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과 함께, 인과 연>을 보면서/전 성훈
폭염이 이제는 지겹다. 폭염소리만 들어도 정말 짜증난다. 남들보다 더위를 잘 참는 편인데 이제는 더위가 정나미 떨어진다. 이 고약스럽고 견디기 힘든 더위가 언제쯤 물러갈까 손을 꼽아본다. 거실 베란다 창문으로 살랑살랑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날을 그려본다. 더위에 지쳐 기력이 떨어지니 쓸데없는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다. 이럴 때 심심풀이로 한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탈의 탈출구가 없을까?
연초였는지 지난 해 말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허무맹랑한 영화 <신과 함께>를 보았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이승에서의 행동에 대한 판결과 죗값을 치른다는 재미없고 식상한 이야기였다. 염라대왕 앞에서 ‘업경대’에 비친 이승의 삶을 보여주는 ‘파노라마’을 쳐다보는 죽은 자와 저승사자의 표정이 익살스러웠다. 일반적으로 제작자나 감독은 전편이 히트 치면 후속편을 만들려고 한다. 전편이나 전작의 후광을 바탕으로 돈도 벌고 명성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작보다 더 흥미 있고 눈요기할 볼거리가 다양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알찬 후속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신과 함께> 후속편 <신과 함께, 인과 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면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졸려서 잠시 눈을 감았는데 음향시설이 잘 된 탓에 잠을 그대로 자도록 놔두지 않았다. 눈은 떴지만 화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졸음을 쫓아보려고 의자 컵홀더에 있는 콜라를 집어서 몇 번이나 마셨다. 영화관에 들어왔으니까 본전을 뽑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리고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려고 나름 애썼다.
천 년 전의 살인 사건, 고려 시대 장군인 아버지와 친아들 그리고 여진족 출신 양자 사이에 생기는 가족 간의 갈등, 여진족 출신 양자와 여진족 고아를 돌보는 처녀 사이의 죄의식과 용서가 얽히고설킨 과거의 이승과 현재의 저승 세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여진족 출신 양자는 고려의 장수가 되어 여진족을 토벌하면서 고아를 돌보는 처녀 부모를 죽인다. 여진족 양자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군량미를 빼돌려 여진족 고아들을 돌보며 고려를 배반한다. 장군의 친아들은 여진족과 전투 중 부상당한 아버지를 전사한 것으로 위장하고, 아버지 대신 토벌군 장군이 되어 동생으로 인정할 수 없는 여진족 양자를 죽인다. 고아들을 데리고 피신할 듯 하던 여진족 처녀가 되돌아와 여진족 양자를 죽인 친아들의 가슴에 칼을 찌른다. 부상당한 몸으로 여진족 처녀를 죽인 친아들도 죽는다. 죽은 자들은 저승에 가서 조건부 ‘환생’으로 삼차사인 저승사자 우두머리와 부하가 된다. 저승사자 우두머리인 친아들은 억울하게 죽은 한 군인을 귀인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환생을 위해 염라대왕을 증인으로 신청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지옥의 재판장은 저승차사 우두머리의 주장을 인정하였고, 염라대왕은 억울하게 죽은 군인에게 ‘귀인’표를 준다.
이승에서의 삶이 저승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 감독은 이승에서 죄 짓지 않고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귀인이라 부른다. 귀인(貴人)의 사전적 의미인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영화는 색다르게 ‘잘못하지 않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환생(還生)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염라대왕을 재판의 증인으로 세운 발상이 신선하다.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의도를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감독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작품을 꾸미고 여기저기 복선을 깔아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알아보는 것도 즐겁고 신난다. 물론 그와 반대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부담 없이 화면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재미있거나 우스운 대사가 나오면 웃고 잔혹한 장면이 나오면 살짝 눈을 감거나 주먹을 쥐고 흔드는 것도 괜찮다. 재미없거나 하품이 나오면 끄떡끄떡 목 운동을 한들 상관없다. 어차피 돈 주고 영화를 보는 것이므로 특별히 남의 시선을 의식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목이 타는 듯 한 찜통더위를 피해 살짝 틈 내어 전기 값 걱정하지 않고 에어컨 빵빵 터지는 영화관을 찾아 피서를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게 아닐까? (2018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