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본관은 양천(경기 ; 현 서울 강서구)이며 호는 구암(龜巖)이다.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경상우수사를 지난 무관이었고 아버지 허론(許碖) 또한 무관으로 용천의 지방관과 부안군수를 지났다. 명종 원년에 출생하여 광해군 7년에 사거하였으니 향년 70세였다. 일설에는 중종 34년(1539), 또는 그 2년 전인 1537년 출생 기록도 있고 향년이 77세라는 자료도 있다.
양천허씨 세보에 허준은 서자라 하고 아버지의 정실 부인은 손씨라 하였다. 한편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그와 친했던 김시흡이라는 인물이 허준의 적삼촌숙부(嫡三寸叔父)라 하여 오히려 본가 어머니가 김씨이며 손씨는 친어머니였던 것으로 볼 소지도 있다. 그런가하면 조선 말기의 성원록(姓源錄)에는 영광 김씨가 허론의 부인이자 허준의 어머니로 기록되고 있어 약간의 혼선이 있다. 여러 견해가 교차할 수 있으나 대체로 본가의 어머니(嫡母)가 손씨이며 실제 어머니(生母)는 첩실로서 영광김씨로 이해된다. 이 경우 미암일기의 김시흡 관련 기록은 본가의 정실 어머니의 동생이라는 뜻이 아니라 친어머니 영광김씨 본가의 배다른 동생이 김시흡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할 듯하다. 허준이 부조(父祖)의 무관 업을 계승하지 않고 당시로서는 중인의 직업이었던 의학자의 길을 걸은 것도 서자(庶子)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일설에 허준의 아버지가 세보에 백부로 기록된 '허연'이라고 하는 등 이설도 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허준의 탄생지는 세거지인 경기도 양천이라는 견해가 많으나 성장지가 어디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568년 서울 유희춘의 집에 방문한 기록이 있어 20대 초에 서울에 거주하였음은 확실하다. 다만 유희춘이 전라도 해남 출신으로 허준의 생모(生母)로 추정되는 영광 김씨와 동향인 점, 허준의 외삼촌 김시흡과의 밀접한 인간관계 등을 고려할 때 양가의 인연이 자못 깊으며 허준 또한 외가의 해남 일대에서 성장했을 개연성도 제기된다. 허준이 의관이 된 후 약재 수집에 전라도 지역을 담당했던 경력도 이러한 시각에 힘을 보태는 듯하다.
혹자는 허준이 경남 산청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유의태(유이태)에게 배웠다 하고 소설과 드라마 등에서 이를 추가 부회하였으나 실제 유의태는 허준보다 훨씬 후인 숙종(肅宗) 시대의 인물로 전혀 관계가 없다. 성장지를 경남 산음(산청)으로 극화한 것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실 무근이다. 또한 1574년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하나, 실제 의과 급제자 기록에는 허준의 이름이 없다. 미암일기에 유희춘이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편지를 보내어 내의원에 들어가도록 천거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이 그의 의관 출사의 실질적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는 유희춘과 그 주변인들의 병을 두루 치료하였다. 유희춘 자신과 아내 및 지인들의 병 치료를 그에게 맡기는 기록이 산견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하여 허준의 명성이 서울 상류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듯하다. 마침내 내의원으로 들어가 왕실의 병까지 담당하여 조선왕조실록 선조8년(1575) 2월조에 "명의(名醫) 안광익(安光翼)·허준(許浚)이 들어가서 상(上 ; 왕)의 맥(脈)을 진찰"하였다 한다. 왕을 직접 진찰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음을 알게한다.
의관은 권부(權府) 요인의 건강을 보위하는 직책이므로 그 본래의 능력과 함께 출신성분이나 정권에 대한 충성도도 중요하였을 것이다. 허준을 천거한 유희춘은 선산유씨로서 원래의 뿌리는 경상도이나 고조부의 지방 관직에 따라 순천지방으로 이주함으로서 호남 사림파(士林派)의 원조적 일인(一人)이 되었다. 해남 담양 등을 근거지로 많은 지인들을 사귀었는데 김인후, 기대승 등 호남의 거유들과도 친교하였고 특히 전자와는 사돈까지 되었다. 명종조에 윤원형이 득세할 때 반대편에 서다가 유배되어 18년간을 외지에서 지났으나 선조가 등극하면서 사림(士林) 득세 정국 속에 복귀되었다. 이후 중앙 요직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전라도 관찰사도 지났다. 퇴계와도 서신으로 성리학을 토구하였으며 선조에게 경연관으로 경사(經史)를 논하였다. 그러한 비중 높은 인물의 천거이므로 허준이 왕의 건강을 직접 보살피는 지위로까지 수식 상승하는 또 하나의 배경 요인이 되었을 듯하다.
그의 위치가 이처럼 성리학자들의 후원을 받았더라도 허준의 의학은 유의(儒醫)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도가(道家)의학적 성향을 띤 것으로 평가된다. 미암일기에 그가 유희춘에게 진작 선물한 책 중에 '노자'도 들어있음도 청년기부터 도가사상에 친숙했음을 시사한다. 다만 조선시대의 도가사상은 중국 도교의 원조인 노장(老莊)사상이나 신선 방술류 뿐 아니라 한국 고유의 독자적 사상계열도 포괄함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허준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로 전해지는 조여적의 '청학집(靑鶴集)'에 의하면 조선의 도가(道家) 선파(仙派)는 중국에서부터가 아니라 시조를 국조(國祖) 환인(桓因)진인(眞人)으로부터 뿌리잡아 단군을 이어 신라 화랑 영랑 등과 고려시대 이명 등을 거쳐 조선시대 자신까지 연결지어 서술된다. 또한 저작시기가 명백하지는 않으나 조선 후기 편찬된 것으로도 거론되는 '규원사화(揆園史話)'나 그 이전으로 주장되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등도 통상 '도가사학(道家史學)'이라 분류되거니와 이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다루지 못한 단군시대 역사와 그 후대의 맥락을 자세히 전달함을 주력하였다. 이들 서적은 필사본으로서 출처에 대한 의심과 사료적 가치에 논란이 있으나 후대의 수정 가필이나 일부 창작성을 가정하더라도 조선시대 사회 일각의 흐름세를 이해하는데 일정한 참고가 된다.
사실 조선은 그 왕조 중반기 이래 성리학이 주도하는 사회였으나 이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은 민중의 무격(巫覡)신앙이나 민속가무(歌舞) 류 외에 식자(識者) 관인(官人)세계에서는 대개 의료, 풍수, 천문, 제의 관련 중간층들이 이른바 '도가'적 범주 내에 관계 발언의 통로를 찾았던 터이다. 이점에는 완고한 성리학자들도 다소 유연함을 보여 그 존립공간을 일정수준 용인하였다. 허준의 도가의학이 민족고유 정신문화에 특별히 관심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성리학적 완고성에 일정 여백을 제공하고 정신건강 상의 균형감각과 성리학 외적 사조의 서식 공간을 넓힌 점은 유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저서에 언해본이 많고 약초명을 한글로 병기하는 노력 등은 당대 의료문화의 추향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본인의 실용주의 사상과 민족 고유문화 전승 측면에서도 음미할 점이 있다.
출사 이후 허준은 능숙한 임상 능력으로 궁중의 광범위한 인사들의 병을 치유하여 신임을 얻고 직급은 계속 높아졌다. 파격적 승진에 대해 삼사 언관들이 반발도 많았으나 왕실의 신임은 날로 깊어지고 승진은 거듭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토가 유린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였는데 허준은 선조를 호종하며 건강을 각별 보위하여 돈독한 신임을 얻었다. 이같은 제반 공로로 1596년(선조29년)에는 정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올랐다.
1596년 이후 허준은 의서 편찬의 왕명을 받아 유의(儒醫)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편찬을 개시하였다. 중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도 중지되었으나 후에 선조가 다시 불러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 하며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어 참고하게 하였다. 1600년에는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1606년(선조39년) 저간의 왕실의 병을 치유한 공로로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가자되었다. 이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최상급 위계여서 대간들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 '보국'의 칭호는 취소되었다. 1608년 2월 선조가 병세가 위급하던 중 사망하자 통상적 관례에 따라 허준은 의관(醫官)의 책임자로서 문책을 당하고 파직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빠른 시일내에 복귀시키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발로 지체되었다.
그 과정에 허준은 장기간 편찬 중이던 《동의보감》을 1610년(광해군 2년) 저작 완료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양평군 허준이 일찍이 선조 때 의방을 찬집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다니고 유리(琉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에 허준에게 숙마 1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을 설치해 속히 인출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하도록 하라.”(조선왕조실록; 광해군2년 ; 1610년 8월 6일)고 명하였다. 유배의 족쇄가 풀리고 복귀하여 다시 왕을 친견하게 되자 광해군은 자신의 건강을 허준과 긴밀히 상의하며 전폭적 신뢰를 보내었고 그의 후속 저술과 출판을 지원하였다.
의관으로서 유래없는 성공과 영광을 얻은 허준은 본인에게 부여된 소임을 마지막까지 수행 진력하다가 1615년 8월 세상을 떠났다. 왕은 허준의 관작을 그의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의 칭호를 더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추증하며 애도하였다.
허준 가문의 연고지였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의 민간인통제구역(DMZ) 안에 허준과 부인 안동 김씨, 그리고 생모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출생지인 서울 강서구 가양동(양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공원인 구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허준의 주요 저서> 벽역신방(辟疫神方) 신찬벽온방(新纂酸溫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동의보감(東醫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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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두종 '한국의학사'(탐구당) 노정우, '한국의학사'(한국문화사대계3 ; 고대민족문화연구소)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醫齒藥出版株式會社) '동의보감'(남산당), 권두 해설 부분. 위키백과(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호, '16세기 후반 17세기 초 의관 허준의 생애 재고' 조선왕조실록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