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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대와 유다 사람들의 반응
□ 이사야5:1-7 □
강사문 (장로회신학대학교・구약학)
I. 본문의 위치와 구조
사 5:1-7절은 7절에 소단락 표시(פ)가 있으므로 1-7절까지가 하나의 문학 단위이다. 5장은 앞의 4장과 달리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소리가 언급되는 장이다.
5장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노래한 3개의 만가(Requiem)로 구성된다. 심판의 노래라는 표시는 “화 있을진저”(⌈호비⌋ יוה) 라는 어휘가 (8, 11, 18, 20, 21, 22절)나타나기 때문이다. 첫째 노래는 1-7절로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난 유다 사람들의 종말에 관한 것이고, 둘째 노래는 8-25절로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상을 서술한 것이며, 나머지 셋째 노래는 26-30절로 이방 나라들의 침공을 기술한 내용이다. 따라서 본 설교 본문이 1-7절은 5장 전체의 서론적 기능을 갖는다.
본문은 네 소단위로 구성된다. 첫째 단위는 1-2절로 1a절은 예언자가 포도원 주인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본문의 서론이다. 1b-2절은 포도원에 대한 포도원 주인의 업적에 대한 예언자의 서술이다. 포도원 주인은 기름진 포도밭을 갈고 돌들을 골라내고 극상품 포도나무(⌈소레크⌋)를 심었으나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쓴 들포도가 맺혔다는 것이다.
둘째 단위는 3-4절로 포도원 주인인 여호와 하나님이 나쁜 열매를 맺은 포도나무를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고소 내용이다. 셋째 단위는 5-6절로 유다 사람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선언이다. 마지막 단위는 7절로 1-6절까지의 포도원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다.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을 말하고,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 실현을 기대했지만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은 살육을 자행했고, 정의를 기대했지만 희생된 자들의 부르짖는 절규만이 드높다는 것이다.
1-2절에서 1인칭 주어는 예언자 자신이고, 3-4절에서는 1인칭 주어가 포도원 주인이며, 5-6절에서 1인칭 주어가 하나님으로 각각 나타나지만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이시므로 1절의 예언자와 3-6절의 하나님을 구별하면 본문 이해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본문 구조를 정리할 수 있다.
단원 | 절 | 말하는 자 | 듣는 대상 | 내 용 | 대칭구조 | ||
1 | 1-2 | 예언자 | 청 중 | 예언자가 포도원 주인의 노래를 부르고 증언 | |||
2 | 3-4 | 포도원주인 | 유다와 예루 살렘 사람 | 포도원주인에 의한 심판 요구 | |||
3 | 5-6 | 하나님 | 하늘과 땅 | 하나님의 심판 선언 | |||
4 | 7 | 예언자 | 하늘과 땅 | 예언자가 비유를 해석 | |||
이 포도원의 노래는 포도 수확기에 불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을 추수기인 초막절에 예언자에 의해 불려지고 회상되었다고 본다. 한나도 초막절에 실로 성소에 가서 축제를 지내는 중 포도주도 마신 것을 보면(삼상 1:3-14) 가을 추수기와 연계시킬 수 있다. 이스라엘 족속(⌈베트 이스라엘⌋)의 심판이란 용어 사용을 보아 우시야 왕(주전 785- 760) 재임 후가 가능하다고 본다 (J.W. Watts, Isaiah 1-33, WBC 24. 25쪽). 이때가 사마리아 멸망 전 가장 국방력이 약한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저는 이 비유가 이사야의 예언이라기보다는 심판의 대상은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므로 유다 멸망의 비극이 하나님의 무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함에 있음을 말하는 신명기 역사 신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O. Kaiser, Isaiah 1-12, OTL, 93쪽). 하지만 이런 신학적 해석이 후대의 산물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대의 전통적인 신학 사조이다.
II. 본문 검토
< 1절 >
1a의 남자 친구나 사랑하는 자를 뜻하는 ⌈이디드⌋ דידי 또는 ⌈도드⌋ דוד 는 인칭 때문에 혼선이 온다. 이디드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로 유다(렘 11:15; 시 60:7)나 벤야민(신 33:12)을 지칭하기 때문에 아람어역(Targum)은 MT의 1인칭대로 이디드를 나의 사랑하는 자(⌈라하미⌋ ימחר)로 번역한다. 여기서 라하미는 이스라엘이나 신부(bride)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1b의 이디드는 곧 나의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LXX역도 1a의 3인칭 그의 포도원(⌈카레모⌋ ומרכ)을 나의 포도원으로 바꾼다. 그렇게 되면 본문에서 나의 포도원은 하나님의 포도원이 아니라 예언자의 포도원이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언자의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나 신랑을 뜻하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나 신부를 말하게 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하나님과 포도원의 관계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 2절 >
2a에 ⌈예아즈케후⌋ והקזעי 를 LXX역과 라틴어역은 “울타리를 치다”(φραγμον περιεθηκα, sepsit eam)로 번역한다. AV나 RV도 여기에 준한다.(He made a trench about it; He fenced it). 그러나 랍비 킴히 Kimchi 는 파다 to dig 로 번역함에 따라 최근역은 “파다”로 옮긴다. 아랍어도 “파다”라는 뜻을 갖는다. 밭갈이로 번역함이 알맞다.
< 3절 >
거민을 뜻하는 בשׁוי가 쿰란 사본에 복수로 ⌈요스비⌋ יבשׁוי 로 나타난다. 사람(⌈이쉬⌋ שׁיא)은 양쪽이 다 같이 단수이나 집단적 단수 collective singular 이다
< 4절 >
4a의 “그 속에”라는 ⌈보⌋ וב 가 몇몇 사본에서는 “그것에”라는 ⌈로⌋ ול 로 바뀌었다: LXX αυτω, 탈굼역(아람어역) ןוהל, 씨리아역 Leh, 라틴역 ei. 한편 4a의 ימרכל (“나의 포도원을 위하여”)가 쿰란 사본에서는 ימרכב (⌈베카르미⌋ “나의 포도원 안에”)로 나타난다. 4b의 “열매를 맺었다”란 말이 2b에서와같이 ⌈베아스⌋ שׁעיו 로 나타나는데 쿰란 사본에서는 ⌈바예사⌋ השׁיו 로 나타난다. 이 단어는 어원이 다른 ⌈나사아⌋ אשׁנ 에서 온다. “열매를 맺다”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열매라는 말과 함께 나타난다. ⌈나사아 페리⌋ ירפ אשׁנ 란 어휘가 겔 17:8, 36:8과 시 72:3절에 나타난다.
< 5절 >
본문의 ⌈하세르⌋ (רסה “울타리를 걷어치우다”)가 쿰란 사본에는 사역형 hiphil 1인칭형(ריסא)으로 나타난다. 일인칭 심판자인 하나님의 의지가 분명히 나타나지만 다음 동작인 담을 헐다라는 ץרפ도 일인칭으로 되어야 하나, ⌈파로츠⌋는 부정형이므로 전자의 형태와 병행을 이루지 못한다. MT가 더 어울린다.
< 6절 >
6a의 ⌈바아시테후⌋ והתישׁאו, “나는 그것을 …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나 התב를 “끝” 또는 “황폐”라는 뜻으로 보아 “나는 그것(포도원)을 황폐케 하겠다” 또는 “폐허로 만들겠다”는 뜻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바타⌋ התב 가 무슨 뜻인지 분명치 않아 망설인다. 그래서 והתישׁאו 대신에 והתיבשׁאו를 제안한다. 이 뜻은 “나는 그것을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말이다. LXX은 “나는 나의 포도원을 내어버리겠다”(και ανησω τον αμπελυνα μου)로 번역하고 탈굼도 “나는 그것들을 버리겠다”로 옮긴다. 심판자의 강한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 이해함이 알맞다.
III. 본문 번역
1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해 노래하리니,
그가 그의 포도원을 위해 부른 노래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은
기름진 언덕 위에 있다네.
2절: 그는 밭을 갈고 돌들을 골라내고,
최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밭 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포도주 짜는 틀도 만들었다네.
3절: 예루살렘 시민들아!
그리고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판단하여 보아라.
4절: 내가 나의 포도원을 위해서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포도원을 위해 아직 못 다한 것이 있단 말인가?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랬는데
왜 쓴 들포도를 맺혔는가?
5절: 지금 나는 나의 포도원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너희에게 알리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우므로
아무에게나 먹히게 하고
돌담을 헐어 버리므로
아무에게나 밭이 짓밟히도록 하겠다.
6절: 그래서 나는 그것을 황무지로 만들겠고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김도 매지 못하게 하여
가시덤불과 잡초만이 무성하게 하겠다.
나는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도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7절: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고
유다 사람들은 그가 기쁨으로 심은 포도나무이다.
그가 그들에게 공의가 실행되기를 기대했지만 살육뿐이었고
정의가 실행되기를 기대했지만 희생자의 절규뿐이다.
IV. 본문 주석
1a절-1절 상반절은 예언자가 그의 사랑하는 자가 그의 포도원을 위해 지은 노래를 부른다는 말이다: “나는(예언자) 나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노래하리니 그가 그의 포도원을 위해 부른 노래이다. 이 구절은 예언자가 사랑하는 자에 관해서 노래를 부른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사랑하는 자가 그의 포도원을 위해 지은 사랑하는 자의 노래(⌈시라트 도디⌋)를 가수처럼 불러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나의 사랑하는 자(⌈도디⌋)란 남성 명사이므로 신부를 위해 부르는 사랑의 연가 love song 가 아니라 탄식하는 친구가 부르는 애가(哀歌)에 해당한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지칭할 때 항상 ”나의 사랑하는 자(⌈도디⌋ 1:13,14,16등등)로 호칭하나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도디’라고 부르지 않는다. 본래 ⌈도드⌋는 “아저씨” uncle 를 말한다. 그래서 라틴역은 도디를 나의 아저씨 patruelis mei 로 번역한다. 따라서 본문의 도디(나의 사랑하는 자)는 나의 친구 남편, 소유자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1절에서 이디디나 도디는 포도원의 주인을 말하고 3-6절에서는 곧 일인칭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도디가 이스라엘을 지칭하지 않는다. Watts는 도디를 “나의 친구”로 번역하여 본문 제목을 나의 친구의 노래(A Song of my Friend)로 붙인다(앞의 책 52쪽). 성경에서 하나님을 친구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벗(⌈아하브⌋ 대하 20:7, 사 41:8, 약 2:23)으로, 벤야민도 하나님의 친구(신 33:12)로, 그 밖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친구로 이해된다(렘 11:15 시 127:2). 이사야 선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거룩한 자 The Holy One 나 전능한 자 The Mighty One 로 이해되었지만 다정한 벗과 같은 분으로도 이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예언자가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의 노래를 부른 것으로 그 가사는 3-6절의 내용과 포도원 자체에 대한 예언자의 서술(1-2절)과 노래에 대한 예언자의 해석(7절)으로 형성된다. 처음(1-2절)과 나중(7절)에 예언자의 진술을 제하면 3-6절은 포도원 주인의 노래 가사 내용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이해에 있어서 전형적인 한 사관의 표현이다. 포도원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에 배은망덕하여 결국에는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1절은 단어가 3+3과 3+3 구조로 평행을 이루는 유사 동음 Assonance 의 운문이다(E.J.Young, The Book of Isaish,vol Ⅰ.Chapters 1-18, 93쪽). 유사 동음의 반복 평행 구조로 되었으므로 청중은 쉽게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
ashireh ----- shirath
lididi ------- dodi
lekarmo ----- kerem
na lididi --- haya lididi
kerem ------ qeren
qeren ------ ben-shamen
1a에서 포도원은 사랑하는 자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의 포도원(⌈케레모⌋). 따라서 포도원이 하나님의 소유인 셈이다. 포도원이 이스라엘의 상징이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렘 12:1-17절에서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는 주제가 나타나고 신약에서도 포도원 주인과 아들(마 21:28-32) 또는 농부(마 20:1-8)등의 비유가 전승되고 있다.
1b에 포도원이 “기름진 언덕에 있다”는 말의 언덕은 ⌈케렌⌋ ןרק 이라는 단어이다. 이 말의 원래 뜻은 ⌈뿔⌋ horn 이란 뜻이다. 산 정상보다 기슭에 해당하므로 언덕이라 번역한다. 이 언덕이 기름진 곳 즉 문자적으로는 기름의 아들(⌈벤 세만⌋)로 수식되어 있다. 포도원이었던 장소는 가장 좋은 땅 즉 가나안 땅을 상징한다. 가나안 땅은 사막과 대조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좋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시켰다는 말이다.
2절은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이 포도원을 위해서 하신 일에 대해서 예언자가 서술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포도밭을 일구는 일이다. ⌈아자크⌋란 동사가 ‘울타리를 만들다’보다는 ‘땅을 뒤집어 흙을 고르는 경작 준비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알맞다. 나무를 심기 위해 딱딱한 자갈밭을 갈아엎는 준비 단계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 작업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칠 족속을 멸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외적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사사를 보내어 위기를 극복케 한 것은 정착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단계는 ⌈싸칼⌋이란 동작으로 일군이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부드러운 밭을 만드는 과정이다. 가나안 땅은 돌이 많다. 창조 때 천사가 돌을 날라 가던 중 한 보따리가 팔레스틴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가나안 지역에는 돌이 많다는 일화가 있다. 돌이 많아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시몬의 별명도 돌(⌈페트로스⌋)이라는 명칭을 따라 시몬 베드로라고 불려진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가나안의 여러 바알 신과 앗세라 여신과 같은 이방 종교와 사상을 골라내어 점점 정화되고 순순한 여호와 신앙이 싹틀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과 같다.
셋째 단계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소렠⌋이란 극상품 포도나무는 양지바른 소렠 골짜기(삿 16:4)에 많이 자라고 있다. 성경 여러 곳에 포도나무가 나타나지만 이 경우 포도나무는 ⌈게펜⌋ ןפג 이란 포도나무이다(겔 17:6-10; 왕하 4:31; 호 10:1; 창 40:9; 시 80:9-17등). 이 역시 포도주를 만드는 재료인 좋은 포도 열매이다. 이보다 더 좋은 소렠이란 포도는 밝은 분홍색의 포도로 달고 맛이 좋다. 최상의 포도나무란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최상의 것이라는 말이다. 보잘 것 없는 소수 민족이지만(신 7:6-10) 하나님의 역사를 수행할 최상의 도구로 인정받고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등 선민이라는 말이다.
넷째 단계는 포도원 가운데 망대(⌈미그달⌋)를 세웠다는 것이다. 돌로 된 높은 탑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포도원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게 했다. 사 1:8절에 망대는 원두막같은 초가 움막 הכוס 이지만 여기는 ⌈수카⌋가 아니고 ⌈미그달⌋ לדגמ 이다. 돌로 된 높고 든든한 영구적인 망대라는 뜻이다. 혹자는 망대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망대란 다윗 왕국 건립과 비유된다. 이스라엘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고 감시할 수 있는 기능이 다윗 왕국에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는 포도주를 짜는 술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야케브⌋ בקי 는 포도주를 모으는 술틀의 아래 부분을 말하나 포도를 밟고 누르는 위 부분까지를 합한 전부를 말한다. 아마도 이 포도주 틀은 포도의 결정적 내용물을 짜서 모으는 곳이므로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신적 결정체가 모이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위의 다섯 단계의 과정은 전부 하나님이 포도원을 위해 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크신 업적 Magnalia Dei 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외적을 물리치고 위기 때마다 돌보아 주시고 다윗 왕국을 건설하고 성전을 건축하여 모름지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여건을 전부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좋은 포도(⌈아나빔⌋)를 맺기 기대했는데 정반대로 쓰고 신 들포도(⌈베우심⌋)를 맺었다는 것이다. 극상품 포도가 극하품 포도로 전락한 셈이다. 하나님의 선한 업적이 인간의 악행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나쁜 포도인 ⌈베우심⌋ מישׁאב 은 LXX역에서는 가시 돋힌 가시나무 ακανθας 로, 라틴역에서는 들포도 labruscas 로 번역하고 BDB와 KB에서는 악취 나는 열매로 설명한다.
3절은 분위기 전환을 나타내는 부사 “그리고 지금”(⌈베아타⌋ התעו)으로 사용되어 저자와 분위기가 바뀐다. 이제부터 예언자 대신 포도원 주인이 예루살렘에 등장하여 자기가 지금까지 포도원을 위해 한 것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를 예루살렘 시민과 유다 사람들이 판단하여 보라고 고발한다. 동시에 포도원은 왜 몹쓸 포도를 맺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판단하여 보라고 촉구한다.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은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위해 은총과 자비를 베풀었지만 유다와 예루살렘 시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 죄인이라는 것을 나단이 범죄한 다윗에게 회개를 촉구하듯이 스스로 판단하여 보라고 한다.
4절 포도원 주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못하는 청중은 침묵으로 그들 자신들의 잘못을 자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청중들을 향해 계속해서 하나님은 일인칭 주체로 포도원을 위해 아직 내가 못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는가 반문한다. 특히 부정형 ⌈라아소트⌋ תושׁעל 는 주체의 필요한 행위를 표현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포도원에 필요한 것은 다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못했다는 말이 아니고 필요한 것은 다했는데 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악취 나는 열매를 맺었느냐는 말이다. 문제는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에 속한 자들 즉 예루살렘 시민과 유다 사람에게 있다는 말이다. 유다 사람보다 예루살렘 사람이 앞에 나오는 것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남왕국 유다 사람보다 예루살렘 도시인들이 더 악을 행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40여명 이상의 왕들 중에 하나님 앞에 칭찬을 들은 왕은 두 명, 곧 히스기야 왕과 요시아 왕뿐이다.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이다.
5절은 3절에서처럼 “그리고 지금”이란 부사의 시작으로 분위기 전환이 나타난다. 즉 앞에 절에서 죄의 추궁에 대답이 없자 그 다음 장면은 하나님 자신의 심판 선언이다. 심판 행위는 두 단계로 나타난다. 첫째 단계는 울타리(⌈메수카토⌋)를 걷어치우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담(⌈기드로⌋)을 허는 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에는 담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 안에는 돌담이 있고, 돌담은 돌아가면서 선인장과 같은 가시나무 울타리가 있다. 돌담을 넘는 것을 막아 주는 철조망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심판의 첫째 단계는 포도원의 울타리를 제거하는 일이다. 쿰란 사본에는 ⌈하세라⌋가 일인칭 사역형 ⌈앗시라⌋로 되어 있으나 평행 구인 ⌈페로츠⌋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MT를 따라 부정형 절대형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즉 ”내가 울타리를 걷어치우는 일을 하겠다“로 할 수 있다. 울타리를 제거하므로 짐승들이 들어와 포도나무를 짓밟으므로 포도나무가 정상적으로 성장을 할 수가 없다. 둘째 단계는 돌담을 헐어 버리는 일이다. 돌담이 헐어지면 짐승이나 도적이 들어가 짓밟으면 포도원은 망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국경을 헐고 방치해 두면 앗수르나 바벨론같이 강한 나라가 쳐들어와 짓밟고 국토를 황무케 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6절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포도원을 황폐케 하겠다고 선언한다. ⌈바타⌋ התב 라는 말이 ‘끝’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끝장이 나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다. 옥토가 황야로 변하게 됨을 뜻한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김도 못 메게 하여 가시덤불과 잡초(사 7:23-25, 10:17절에 개역은 질려와 형극으로 번역)만이 무성한 포도밭이 될 것임을 예견한다. 하나님은 구름에게 명하여 지면에 비도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신다. 사 4장에서 비를 내려 주는 복과 정반대 되는 저주를 말한다. 완전 폐허가 된 셈이다. 이는 마치 이방인의 침입을 받으면 이방인들이 가나안 땅에서 잡초처럼 번성하여 짐을 뜻한다. 사 7:23-25절에 묘사된 대로 앗수르의 침입을 받은 때의 상황 묘사에 가시덤불과 잡초가 무성했다는 것으로 기술된다.
7절 포도원의 노래는 6절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심판으로 막을 내린다. 7절에서는 앞의 노래에 대한 예언자의 해석이다. 하나님의 포도원은 누구를 가리킴인가에 대해 이스라엘 족속 לארשׁי תיב 이라고 한다. 포도원에 기쁨으로 심은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공의(⌈미스파트⌋)를 실행하라고 했는데 유다인들은 살육(⌈미스파흐⌋)을 자행했고, 정의(⌈체다카⌋)를 행하도록 했는데 유다인들에게 희생된 자들의 절규(⌈체아카⌋)만이 들린다고 한다. 공의와 정의의 실현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요구 사항이다. 율법과 예언도 공의와 정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있는 것이다. 특히 이사야는 1:21-26절에서 예루살렘에 요청되는 것은 위 두 요소, 즉 ⌈미스파트⌋와 ⌈체다카⌋였다고 한다. ⌈미스파흐⌋는 여기만 나오는 단어이므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BDB나 아랍어에서도 살육bloodshed으로 해석한다. LXX역은 이것을 “무법” ανομια 으로 번역한다. ⌈체아카⌋는 정치와 사회의 고통으로 부르짖는 약자의 소리를 말한다(창 27:34, 출 3:7.9). 시 9:13(12)은 이러한 절규를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한 행위는 하나님의 요구와 정반대 되는 행동을 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사람은 악으로 갚았다는 의미이다.
V. 메시지
1. 포도원의 첫째 교훈은 ‘포도원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포도원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주인과 소유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은 포도밭을 갈고 돌을 골라내며,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우며 포도주 틀을 만들므로 포도원을 위해 자의로 마음껏 하셨다. 마 20:15와 같이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한다”는 말씀처럼 포도원의 관리는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소유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길밖에 없다. 어떤 특권이 있어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의로 하나님의 소유로 되었기 때문에 선택 목적에 부응해야 한다. 막 12:9절에서 포도원에 고용된 농부가 포도원 주인이 되려고 할 때 진멸 당하고 포도원을 빼앗긴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포도원은 포도원이 되어야 한다. 마 21:30절의 둘째 아들처럼 일단 거부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이 선택받은 자의 최선의 삶이다. 그래서 7절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만 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만민을 위해 그 존재 의의를 가진다.
2. 둘째 교훈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책임이다. 2절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좋은 포도가 맺지 않고 쓰고 썩은 포도가 맺은 것을 보고 4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포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했는데 아직 더 무엇을 못해서 이런 몹쓸 포도가 생겼냐고 반문한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결실이 좋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의심해서 묻는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책임을 추궁하는 말이다. 좋은 포도나무라 할지라도 결실이 좋지 않으면 문제가 주인인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자체 즉 이스라엘이나 인간 자체에 그 문제가 있음을 말한다. 인간은 책임적 존재이다. 기계처럼 의지 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하나님 앞에 선 책임적 존재이다. 자기 책임 완수를 하지 못할 때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에 앞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자기의 책임을 이행할 때에 행복한 사회가 된다. 오늘 우리 사회의 불행과 불의의 참사로 인한 비극은 책임 부재에서 온다.
3.셋째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은 악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셨건만 이스라엘은 계속 악만을 일삼고 있다는 말이다. 예언자의 해석인 7절에 하나님은 공의가 넘치는 공동체를 기대했지만 살육이 팽만한 사회가 되었고,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소망했지만 압제와 억압에 눌려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비명만이 난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시고 가나안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시며, 다윗 왕조를 세워 다윗 왕조를 보호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악한 일만 일삼았으니, 막 12장의 비유처럼 하나님의 포도원을 강탈하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살육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악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바벨탑의 건축자들처럼 인간은 계속 악만을 일삼고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보여준다.
4. 넷째 교훈은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난 포도원은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내가 기대했다” 라는 어휘가 3번(2,4,7절) 반복된다. 하나님이 세 번씩 반복하면서 소원했던 것이다. 극상품 포도를 심었으니 좋은 포도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희망이 두 번 반복되고,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소망했던 것이 한번으로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진술이다. 인과응보의 원리대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한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소원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면 심판을 받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신명기 사관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울타리가 헐리고 담이 무너져서 폐허가 된 터전에 가시덤불과 잡초가 무성하게 된 것을 국경이 무너져 앗수르나 바벨론의 압제를 받았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한 심판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소퍼클레스는 인간의 모습을 저주된 운명을 피하려고 애썼으나 더욱더 악한 운명의 길로만 찾아가는 외디푸스왕의 “사는 것이 죄”라는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 묘사했지만, 성경은 비극적 심판을 통해서 구원을 얻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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