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사람들이 1000년 이상 사용해 온 오래된 토박이말이 있다. 전국 어느 곳보다 사투리가 잘 보전돼 있고,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정겨운 사투리가 바로 ‘에나’라는 단어다. ‘참’, ‘진짜’라는 의미며, ‘에나가?’, ‘에나로?’라는 말은 ‘참말이야?’, ‘진짜로’라는 물음이다. 또 ‘하모’라는 말은 동의‧긍정의 의미를 담은 진주 방언이다. 진주에는 ‘에나 길’이 있다. 역사문화 생태길이며, 진주는 물이 풍부한 도시다. 남강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른다. 그래서 물문화관까지 만들었으며, 부산지역까지도 물을 공급하고 있다. 서부 경남중 특히 진주사람들은 아직도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에나가’란 말이 있다. 에나가는 명세와 결의에 찬 말이며, 160여 년 전 농민들이 목숨을 걸었던 말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진주민란晋州民亂’은 1862년(철종 13) 경남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였다. 임술년인 1862년 단성에 이어 2번째로 발생했는데, 본격적으로 전개된 후 여타 지역의 농민봉기를 선도했다. 진주에서는 농민들의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계층분화가 극심했고, 많은 농민이 빈궁에 허덕이고 있었다. 특히 세금을 이용한 수탈이 심각해지면서 진주 농민들은 한층 더 궁핍해졌다. 관속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횡령한 후 그 횡령분을 농민 부담으로 전가하려 했는데,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이 주도하였고, 관리들도 일조했다. 2월 14일에 봉기가 발발하여 각 면‧리로 집결하여 공론을 모아, 경상감영에 모순된 제도의 철폐를 호소하며, 철시撤市를 비롯한 실력행사를 했다. 민란이 일어날 당시, 모의하는 과정에서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참여하겠다.’라는 뜻으로 ‘에나가?’라고 물으면 ‘에나다.’라고 대답했다. 초군樵軍(나무꾼)들은 2월 18일 읍내를 점거했으며, 지주제 등 광범한 봉건적인 모순을 문제 삼았다.
관리들의 수탈이라는 부끄러운 역사에 침을 뱉다가도 분연히 일어선 백성들의 결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다면 하는 게 바로 ‘에나’ 정신이다. 세상이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유념하자. 실제의 상황은 불확실성의 연장선에 있다. 백성이 나서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재앙이 언제 닥쳐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사회 변혁의 무기로 활용 가능한 사회적 힘이었으며, 말은 정신적으로 유대감을 만들었다. 말이란 누구나 쉽게 알아듣도록 하면 좋으련만 토속적인 말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해석 자체가 불가능한 어휘, 문장이며 진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도 생소한 사투리가 흔했다. 세상을 오래 살은 사람에게 물어보지만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말이 상당히 많았다. 사투리는 표준어와 다른 어느 지역에서만 쓰이는 말을 뜻하기도 한다.
20년 전 이야기다. 서울에서 지인을 만나 자연 술집으로 이동했다. 한잔, 두잔 하다 보니 분위기가 익어가면서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뱉고 나면 목청도 커졌다. 생판 모르는 손님이 소주를 들고 와 술판에 놓고 나간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치레하자 다른 분이 입가심하라며 맥주도 몇 병 보내주었다. 아마도 동류의식을 느끼는 고향 까마귀들이리라.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말씨를 들어보고 고향이 어디쯤이라는 걸 유추해 낸다. 말 몇 마디가 그 사람 행적까지 추적되는 아이러니에~ 비상한 두뇌의 속도에 감탄한다.
진주말에만 쓰는 사투리로 대표적인 것은 ‘에나(참말로. 정말. 진짜)’를 꼽히지만, ‘하모(아무렴, 그래)’, ‘칼컬타(깨끗하다)’, ‘널쭈다(떨어뜨린다)’, ‘쑥쑥다(더럽다, 지저분하다)’, ‘기다(맞다, 됐다, 그것이다)’ 등도 진주 이외에서는 잘 듣기 힘든 진주 사투리로 조사된 말들이다. 문장으로 만들어 보면, “응가, 에나로 갸가 그랬나?”(언니! 진짜 그 사람이 그랬어?), “묵고 나면 칼크리 해놔라”(먹고 난 후 깨끗이 치워놓아라), “하모! 니가 글 쿤깨 내가 글 쿠제, 니가 안 글 쿠모 내가 글쿠것나”(그렇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그렇게 말하지, 네가 그리 안 하면 내가 그렇게 하겠니?). 진주 특유의 말맛을 가진 진주말이 우리 입말로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진주는 역사‧문화‧예술‧교육이자 경상남도 서부의 거점 도시며, 자연적‧역사적 관광자원이 풍부한 관광도시다. 1896년에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가 되었고, 1925년 이곳에 있던 경남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고 부산의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진주는 예전의 지위와 위세를 잃어갔지만, 남성동‧본성동에 걸쳐 있는 일명 촉석성이라 하는 진주성은 임란 3대첩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진주대첩이 치러진 성이며, 진주 전투 당시 진주성의 항쟁을 통해 단군 이래 살아 숨 쉬는 겨레의 영광을 예술로 받든다는 민속행사로 1949년 영남예술제로 시작된 개천 예술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공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고. 진주사람은 의義를 존중했다. ‘의리義理, 하모! 에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