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매雪中梅
안상학
지금 여기서 내가
눈 속에서 꽃을 피우든지 꽃으로 피어서 눈을 맞든지
나는 꽃으로 향기로울 때
잎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잎으로 푸르를 때
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금빛 열매를 달았을 때
향기가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목으로 동토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꽃이었고 향기였고 잎이었고 열매였고 나목이었고 또 나는 꽃이었다가 향기였다가 잎이었다가 열매였다가 나목이었다가 또 나는 꽃이었으니
나는 지금 내게 없는 기쁨을 노래한 적 없다
나는 지금 내게 없는 슬픔을 노래한 적 없다
나목이 나목을 잃고 꽃이 꽃을 잃고 열매가 열매를 잃고 잎이 잎을 잃고 향기가 향기를 잃을 때에도
꽃에 앞서 잎을 내세운 적 없다 잎에 앞서 열매를 열매에 앞서 나목을 나목에 앞서 꽃을 꽃에 앞서 향기를 내세운 적 없다
내가 눈 속에서 향기를 피우든지 향기로 피어 눈을 맞든지
나는 다만 수많은 하나의 지금
무수한 하나의 여기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을 뿐이다
-『창작과 비평』 2023년 여름호
-1962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아배 생각』, 『안동소주』 등.
-동시집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 등.
-권정생문학상, 백석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