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의 수은정(睡隱亭) |
1618년 남간공의 부친인 덕양공 시묘중에 수은선생의 비보를 받고 지어 보낸 晩詩가 睡隱集에 실려있어 소개 합니다.. 聞師睡隱公訃(문사수은공부)/스승 수은공께서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다. 五月初六日(오월초육일)/1618년 5월 초6일 수은집(睡隱集) 附錄 [挽詩]편에 羅應瑞 海鳳의 시 원문/나해봉 번역/ 나천수 格者論之曰(격자론지왈)/가지각각 사람들이 논하기를 天應殺善人(천응살선인)/하늘도 선인을 죽인다 하더라. 先生遽如許(선생거여허)/수은 선생이 어째서 이리되었는가. 此說豈非眞(차설기비진)/이 말이 어찌 참말이 아니란 말인가. 漠漠元無信(막막원무신)/원래 소식이 없어 막막하였는데 蒼蒼果不仁(창창과불인)/과연 하늘이 인자하지 못함이 창창하구나. 呼穹穹轉邈(호궁궁전막)/하늘에 호소한다고 하늘이 더 멀어지랴. 血淚目盈巾(혈루목영건)/피눈물만 눈에 가득하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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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의 내산서원에는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수은정(睡隱亭)이란 정자가 있다. 여기서 수은(睡隱)은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강항(姜沆:1567~1618)의 호를 따 정 이름을 정했다.
정자는 연못에 두 기둥을 물에 잠기게 하며 연못 가운데로 동그란 섬을 띄워놓아 멋을 내고 있다. 선비들의 정자는 삶은 각지게 살아야 한다는 묵시의 규율이 있어 연못을 각지게 만들었고 또한 마치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최근에 1992년에 지어진 누각으로 정사각형으로 된 방문객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지만 사당.서원이라는 다소 무거운 감정을 싱그럽게 하는 공간이었다. 방문한 날 연못과 초록빛으로 물들인 수변 수목과 함께 편안한 오후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곳은 문벌이 높은 문인학자였던 강항은 왜(倭)의 땅에서도 지방 토호의 보호 속에 일본에 퇴계학(退溪學)을 전한 유학의 스승이 되었고, 그 옛날 백제의 왕인(王人) 박사가 천자문을 전했던 뱃길로 그는 다시 조선 유학의 씨를 뿌린 제2의 왕인박사였다.
본관은 진주.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 좌찬성 희맹(希孟)의 5대손이며, 강희맹(姜希孟)의 아들 강학손(姜鶴孫)이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귀양 갔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그 곳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게 되었다. 그는 강학손의 현손(玄孫)이며 극검(克儉)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그는 영광군(靈光郡) 남쪽 불갑산(佛甲山) 유봉리(流峰里)에서 태어나 어릴때 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많은 학문에 뛰어났다. 유년기 다섯 살 때 벌써 글을 익혀 청렴한 문인으로 알려진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1532~1585)가 각(脚)자라는 시제를 제시하니 강항은 주저없이 "다리는 만리를 가지만 다리를 부리는 것은 마음이라 脚到萬里心敎脚"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그는 인생의 행적은 조광조의 도학이념과 실천정신을 이어 받은 스승 성혼에게서 비롯됐다. 1593년(선조 26)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박사·전적을 거쳐,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군량미와 군기를 모아서 전라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에게 보냈다. 1593년(선조26) 세자[광해군]가 전주(全州)에 머물면서 정시(庭試) 문과를 베풀었는데, 나이 27세로서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 보급에 힘썼다.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인 영광에서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싸웠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이순신 진영 해로로 탈출하려다 영광 염산 앞 바다에서 1597년 포로가 되었다. 이 때 무안 앞 바다를 메운 600~700척의 거의 절반이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남녀를 실은 배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정유년에 포로 되었던 함평 월야 출신의 정희득(鄭希得)은 이때 일본에 끌려 간 조선 사람이 10만 이상이라고 했는데 고국으로 쇄환(刷還)된 수는 7,5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
그때의 참상이 간양록 적중 봉소(賊中封疏)에서는 "........중형의 아들 가린(可隣)이는 여덟 살이다.목말라서 짠 소금국을 마시고 구토설사하여 병이 나자 적이 물 속에 던지니,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도록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아이야 아비를 바라지 말라(兒兮莫望父)’라는 옛말이 참말이 되었다.......어린 놈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의 죽음이 너무도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 까막 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 버렸다. 엄마야! 엄마야! 부르던 소리 아직도 귓결에 들려온다. 그 소리마저 시들어질 때 산 아비가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 온통 밤이면 밤마다 통곡을 했다. 슬피 하소연하는 것을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포로선은 아비규환,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한 바다 아득아득 달조차 지려는데 / 눈물이 이슬과 함께 옷섶을 적시누나 넘실넘실한 이 수면 상사한들 어찌하리 / 견우 직녀 응당 이 밤 심정 알거로세 滄海茫茫月欲沈 淚和涼露濕羅衿 盈盈一水相思恨 牛女應知此夜心
........굶주림과 피곤함이 너무 심하여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작은 딸이 나이가 여섯 살이어서 제 힘으로 걷지 못하므로 아내와 처모(妻母)가 번갈아서 업었다. 업고서 내 하나를 건너다가 물 속에 쓰러지자, 힘이 없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언덕 위에 있던 한 왜인이 눈물을 흘리며 붙잡아 일으키고 말하기를,
“아! 너무도 심하다. 대합(大閤)이 이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어디다 쓰려는가? 어찌 천도(天道)가 없을소냐?” 하고, 급히 자기 집으로 달려가서 서속밥과 차숭늉을 가지고 와서 우리 한 집 식구를 먹였다. 그제서야 귀와 눈이 들리고 보였으니, 왜노 가운데도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간양록 적중 봉소(賊中封疏) 난리를 겪은 사적(涉亂事迹)에 포로자의 처절한 심정이 묻어나 있다. "좌도(佐渡)가 고성(固城)에서 군사를 철수하여 왜경(倭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곡(部曲)을 보내어 우리 집안을 왜의 서경(西京)인 대판성으로 강제로 가게 하여, 배를 타게 되었다. 이에 감개를 못이겨 시 한 수를 지었다.
내 나라를 떠나온 천 리 밖에서 / 아득아득 동으로 다시 향하네 응당 해돋이를 다 가자면 / 도시 편풍에 맡길 뿐이네 去國今千里 迢迢更向東 應須窮出日 都只信便風
전쟁은 헌원씨가 시작하였고 / 요사는 약캐던 진동(秦童) 때부터 움텄네 남아로서 염원하던 사방의 뜻이 / 왜놈 땅에 올 줄이야 뉘 알았으리 禍首軒轅氏 妖胎採藥童 男兒四方志 不意到倭中
선비가 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시문이었다. 또 배 안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그의 나이 30세 였음을 알리고 있다.
만 생각 천 시름이 벌집과 같은지라 / 나이 겨우 서른 살에 귀밑머리 하얗다니 이 어찌 계륵이 혼 골을 녹여서랴 / 진실로 용안을 못 뵙는 때문이야 滿臆千愁若蜜房 年纔三十鬢如霜 豈綠鷄肋消魂骨 端爲龍顔阻渺茫
평일에 글을 읽어 명분 의리 중하지만 / 후일에 역사 보면 시비가 길거로세 부생이 저 요동의 천년 학 아닐진대/죽을 바엔 해상의 염소를 보자꾸나 平日讀書名義重 後來觀史是非長 浮生不是遼東鶴 等死須看海上羊
그래도 살아야 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 성(伏見城)으로 이송된다. 우리나라 병선(兵船)이 왜적에게 빼앗기게 되어 우치하(宇治河) 입구에 와 있음을 보고 또 한번 서글퍼 했다. 대판에서 작은 배에 실려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기는데, 밤에 배 안에서 자면서 절구시 한 수를 지어 답답한 심회를 풀었다.
노화에 배 닿자 달 한창 밝고 / 오경이라 모래 둑엔 자는 백구 놀란다 해 묵은 배는 내 집이 되고 / 머리 센 사공의 노 젓는 소리 舟着蘆花月正明 五更沙岸宿鷗驚 經年海舶爲吾室 頭白篙工上棹聲
어느날 전라 좌병영(全羅左兵營)의 무관 우후(虞侯) 이엽(李曄)이 사로잡혀 온 사람들과 배를 사서 서쪽으로 탈출하다 잡혀 절명사(絶命辭)를 남기며 칼을 빼어 스스로 찌르고 바다 가운데로 떨어져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서 수레에 사지를 걸어 찢어 죽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수은은 그 시에 차운한 수 편에 시가 전하고 있다. 그중에
봄이 금방 동으로 오니 한이 금방 길어지고 / 바람 절로 서쪽으로 부니 생각도 절로 바쁘구나 밤 지팡이 잃은 어버이는 새벽달에 부르짖고 / 낮 촛불처럼 아내는 아침 볕에 곡을 하리 春方東到恨方長 風自西歸意自忙 親失夜筇呼曉月 妻如晝燭哭朝陽
물려받은 옛 동산에 꽃은 응당 졌을거고 / 대대 지킨 선영에는 풀이 정녕 묵었으리 모두 다 삼한이라 양반집 후손인데 / 어찌 쉽게 이역에서 개와 양과 섞일 수야 傳承舊院花應落 世守先塋草必荒 盡是三韓侯閥骨 安能異域混牛羊
또 장군의 기개야말로 하늘 같이 길고 긴데 / 어느 사람 바삐 도망갔다 뒤집어 말하네 의골은 흔연히 동해 밑에 잠겼는데 / 맑은 바람은 멀리 수양산을 대었구려 將軍氣槩與天長 何者飜論此去忙 義骨樂沈東海底 淸風遙接首山陽
매달린 머리, 비를 맞아 씻기는 게 좋을지니 / 흙에 묻혀 무엇하리 변방 풀 묵을텐데 만권의 글을 읽은 서생이 면목 없네 / 두 해를 궁발에서 저양을 먹이다니 竿頭好受秋霖洗 埋土寧敎塞草荒 萬卷書生無面目 兩年窮髮牧羝羊
또 만 리의 청구라 바닷길이 멀고 먼데 / 꿈 혼은 어디서 바삐 가고 바삐 오나 삼청 이별의 한은 봉래산 밖이거니 / 가고픈 일편단심 한강의 남쪽일세 萬里靑丘海驛長 夢魂何自去來忙 三淸離恨蓬山外 一片歸心漢水陽
생각하면 인생이란 참으로 잠깐이라 / 천도를 살펴보면 막연한 것이 아니라네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함은 우리의 가훈이라 / 아이들도 개와 양에게 절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네 算得人生眞抄忽 看來天道豈蒼荒 成仁取義吾家訓 童子猶慙拜犬羊
그는 일본 오쓰 성(大津城)에 유폐되어 이곳에서 이즈시 사[出石寺]의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친교를 맺고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醒窩) 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포로신분이지만 현지 쇼군(장군,將軍)에게 특별대우를 받았다.그는 어느날 풍신수길의 묘지인 황금전 문에다 "반 평생 경영이 남는 것은 한 줌 흙인데/십층 황금전은 부질없이 높다랗군/조그만 땅이 도한 다른 사람 손에 덜어졌는데/무슨 일로 조선을 다시 침략했느냐"고 당당히 썼다.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봉소(敵中封疏)로 비밀문서를 우리나라로 보내기도 하며 꼼꼼이 적어 기록했다. 그던 4년이나 이어진 포로 생활 속에서 탈출을 시도 했으며 친교가 있던 승려 '카이케이'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며 특히 강항의 제자라 할 수 있는 '후지와라 세이가(藤原醒窩:1561~1619)'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후지와라 등의 도움으로 1600년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후 1602년 대구교수, 1608년 순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사직했다. 벼슬도 거절하고 두문불출하였으며 지인과의 편지에서 "나는 비록 이 세상에 있다 해도 맥이 풀려 저승의 사람과 같으니, 윤회(輪廻)가 있다면 속히 죽어 다른 삶을 얻기를 바랄 뿐,현세에는 바랄 것이 없다"고 자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한 죄의식으로 고향에서 계당(溪堂)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인물화와 소나무를 그리는 데도 뛰어났다. 그러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귀거래사 같은 생활이었다. 그의 한거(閒居)하면서 지은 시에서
무우청 줄기 나고, 보리싹 돋아나네/이리저리 나는 나비 가지 꽃에 날아든다. 햇볕 밝은 울타리에 거친 밭도 깨끗하고/밭에 가득 봄날의 일이 시골집 같아라 蕪菁結穗麥抽芽 粉蝶飛穿茄子花 日照疎籬荒圃凈 滿園春事似田家
권필(權韠)이란 선비는 이 강항에 대해 "절위간양락(節爲看羊落, 절개를 지키기 위해 양치기로 떨어졌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 뜻은 중국 전한시대 충신인 소무(蘇武)는 한 무제(漢武帝) 유철(劉徹. 재위 BC 141-87) 시대인 기원전 100년 강화사절단 대표로 흉노에 파견되었다가 억류됐다.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한 그는 숫양 몇 마리와 함께 지금의 바이칼호로 생각되는 북해(北海) 부근으로 추방돼 그곳에서 19년을 보내고 기적적으로 귀국했다. 흉노왕은 소무를 추방할 때 숫양들을 가리키며 "이놈들이 새끼를 낳는 날 널 집으로 보내주리라"고 말했다. 소무가 양을 친다는 뜻의 '소무목양'(蘇武牧羊)이란 고사는 이렇게 해서 생겼다.종숙부인 고경명과 의병을 일으키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의병에 참가 완산에 이르렀을 대 강화가 되어 두문불출 학문에 열중하며 유유자적하며 생을 마감했던 그의 제자 탄음(灘陰)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이 수은에 대한 만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문장은 원래 잔재주이고, 절의는 본래 올곧은 정신인 것을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목숨 또한 가벼이 여겼네. 평지에 담긴 정성스런 글은, 만리타국에서 임금을 사랑하는 충설스런 마음.인상여(藺相如)에 화벽씨(和氏壁)에 누가 감격하지 않으리...
강항은 귀국 후, 일본에서 3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보고들은 것을 기록한 문견록(聞見錄) 한 권을 조정에 바쳤는데, 이것이 뒤에간양록(看羊錄)은 억류기간 동안 그가 일본에서 보고 들은 일을 귀환하고 나서 정리한 책이다. 이 회고록은 강항 자신이 애초에 붙인 타이틀이 '건차록'(巾車錄)이다. 건차(巾車)란 죄인을 태우는 수레라는 뜻. 강항 스스로가 포로가 되어 적국에서 연명한 신세를 자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한 심정을 담은 듯 한 그의 시가 애닯기만 하다.
아득한 바다에 달빛 어린 밤이어라/눈물 섞인 찬 이슬에 옷깃이 젖네. 넘치는 물결은 임 그린 눈물인가/ 별아!너만은 알겠지 서러운 이밤을 滄海茫茫月欲沈 淚和凉露濕羅襟 盈盈一水相思恨 牛女應知此夜心
간양록(看羊錄)은 체험기라는 측면에서는 성격이 같은 최부(崔溥. 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 신유한(申維翰.1681-1752)의 '해유록'(海遊錄).1569년∼1630), 정경득(鄭慶得)의 호산공만사록(湖山公萬死錄) 등이 있다.
수은정이 있는 영광내산서원 (靈光內山書院)은 강항(1567∼1618)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서원은 인조 13년(1635)에 나라에서 ‘용계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숙종 28년(1702)에 고쳐 세웠다. 1875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일제시대 때에도 고쳐 지었는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1974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산서원 입구의 정려문은 강항이 52세를 일기로 타개하여 이곳 산기슭에 묻히자, 식음을 전폐하고 그의 뒤를 따른 둘째 부인 함평 이씨에게 내려진 열녀문이 발길을 붙잡는다.
저서에 운제록(雲堤錄). 강감회요(綱鑑會要). 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 등이 있고,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강항휘초 姜沆彙抄가 소장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제향되었다.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 성주 아카마쓰 히로마치 기념비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남 광양 섬진강변에 있는 수월정에서 강항이 읊은 수월정30영(水月亭三十詠) 첫 장(洞天風月 좋은 계곡의 바람과 달)의 시로 이곳에서의 감회를 대신한다. "뜬세상 공명 찾아 50년 지났는데 돌아오니 벽안에 앉을 방석도 없네.오직 시내 바람과 삼나무에 비친 달은 즐겨도 돈 한푼 안든다네. 浮世功名五十年歸來四壁客無氈 惟有溪風與杉月取之應費文錢....
이 작은 정자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남겼다. 이것이 사라진 정자가 다시 세워지고 보존되야야 할 이유이다.
참고문헌=고전번역서.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수은집(睡隱集) 간양록(看羊錄) 문화.김은희 南道 정자기행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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