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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유래 1818년 어느 늦은 밤 오스트리아의 잘차흐(Salzach) 강변에 위치한 오베른도르프(Oberndorf)라는 작은 마을에 성 니콜라스 교회를 지키는 모올 신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간을 고치고 있었다. 그 교회의 오르간은 잘차흐 강의 습기로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뒀을때 갑자기 고장이 나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수리를 위한 기술자의 방문은 봄에나 오기로 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날 성탄미사도 드려야 하고 연극 발표회도 해야 하는데 하나뿐인 오르간이 고장났으니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골 마을이라 기술자는 봄이나 오게 되었고 그렇다고 새로 구입할 형편도 아니었기에 그는 벌써 며칠째 오르간을 뜯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는데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다. ‘오르간도 없이 어떻게 크리스마스 행사를 할까.’ 몹시 상심한 그는 일손을 멈추고 자리에 꿇어 앉은 채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참 동안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니... 깊은 밤 어둠 속으로 환한 달빛이 비추는 마을의 풍경이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참으로 고요한 밤이구나.......!!’ 그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에 감동받은 그 순간 그는 아름다운 시 한편을 떠올렸다. 자신이 신부가 되기 전에 바로 이와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감동이 되어 고요한 밤(Silent Night)이란 시를 써 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즉시 펜을 들어 떠오르는 글들을 새롭게 다시 써내려 갔다. 다음날 아침 그는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인 프란츠 그루버(Franz Gruber)선생을 찾아가 시를 보여주며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르간이 고장났으니 선생께서 이 시로 작곡해서 성탄미사 때 기타로 연주하면 어떻겠습니까?” 그해 성탄절, 교회의 신도들은 성스러운 성탄절에 기타를 들고 교회의 제단에 선 모올 신부와 그루버를 보고 의아히 생각하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작은 성당에서 모올 신부가 쓴 이 한 편의 시에 곡을 붙인 감미로운 음악이 기타로 연주되었고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으니,.. 그들 두개의 목소리는 다시 교회의 성가대가 합세하여 코러스가 되어 울려퍼졌다. 노래가 끝난 후에 신도들은 한동안 감동으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에 신도들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고, 결국 모올 신부는 음악이 있는 크리스마스를 하게 된 것이다. 다음해 봄, 교회는 고장난 오르간을 고치게 되었다. 기술자가 오르간을 고치러 드디어 교회로 온 것이다 그런데 오르간을 고치러 온 사람이 우연히 이 노래 악보를 보게 되었다. 그는 감동적인 이 노래의 악보를 보고 가지고 갔다. 그리고 오르간을 고치러 독일 이곳 저곳을 오가면서 그때마다 이 노래는 새로운 곳으로 계속 퍼져나갔다. 처음엔 독일에서... 그 다음엔 유럽에서...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된 것이다 오베른도르프의 성 니콜라스 교회
올해는 '고요한 밤'이 작곡된 지 192주년(작시는 194주년)째다. 성탄의 정경에 대한 풍부한 상상을 자극하는 이 성가는 교파와 언어, 시공간을 넘어 세계신자들에게 가장 널리 불리는 캐럴의 하나다. 현재까지 밝혀진 이 성가의 정확한 유래를 알아본다.
▲고요한 밤이 초연된 성 니콜라스 성당의 본래 모습. 인근의 잘차흐 강물이 매년 범람해왔다.
1818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 서북쪽 알프스 산자락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티롤 지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가 자리잡은 고장이다.한 가톨릭사제가 총총걸음으로 찬 겨울공기를 가르며 길을 가고 있었다. 몇 시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이브 자정미사를 앞두고 그의 마음속은 2000년전 태어나신 아기예수, 올해도 변함없이 그 탄생을 축하하게 될 신자들인 정다운 마을사람들, 그래서 꼭 필요한 새 성탄절 찬양 생각으로 차 있었다.
그래서 다소 조급한 마음으로 친구네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집까지는 3km, 약20분 거리다. 문을 열고 반갑게 맞아 주는 벗과 잠시 인사를 나눈 그는 자작시 한편이 적힌 종잇장을 내밀며 오늘밤 자정미사 때 부를 노래를 2명의 독창자와 성가대, 그리고 기타반주를 위해 만들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시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서둘러 멜로디와 화음을 붙여나갔다. 아기예수를 찬미하기 위한 두 사람의 열정이 협화음으로 하나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기예수께 바치는 예물인 동시에 수십년 후 온 인류가 나누게 될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구세주의 나심을 기념하는 날,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도 아기처럼 태어났다.시인은 오베른도르프에 있는 성니콜라스성당(Nikola-Kirche)의 보좌신부 요제프 모르(Josef Mohr), 작곡자는 성당 성가대지휘자 겸 오르간 부반주자 프란츠 그루버(Franz Xaver Gruber)였다.
▲니콜라스성당 안에 있었던 제대. 바로 이 앞에서 고요한 밤이 초연됐다. 이 제대는 신축된 현재의 성당 안에 그대로 옮겨져 설치됐다. 그날 밤 자정. 신부의 기타를 든 그루버와 모르가 먼저 2중창을 부르고 마지막 줄[行]을 성가대가 4부 합창으로 반복 화답하는 형식으로 연주했다. 성가대는 제대 앞에 장식된 아기예수의 요람 곁에서였다. 지은 지 얼마 안된 새 건물인 이 성당의 이름조차도 알고보면 성탄절과 연관된 성인(산타클로스)의 이름이었다.
신자들은 선 채로 귀기울이며 베들레헴 구유 속에 누워 계신 아기예수와 마리아, 요셉을 맘속에 그렸다. 맑고 낭랑한 가락이 창 밖으로 스며나가 별빛아래 정적 속으로 울려 퍼졌다. 온 신자들의 얼굴에 하늘평화가 넘쳐흘렀다.
그날부터 '고요한 밤'은 이 성당 연례 성탄미사의 애창곡이 됐지만 이 교회의 그 누구도 장차 이 노래가 신구교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한 세계인들이 즐겨 부를 캐럴이 될 줄은 물론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 캐럴은 미국 남북전쟁, 세계1, 2차 대전 때 전장의 총성과 미움을 일시나마 잠재우는 놀라운 평화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1997년에 가수 브룩스(Garth Brooks)는, 적으로 대치 중인 양측 병사가 자기 참호에서 '고요한 밤'을 부르다가 일어나 서로 인사를 나눴다는 얘기를 다룬 노래 '벨레오 숲'을 발표한 바 있다.
중동 테러사태와 이라크전쟁도 이처럼 하늘평화로 잠재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고요한 밤'의 유래에 관해 그동안 온갖 전설과 낭설, 학설 등이 만발했었으나 만프레드 피셔 등 현지 전문가들과 요제프 가스너 박사 등 여러 사학자, 음악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해오던 차 1995년에 원본과 거의 다름없는 작시자 모르의 편곡악보가 발견돼 보다 더 정확한 내력이 밝혀졌다.
이 악보의 발견으로 확실해진 역사적 사실은 첫째로 '고요한 밤' 가사는 작곡/초연 수년전인 1816년에 이미 작시됐다는 것이다. 모르 자신의 필체로 '1816'이란 숫자가 명시돼 있다. 따라서 기존학설을 따라 작시작곡 연대가 모두 '1818년'으로 기재된 일부 찬송가의 기록은 고쳐져야 옳다.
▲작시자 모르 신부의 초상을 담은 스테인드 글래스. 원래의 니콜라스 성당 자리에 지어진 기념채플에 장식돼 있다. 모르의 악보가 확증해준 또 다른 사실은 멜로디가 그루버의 것이란 사실이다. 그 동안은 그루버가 다른 대가의 멜로디를 빌려 편곡했다는 설이 꾸준히 제기돼 왔었다.
'고요한 밤' 초연이 기타반주로 이뤄진 까닭에 대한 추론도 구구하다. 당대 교회음악이 기타로 연주된 예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성당엔 오르간이 있는데 그날 반주를 왜 기타로 했을까? 온갖 상상과 추정이 있어왔지만 확실하게 증명된 학설은 하나도 없다.
▲1995년에 발견된 모르 신부의 고요한 밤 악보 사본. 원본에 가장 가깝다.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오르간이 고장이 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성당 바로 가까이 있는 잘차흐 강은 해마다 범람하기로 유명해 성당 오르간이 습기에 영향을 받아 고장났을 가능성이 높다.사실 잘차흐 강물은 오베른도르프 성당신자들을 비롯한 주민들의 젖줄이기도 했다. 강을 이용해 배로 소금을 날랐기 때문이었다. 도시전체가 소금 무역으로 유명했다. 잘차흐(Salzach), 잘츠부르크(Saltzburg)란 이름 자체가 소금과 관련있다.
오르간 고장설은 특히 안스도르프의 기념박물관에 전시돼있는 그루버의 그림과 곧잘 연결되기도 한다. 화가이기도한 그가 오르간 바람통을 쏠아먹는 생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생쥐 탓에 니콜라스성당 오르간이 고장 났던 걸까? 이 역시 추정일 뿐이다.
아무튼 이런 설이 사실이라면 오르간고장 사건이 캐럴명곡을 낳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작곡자 그루버가 훗날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한
고요한 밤 악보.
또 한가지 설은 오르간과 상관없이 단지 모르 신부가 새로운 형태의 성탄절 성가를 원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모르 자신이 평소 노래와 기타를 즐겼고 오스트리아 사람 특히 티롤 같은 산지의 주민들은 기타의 명수들이었다.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인 슈베르트의 가곡의 반주곡 상당량은 원래 기타용이었다.유럽과 미국, 그리고 세계로
그로부터 7년 후인 1825년. 니콜라스 성당에 새 오르간을 설치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온 한 기술자가 있었다. 티롤의 질러계곡(Zillertal)에 사는 오르간제작수리공 칼 마우라허(Karl Mauracher)였다. 성당에서 그는 '고요한 밤'' 노래를 발견해 이웃동네 음악가족인 라이마흐의 슈트라서(Strasser)네에게 전달했다. 마우라허가 입수해 전달한 게 악보였는지 가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슈트라서네는 장갑을 만들어 매년 외국장터를 두루 떠돌며 티롤지방 민요를 들려주는 유명한 유랑노래악단이었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실주인공인 폰 트랍(von Trapp) 일가를 연상시키는 그룹이다.
그들은 '고요한 밤'을 티롤 민요 레퍼토리의 일부로 삼아 1831년 독일 라이프치히의 시장에서 처음 소개했다. 라이프치히 언론 '라이프지거 타게블라트'에 따르면 이들은 1832년 12월 시내음악회에서도 이 곡을 불렀다. 이 무렵 이미 원곡의 가락이 약간 바뀌어있었다. 독일인들은 저마다 앞다퉈 이 캐럴을 배웠고 이내 주변으로 번져갔다.
▲고요한 밤이 유럽에 퍼지는 데 기여한 슈트라서 유랑악단. 같은 마을의 또다른 유랑노래단 라이너(Rainer)가족도 미국을 방문, 1839년 당시 화재로 불타버린 뉴욕시 트리니티 성공회의 광장 앨릭잰더 해밀턴 기념비 곁에서 이 '티롤 민요'를 불렀다. '고요한밤'이 미국에 첫선을 뵌 것이다. 1863년에는 트리니티 성공회의 존 영(John Freeman Young) 신부의 번역으로 첫 영어판이 발행됐다.
19세기말-20세기초 유럽과 미국곳곳에 보급된 '고요한밤'은 선교사들을 통해 남북미주는 물론 뉴질랜드, 아프리카, 한국 등 제3세계까지 퍼져나갔다. 최근까지 이 캐럴은 300여 언어로 번역돼 성탄절때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불리고 있다. 무명시인 신부와 무명음악가가 함께 만든 겸허한 노래가 가장 유명한 성탄 성가가 된 것이다.
공적 사항과 사본들
1854년 베를린 프로이센왕가 교향악단이 노래 원본을 구하고싶다고 잘츠부르크의 베네딕도 수도회에 문의해왔다.
당대의 하노버 왕립오페라가수 블레차허의 증언에 따르면, '고요한 밤'은 이미 1840년대에 베를린 왕립대성당 합창단에 의해 대중화됐고 프레데릭 빌헬름4세 프러시아 국왕이 매년 성탄절시즌 때 즐겨 듣는 곡이었다.
▲고요한 밤을 미국에서 초연한 라이너 유랑악단.
그때까지 왕실악단 측은 이 노래를 하이든의 동생 J. 미카엘 하이든의 작품으로 잘못 알고있었고 일각에선 하이든,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작곡설마저 나돌았다.수도회의 전갈을 받은 그루버는 이 노래의 공식 유래증명서(Authentische Veranlassung)를 12월30일자로 작성했다. 그루버의 서명이 곁들여진 이 설명서는 특히 모르신부가 과거 마리아파르 순례자교회 사목 당시 원시의 초고를 이미 썼다가 1816년에 정식 시로 만들었고 2년후 자신이 곡을 붙인 사실을 밝혔다.
'고요한밤'의 1818년 원본은 분실됐고, 그와 비슷한 모르의 편곡사본(1820년)이 1995년 발견됐는데 현재 우리의 성가 곡과는 상당히 다르다. 기타 반주가 붙어있고 멜로디 일부가 장식적이며 가사도 모두 6절이다(본 기사 하단 참조).
'아기 잘도 잔다' 부분의 원시는 '하늘평화 속에 잠자네'란 뜻이며, 합창으로 반복하게 돼있다. 그루버의 교향악을 위한 편곡(1845년), 오르간 편곡본(1855)등 모두 5점의 편곡사본도 발견됐다.두 작가의 삶
작시자 모르 신부는 1792년 12월11일 잘츠부르크에서 대교구 소총병인 아버지와 편물공인 어머니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모범생인 그는 음악을 좋아해 잘츠부르크의 여러 성당 성가대원으로 활약했다.
▲고요한 밤 시를 쓴 요제프 모르 신부의 젊은 시절 초상화. 가난 탓에 보좌신부 겸 성가대지휘자 요한 히른레에게 입양된 그는 명문 크렘스뮈스터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잘츠부르크 대교구 신학교를 나와 1815년 사제서품을 받는다. 법적 신분 때문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느라 우여곡절을 거친 뒤였다. 첫 사목처는 순례자들을 위한 룬가우 마리아파르 성당. 시 '고요한 밤'은 이 무렵 작품이다. 순례자교회란 주로 마을을 오가는 나그네의 신심을 보살피는 성당이었다.
몸이 허약한 그는 일시 입원했다가 1817년(1816년설도 있음) 니콜라스성당에 부임했고 이듬해인 1818년 12월24일밤 그루버의 작곡으로 '고요한 밤'' 초연을 했다. 1819년부터는 잘츠부르크 내 여러 교구에서 사목하다가 1837년 폰가우 바그라인의 주교대리로 임명됐다.
연로자 사목과 청소년교육에 전념하며 교구민의 존경을 받던 그는 1848년 12월4일 폐병으로 숨져 바그라인 성당 뜰에 묻혔다. 평생 청렴했던 그는 얼마 안 되는 유산마저 동네 연로자 사목과 어린이교육에 다 바쳐 한푼 없이 무덤과 묘비, 시 몇 편을 남겼다. 무덤 곁엔 기념학교가 건립됐다.
작곡가, 성가대지휘자, 오르간주자, 음악교사, 화가 등으로 다재다능했던 그루버(Franz Xaver Gruber)는 1787년 오스트리아북부 호흐부르크의 가난한 직조공 집의 아들로 출생했다. 역시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한 그는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후 교사 안드레아스 페테르레크너 등 몇 후원자를 만나 가업을 대물림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 음악공부를 한다.
▲고요한 밤의 작곡가 프란츠
그루버.
18살때 교회반주자 게오르그 할트도블러에게 3개월 오르간을 배우면서 이미 미사반주를 시작했다. 1807년 안스도르프의 음악교사로 부임, 교장과 관리인, 교구 오르간이스트를 겸직했고 1816년엔 니콜라스성당 성가책임자까지 겸임하다가 29년 베른도르프 교사로 승진한다. 1835년에는 할라인성당 성가대지휘자로 부임, 63년 숨질 때까지 사목했다.
현지 주변과 근황
그루버의 생가는 없어졌으나 인근 하이마트하우스 박물관에 모형이 있다. 그가 교장이었던 안스도르프의 학교건물 2층이 그의 가족아파트이자 '고요한 밤' 작곡장소로 현재 프란츠 그루버 기념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 박물관엔 그가 사용하던 피아노와 모르 신부의 기타 등이 전시 되어있고, 그의 회화작품들도 있다. 바로 이웃의 마리아 암 뫼슬 성당엔 그루버가 미사 때 사용하던 파이프오르간이 복원돼 있다.
그루버의 'D장조 미사'등 9개 미사곡과 성가를 비롯한 90여 작품중 일부는 지금도 유럽에서 연주된다.아내가 연이어 죽는 통에 두 번 재혼한 사이에 낳은 12자녀중 생존한 4명이 다 음악교육을 받았고 장남은 왕립고등학교 음악교사겸 작곡가였다. 그루버 일가가 이 캐럴의 판권을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후손들이 거부가 됐을지도 모른다.
앞서 비친 대로 '고요한 밤'이 초연된 니콜라스 성당은 인근 잘차흐 강으로 소금을 실어 나르는 인부 가족들을 위해 설립된 성당이었다. 그러나 1900년대초 홍수와 화재 등으로 파괴되고 주변마을도 홍수로 상류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새 건물이 오베른도르프 시내에 세워져 원 건물의 제대와 장식물들이 옮겨 설치됐다.
원래의 성당 자리에는 아담한 '고요한 밤' 기념 경당(Stille Nacht Kapelle)이 1937년에 세워졌는데 작시작곡자의 모습을 그린 스테인드글래스로 장식돼있다. 곁에는 배경자료를 전시한 '고요한밤' 박물관이 있어 경당과 함께 연중내내 관광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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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그런 사연이.....많이 배웠습니다^^
유래처럼 모두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