족하십니다. 요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기르십시오.
You win~~ !!!!!!!! 짝~ 짝~ 짝~짝~......ㅠㅠ
열람때문에 가입했다는 것은 이미 말도 안되는 변명임이 드러났습니다(자료실 참조)/ 양심적 증인논리로는 그 어떤 사유로도 유엔과 어떤 제휴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그리고 저의 사명감은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통치체" 어버이께 효도를 아주 잘하시네요.
춤추고 몸바치는 "기쁨조"가 따로 없네요.
통치체는 자식 농사를 잘 지어서 아주 뿌듯해 하는 것이 눈에 선하네요.
여증의 "효도"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올댄뉴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명문학교에서 수업한 지성과 인격을 겸비한 장래가 촉망 되는 젊은이야 아마 인류 복지에 크게 이바지 할거야" 그러나 " 완전한 것은 하나님이야" 라는 문장을 해석하는데, 주된 의도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인류복지에 이바지하는 올덴뉴의 능력을 칭찬하는게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언듯 보기에 그럴듯한 논리지만 위 문장은 구성이나 용례로 보아 진정한 의도는 올덴뉴의 찬양에 촛점을 맞춘 문장입니다. 즉 올댄뉴의 능력(유엔)은 실존하는 현실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희망사항입니다. 상응하는 예가 아니지요. 님의 견해는"그러나' 라는 접속부사로 도피장치를 한뒤 날로먹는 견강부회의 전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