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요에 (浮世繪)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강호시대);1603∼1867]에 성행했던 풍속화의 한 양식. 속세(俗世)를 주로 그린 일본식 목판화이다. 가부키[歌舞伎(가무기)] 배우의 연기모습과 일반 시민의 일상생활과 풍속, 일본과 중국의 시가(詩歌) 또는 고사(故事) 등을 제재로 강렬하고도 선명한 색채들을 즐겨 사용하면서 간단 명료한 선조(線條)를 운용하였다. 대량생산할 수 있는 판화형식을 취한 점에 특색이 있고, 회화감상의 감동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일어난 새로운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다. 우키요에 판화기법은 1660년경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능천사선)]가 먹색으로만 인쇄하는 <스미즈리에[墨摺繪(묵접회)]>를 시작으로 1673∼1716년 <스미즈리에>에 채색하는 <베니에[紅繪(홍회)]>가 유행했고, 1716∼1744년에는 <우루시에[漆繪(칠회)]>로 발전, 이어 <스미즈리에> 위에 분홍·초록 등 2∼3가지 색의 색판(色版)을 겹쳐서 인쇄하게 되었다. 1765년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영목춘신)] 등이 다색판화인 <니시키에[錦繪(금회)]>를 만들게 되어 우키요에의 황금시대를 맞았다. 18세기에 쇠퇴하기까지 활동한 유명작가로 기타가와 우타마로,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갈식북재)] 등이 있다.
日本 浮世畵 木版畵
1.사회적 배경패권이 어지러운 시대를 거치던 일본은 도요도미측과 도꾸가와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도요도미측인 이시다와 도꾸가와의 마지막 전쟁터인 세기가하라(關原)에서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승리를 얻으므로 정치를 장악하게 된다. 도꾸가와는 전쟁 후 10흘뒤인 1600년 9월 21일 전국적인 패권을 가지게 된다. 그후 1603년 이에야스가 세이다이쇼오군(征弟大將軍)의 칭호를 받고 에도 막부(江戶幕府)를 열었던 시기부터 1867년 15대 장군으로 막을 내리고 메이지 시대(明治時代)가 시작되기 전 까지를 에도시대라 한다. 그러나 정치적 시대구분과 문화적 시대구분은 상당한 간격을 두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치적 구분에 의한 1603∼1867년 동안을 에도시대라 한다.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한 도구가와는 재정이 취약한 단점과 언제 어느 때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 군주인 다이묘(大名)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재정을 고갈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들을 만들어 냈다. 도구가와는 다이묘 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에도에 머물게 하고 주기적으로 에도에 오게 하는 한편 모든 경비를 다이묘들이 부담하게 하게 하여 다이묘들의 재정을 고갈 시켜나갔다.
도구가와 체제는 화폐제도를 낳고 상업경제 성장을 촉진시키며 상인계급을 성장하게 하였다. 그들은 미곡상, 금융업자, 장사꾼등 다양한 상인 계급들로 부는 축적하였지만 지배자인 무사계급을 전복시킬 수는 없었다.
에도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주자학으로 에도시대의 통치이념으로 사용되면서 무사들의 생활윤리에 영향을 주어 오륜이 강조되었다. 이는 君臣有義(군신유의)의 본래의 뜻 보다는 무사들의 主從(주종)관계를 철저하게 지켜나가는 것을 주된 미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우월성을 인정받으며 성장한 세습 무사계급으로 복장, 언어, 생활전반에 걸친 지위를 보장받는다. 하지만 막부체제의 무사들은 실전 경험이 없는 계급으로 관료나 지식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상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빈곤에 처하게된다. 다이묘와 무사들은 상인들을 최저계급에 묶어두지만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고자 부유한 상인들과 혼사를 맺기도 했다. 안정된 막부정권 아래 상업은 번창하였으며 유통시설이 개선되면서 에도(江戶)·교토(京都)·오사까(大板)같은 주요도시 외에도 전국에 걸쳐 새로운 도시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 도시의 경제권을 장악한 죠오닌(町人 : 商人·工人)들은 지배계급인 무사·다이묘들과 갈등을 빛는 일이 자주 생겨났다. 결국 아무리 부를 축적하여도 신분을 뛰어 넘을 수 없었던 죠오닌 들은 소비와 축재(蓄財

)의 길을 걷게된다.
이소다 고류우사이 / 설빔을 한 소녀2.江戶의 문화현상江戶는 막부체제를 위한 정치도시였기 때문에 문화적 전통과 기반이 취약했다. 이 때 부를 축적한 죠오닌이 출현하면서 문화주체로 자리한다. 전통적인 정치 문화 중심지인 교토를 벗어난 이들은 에도의 문학·연극·미술의주체로 자리한다. 죠오닌 들은 도시 안에서 그들만의 구역을 만들고 문화를 만들어 가게 된다. 죠오닌들은 정치나 추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개인적이고 즉각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문화를 즐겼다. 이러한 문화를 방랑 세계를 그리는 단어인 우끼요(浮世)라 하였다. 우기요는 유행과 서민적인 오락의 문화의 대명사로 죠오닌의 주된 풍속을 그린 것이며 결국 여색(女色)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었다. 원래 浮世는 모든 세상의 덧없음을 말하는 불교의 단어였으나 점차 종교적 의미는 사라지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받는 환희의 삶을 말하게 되었다.
죠오닌의 문화는 우끼요 즉 오락세계의 산물로써 연예인·통속소설·연극,·판화·유녀를 주된 관심사로 삼았다. 당시 에도의 요시와라(吉原) ,교또의 시마바라(島原), 오오사까의 심마찌(新町)등 전국 도시와 특수한 지역에 유곽, 음식점, 찻집, 목욕탕, 극장 등의 환락가가 형성 되었다. 특히 유곽의 번창은 일본 역사상 전후 무후한 현상으로 죠오닌들은 이곳에서 사회계급에서 벗어난 금력을 바탕으로 환락의 세계를 즐겼다. 이곳의 게이샤(藝者)는 직업적인 접대부나 계보를 가진 유녀나 무용수들로 상인들과 몰락한 무사·귀족에게 휴식처를 제공하였다. 처음에는 무사들에게 금지구역이었으나 점차 칼을 버려 둔 채 홍등가의 오락을 즐기게 된다.
17세기의 유명한 소설가인 이하라 사이까구(井原西鶴)는 외설한 소설의 주제로 화류계 여성을 표현하였으며 인쇄술에 힘입어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동시대는 인형극도 시작되었는데 가부끼(歌舞伎)라는 새로운 형태의 연극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가부끼는 매춘을 수반하여 사회적 문란을 야기하자 막부는 이를 금지시키게 된다.(1629) 이 때 부터 明治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여우(女優)가 존재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유행에 민감하여 여인의 머리모양, 허리띠 문양 등은 빨리 전파되고 급격히 변화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인에 국한되지 않고 남자들에게도 퍼져 나갔다.
문자의 보급과 인쇄술의 발전은 출판업을 활성화 시켰는데 출판업자는 소설가와 삽화가를 고용하여 애정소설과 유흥가 안내도를 출판 하였다. 내용은 멋쟁이 죠오닌이나 게이샤에 관한 내용으로 외설적인 경우가 많아 자주 금지 당했다. 당시는 목판이 가장 능률적인 기법으로 우끼요에(浮世畵)라 불리는 풍속화가 주로 제작되게 된다. 浮世畵는 처음에는 단순한 선 묘사로 나타났으나 나가사끼(長崎)를 통해 중국의 彩色術이 들어오면서 일본 미술의 중요한 전통적인 다색 목판술로 자리하게 된다. 통속적이고 외설스러운 浮世畵는 저급예술로 간주되어 외면 당하다가 유럽에 히시가와 모로노부(菱川師宣)의 작품이 알려지면서 각광을 받게 된다.
이소다 고류우사이 / 세쓰국 누이노타마가와3.우끼요에 형성도꾸가와 막부 시대의 미술은 크게 초기(1624-1644), 중기(1688-1704), 후기(중기 이후 明治전까지)로 볼 수 있는데 초기는 건축을 중심으로 한 모모 야마 미술과 元祿을 중심으로 하는 중기 그리고 후기는 에도 시대 미술이 확실하게 나타난 시기로 볼 수 있다.
막부 초기미술은 막부에 의한 화려한 모모야마풍 건축이 성행하였고 이 건축물들을 치장하기 위해 고용된 어용화가 들은 障壁畵를 제작하기에 바빴다.
障壁畵미닫이 문의 장지에 그리는 그림·병풍화·삼목나무 널빤지로 된 문에 그린 그림·천정화등으로 그 중에서도 금벽 장벽화는 금은박이나 금은니를 써서 구름모양이나 지면을 나타내고 적,록,청 등의 화려한 색채를 두텁게 발라서 만드는 것으로 당시는 濃畵라고 불렀다. 주로 花鳥, 風俗 같은 현실적인 것을 즐겼다.
서민들 사회에서는 소형의 병풍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내용은 연극이나 인형, 유곽의 정경 등 향락적인 것이 많았고 소재는 유녀나 탕녀의 요염한 자태를 즐겨 다루었는데 이것은 중기 이후 발전하는 우끼요에 미인화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중기는 극단적인 양식화와 단순화된 그림들이 주를 이루는 장식 병풍, 옻칠한 상자, 도기 등에 많이 나타났다. 이 때 부터 어용화가에 의한 미의식에서 벗어나 평민화가들이 주를 이루며 주체가 평민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서양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막부후기(우기요에 전기) 1657년에는 출판사업이 성황을 이루며 세태를 소재로 한 우끼요죠우시(浮世草紙:우끼요이야기) 가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책에 들어간 삽화를 그리던 히시가와 모노로부(菱川師宣)의해 확립되기 시작했다. 모노로부는 초기에는 육필로 제작하였으나 점차 소비가 많아지고 인기가 높아지자 점차 목판화로 이행되었고 모노로부가 그린 여인들의 그림은 미인의 전형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후 기요노부, 도리이 기요마스, 가이게쯔도 안도,오구무라 마사노부 등의 활약으로 초기 우끼요에는 에도 죠오닌 예술로 정착되었다.
우끼요에 후기가 되면 우기요에, 문인화, 양풍화, 四율圓山派 등의 여러유파가 생겨났고 작업에 대한 노하우와 정통성을 유지하며 활발한 작업을 하였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우끼요에 였다.
4.초기 우끼요에에도는 막부가 있었던 곳으로 백만에 가까운 인구의 과반수는 무사였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도시로 죠오닌의 생활도 무사들 위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유곽의 세계였다.
우끼요에는 아즈찌, 모모야마 시대에 발달한 육필화의 계보를 이어 가는 것으로 죠오닌들이 의식을 갖고 자신들의 생활을 그린 것이다. 따라서 환락가의 유녀나 배우의 얼굴과 여색을 나타낸 그림이 대부분이고 독특한 화법과 새로운 구도를 보이고 있다.
모노로부는 봉박을 하는 집에서 태어나 가업에 따라 밑그림을 그리고 청년때에는 에도에 나와서 그림을 전업으로 하였다. 당시에 출판업이 성행하자 목판화가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큰공방을 가지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며 단순 삽화에서 벗어난 목판화 한 장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우끼요에 판화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초기목판은 검은 선 묘에 의한 것으로 붓으로 그린 것에 못지 않은 세밀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하고 있었다. 단색으로 된 이러한 목판을 스즈미리에(黑 畵)라하였다. 우끼요에는 육필과 판화의 두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우끼요에라 함은 판화를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5.전성기의 대표작가
1)스즈끼 하루노부(鈴木春信)에도시대 전기를 막부체제의 성립과 발전의 시대로 본다면 후기는 그것이 성숙되고 정체하여 이윽고 해체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전기에는 볼 수 없었던 정치적 동요가 여러 번 일어나 개혁도 자주 하게 된다. 이러한 개혁은 궁핍한 막부 재정의 재건책으로 또 인심의 쇄신, 봉건체제의 강화책으로 반복되지만 붕괴되어가는 길을 막기는 어려웠다.
현대의 元祿(1688-1704)시대는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새로운 도시의 건설과 농지의 개발 이로 인한 고도성장 정책은 재정 지출을 증대시켰고 새로운 도시사회가 팽창하면서 신흥 죠오닌이 등장하지만 상대적으로 막부의 재정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8대 장군 도꾸가와 요지무네(0684-1751)의 행보개혁은 느슨해지기 시작한 봉건질서의 재강화를 기하고자 무단주의를 채택하고 재정의 긴축화로 그 위기를 타파해 나가는 한편 유럽과 중국의 기술과 지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1920년(亨保5년)의 기독교 이외의 洋書 해금조치는 서양 근대과학과 그 기술을 이용하기 위한 실리적인 시책이었지만 그 蘭學(네덜란드어를 통한 서양학의 연구)의 도입은 얼마 안되어 보다 넓은 洋學으로 전개되어 실증적 탐구정신과 합리적인 사고를 낳았으며 이러한 조류는 亨保개혁의 경제정책을 개발 계승시킨 나누마(田沼) 시대에서도 당연한 일이기에 더욱 활발해 졌다.
다누마시대는 9대장군 이에사다의 밑에서 1767년(明和4년)이래 로오쥬우 나누마 오끼쯔꾸가 실권을 휘둘렀던 明和·安永·天明의 약 20년간으로 그 정책은 어용상인과 결탁해서 공공연하게 상업활동을 장려하고 상인집단에 허가를 내리며 세를 부과하였고 새로 주화도 만들었다. 또한 전매제도를 위시하여 적극적인 영리추구를 행하였으며 공연히 금력에 의한 부정이 횡행하여 그 때문에 세상의 비난이 집중해서 실각했지만 죠오닌의 부는 증대하였고 일반적으로 화려한 풍조가 넘쳤다.
한때 다누마의 원조를 받은적이 있는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1726-1779)는 식물학 연구·석면·전기실험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풍자소설과 희극도 썼으며 서양에서 배운 유화기법을 사용하여 그림 그렸다. 이 겐나이(原內)는 하루노부와 같이 간다시로바게죠(神田白壁町)에 살았고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교우를 가졌다. 또한 일본 최초로 동판화제작에 성공하고 洋畵 최대의 화가였던 시바 고오깐(司馬江漢:1738-1818)도 처음에 겐나이에게 서양화를 배웠다. 고오깐은 하루노부풍의 우끼요에 미인화를 수많이 제작하고 있는데 하루노부의 주위에서는 일본현대미술의 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亨保이래 크나 큰 전개를 시작한 南畵의 기초였던 明淸 회화는 새로운 화풍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 하나로 난빙 양식이 있었는데 이 양식은 만든 沈南정은 행보 16년(1731년)에 일본에 들어와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운난덴 양식에 대해서 고우까뗀요우體라고 부르는 전통성이 강한 세밀하게 착색하는 花鳥양식을 전했다 심난정의 일본체류는 2년에 머물렀지만 난빙파를 만든 외에 그 후의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하루노부는 1725년(亨保10년)에 출생하여 니시끼에를 창시한1765년(明和2년)이래 46세로 죽는 6년간은 대단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明和2년 이전 베니즈리에 시대의 작품은 40여점을 헤아리는데 지나지 않는다.
하루노부의 평가는 우끼요에 史에 남긴 것은 크게 두가지가 역사적 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는 니시끼에 창시의 참가자인 동시에 차후의 프로모터(興行)로서의 활약, 둘째는 니시끼에 묘사내용의 질적 발전을 이루었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스즈키 하루노부 / 눈속에서 한 우산2) 그림달력과 니시끼에의 탄생히시가와 모로노부에서 (菱川師宣)시작되어 기요노부( 信)라든가 기요마스라(淸倍)는 도리이파(鳥居)에 이르게 된다. 延寶에서 순행에 이르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1장 그림은 점차 먹 한색으로 찍는 스미즈리에(黑 繪)부터 붓으로 색을 더한 단에(丹繪) 베니에 아교를 섞어 효과를 내는 우루시에란 진전의 길을 걸어서 양산에 적합한 붓으로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닌 색판으로 찍는 베니즈리에에 이른다.
홍과 록을 주조로 하는 이 소수 색채판화는 상징적이기는 하나 구상적 요소가 강한 우끼요에의 제재를 표출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은데 다색판이 이루어지는 계기는 明和초년에 크고 작은 모임이 유행하며 지식인, 취미인으로 구성되는 문화모임이 생겼으며 하루노부도 이들과 갈이 어울리면서 니시끼에의 출현을 보는 것이다.
당시는 개방적인 다누마의 정책으로 문화면에서는 그 육성에 기여하여 취미와 이해를 같이하는 무사계층과 그 교양을 소화하여 더불어 즐기는 인텔리 죠오닌과의 혼합된 집단으로 문예도 일어났는데 이것이 전국적으로 보급된 일본시의 표현방법인 하이꾸이다. 이러한 하이꾸 동호인들이 당시 유행시키고 있던 크고 작은 인쇄물에 눈을 돌려 이것을 예술적으로 발전시키는 행동으로 나온 것이 대소섭물이란 태음력의 달력이다.
3)하루노부의 작품세계하루노부는 니시무라 시게나가, 오꾸무라 마사노부, 이시가와 도요노부 등의 영향을 받으며 판화가로서 발전해 나가다가 드디어 자신만의 독특한 여인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니시끼에라는 多色版畵를 시작하여 일본판화의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하루노부는 당시에 유명하던 선정적인 여인상의 우끼요에에서 탈피하여 일본 고전 시문학의 낭만적 기분을 되살린 우아하고 세련된 젊은 여인상을 묘사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이상화된 인물로써 그 당시 에도 사회의 생활 감정을 잘 표현한 장면들을 그려냈고 섬세한 인물과 色彩에 알맞게 그의 판화는 대개가 자그마한 중판(28×20㎝) 크기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색을 칠하지 않고 맨 종이에 모양을 오목線을 찍는 가라즈리에서 얻어지는 질감 효과와 배경을 한 색으로 처리하는 공간의식등 한차원 높은 기법을 구사한 하루노부의 니시끼에는 재래의 것과는 격이 다른 미적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려진 소재와 이미지, 그리고 내면에 지니는 조형성은 종래의 다른 화가들과는 다른 취향을 보이면서 전개하고 있다. 당시 화가들은 대부분 서있는 고전적인 양식의 그림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노부는 여기서 탈피하여 대중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사생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통한 서정성의 도입은 하루노부의 작품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이다.
가라즈리의 효과는 미인의 흰 옷에 또는 눈 덮힌 땅에서도 볼 수 있다. 원래 이것은 하이진(排人)판법의 특징이지만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明代의 시집에서 보이는 것으로 아마도 중국 삽화본, 다색 인쇄등 당시 중국 판법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루노부 미인은 明末 그림책에 흔히 나오는 미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보인다. 또한 그의 미인화에 보이는 그림의 상부를 구름형태로 두르고 거기에 노래가사등을 쓰고 그 어귀를 암시로 해서 구상하는 방법은 古傳을 現代로 樣式化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대풍조의 영향이라 하겠다. 그리고 니시끼에라 하는 사실적 표현이 가능한 판화기법을 사용하면서 손발은 가늘고 허리는 잘록하게 그리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유연한 線描와 간단하면서 정확한 색채 그리고 인물화 배경의 뛰어남은 春信風 이라는 화풍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스즈끼 하루노부의 이름을 더욱 인식시켰다고 생각되는 작품으로 당시의 에도에서 평판이 있었던 실재의 미인을 소재로 한 그림은 에도중기의 회화전반에 이른바 사실적 경향의 표현이고 니시끼에가 창시되고 처음으로 실행되었던 우끼요에 범위의 확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루노부의 회화는 관능감각을 떨쳐버리고 이상미라고 할 수 있는 일개의 인형을 창조한데 있으며, 그것은 의상그림으로서의 문양미에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고 개성도 강조되는 것이 아니였다. 또한 연령·신분 차별에 의한 충돌도 없고 인간관계는 소년 소녀의 사랑과 같이 때로는 사소한 머리형과 의복이 다른 것에 의해서 구별짓는 이외에는 남녀의 구별까지도 어려운 이상미를 창조한데에 있다.
대표작 중인 하나인 「가사모리 오셍」은 에도에서 평판이 있는 미녀로써 가게의 평상에 걸터앉아 부채팔이와 담소를 하는 오셍의 자태미를 교묘하게 그린 것이다. 하루노부는 실재의 인물을 그리면서 자기가 이상으로 한 손발이 갸날픈 몽환적이고 우미한 인상을 주는 미인을 그렸다. 여름의 얇은 옷을 비치게 하여 여체를 나타내는 기법도 목판화 아니면 안 되는 독특한 표현법이다. 이러한 나시끼에의 한 장 그림으로 하여 오셍의 이름은 에도 시중에 퍼지고 또 오셍을 그린 것으로 해서 하루노부의 이름 또한 높아 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림가운데 부채에 그려진 배우 그림이 있는데 거기에 낙관이 보이며 당시 차차 성해진 배우의 초상화가 이러한 실용면에서 진출한 것을 보이고 있는 흥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루노부 그림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인 臥龍梅와 비오는 밤에 신사에 참배하는 젊은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雨夜宮詣美人도 갸름한 얼굴, 작은 입 그리고 꿈꾸는 듯한 눈의 표정, 비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와 여인의 옷자락은 배경의 직선과 사선을 사용한 기하학적 구조와 묘한 대칭을 이룬다. 또 학 위의 여인을 그린 鶴上의遊女 는 학의 흰털을 강조하기 위해서 종이를 도톰하게 보이게 하는 "기메꼬미"라는 판화상의 새로운 기법을 쓰고 있다.「속삭임」이라고 하는 작품은 몽환적인 남녀의 아름다운 정감을 묘사한 하루노부의 걸작중의 하나이다. 여자 두 사람이 등장하지만 동성 연애자는 아니고 벌레가 우는 가을의 초저녁, 연상의 처녀가 자기보다 어린 처녀의 귀에 속삭이는 정경이다. 하루노부는 정신적 감정을 표현하는 몽환·우미·우아 등의 부드러움에 가을비, 벌레소리, 가랑잎 소리들도 화면에 끌어들임으로 해서 자그마한 실내 공간에 환경의 암시를 주는 것이다.
4)기따가와 우다마로우다마로는 에도의 아사쿠사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도리야마 세끼엔(島山石燕)의 보살핌을 받았다. 부패한 다누마(田沼) 시대에 서민들은 오히려 활동적인 생할을 하였다. 가부끼라든지 우끼요에는 이러한 서민들로 인해 일반화 되었다. 다누마 20년 정치의 뒤를 이어 11대 장군 이에나리(家齊) 밑에서 로오주우(老中)가 된 마쯔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8代將軍 吉宗의 손자)는 요시무네(吉宗)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더욱 획기적인 정책을 실시 하게된다. 그는 대쪽같은 정치가로 문무를 장려하는 한편 무인들의 놀기 좋아하는 풍조를 단속 하고자 했다. 사치금지령으로 시작된 개혁은 단숨에 서민들 생활 까지 엄한 금령으로 묶어 나갔는데 오까바소(비공인 된 사창가)를 없애고 호객행위를 하는 여자들에게는 시집가기를 권고하고 여배우에 한 하여 허락되고 있던 남녀의 혼욕 풍조를 금지하고 남색을 금지했다. 사치품으로 인정되고 있던 거북등을 이용한 세공물에서부터 산호의 세공물, 비단 나아가서는 죠오닌의 연날리기 등등도 그지했고 당국에서는 밀고를 암암리에 장려하는 등 어둡고 엄한 세태 때문에 마침내 문화는 급속하게 고갈되어 간다. 이러한 탄압 정책은 니시끼에를 위시란 출판계의 구석구석 까지 미쳤지만 우다마로는 왕성한 서민적 반골 정신의 소유자로 교묘하게 막부의 탄압에 대항 하였다. 더구나 이시대의 시민 감정은 다소간에 차이는 있지만 다분히 반항적이라 볼 수 있다. 대출판업자 쯔다야 쥬사브로( 거屋重三郞)는 겉으로는 당국의 정책에 따르는척 하면서 내적으로는 강한 비판을 표출하였다. 죠오닌들은 당국의 정책을 대놓고 비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익명의 문서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이거나 길거리에 떨어뜨려 대항 하였다.
1791년 사다로부가 물러나고 기강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에도 사회는 상하가 모두 감각적인 향락을 쫓는 세기말적 현상이 전개되었다. 이 때 우끼요에는 화려하며 호색적인 것이 되어 점포에 넘쳐 났으며 정부는 1793년 9월에 일제단속을 행하여 금령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시민 대중에게 환기시켰다. 쯔다야의 샤라꾸(寫樂)가 그린 구로기라즈리가 금지되고 얼마 안있어 오오꾸비에 전부가 금지의 대상으로 되었다. 이는 여자의 얼굴을 그려서는 안 됀다는 것이어서 우끼요에 화가는 도대체 여자의 어디를 그려야할지로 고민하였다. 결국 우다마로가 전신상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
1797년에 정부는 화려함·호색적·실명을 특징으로 하는 니시끼에는 전부 몰수하고 절판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文化元年(1804) 5월 막부는 에죠우시(繪草紙) 상점 행사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에죠우시에 관해서 공고를 한다.
미심쩍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 대해 각기 처벌한다.
-1장 그림은 天正이래 무사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물론 家紋이나 이름등을 함부로 쓰는 것은 안된다.
-1장 그림에 씨름, 가부끼배우, 유녀의 이름은 별도로 하고 그 외 詞書 일체쓰지 못한다.
-다색판의 겹종이 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겹종이는 묵 정도로 찍고 채색을 해서는 안된다.
이는 서민의 즐거움 같은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손길이 닿은 프린트효과나, 조화된 색의 추구 등의 미의식 추구는 필요 없고 단지 형상만 나타나면 된다는 생각이다. 서민 쪽에서 보면 어이 없는 일이지만 막부는 출판통제로써 그것을 감행하였다. 특히 1장 그림은 天正이래 무사…의 항목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에도막부의 경위 등을 표현 한 것으로 정치비판의 하나로 최악의 문제 사항 이었다. 한편 우다마로는 소문난 처녀의 이름을 니시끼에에 넣는 것을 금지 당하자 문양을 넣은 편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며 "오끼다"의 문양이 오동을 닮은 꽃의 형태이면 그것을 그려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는 방법을 취했다. 오끼다, 오히사 같은 여자들은 당시 문양만으로 판별이 될 만큼 유명했으며 문양으로 알 수 없는 유명하지 않은 여자들일 경우에는 하이꾸를 적어서 알렸는데 이러한 방법은 단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文化元年 5월 16일 드디어 우다마로에게 철퇴가 내렸졌는데 미인화가 아닌 <太閣五妻洛東遊觀之圖>가 탄압의 대상이었다. 이 그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섯 처를 거느리고 유람하는 것을 그린 그림으로 장군 이에나리의 사생활을 비방한 것으로 해석되어 당시 대단한 인기가 있어 3장 시리즈의 니시끼에로써 팔고 있었다.
원판은 전부 몰수 한모또는 15실문의 벌금, 삽화의 도요구니 50일, 우다마로는 구금 3일과 함께 수갑차기 50일의 형을 받았는데 수갑이라는 것은 수갑을 찬 채 자택에서 근신하는 것이었다. 우다마로는 미인화를 꽤나 호색적인 으로 그렸기 때문에 풍속을 문란 시킨 위험한 존재라고 보여졌음에 틀림없다. 구금 3일 이라는 것은 실형이니 만큼 우다마로는 다른 사람보다 무거웠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그는 에도 토박이 기질을 발휘하여 막부의 탄압에 계속해서 저항했다.
우다마로의 女繪를 보고 당황한 막부는 금지령을 내리지만 그럴수록 금지령에 걸리지 않게끔 우다마로는 더욱 교묘하게 그려 놓았다. 막부는 또 다시 금지령을 만드는 순환을 거듭하다 드디어 대책이 없어진 막부는 화려한 모든 것을 금지하고 16문의 니시끼에만 만들도록 제한한다. 막부의 관리들은 우다마로 한 사람에 의해 농락당한 결과가 되고 그 분노의 폭발이 마침내 <太閣五妻洛東遊觀之圖> 에 대하여 폭발한 것이다.
이러한 처벌을 받고나서 우다마로는 유행화가로서의 기나긴 피로와 함께 몸도 약해졌다. 그 약해진 소문이 시중에 퍼지자 출판업자들은 그의 예술의 한계를 알고 그에게 많은 그림을 주문했다. 우다마로는 과로한 일로 인하여 탄압에 의한 창조성의 고갈과 쇠약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文化3년 (1806) 54세를 일기로 인기 있고 화려했던 우끼요에 화가로서의 생애를 끝맺는다.
기타가와 우타마로 / 관상10가지, '바람기'의 상5)우다마로(歌 )의 세계그는 본성을 기다가와(北川)氏 (후에 喜多川라고 사용)이름은 信美 또는 유우스께(勇助) 라고 불렀고 출생지에 관해서는 오늘에 와서도 정설이라 하는 것은 아직 없다. 그는 도리야마 세끼엔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후에 우끼요에 한모또의 큰인물 쯔다야 쥬우사부로가 그를 발탁하였다. 우따마로는 그 집에 있으면서 미인화로 자기의 나아갈 길을 찾아갔다.
기요나라의 미인화가 묘선을 주로 하여 전신상의 군상형식으로 자태미와 의상미를 표현목적으로 하고 있음에 대하여 우다마로는 한 여성의 얼굴의 아름다움, 피부의 하얗고 부드러움을 유연한 묘사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묘선은 단순화 되고 색채도 극도로 억제되었으며 최소한의 색으로 최대의 색채효과를 발휘했다.
우다마로가 외형으로써의 자태미라든가 의상미에 현혹됨이 없이 진실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이상화하여 묘사, 표현하므로써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인물을 그릴 때 얼굴의 선을 전혀 그리지 않고 배색에 의하여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그림이 <娘日時計>인데 이것은 젊은 창부의 하루를 표현한 것으로 얼굴 등은 흰 바탕을 살리면서 윤곽 없이 하고 목젖이라든가 유방 등은 가라즈리로 하며 배경은 운모를 대신하여 황색으로 그려냈다.
한편 그는 세상의 유행을 날카롭게 관찰하여 그것을 그림 속에 나타내면서 유행을 만들기도 했다. 여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무렵 섬세한 홀치기 염색이 유행하게 되자 당시의 유행무늬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우다마로의 미인화로 해서 유행의 세무늬가 생산되기도 하였다.
미인화는 의상에 있는 무늬를 화려하게 그리는 것은 물론 오오꾸비에(大首繪), 半身像, 전체의 모습으로 옮겨 가면서 대상도 찻집의 여자, 화류계의 간판격인 얼굴 "오이란", 여엄집의 처녀, 어머니와 아이 등 여러 가지로 머리의 형, 입은 옷, 비녀 등도 미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좋은 예로써 당시 에도의 삼미인 이라고 하는 것은 우다마로의 이상화한 미녀로 그려져 있고 단지 인기 있는 여인의 실명만을 빌려서 표현 해내고 있다.
그에게 작품을 의뢰한 한모또(版元)는 40집 이상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작품에 메너리즘을 만들어 이른바 "歌 美人" 이라는 형식미가 만들어 졌다. 부드럽고 풍만한 살결, 늘어진 머릿결, 장식적인 천의 묘사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미인도는 여인의 육체에서 느끼는 色氣를 퇴폐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일본의 우키요에(淨世繪)와 한국의 민화(民畵) 비교
역사적으로 볼 때 회화는 특정 상류계층의 향유문화로 인식되어왔다. 그것은 그들만이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문화를 영위할만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전반적으로 서민들에게도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회화의 대중화를 대표하는 것이 일본에서는 우키요에(淨世繪)와 한국에서는 민화(民話)라고 불리는 장르이다. 우키요에는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여 서민들도 경제적 부를 쌓을수 있었던 에도시대에, 민화는 역시 서민들의 경제적 주체로 대두되던 조선시대 후기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중 회화의 대표적 장르이다.
이 두 장르는 모두 서민이 역사의 주체로 부상하는 근대기 직전의 17 ∼ 19세기에 전반적으로 향유되었다는 면에서 또한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키요에는 목판화, 민화는 주로 종이에 그린 회화로 형태는 조금 달랐으나 양국의 서민들은 이들 장르를 통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미의식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근대기 직전 대중예술로서의 두 장르의 미(美)를 비교하고 그 배경 원인을 각각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이르러 전반적인 서민층의 경제력 향상과 상업 및 도시의 발달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키요에가 목판화라는 것 자체가 대량생산으로 일반 서민층에게 널리 보급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유흥가와 극장등 오락의 중심지였던 신흥도시에도(江戶)에서 꽃피웠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키요에는 풍속화로 출발했다가 점점 배우나 기녀등의 인물묘사로 흐르면서 당시 유행하던 연극 가부키의 발전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때문에 우키요에는 대개 화려하며 감각적이고 선과 색채가 강렬하다. 이것은 당시 서양과의 무역을 통해 서양화의 사실주의와 원근법등의 영향을 받은 탓도 크다.
가스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의 삼십육경치(富嶽三十六景)>에서 보면, 작은 배를 향해 거대하게 덮쳐오는 파도의 모양을 기하학적이고도 아름답고 힘차게 그려놓았다. 물결은 선명한 파란색의 명암을 주어 생생한 물길을 표현했으며 특히 화면구성을 압도할 정도로 커다란 파도는 그 물결 하나하나에 갈코리같은 묘사와 섬세하게 튀기는 물방울등을 그려놓음으로써 종래의 은유적이고 생략적이었던 풍경화풍의 그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강렬한 선들과 파란색과 흰색의 대비는 파도의 격렬함과 능동적 움직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한편, 기타가와 우타마(喜多川歌 )의 미인도에서 볼수있듯이 기녀, 유녀와 같은 인물들의 감각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묘사도 많이 눈에 띄는데, 물흐르듯 매끄럽게 그러나 선명하게 이어지는 선의 연달음이 기모노의 화려한 문양과 어우러져 환상적이며 세련된 느낌을 준다. 눈오는 마을의 평온한 풍경을 그린 그림조차, 눈의 흰 색과 다른 사물사이에 색의 변화를 강렬하게 주어 보통의 풍경화와는 달리 이질적이면서도 개성적인 느낌을 준다. 한편, 가부키 배우의 모습을 그린 <市川團十郞像>을 보면, 배우의 성격과 개성을 활동적이고 극적으로 그린 것이 눈에 띈다.
이와같은 강렬함은 장식을 중시하는 일본 회화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있다. 야시로 유키오라는 사람은 일본예술의 특징중 하나를 '장식물의 장식적 변형'이라고 들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일본미술은 자연의 소재로부터 주변의 생활모습에 이르기까지 대담하게 장식화를 시도하면서도 사실적 수법보다 훨씬 더 절실한 생명감을 표현해내며 회화와 문양과의 중간 영역에서 고도의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같은 일본 특유의 장식성이 우키요에에 이르러 그 이용목적과 어우러져 더욱 두드러진다고 생각된다. 즉, 가부키 극의 발전과 함께 극장이나 유흥가의 모습이나 가부키의 배우등을 그리며 가부키 극장의 간판에 까지 사용되는등 보다 상업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었기 때문에 더욱 장식적인 경향으로 흐르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이와같은 특징은 당시의 일반서민들을 즐겁게 했음은 물론, 서양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서 모네, 마네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낳게 하기도 했다.
한편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민화는 대중회화로써의 또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즉, 장식적이고 화려한 우키요에에 비해 소박하고 순진하면서도 질박한 서민 그대로의 감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형식을 의식하지않고 미의식과 정감을 솔직히 표현하여 보다 서민적 기질이 다분히 깔린 느낌을 준다. 더구나 민화는 장식성이나 예술성보다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더욱 중시하여 주술적 성격이 강한 실용화였다.
물론 어느 시대의 그림이나 이러한 성격을 지니기는 하였으나 우리조상들은 그러한 의미를 더욱 뚜렷이 부각시키기위해 표현 방법이나 소재의 해석을 늘 새로이 했으며 이를 통해 우리의 민화는 더욱 독특하게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예를 들어, 물고기의 특징, 즉 한꺼번에 많은 알을 낳는다는 점과 떼지어 다닌다는 점은 다산(多産)을 의미하며,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그림인 <약리도>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입신출세를 상징한다. 이 <약리도>는 등용문에 통과하여 입신출세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주고받았던 그림이었지만, 결코 세련된 풍으로 그려져있지 않다. 가늘은 선의 묘사와 강렬한 색깔은 우키요에와 흡사 비슷할수도 있으나 그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이나 섬세함은 이 그림에서 찾을수 없다.
하늘에 피어나는 구름은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순진하게 거듭된 원으로만 그려져 있으며 그 사이에서 솟아나는 해도 지극히 소박하게 그려져있다. 뛰어오르는 물고기의 모습도 실제같다기 보다는 만화에 나올법한 귀엽고 해학적인 모습이다. 이것은 배우의 모습이나 풍경등 장식위주로 그린 우키요에보다, 서민들의 성격을 더욱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민화의 모든 소재는 그 하나하나가 여러 가지 상징성을 띄고있는데 이같은 특성은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해줄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사소통의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가령 풍족하게 살며 자식을 많이 낳게 해달라는등 인간으로써의 소박한 바램을 표현함으로써 민화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동경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는 또다른 민화로, 유명한 <까치 호랑이>그림이 있다. 이것은 설화의 내용을 상징하는가 하면, 신탁의 전령사인 길조 까치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전능의 신 서낭신의 사자(使者) 호랑이를 같이 그려 신에게 기쁜소식을 전한다는 뜻을 갖고있기도 하다. 그러나 호랑이 그림이 갖는 가장 대표적인 성격은 바로 악귀를 내쫓고 복을 가져오는 영물화라는 것이다. 이것은 궁중은 물론이고 사대부의 저택과 일반 서민의 집에서도 정월 초하룻날에 대문 도는 집안에 붙여졌는데, 이같은 '영적인 힘을 지닌 동물그림을 집에 둠으로써 잡귀를 물리칠수 있다'는 믿음은 가장 서민적이며 소박한 바램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 나타나는 호랑이의 모습이 결코 광포하거나 잔인하지 않고 해학적이며 귀엽기까지 하다는 것은 우리 서민들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까치를 향해 빙긋 웃으며 혀를 내밀고있는 호랑이의 모습은, 귀신을 쫓는 일에 조차 부드럽고 인정있게 대했던 우리 조상들의 품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민화가 주로 이름없는 무명작가들에게서 무작위적으로 그려졌으며 어떤 상업적 목적에 결부되었다기 보다는 친한 사람들 사이에 오고갔던 것이라 할 때, 어떤 화파(畵派)를 형성하며 가부키라는 흥행극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우키요에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같은 대중회화, 서민 향유의 그림이라해도 두 장르의 성격은 이토록 다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키요에는 장식성이 더욱 강조된 서민 회화요, 민화는 주술적 실용성이 더욱 강조된 서민회화라고 하겠다. 때문에 전자는 화려하고 강렬하며 후자는 소박하고 순진하고 다양하다. 이렇듯 달랐지만 이들은 양국의 그 시대 서민들의 애환을 덜어주었을 것이고 이후 근대기에 주체로 대두되는 그들의 의식을 더욱 고취시켜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록 후기에 이르면 우키요에는 전형적이며 말초적인 묘사로 타락, 민화는 서민의 것을 천시하는 풍조에 함몰되어 각기 쇠퇴하지만, 그들이 갖는 의미는 그 어떤 예술보다도 의미깊은 것일 것이다.
< 참고도서 >
名野健 外 공저, <<일본미술사>>, 열화당, 1978
武藤 誠, <<일본미술사>>, 지식산업사, 1994
惟雄, <<일본미술 이해의 길잡이>>, 시공사, 1994
운열수, <<민화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1995
존 카나디이, <<미술이란 무엇인가>>, 덕성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