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부자들의 향기
솔향남상선/수필가
우리의 삶은 물질의 유무에 따라 삶의 명암이 엇갈린다. 혹자는 삶이 넉넉지 않지만 늘 밝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풍요를 누리지만 얼굴은 항상 어둡고 걱정을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지족상락(知足常樂)’이란 말도 있지만, 전자는 가난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만족하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니, 자신의 현주소에 상관없이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라 하겠다.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님은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는 분들이시다. 세 분은 종교는 달랐지만 삶의 공통점은 청빈이었다. 또 각기 다른 종교를 떠받치는 기둥들이셨음에 틀림없다. 세 어른들은 가난하게 사셨지만 향기가 있는 분들이셨다. 아니, 가난한 부자라 일러도 어색함이 없는 분들이라 하겠다.
세 어른들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 보는데 소천하신 순서대로 말해 보겠다.
한국 대형교회의 원조인 영락교회를 일으킨 분은 한경직 목사님(1902∼2000)이시다. 그가 소천하실 때 남긴 유품은 달랑 세 가지뿐이었다. 휠체어, 지팡이, 겨울 털모자 그게 전부였다. 목사님이 남긴 것은 집, 통장, 그 아무 것도 없었다. 종교계의 거장이라 일컫는 분의 평생의 삶이 고작 청빈이란 단어 하나로 말할 수 있는 거였다.
관련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한경직 목사님이 추운 겨울 기도하시다가 감기에 걸리실까 염려해서 한 성도가 오리털 점퍼를 선물했다. 그 뒤 얼마 후에 보니, 시각장애인이 바로 그 오리털 점퍼를 입고 구걸하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한경직 목사님이 소천하신 후에 개신교는 또 한 차례 중흥기를 맞아 성도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복음 전파와 교회 일치 운동, 나라 염려를 많이 하신 분이셨기에 그를 존경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엄청난 성도 증가로 이어진 것이다.
목사님은 청빈하게 사셨지만 그가 물려주셨던 크디큰 정신적 자산은 이루 헤아리기가 어렵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자산의 보물을 물려받으신 분들이 바로 개신교 중흥기 성도들이라 하겠다. 이래서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한 부자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김수환 추기경님은 2009년에 소천하셨다. 김추기경님이 세상을 살다 가신 물질적인 흔적은 사제 신부복과 묵주뿐이었다. 얼마 후에 추기경님의 또 다른 유품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바로 추기경님이 기증한 강막을 이식받고 시력을 되찾은 어느 시골 양반이 용달차를 운전하고 가는 모습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남긴 인생 덕목에‘노점상’이란 항목이 있다.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값을 깎지 마라. 그냥 주면 게으름을 키우지만 부르는 값을 주면 희망을 선물한다.>는 것이다. 말씀대로 추기경님은 명동의 노점상 앞에 가끔 걸음을 멈추고 묵주를 사셨다. <짐이 무거워 불편하다면 욕심이 과한 것이다. 덥석 물건부터 집지 말고 시장 안을 둘러보아라. 한 번 사고 나면 바로 헌 것이 되는 것이니 물릴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가지려 하는 것부터 남에게 주어라. 준비가 부족한 사람은 어려운 날을 보낸다.> 살아 계실 때 그 어른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천주교를 이끌던 시절엔 신도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정신적으로 추기경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니 이보다 더 큰 자산이 어디 있다 하겠는가? 그래서 김수한 추기경님을 가난한 부자로 칭해도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법정스님은 2010년 3월 11일에 세수 79세로 입적(入寂)하셨다.
스님은 신도들에게 신세지기 싫다고 도시락을 싸와 공원에서 식사를 하셨다. 산길을 넓힌다고 함부로 나무를 베지 않는 스님이었다. 그라면서도 수행자다운 수행자를 칭찬하고 가까이하셨다.
스님은 절집 안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행태도 결코 방관하지 않으셨다. 특히 절 안에서 버젓이 벌이고 있는 상행위를 못 마땅해하셨다. 안내소나 종무소 앞에는 불단에 올릴 쌀은 얼마, 초는 얼마, 아직 짓지도 않은 전각의 대들보는 얼마, 기둥은 얼마, 서까래는 얼마, 기왓장은 얼마 하고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을 싫어하셨다.
스님의 삶은 평소 법문과 일치한 언행일치의 삶이셨다. 권력과 물질과는 거리가 멀게 사신 그야말로 청빈이 몸에 배신 분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청와대를 초대할 때에도 권력자를 멀리할 정도였다.
다음은 법정스님, 김영한 여사, 대원각, 길상사에 얽힌 일화 한 편을 보도록 하겠다.
김영한 여사로부터 1천억 원대의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시주하겠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는 스님의 올곧은 성품과 청렴함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아무 조건 없이 제가 대원각을 내놓겠으니 스님께서 받아주십시오. 다만 절이 잘 운용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감사 한 사람을 둘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감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감사 후보자임이 분명했다. 그때 스님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우리나라에는 고승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보신 뒤에 믿음이 가는 분에게 시주하십시오.> 스님은 이렇게 한 마디 하고는 바로 나가 버리셨다. 그 때부터 여사는 2년 동안, 사람들이 고승이라고 존경하는 스님들을 찾아가 두루 만나보았다고 한다. 여사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에다 여사가 좋아할 만한 조건을 더 붙여 맡겠다는 스님들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사는 결국 다시 법정스님을 찾아와 <감사를 두겠다는 조건을 거두겠으니 받아주십시오.>라고 하소연하며 당시 1천억 원대의 대원각을 시주했다.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스님이지만 자신의 재산에 정작 무관심했던 스님이기 때문이었다.
법정스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TV에 방영된 스님의 장례식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대부분 고승들이 입적하시면 꽃으로 장식한 운구차에 실려 갔지만, 법정스님은 당신의 유언에 따라 그러지 않았다. 누운 스님을 가사 한 장으로 덮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스님의 그 모습은 송광사를 찾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뒷모습이 참모습이라는 걸 깨달음으로 주었기 때문이었다.
‘법정스님의 뒷모습’은 우리를 그토록 감동시킨‘무소유의 삶’이 진정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알고 보니 한경직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이 세 분은 모두 가난한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아니,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준 임청난 재산가라 해도 될 것 같았다.
세 큰어른들은 일편단심으로 당신들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실천하셨다. 타종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시비를 논하는 한 말씀도 없으셨다.
행복은 부유한 사람만이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도 행복한 부자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한경직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같으신 분들이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사람의 행불행은 물질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 여하에 달려 있다. 가난해도 마음을 비우고, 욕심 없이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욕심을 쌓아두고 살면 늘 불행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버리지 못한 욕심을 안고 사는 사람은 늘 빈곤하게 사는 것이다.
오늘 따라 톨스토이의 명언이 왜 이리 위대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욕심이 작으면 작을수록 인생은 행복하다.’
‘가난한 부자들의 향기’
남의 것이 아니다.
마음을 비우면 내 것이 된다.
첫댓글 "마음을 비우면 내것이된다."
육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