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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구름
박서영
좋은 구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떠난다고 했다 빈들에 나가 여자를 불렀다 사랑스러운 여자는 화장하고 옷 차려입느라 늦게 나갔다 사진작가는 버럭버럭 화를 냈다 좋은 구름이 떠나버려서, 좋은 구름이 빈들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여자는 이 모든 게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여자는 오래 빈들에 서서 보았다 사자와 치타, 새와 꽃, 허기와 얼룩, 구름 속에서 자꾸 구름 아닌 것들이 쏟아졌다 남자는 화가 나서 떠나갔다 한 프레임 속에 좋은 구름과 빈들과 여자를 넣지 못해서
좋은 노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뛰쳐나간다고 했다 다리 위에 서서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또 노을이 떠나 버릴까봐 서둘렀다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 노을 앞에 서자 사진작가는 또다시 화를 냈다 좋은 노을이 떠나버려서, 좋은 노을이 강물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땀에 흠뻑 젖은 여자는 다리 위에 서서 보았다 기러기와 사과밭, 몇 발의 총성, 고통과 사랑, 노을 속에서 자꾸 노을이 아닌 것들이 쏟아졌다 이별의 순간에도 저런 멋진 장면이 연출되다니, 집에서는 혼자 두고 온 아이가 울고 있을 텐데, 여자는 포유류처럼 새끼를 찾아 떠나는 구름, 십일월의 사과나무처럼 찢어지는 노을, 이런 말을 심장에 구겨 넣었다
여자는 바뀐 장면들을 떠올렸다 시간의 그림자와 빛, 노을 속으로 기러기들이 날아갔다 여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구름과 노을을 사과처럼 베어 먹었다 정말 사과를 베어 먹는 것과는 달랐지만, 옷을 벗기고 상처를 파내고 고열로 헐떡이는 심장에 입을 맞추며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흰 구름이 흩어졌다 사방에 핏자국, 후드득 새의 깃털들, 여자는 총성이 자욱한 들판에 서 있었다 여기저기 기러기들이 떨어지는 소리 들렸다 여자는 작은 새가슴을 움켜쥐었다 빛이 쉬지 않고 풍경을 찍어댔다 하늘의 뱃가죽 질질 끌며 구름을 데려오고 있었다 구름과 노을과 여자의 심장이 한 프레임 속에 찍혔다 천국의 아편 같은 구름이 빈들에 내려왔다 남자가 떠나자 비로소 좋은 구름이 여자의 혀 밑을 파고들었다 키스는 얼굴의 불안을 심장으로 옮긴다 이렇게 멋진 배신의 순간, 집에 두고 온 아이가 생각나다니!
68년 경남 고성 출생
95년 《 현대시학》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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