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청주]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분하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이사 58, 1 - 9ㄴ
† 복음 : 마태 9, 14 - 15
★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리신다. 단식이란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행위여서는
안 된다. 참된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어야 한다(제1독서).
★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요한의 제자들과 달리
단식을 하지 않았다. 참된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혼인 잔치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장 가난한 이들이 되었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해야 할 기준으로 신랑을 빼앗겼는지
그렇지 않는지의 여부를 제시하셨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 잔치 때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지만, 신랑을 빼앗겼을
때에는 단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혼인 잔치란 과연 무엇이고,
언제 신랑을 뺏긴 것이 될까요?
예수님의 혼인 잔치는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의 일치입니다.
의로우신 하느님과 죄인이었던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러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지 못한 채 죄인으로 남게
된다면 우리의 혼인 잔치는 깨어지고 맙니다. 곧 우리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신랑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고자 단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사회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가, 성한 이와 성하지
못한 이가, 힘없는 이와 권력을 가진 이가 화해와 일치를
이룹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셨고, 십자가를 지신 채
성치 못하신 몸을 선택하셨으며, 도살당하는 어린양처럼
힘없는 분이 되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 성치 못한 이들, 힘없는 이들이 부유하고
건강하며 힘 있는 이들에게서 소외된다면 그것이 바로 ‘신랑을
빼앗기는’ 상황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삶의 자리에서
굶주리는 이들이 늘어 가고, 병자들이 내버려지며, 힘없는
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단식을 하라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가운데 절제와
극기로 형제애를 실천해야 할 때임을 알려 주는 신호인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분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 9,14-15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라.
지구모임이 있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며 신부님들도
하나씩 결심을 하였습니다. 술을 좋아하시는 분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셨고, 외출을 좋아하시던 분은 외출을
자제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성경을 읽을 시간이
많아지더라! 무겁게 지내지 말고 일상 안에서 더 많이
사랑하자고 결심하신 분도 있습니다. 한 신부님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니 기도할 시간이 확보되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사순절은 정말 은혜의 때입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면서
지낸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 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나를 정화하고
절제와 희생, 그리고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고 그것으로 이웃과 나눌 수 있다면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식은 단지 굶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
40일간을 단식하였고, 그는 계약의 말씀,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습니다.(탈출34,28) 엘리야나 다니엘 예언자도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 단식을 하였는데 재를 뒤집어쓴 채
몇 주간씩 맛있는 음식, 고기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엄격하게
지켰습니다(다니엘10,2-3).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예배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선택하셨고 사도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습니다.
(사도13,1-3)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서
40주야를 광야에서 단식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루카4,1-2).
단식과 금육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이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자신을 정화하며 이웃을 돕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뜻은 매 순간, 모든 장소에서 깃들여
예전에 간발의 차이로 전철을 놓친 적이 있었습니다. 다음
차 시간을 보니까 10분 뒤에 온다고 되어 있더군요. 순간의
차이로 10분을 쓸데없이 소비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화가
났습니다. 길에서 조금만 속도를 냈더라면, 내게 길을 물어본
그 아주머니만 없었더라면, 에스컬레이터에서 길을 내주지
않아 서서 올라가는 시간만 줄였더라면.... 계속해서 전철
놓친 것에 대한 생각, 그리고 10분이나 허비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어 천천히 플랫폼
끝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 플랫폼 끝에 두 개의 화분이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이 끝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없기에
굳이 이곳에 화분을 두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뜻밖의 자리에 예쁜 꽃을 담고 있는 화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바로 이 순간, 만약 전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이 꽃 화분을
볼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10분의
시간이 내게 뜻밖의 미소를 간직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
세상에 쓸모없는 시간과 일과 물건은 절대로 없음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지요.
순간의 기쁨을 간직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느리게 걸었던 내
발에 그리고 내게 길을 물어 본 아주머니가 또 에스컬레이터에서
길을 내주지 않았던 분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우리는 세상을 온통 쓸모 있는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망가지면 버리고, 실용성이 떨어지면 금방 대체시키고, 빈
곳은 어떡하든 채우는 식의 사고법에 익숙해지다 보니 생활
속의 여유마저 ‘쓸모 있는 여유’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쓸모없다는
시간이 나를 풍요롭게 만들며, 아깝다는 시간이 나의 소중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종종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을
봅니다. 그래서 여유가 되면 성당에 나가겠다고, 지금의
바쁜 것만 다 끝나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나아가는 것,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 뜻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언제 단식해야 할지, 그리고 언제 웃고 즐겨야 할지 모르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서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매 순간, 모든 장소에서 깃들여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 주님의 뜻을 찾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시간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사랑할 때 경험하는 감정은 정상 상태에서 나온 감정일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 때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안톤 체호프).
지금 어려움 속에 있는 콜트 콜텍 노동자들과 함께
미사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호기심
제 조카 중에서 한 명은 어렸을 때 아주 독특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어떤 차를 봐도 그 차종을 다
맞추는 것입니다. 물론 차의 상표가 붙어있는 뒤쪽이 아니라,
앞이나 옆을 봐도 그 차가 어떤 차라고 척척 맞추는
것이었지요.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어느 날, 이 아이에게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냥 알아요. 저는 자동차가 좋거든요.”
좋아하면 당연히 호기심을 갖게 되고, 호기심을 가지면
어떻게든 파헤쳐서 알아내고 싶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차의 한 부분만을 봐도 어떤 차라는 것을 척척 맞출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기억이란 호기심이 왕성할 때 더욱 더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와 달리 어른들은 이 호기심이 점점 줄어들지요.
작은 것에도 감동하지 못하고,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또 별
것이 아니라는 듯이 취급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면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다양한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새로운 자극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또한 이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호기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호기심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들에게 직접 환하게 보여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라고 계속해서
과제를 주고 계신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호기심이 필요할 때입니다. 나만의 기준으로
그 호기심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더욱 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의 보다 기억력이 훨씬 더 좋아지는 것은 물론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미래로 가고 결국 떠날 날이 오겠지요.
2013년 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 미래로 가고 결국 떠날 날이 오겠지요.
변화 있는 세상이 정상입니다. 변함없는 세상이란 비정상입니다.
몸과 마음, 건강, 나이, 날씨, 물가 등 어느 하나 고정된 게
없습니다. 주위환경이나 조건에 제대로 잘 맞춰가며 지내는 게
정상 삶입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하고 더울 때와 추울 때에 의상이 달라져야
합니다. 유아기부터 청소년 청년 장년 중년 노년에 따라 달라져야
하고요. 그러면서 내일로 넘어가며 미래로 가고 결국 떠날 날이
오겠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오 9,15)”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수도회] 불쌍한 성인(聖人)
2013년 다해 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마태오 9,14-15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불쌍한 성인(聖人)>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란 말씀을 바꿔 말하면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가 아닐까요?
그토록 오랜 세월 목이 빠져라 기다려왔던 ‘주인공’,
‘VIP 손님’, ‘그분’, ‘신랑’, ‘메시아’이신
주님이 오셨는데, 그분이 우리 사이에 함께 자리 잡고
계시는데, 더 이상 무슨 단식이며, 준비며, 여타
프로그램이 필요하겠냐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이란 좀 더 그분 가까이 다가가서 앉는
일입니다.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일생일대의 행운의 순간이 찾아왔음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필립비 4장 4절 참조)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
늘 기도하는 일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는 일입니다.
(1데살 5장 16-18절 참조)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聖人)이 슬퍼한다면, 그는 불쌍한 성인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입니다.
“악은 기뻐하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십시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입니다. 기쁨은 굳셈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 표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말초적, 육체적, 순간적 기쁨을 넘어섭니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한
영혼이 자신을 극복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느끼는 보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나의 작은 봉사로 세상이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자그마한
평화라도 깃드는데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인식하는데서 찾아오는 기쁨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대구] 단식의 올바른 의미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자기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는가
하고 말입니다. 자기들은 열심히 단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안 하니까 기분이 상했던 것이죠. 이에 예수님은 신랑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은 슬퍼할 수 없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그때에
그들은 단식할 것이다.”
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세상 종말에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기에,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단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을 경축하는 기쁨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자선’
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이 중 오늘 복음에서는 ‘단식’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매주 금요일 우리는 금육을 하고
재의 수요일이나 성금요일에는 단식도 합니다. 그런데 단식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게 되고 말 것입니다.
단식은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여는
것입니다. 정신을 맑게 하고 우리의 기본 욕구를 절제해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식을 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바리사이처럼 ‘규율이니까 지키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본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큰 의미 없이 금육과 단식을 해왔다면 이제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금육과 단식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그 희생만큼의 사랑을 베풀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희생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니게 되고
예수님의 희생과 결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요한 신부(대구대교구 효성중학교 교목실장) -
◈ [기타] 영혼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2013년 다해 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영혼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마태 9, 14-15)
사람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시어, 가진 것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단식을 하고 희생을 나누는 삶을 살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을 사람의 공로로 받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전에 어느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30일간 물만 마시며
단식을 하신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40일 단식은 예수님만 하시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사순절이 되면 매일 한 끼씩 단식을 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다 하지 않으니까 어느 때는 속이
쓰리고, 어느 때는 힘이 없어 미사 때 목소리가 약하게
나가기도 합니다.
교회법으로는 1년에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또 고해성사나 미사참례에 대한 의무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최소한으로 정한 것이지
그 이상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열심한 유다인들은 한주에 두 번 정도 단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성모님께서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전통과 또 지금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사려됩니다.
실제로 아프리카나 가난한 국가에서 1년에 천여만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은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비참한 일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식을 하거나 너무 먹어서 비만으로 걱정을 한다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내 마음 안에 굶주리는 이들의 고통을 측은히 여기고, 그들의
아픔을 나눌 마음을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눈을 찔끔 감고 이내 그 마음 안에 머물지 않고,
생각지 않는다면 이내 그 거룩한 마음은 사라지게 됩니다.
지난 1월에 해외원조주일이나 기타 비슷한 주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영혼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단히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히려 눈을 찔끔 감고
만원 혹은 몇 만원을 봉헌 할 수 있다면 주님의 은총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단식에 대한 논쟁이 나옵니다. 먼저 “나는
단식하고 있는가?” 자문하고, 또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내 안에서는 어느 정도 발동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는 것이다.’ 라고 주님의 말씀을 제1독서에서
전하십니다.
사순절기간 동안 사순절 헌금통에 사랑의 헌금이 차곡차곡
쌓이고, 내 안에 숨겨진 측은지심도 더욱 크게 성장되어
절제와 희생이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자선의 양
2013년 다해 2월15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야 58장 1~9절)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그 말씀을 읽고 ‘자선’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는데요. 내 밥
그릇에 있는 밥을 얼마나 덜어 주면 될까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텐데요. 아마도 대부분은 저와 비슷한 수준의 자선을 실천
하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당에 봉성체 하시는 할머님이 세분 계십니다. 한 달에 한 번
방문을 하는데요. 첫 해에는 보좌 때 하던 대로 빈손으로 방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둘 째 해부터는 ‘뭔가 드릴 선물이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당에 너무 많이 심어 놓아서 남아도는
방울 토마토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방울
토마토를 따다가 드리면, 나도 부담 안 되고 할머님들도
좋아하시겠다...’
그래서 방울 토마토를 봉지에 담아 가지고 기도하러 가서 선물로
드렸습니다. 짠~ 하고 봉지를 내밀며 ‘선물이에요~’ 하고
드렸는데요. 할머님들 표정이 확 밝아지시더라고요. 선물
받으신다는 거 자체가 오랜만에 체험하는 신선한 일로 느껴지시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봉성체 때마다 선물로 들어온 귤이나
사과나 망둥이나 고기들을 할머님들께 드리기 시작했는데요.
남는 것을 드리는 그 일을 자선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런 거랑 비슷한 거 같습니다. 저희 본당에서 일 년에
두 번, 사순 제3주일과 대림 제3주일에 양로원 할머님들을
생각하면서 드리고 싶은 무언가를 직접 사서 봉헌하는데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안 입는 내복이 두 벌이나 있으니 하나
봉헌하자.. 선물 받은 양말이 남아도네 그 중에 손에 집히는 거
하나 드리지 뭐..’ 한다면 어떨까요? 자선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겠지만, 자선이라고 한다면 그 양이 너무 적다고 느껴집니다.
아마도 자선이라고 말하기에 안전한 기준은 루이스가 말한 대로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정도보다 조금 더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선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나랑 수입이 비슷한
누군가와 똑같이 먹고 쓰고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너무 적게 주는 거겠죠. 자선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자선의 실천으로 무언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되어야
정상일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내가 지금 실천하고
있는 자선이 내 생활을 조금이라도 어렵고 힘들게 하는지..
또 그 자선으로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지를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남아도는
것을 건네주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70이 넘으신 형제님이 보편지향기도 4번을 하셨다. 그런데
안경을 가져오지 않으셔서 잘 안 보이셨는지 기도문을 읽는데
거의 5분이 걸렸다.
미사가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다른 형제님들이 ‘애썼어..
나는 오히려 그렇게 천천히 읽는 게 좋더라..’ 하고 격려해
주셨는데, 마지막 위로가 기억에 남는다.
“형님, 그래도 형님이 보편지향기도 해서 다행이야,
만약에 형님이 독서했었어봐..
가뜩이나 오늘 독서가 길었는데..
형님이 했으면 1시간은 했었을 거야...”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어찌하여! [허윤석신부님]
어찌하여 다음에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찌하여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기분
나빠지는 법이다. 일단 어찌하여라는 말을 한 사람은 빈정이
상하거나 자신의 처지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은 상황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어찌하여라고 예수님께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온유한 인품이 빛난다. 혼인잔치 손님들과
신랑의 비유로 그들을 이해시켜주신다.
천주교를 계시종교라고 한다.
절대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알려주신다는 뜻이다. 우리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셨기에 알수 있다.
예수님은 오늘 빈정이 상하셔서 제자들을 책망하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비유를 사용하신다. 자신과 제자들의 입장을
밝히시고 당신이 수난하실 것을 또한 예고 하시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떤 질문을 하던 성실히 답하셨다.
그래서 묻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무척 자유롭고 상상력이
풍부해졌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찌하여라는 말을 인간들 사이에서도
하기 어렵고 듣기 싫은 말인데 예수님은 잘 받아주신것에 대해
행복감이 밀려온다.
어찌하여라는 말을 기도안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너무 자주 사용하면 안되겠지만 우리 하느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잘 타일러 주시고 설명해 주시는 분이시다.
사람과 사건에 대해 어찌하여라는 말이 나올 때 그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어찌하여라고 여쭙는다면 하느님께서
먼저 그답을 오늘처럼 알려주실 것 같다.
따라서 기도하는 것이 판단하는 것에 앞서야 한다.
- 허윤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2월15일 금요일 복음묵상/ 소나무 신부님~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오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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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문화권의 나라들은 삶을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나누어서 표현했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이다.
모두가 필요한 마음의 움직임들이다. 기쁨과 즐거움만을
가지고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분노와 슬픔만을 가지고
살 수도 없는 세상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우리네의 삶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세상, 혹은 분노와
슬픔만 있는 세상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이 네 가지의 감정을 갔고 살다가 갈 것이다. 기호에
맞는 감정만을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유명한 외국 스님의 ‘화’라는 책이 몇 년 전에 여러
나라에서 읽혀져 화제가 된 것을 기억한다. 화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야기와 방법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쓴 글을
공감하면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은 좀 달랐다. 결국 세상의 아픔과 부조리에는
거리를 두고 홀로 득도라도 하라는 소승적 생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노할 것에는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최선이기 때문이다.
복음적인 것의 특징들 중의 하나는 공감이다. 이 공감 안에서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해야만 한다. 물론 여기서의
공감은 옳은 공감이어야만 한다. 이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람답다는 말을 듣는다. 웃어야 할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울고,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느끼며, 즐거워해야 할 때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 어쩌면 당연한 말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우리의 사는 모습을 보면, 이리도 당연한 일을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결국 공감의 세계보다는
이질감의 세계에서 사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예수님께서도 이 네 가지의 감정 안에서 삶을 사셨고 복음을
전하셨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기쁨을 표현하셨고,
성전을 장사 소굴로 만든 이들에게 분노를 보이셨으며,
라자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순수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 기쁨을 표현하셨다.
혼인 잔치에서 곡을 한다면,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병든
가슴을 가진 이다. 초상집에서 기뻐 춤을 춘다면,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병든 가슴을 가진 이다.
언제나 우리의 삶의 위치는 희로애락의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이유로 그 자리에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 느낌을 존중하는 것이
옳다.
옳은 이유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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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상에 어울리는 글과 그림이 있어 퍼왔습니다. 출처는
모릅니다)
스페인의 한 투우장에서 한 투우사가 수 많은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소와 싸움을 벌이고 있다. 소의 공격을 피하며,
소의 등에 칼을 꽂던 투우사. 이제 마지막 회심의 일격만이
남아 있다. 그 순간, 공격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 소. 마치
살려달라는 듯, 싸우지 말자는 듯 하는 소의 눈을 바라본
투우사는 마지막 일격을 망설인다. 한참을 망설이던 투우사는
결국 그대로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만다. 그리고 투우사는
경기장 밖에서 또 다른 싸움을 벌인다. 바로 투우를
반대하는 싸움을 말이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kdycmf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나비(마리아)처럼 날아서-이해욱신부
<후속> 15. 나비(마리아)처럼 날아서(내맡겨),
벌(예수님)처럼 쏴라(살라)!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란, 내맡김의 모범(모델)이신
"성모 마리아님처럼"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내맡겨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영성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삶은 정말로 기쁘고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신만의 기쁨과 행복한 삶에
만족을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예수님처럼 살기 위함"입니다.
과거 세계적 유명 복서에게서 유래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에서처럼, "마리아처럼 내맡겨,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내맡김의 영성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귀는 행복감에만 빠져 자신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내맡김, 완전한 내맡김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내맡김"은 죄와 악을 제외한 모든 존재와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입니다. 오히려 죄악과의 경계를 확고히 하는
"방어벽"입니다. 나를 벗어나 하느님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과의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우주만물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는 매우 심오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에페 1,10) 참으로 거룩한 행위입니다.
"참사랑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즉 "사랑"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랑을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류역사 최초로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내맡긴 영혼들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또,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내맡긴 영혼들을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엄청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작업의 완성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럼에도 내맡긴 영혼들은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게 각자의
처지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일과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하느님께 내맡김"의 영성이 21세기에 매우 적합한 영성이라는
말은, 현대 모든 사람이 다양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바라시는 삶을 참으로 거룩하게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현대적 영성"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통하여, 세상과 함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의 수도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성입니다.
어떤 특별한 예복 없이도, "하느님 뜻"이라는 예복을 입고
겸손한 당당함으로
이 세상을 거룩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영성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과 만나고, 사람과 만나야 합니다.
일과 사람을 도외시하는 고고한 삶은 자기만족적인
이기적인 삶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맡긴 영혼은 그 일과 사람을 자신이 스스로 만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일이 무엇이든,
보내주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가려서도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프란치스코
살레지오 성인(1567-1622)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원하거나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성부의 뜻만 원하고 구하셨으며,
아버지의 뜻대로 그 참혹한 죽음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참 모델이신
"마리아처럼" 내맡겨,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에게 예수님처럼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처해진 삶 속에서 말입니다.
생활의 현장에서 말입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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