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의자
부처님!
세상에서는 ‘벽감투’란 말이 있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얻어 걸린 높은 벼슬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세속에서는 오욕 중에 하나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속을 여의었다는 당신의 제자들도 그 ‘높은 자리’에 앉아 버티기를 세속사람들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을 요즈음 흔히 봅니다. 마치 그런 감투나 뒤집어 쓰기위해 불문에 들어온 것처럼-.
한번 그 자리를 차지하면 자기 분수도 돌아보지 않은 채 노랗게 탐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권을 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 마키아벨리즘의 무리들처럼, 말로라도 세상의 욕락(慾樂)을 떠나 출가수도 한다는 이들에게 무슨 ‘장(長)’이 그리도 많습니까? 그나마도 솔직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일이 전혀 자의 아닌 타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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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스님 |
물론 개중에는 개인의 수업을 온전히 희생하고 대중의 외호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보살의 화현 같은 이도 없지 않습니다. 또 오늘날의 사회구조로 보아 본의는 아니나마 그 긴 의자에 걸터앉아야 하고 사원의 의무를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왕 출가의 길에 들어섰으면 어디까지나 불제자 된 분수와 출세간적인 입장에서 사심 없이 공정하게 집무해야 할 것임에도 삼보의 정재를 함부로 탕진하고 나아가서는 승려로서의 본분을 이탈한 채 사회적으로 불미스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례를 그동안 드물지 않게 보아오고 있습니다.
기본재산이 좀 여유 있거나 수림이 우거진 절은 서로가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는 꼴을 우리는 불행하게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저의는 얼마 안가서 결과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불전함 (喜捨凾)을 치워라
부처님!
당신의 성상이 모셔진 법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자비하신 당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입을 딱 벌린 채 버티고 있는 ‘불전통’이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의 위치는 바로 당신의 코앞입니다.
시정이나 산중에 있는 절간을 가릴 것 없이 그것은 근래 사원의 무슨 악세사리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내려다보실 때마다 얼마나 난처해 하실까를 당신의 제자들은 눈이 어두워 못보고 있는 성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어떤 곳에서는 이런 ‘간판’까지 내걸고 있습니다. ‘돈을 넣고 복을 비는 곳’이라고-. 49년 당신의 설법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번이라도 계셨습니까? 복덕(福德)이라는 게 화폐로써 잴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당신의 가르침이 사교(邪敎)가 아닌 위없는 정법(正法)임에도 -. 누가 보든지 낯간지러운 이 괴물은 시급히 철거되어야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상이 모셔진 코앞을 비켜서 만이라도 -.
극락행 여권
부처님!
극락으로 가는 차표를 발급하고 있는 데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무슨 잠꼬대냐고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 암흑의 계절 중세가 아니라, 오늘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푸닥거리나 일삼는 ‘무당집’에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손꼽는 큰절에서 버젓이 백주에 거래되고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다라니’라는 것을 찍어서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다. 야시장도 아닌데 이런 넋두리까지 겹쳐서 ‘극락으로 가는 차표를 사가시오’ 하고-.
당신의 옷을 입고 당신이 말씀해 놓은 교리를 공부하는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당신을 파는 이런 짓을 얼굴하나 구기지 않고 뻔뻔스럽게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교(邪敎)에서나 있음직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부처님!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샤머니즘이 횡행해야 되겠습니까? 한동안 마치 중세 구라파에서 한동안 치부에 여념이 없던 살찐 카톨릭의 성직자들이 ‘면죄부’라는 부적을 팔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짓이 아닙니까?
이것이 그쪽에서는 종교정책의 한 불씨가 되었다고 하지만, 오늘 이 고장에서는 이 비슷한 일이 하도 많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서는 가끔 억울하게도 미신과 동일한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실로 낯을 들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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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쓴 웃음을 짓게 하는 불전함 글귀 © 정헌 |
불사의 정체
부처님!
불사라는 행사가 요즘에는 왜 그리도 많습니까? 걸핏하면 ‘백일기도’ ‘만인동참기도’ ‘보살계삼림’ ‘가사불사’ 탑에 물방울 정도 튀기는 ‘세탑(洗塔)불사’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위조지폐까지 발행해가면서 하는 도깨비놀음 같은 ‘예수재’ 등등......
이밖에도 일찍이 보고 듣지도 못한 별의별 희한한 불사들이 정말 비온 뒤의 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잇달아 거행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불국세계가 도래하는 게 아니냐 싶게-.
불사라는 본래 뜻은 부처님의 교화를 가리킨 것으로서 개안(開眼) 상당(上堂) 입실(入室)등에 주로 쓰인 말인데, 요즘에는 흔히 승려들의 일용사(日用事)쪽으로 추락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불사의 본래 뜻에 합당한 불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흔히 불사란 이름을 내걸고 실속은 엉뚱한데 있는 불사(佛事) 아닌 ‘불사(不事, 해서는 안 되는 일)’를 자행하고 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구도자의 양심에 비추어보아 떳떳할 수 있는 법다운 불사가 얼마나 될는지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중이 돈이 아쉬우면 멀쩡한 축대라도 헌다’ 속담이 있습니다. 결코 웃어넘길 수 만 없는 가슴을 찌르는 통절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럴듯한 이름을 내건 ‘○○불사’라는 모임이 있을 때면, 으레 그 끝은 두둑한 ‘권선책’이 나돌기 마련입니다. 한꺼번에 몇 가지씩 결코 ‘희사(喜捨)’일수가 없도록 반강요하는 눈초리를... 재화를 다수 내놓으면 흔히 말하기를 ‘신심이 장하다’고 합니다.
재화가 신심의 바로미터일수가 있겠습니까? 불사라는 미명하에 신도를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순진한 신도들은 교화를 입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출혈적인 혹심한 수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돈도 없는 사람은 절에도 나갈 수 없더라’는 비불교적인 서글픈 탄식이 나오는가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전체 승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 가운데서 수도에 전념하는 의젓한 구도자가 몇이나 되는지, 관계기관인 중앙총무원에서도 집계를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반해서 포교당을 비롯해서 신도들을 자주 접촉하고 있는 절간에서는 신도의 축원카드가 어느 시청의 호적 사무 못지않게 질서 정연히 정비되어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극성스러운 곳에서는 카드에 금전출납의 기록란까지 만들어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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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일암 섬돌 곁에 놓인 투박한 나무의자 |
부처님!
이런 짓을 포교의 사명처럼 착각하고 있는 두꺼운 안면 신경을 가진 당신의 제자들이 허다합니다. 불사라고 당신의 이름을 팔아 거행되는 그 표면에는 얼마나 셈 빠른 타산이 오르내리는지, 부처님도 아시게 되면 얼굴을 붉히실 것입니다. 속이 유리 속처럼 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이 어설픈 수작들은 휴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그리고 이런 무자비한 횡포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市井]에서 어떤 모임을 보면 너무나 세속적인 동작들에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그 숨 막히는 조직사회에 염증이 나서 어쩌다가 당신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을, 문안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다시 조직 속에 얽어매려는 선참(先參)들의 횡포가, 무자비한 횡포가 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피곤한 나그네에게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트인 길조차 막아버려야 하다니! 싱싱하게 이끌어 주어야 할 구도의 길을 짓눌려버려야 하다니!
더구나 이쪽이 물질적으로 여유 있다는 것을 선참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탐욕은 왕성하게 동(動)해서 상대방의 의사도 아랑곳없이 감투 뒤집어씌우는 이 노란 술책! 그 잘난 <신심>이라는 코걸이를 미끼로 내세우면서 …. 우리는 그러한 모임에서 어떻게 순수한 종교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요즘 항간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파라독스가 떠돕니다. ‘큰스님’의 체중이란 법력이나 도덕의 비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신도들을 얼마만큼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 당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귀의한 새하얀[純白] 신앙인을 마치 하나의 재원(財源)으로 착각하고 있다니 ….
부처님!
불사(佛事)라는 말을 이 이상 더럽혀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이 ‘불사(不事)’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말로 시급하고 중요한 불사라면, 한시바삐 탐욕과 무지의 탈을 벗고 또한 벗겨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첫댓글 법전, 헌금함에 움직이는 종교집단에게 주는 일침이며, 정말 생각해야하는 거라 봅니다
가사불사’ 탑에 물방울 정도 튀기는 ‘세탑(洗塔)불사’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위조지폐까지 발행해가면서 하는 도깨비놀음 같은 ‘예수재’ 등등...... /// 정확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군요. 예수재가 무엇을 말한 것일까요.?
스님 못지 않게 신앙생활이란 말을 내비칠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요.
가톨릭신자로서 요한은 이러한 경험과 그후로 체득하게된 지혜를 말씀드리면
나의 오감에 스치는 의혹과 부정적인 모든 요소 예를 들면 성직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신앙인들의 不事에 대해
단죄할 힘을 주신 것인지 방관할 처지를 원하시는지 위대한 힘의 자식들로 거듭나게 하시어 그때마다 나아갈 길을
주실
뜻인지를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아버지를 따라 언행에
힘쓴다는 것입니다.
오류는 시간이 걸려도 걸러지고
지난 글에도 보여 주셨듯이
여러 재난이 우연이라고만
볼수 없듯이
많은 일이 세밀하게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때마다
할일을 주시고, 만날 사람도 이어 주시고,
어느 산인이 걸으며 말했지요.
블루산 천상길을 걷는다 싶었을 때 저의 어떤 질문에
그는 저는 이러한 곳이 교회입니다 하였지요. 참 깊은 의미를 느끼고 공감했지요.
어떤 형식과 겉치레의 굴레속에서도
살아 계신 그분을 느낀 이후로는
격한 감정[ 하기야 누구들은 요한도 강성이야 로 분류 ]을 무거운 바위 밑으로 숨기고,
그분이 주신 길과 빛과 생명으로 연명하며
아직도 붙어 있는 사악한 때를 벗겨 내가며
타의 허물을 들추기도 먼지가 싫어
좋은 점들을 살피기도 얼마나 바쁜지
여튼 블루에 푹빠지라 하시니 경기도 세배의 그곳을 오백번 두들겨 조금은 맛보고 다른산으로 애인을 바꾸고
우리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관문에 문지기가 인상을 쓴다고해서 매주 배알할 효도의 의무를 져버려서는 안되고
초록이 좋아 평화를 주시는데 동행의 벗들과 즐거운 노래 함께 하는 시간
바로 아버지를 찬미하는 행복한 이들의 영원한 순간들이라 믿습니다.
요한 또한 봉투에 돈 쬐끔 넣어 올려진 이름들의 바라는 내용들을 그분께서 다 들으시지
않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