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정일이 들려주는 완주역사 이야기]
삼남대로는 원래 서울 숭례문(崇禮門)에서부터 제주시 삼도2동에 자리 잡은 관덕정(觀德亭)까지에 이르는 길이었다. 제주도 내에서는 관덕정에서 약 25리 길을 걸어가 조천관에 도착한 다음, 그곳 나루에서 배를 타고 전라남도 해남의 이진항으로 갔으며 거기서부터는 육로로 이어졌다.
이 길은 조선시대의 9대 간선로 가운데 제7호로로서 주요 노정을 서울에서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작나루, 과천, 유천, 청호역(수원), 진위, 성환역, 천안, 차령, 공주, 노성, 은진, 여산, 삼례역, 태인, 정읍, 갈재, 장성, 나주, 영암에 이른다. 강진을 지나 해남에 이르고, 해남의 이진항 또는 관두량을 통해 배를 타고 제주 조천포로 간 다음 최종적으로 관덕정(觀德亭)에 이르는 길이었다.
삼남대로의 종착지였던 제주
관덕정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대표적인 정자로서 1448년(세종30)에 제주목사 신숙청(辛淑晴)이 병사들의 활쏘기 훈련장으로 창건하였다. 그 후 성종11년에 목사 양찬(梁瓚)이, 그리고 숙종16년에 목사 이우항(李宇恒)이 한 차례씩 중수하였으며, 1882년(고종19)에 목사 박선양(朴善陽)이 중건하였다.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덕정은 본래 3칸 건물이었고 창건 당시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편액을 썼는데,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이 일대의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에서 유일한 현존 건물이지만 1924년에 일제가 보수하였고, 1969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그 뒤 2003년 12월에 새로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2006년 8월에 원형을 완전히 복원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이고 팔작지붕이다.
관덕정에서 화북을 지나면 조천읍에 이른다.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조천포는 진시황이 술사(術士) 서불(徐巿)을 시켜 발해의 어느 섬에 있다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3천명을 파견했다는 전설의 장소로 진시황구선입해처(秦始皇求仙入海處)’가 있다.『사기』 ‘진시황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제나라 사람 서불이 글을 올려 말했다.
“바다 속에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이름을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으니, 청컨대 재계하고 어린 남녀와 함께 신선(神仙)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불을 보내 어린 남녀 수천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도록 했다.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불이 중국을 떠나 맨 처음 도착한 곳이 이곳 조천포였다고 한다. 서불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의 기운을 살피고서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하여 ‘조천(朝天)’ 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는데 서불이 글자를 새긴 조천바위는 고려 시대에 조천관을 건립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조천관(朝天館)은 한양을 오고 가는 관인들의 숙소였다. 창립연대는 불분명하지만 고려시대인 1374년(공민왕23)에 목사 이옥(李沃)과, 조선 선조32년에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중수하는 등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한때는 초등학교로도 쓰였으나 지금은 창고가 되어 있다.
조천포는 금당포(金塘浦)라고도 했는데, 예전에 제주도에서 육지로 떠나는 배는 모두 이곳에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고 전라도 쪽에서 제주로 들어오는 배들은 모두 이곳 조천관과 북제주군 애월읍에 있는 애월포에 댔다고 한다. 조천 북쪽 바닷가에 있는 연북정(戀北亭)은 건평 18평에 3면에 회랑이 있는 정자로 제주로 파견 된 관리와 유배를 온 사람들이 고향과 임금이 있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는 정자이다. 본래 고려 공민왕 때 목사 이옥이 조천성을 동북쪽으로 돌려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지어 ‘쌍벽정’이라고 하였는데, 조선 선조32년에 목사 성윤문이 중수한 다음 “임금을 그린다”는 뜻의 ‘연북정’이란 이름으로 고쳤으며, 1820년(순조20)에 중창하고 1971년에 지방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육지에서 삼남대로의 시작점인 이진항
본래 영암군 북평종면이었으나 지금은 해남군 북평면이 된 이진리는 지형이 배[梨]처럼 생겨서 지어진 지명으로 ‘배진’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진영(鎭營)이 있었고 종4품인 만호(萬戶)가 웅거하였던 곳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이진진(梨津鎭)은 한양에서 950리 위치에 있으며, 성에는 해월루가 있다.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에서 배로 떠난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의 상신 김상헌(金尙憲)이 제주를 다녀와서 지은『남사록(南槎錄)』에는 제주를 오고 가는 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강진․해남 두 현은 모두 바다에 있다. 무릇 제주를 왕래하는 공행(公行)은 반드시 여기에 와서 배를 탄다. 해남은 관두포(館頭浦)이고 강진은 백도포(白道浦) ― 지금의 보길도 ― 이며 영암의 이진포(梨津浦)가 강진과 서로 가까이 있으므로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이 세 곳에 모이고 매년 해남․강진의 두 읍은 모여 이 호송하는 일에 윤번(輪番)을 정한다.
여기에 나오는 이진포는 지금의 해남 북평면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영암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관두포는 해남의 화산면에 있는 관머리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관두산(館頭山)이 “현의 남쪽 41리에 있다. 제주를 왕래하는 배가 이 산 밑에 머문다” 고 기록되어 있다. 관두산은 현재의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의 관머리 서남쪽에 있는 178m의 낮은 산으로 한라산과 마주보고 있다.
강진에서 누릿재를 넘으면 영암이다.
해남에서 강진에 이르고 성전을 지나 영암으로 넘어가는 누릿재를 넘는다. 소를 팔고 사는 우상인(牛商人)들이나 보부상이 영암장이나 나주장을 보기 위해 넘었을 길인 누릿재는 나지막 하고 황토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누릿재를 오르는 길도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황치(黃峙)’라고도 하는 누릿재는 지형이 가파르지 않고 밋밋한 편인데 이곳에 누런 뱀이 수풀 속에서 나타난다는 황사출림형(黃蛇出林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고개에 올라 드디어 강진 땅에서 영암 땅으로 접어든다.
길은 덕진면을 지나 나주시 영산포에 이르고 광주의 광산구와 장성읍을 지나면 전북 정읍으로 넘어가는 갈재가 지척이다.
장성에서 정읍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 갈재
입암산 아래에 바로 ‘갈재’ 또는 ‘노령(勞岺)’이라고 불렀던 유명한 고개가 있다. 옛날, 서울에서 남도로 오거나 남도에서 서울로 갈 때면 꼭 넘어야 했던 갈재는 높이가 276m에 지나지 않지만 제법 험한 고개로 알려져 있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 사이에는 “노령 고개를 넘는다”고 하면, “어떤 선비가 또 갈재를 넘어 유배를 가는구나”하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던 갈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갈재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 전북 정읍시 입암면 등천리 군령 마을이다. ‘군령다리’라고도 부르는 이 마을은 예전에 군량미(軍糧米)를 저축해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 동남쪽에 있는 ‘삼부리골’에는 돌부처가 셋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다
조선시대 전기의 인물 매월당 김시습(金時習)도 이곳 갈재 아래 천원역을 지나다 누각에 올라서 시 한편을 남겼다.
언덕 펀펀하고 먼 나무가 그럴듯한데
희미하게 인가에 접해 있구나.
땅 기름져 밭에서는 차조를 거두고
산이 낮아 차(茶)를 공물 한다오.
갈재에는 구름이 암담한데,
능악(愣岳) 묏부리가 뾰족하구나.
강호의 경치를 수습하고서
올라가니 해가 반쯤 기울었더라.
― 『매월당집(梅月堂集)』
정읍 운동장을 지나면 뒷산의 산세가 용과 닮았다는 용흥동이 있고 그 북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정읍시 연지동인데 조선시대의 영지원(迎支院) 자리였다. 옛날에 보통의 나그네들은 이곳 영지원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관리들은 여기서 30리쯤 떨어져 있는 거산역(居山驛)에서 묵었다고 한다. 이제 정읍역과 버스터미널 중간 지점을 지난다.
송시열의 마지막을 지켜본 수성동
연지동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고 북면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수성동은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이 최후를 장식한 곳이다. 조선 선조40년에 태어난 송시열은 인조11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나중에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봉림대군이 임금으로 즉위한 1649년부터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에 이어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 향리에 은거해 있던 그는 장희빈이 낳은 왕자 ― 훗날의 경종이다 ― 에게 원자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89년(숙종15)에 제주도에 유배 갔다가 돌아오던 송시열은 수성동의 은행나무 거리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숙종은 “그의 죄악은 국문하지 않아도 여지없이 나타났으니 도사가 약을 가지고 가다가 그를 만나는 대로 사사하라”는 영을 내렸던 것이다. 송시열이 국문을 받으러 올라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을 때 거적 한 장만이 깔려 있었다. 제자들이 자리가 추하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자 송시열은 “우리 선인(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못 까셨네”하고 거절한 뒤 사약을 마셨다고 한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완주군을 지나는 삼남대로
원평을 지나고 금구를 지나면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에 이른다. 이곳에는 예전에 한 효자가 살았는데 그 어머니가 나들이를 할 때마다 업고서 내를 건넜으므로 ‘인(人)다리’ 또는 ‘인교(人橋)’라고 했던 것이 변하여 ‘은교(銀橋)’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 은교리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실려 있다.
대동여지도는 일반 사람들이 보아서는 잘 모를 수가 있는데 보는 방법 몇 가지만 익히면 누구니 쉽게 볼 수 있다. 대개 읍치(邑治)는 동그라미에 써 놓았으므로 동그라미가 하나인 곳은 읍성이 아니라는 뜻이며 동그라미를 겹으로 그린 곳은 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개의 동그라미가 있는 전주와 고부, 나주, 공주 등에는 성이 있다는 표시다. 길은 10리마다 점을 찍어서 길의 거리를 표시하였으며, 산과 산을 잇는 고개는 그 높이만큼 간격을 짧게 찍어서 넘어가는 시간을 가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이 중시되었던 시절이므로 강에 대한 것도 나름대로 특색을 살렸다. 큰 강의 하류에서는 대개 두 줄로 그리고 상류 쪽은 한 줄로 그리는데, 그것은 두 줄로 그린 곳까지 배가 들어오고 그 지점 위쪽부터는 배가 다니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곳 은교리 신월 마을 동남쪽의 앵곡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앵곡역(鶯谷驛)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앵곡역은 고려시대에는 장곡역(長谷驛)이라 불리다 조선시대에 앵곡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삼례도찰방에 딸린 역이었다.
고려 현종 임금이 1011년 정월 초이틀에 거란의 난을 피하여 삼례역에 이르렀다가 전주로 들어가서 묵으려 하였다. 그때 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평복으로 나와 영접하는 것을 본 박섬(朴暹)이 아뢰었다.
“전주는 옛 백제의 도읍지로 태조께서도 꺼리었사오니 거동하지 마시옵소서.”
그리하여 전주를 버리고 나주로 가는 길에 이곳 장곡역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날 밤 절도사 조용겸이 왕을 붙들어 놓고 전운사 이재(李載), 순검사 최집, 전중소감 유승건(柳僧虔) 등과 함께 흰 기를 모자에 꽂고 북을 울리며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지채문(智菜文)이 병졸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켜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거란군이 물러나자 현종은 나주를 출발하여 전주에 머물다가 2월에 공주를 거쳐 개성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때부터 전주 지역의 이씨와 최씨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곡역에서 임금을 놀라게 한 전주관원 조용겸과 유승길은 그해 8월, 귀양길에 올랐다.
초남이 성지가 있는 남계리
이서면 상개리 오목내를 지나 북쪽으로 남계리를 지난다. 이곳 남계리 초남 마을 부근에는 소가 엎드려서 밭을 가는 형국인 경전와우(耕田臥牛)의 혈이 있다고 한다. 또 천주교 ‘초남이’ 또는 ‘최남’ 성지가 있는데, 천주교가 전래된 초창기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순교성인이 된 유항검(柳恒儉)이 바로 이 마을 출신이다. 또한 이 마을은 그의 큰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루갈다)가 1797년부터 1801년까지 4년간 동정부부로 생활한 곳이기도 하다.
유항검은 호남지방 전교에 힘써 ‘호남의 사도’로 불렸으며, 당시 전라도에서 체포된 200여명 대부분이 그가 전교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 ― 현 전동성당 ― 에서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라는 죄명으로 참수되었고, 12월 28일에는 그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며느리 루갈다, 조카 유중성 등이 지금의 전주 진복동인 ‘숲정이’에서 참수되었다. 집안 노복과 친지들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완주군 이서면에 있는 ‘초남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란 곳에 가매장했었는데, 1914년 4월 19일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와 신도들이 치명자산성지(지방기념물 제68호)에 다시 모셨다고 한다.
초남이 성지
남계리를 지나 반교리로 접어든다. 그러고 보니 농번기다. 반교리는 반석으로 놓은 다리가 있어서 ‘독다리’ 또는 ‘반석다리’라고 하며, 반교리 서쪽에는 6․25때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 정착했다고 하는 정착농원이 있다. 반교리의 원반교를 지나 원동리에 이른다. 조선시대에 삼례역에 딸린 허고원(虛高院)이 있었다는 이 완주군 이서면 원동리 동쪽에는 문덕산이 있는데 하나의 전설이 서려 있다.
용정동의 구정 마을을 지나 고속도로 밑을 통과하자 용신 마을이고, 화전 마을이 바로 지척이다. 꽃이 많은 동네로 유명한 이 마을은 만경강 건너편에 세워져 있는 비비정(飛飛亭)과, 그리고 삼례읍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삼례교, 만경강을 가로 건너는 삼례철교 등이 주변에 둘러 있어서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화전동의 원화전 마을에는 옛날에 ‘대천주막’이라는 큰 주막이 있었고 마방(馬房)이 있어서 이곳을 지나던 수많은 소장수들이 이용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또 원화전 마을 남쪽의 반월동에도 조산원(兆山院)이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장이 섰다고 하는데 그곳 역시 아무런 자취도 없다.
만경강을 건너는 삼남대로
조선시대에는 원화전 마을과 그 건너편인 비비정(飛飛亭) 아래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소금을 실은 배들이 출입했다고 하는데, 익산 근처의 목천포 다리 부근에 제수문이 만들어지면서 바닷물의 유입이 끊어져 뱃길 또한 사라졌다. 지금은 이 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수많은 지류가 오염되어 있어 심각한 환경오염을 겪고 있다.
삼례대교를 넘으면 완주군 삼례읍이다. 삼례읍 남동쪽에 자리 잡은 하리는 ‘창뜸’이라고 불렀으며, 예전에는 그곳 조사리까지 배가 들어와서 조세(租稅)를 받아 쌓아둔 세곡을 실은 뒤 서해를 거쳐 한양으로 갔다고 하며 나그네들 역시 하리에 있던 ‘사천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삼례대교 서쪽에 위치한 비비정으로 간다. 비비정은 옛길 삼남대로의 길목에 세워져 있어서 수많은 길손들이 쉬어갔던 곳이다. 조선시대인 1573년(선조6)에 최영길(崔永吉)이라는 인물이 세웠으며, 1752년(영조28)에 관찰사 서명구(徐命九)가 중건하여 관정(官亭)이 되었다. 지금의 비비정은 사라지고 없던 것을 최근에 다시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