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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충주중원문화재단에서 마련한 조선통신사 옛길 문화탐방 자료 전체를 참고로 소개합니다.
통신사 유적답사 장소 및 Time Table
일시: 4월 6일(목) 09:00~15:15
장소: 충주 관아, 통신부사 김세렴 묘소, 통신부사 박재 거주지(샘개), 목계, 연풍 수옥정, 연풍 이불병좌상
참가인원: 서울-도쿄 걷기팀 35명
충주시민 30명
버스: 2대
Time Table
09:00 관아공원 집결
09:00-09:30 관아공원 답사
09:30-10:10 김세렴 묘소로 이동
10:10-10:40 김세렴 묘소 참배 및 답사
10:40-11:00 박재 거주지 샘개로 이동
11:00-11:20 샘개 답사
11:20-11:45 목계로 이동
11:45-12:15 목계 답사
12:15-13:15 점심식사(실비집, 밤안개)
13:15-14:00 연풍 수옥정으로 이동
14:00-14:45 수옥정과 이불병좌상 답사
14:45-15:15 관아공원 도착
충주 관아(忠州官衙)
충주는 1395년(태조 4) 충청도(忠淸道) 감영(監營)이 되었고, 임진왜란 후인 1603년 충청감영이 공주(公州)로 이전되었다. 그러므로 오전 후기 통신사들이 지나갈 때는 충청도사가 연회를 주관했다. 1895년(고종 32) 감영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실시할 때 충주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13도제를 실시하면서 충주는 충청북도의 관찰사부(道廳)이 되었다. 1908년(융희 2) 충청북도 도청이 청주(淸州)로 옮겨졌다.
1871년 만들어진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에는 1869년 신축된 충주읍성(忠州邑城)이 원 모양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사대문(四大門)과 삼십여채의 건물을 그림으로 표시했다. 성안 북쪽에 동헌(東軒), 내아(內衙), 객사(客舍)가 보인다. 남쪽으로 장청(將廳) 작청(作廳) 향청(鄕廳)이 보인다. 사대문은 동 조양문(朝陽門), 서 휘금문(輝金門) 남 봉아문(鳳阿門) 북 경천문(敬天門)이다.
현재는 청녕헌(淸寧軒) 제금당(製錦堂)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의 세 개 건물이 남아 있다. 관아의 문으로는 2층 문루인 중원루(中原樓)와 예성별관(蘂城別館)이 있다. 이 중 청녕헌과 제금당이 충북 유형문화재다. 그리고 1871년 충주읍성의 축성을 기념해 세운 축성사적비(충북 유형문화재)가 있다. 청년헌 서쪽에는 순교현양비(殉敎顯揚碑)가 있다.
『동사일기(東槎日記)』 1616년 6월 초4일(정유)
맑음. 사시(巳時)에 연향(宴享)을 베풀었다. 상사(上使)가 동벽(東壁)에 앉고 차례대로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이 앉았다. 공홍도사(公洪道事)가 서벽(西壁)에 마주 않고, 박대근(朴大根)과 정언방(鄭彦邦)은 뒷줄로 차등을 두어 동벽의 말석에 앉았다. 군관(軍官) 등은 삼사(三使)의 뒤에 앉고, 역관들은 도사(道事)의 뒤에 앉았다. 별파진(別破陣)과 기패관(旗牌官)은 남쪽 기둥 밖에 앉았다.
공주(公州) 서원(西原) 충원(忠原)의 기악(妓樂)들이 모두 모였다. 거상악(擧床樂)은 여민락만(與民樂慢)으로 시작해서 , 그 다음은 보허사(步虛詞) 무동(舞童), 그 다음은 상발(尙鉢)춤, 그 다음은 영산회산(靈山會散) 처용무(處容舞), 그 다음은 계면조(界面調) 파연곡(罷宴曲)으로 하였다. 같이 온 노비(奴婢)들도 중문(中門) 밖에서 연향(宴享)을 즐겼다. 해질 무렵에 상사(上使)가 와서 만났다.
# 연향(宴享)은 충청도 전별연(餞別宴)을 말한다.
# 박대근과 정언방은 역관(譯官)으로 벼슬이 동지(同知)였다.
# 회답 겸 쇄환사는 5월 28일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출발했다.
통신부사 김세렴 묘소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은 동인의 거주 김효원(金孝元)의 손자다. 1615년 생원 진사시에 합격했다. 1616년 증광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직했고, 곧 이어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사간원 정언으로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해 곽산을 거쳐 강릉으로 유배되었다. 강릉의 다른 이름이 명주(溟州)여서 동명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계에 복귀해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630년 부응교, 사간이 되었고, 1631년 11월 이귀(李貴)를 논핵한 일로 현풍(玄風)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36년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고, 경연 시강관(經筵侍講官)ㆍ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ㆍ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하였다. 8월 11일 통신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했다. 1637년 3월 9일 돌아와 『해사록(海槎錄)』을 지었다. 통신사행에 걸린 기간은 7개월이었고, 거리는 만 사천리였다.
1636년 제4차 통신사행의 정사는 승정원 동부승지 임광, 부사는 홍문관 응교 김세렴, 종사관은 사헌부 장령 황호다. 부사인 동명 김세렴이 일본 사행기록인 『해사록』을 남겼다. 통신사 일행은 8월 11일 아침 임금을 알현하고, 경기감사의 접대를 받은 다음 오후 한강변 동호의 독서당에 하룻밤을 보낸다. 이들은 육로로 가지 않고 수로로 양평 여주를 지나 충주로 가는 길을 택한다.
8월 15일 배는 이포를 출발, 양화포를 지나 여주 벽사(甓寺)에 이르렀다. 여기서 벽사는 신륵사를 말한다. 그리고는 강천을 지나 밤늦게 흥원에 도착한다. 흥원은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흥원창을 말한다. 16일 드디어 정사인 임광이 충원(忠原)을 향해 출발한다. 여기서 충원은 충주라는 지명이 격하되어 생겨난 이름이다. 그리고 부사인 동명 김세렴은 근친을 위해 원주로 향한다. 이를 통해 김세렴의 고향이 원주임을 알 수 있다. 고향에서 동명은 치악산(雉岳山) 승려인 혜기(惠琦)를 만나 일본의 사정에 대해 듣는다. 혜기는 송운대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온 승려였기 때문이다.
동명은 18일 원주를 출발 대현(大峴)을 넘어 구래촌(求來村)에서 잔다. 여기서 대현은 현재 양안치 고개고, 구래는 귀래다. 동명은 19일에 고개를 넘어 목계(木溪)에 도달한다. 석양 무렵 목계를 떠나 북창(北倉)에 도달했고, 강을 건너 충원에 이른다. 단양군수, 음성현감 등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 20일에는 충원에 머물며 하루 쉰다.
김세필 묘소는 충주시 앙성면 본평리 본복마을 뒷산에 있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그 우측면에 상석을 향해 묘비가 서 있다. 상석 전면 좌측에 동자석이 있으며 그 뒤에 망주석이 1조, 문인석이 1조씩 세워졌다. 묘표의 전면에는 ‘호조판서 홍문제학 시문강 동명김선생세렴지묘(戶曹判書弘文提學諡文康東溟金先生世濂之墓) 정부인 문화유씨부좌(貞夫人文化柳氏祔左)’라고 새겼다. 후면에는 묘표 음기(陰記)가 있다. 음기에 ‘공의 묘소가 충주 복성동 해좌사향 언덕에 있다(公之墓在忠州福盛洞亥坐巳向之原)’고 적혀 있다.
묘소 아래 길 옆에 의정부 우의정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은 신도비‘호조판서김공 신도비명(戶曹判書金公神道碑銘)’이 있다. 글씨는 이조판서로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인 오시복(吳始復)이, 전액은 공조참판 겸 예문관 부제학인 이서우(李瑞雨)가 썼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온화하고 공손하고 삼가는 덕과 溫恭愼德
화락하고 단아한 용모와 기상은 以篤愷悌
행실에서 나타났다. 觀其行也
바른 도리를 지켜 굽히지 않으며 直道不回
형통할 때와 불운할 때 한결같이 함은 通塞不貳
선천적 성품에서 나타났다. 觀其定也
두루 착한 소문이 퍼지고 周聞令善
직간하여 숨김이 없음은 犯而不隱
경하는 데서 나타났다. 觀其敬也
예절과 의리를 잡아 확고히 지키고 秉禮制義
먼 나라 사람을 복종케 하니 遠人向服
사절에서 역량이 발휘되었다. 觀其使也
부역을 늦추고 대중을 교화하니 寬力敎衆
백성이 그의 자혜를 즐김은 民樂慈惠
그의 치적에서 나타났다. 觀其理也
통신부사 박재(朴榟: 1564~1622) 천포(泉浦) 산계(山溪) 북진(北津)
『동사일기(東槎日記)』
1616년 6월
초1일(갑오)
맑음. 진시(辰時)에 길에 올라 안평역(安平驛) 천변(川邊)에서 점심을 먹었다. […] 오후에 천포(泉浦)에 도착하여 선조의 묘에 절하였다.
초2일(을미)
일찍 전배를 올리고 전배가 끝난 후 곧장 출발하였다. 미시(未時)에 산계(山溪)에 도착하였다.
초3일(병신)
맑음. 아침에 조참판(參判) 숙모님과 조감역(監役) 숙부님을 뵈었다. 조감찰(監察)의 집에 가서 사당에 절하고, 인하여 묘소에 가서 청풍의 제물로 외조부모님의 묘에 전(奠)을 올렸다. 막사로 돌아와 아침을 먹은 후에 김정승(政丞)의 묘에 차례대로 절하고, 정랑(正郎) 김기원(金期遠)을 조문하고 또 조순우(趙純祐)의 영좌(靈座)에 조문하였다. 고개를 넘어가서 명엽(名燁)의 처를 만났다.
가마로 북진(北津)을 건너 미시(未時)에 충원(忠原)에 도착해 상사와 종사관에게 인사하였다.
지명 이야기
안평역: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여주 남쪽 30리에 있다. 현재 여주시 점동면 장안리 478 안평초등학교(폐교) 자리다. 폐교를 활용해 여주 한지문화체험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운동장은 생태학습장으로 변화되어 있다.
천포: 천포는 순우리말로 샘개다. 충주시 앙성면 강천리다. 강천이라는 지명은 강정말과 천포의 첫자를 따 만들어졌다. 강정말은 앙암로에 있는 중전교 동쪽에 위치한다. 천포는 강변에 위치하며 샘개나루가 있다.
산계: 산계는 현재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다. 목계는 동계, 서계, 내계의 세 마을로 이뤄져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마을이 서계다. 박재 선생이 찾은 평양조씨는 서계에 터전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 선산과 재실이 있기 때문이다.
북진: 북진은 충주시 금가면 문산리에 위치한다. 문산리는 문지와 용산에서 한자씩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용산은 문지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산 앞에 건너 목행리 행정으로 건너는 나루가 있었는데, 이곳을 북진나루라 한다.
충원: 충원은 충주의 지명이 격하되었을 때 이름이다.
연풍(延豊) 수옥정(漱玉亭)
제8차 통신사행은 이에노부(家宣)의 제6대 관백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 1711년 이루어졌다. 정사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 지제교(戶曹參議知製敎) 조태억(趙泰億)이, 부사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 지제교(司僕寺正知製敎) 임수간(任守幹)이, 종사관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병조정랑 지제교(行兵曹正郞知製敎) 이방언(李邦彥)이 맡았다. 그 중 부사인 임수간이 『동사일기(東槎日記)』를 썼다.
통신사 일행은 5월 15일 임금을 알현하려 궁으로 들어간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 임금은 우리가 멀리 장해(瘴海: 습하고 독기가 있는 바다)를 건넌다 하여 친절히 위로하면서 술을 내린다. 정사가 임수간의 과음을 걱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금이 석 잔 이상 마시지 말도록 당부하고, 사신 일행은 하사한 술을 받아 마신다.
5월 20일 날씨는 흐리고 통신사 일행은 충주에서 안보역까지 간다. 5월 21일 날씨는 맑아지고 일행은 안보를 떠나 문경까지 간다. 중간에 수옥정(漱玉亭)에 들러 폭포를 보면서 술을 한 잔 나눈다. 수옥정은 연풍면 원풍리에 있다. 조령에서 내려온 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폭포를 이루고, 폭포 아래 정자가 있다. 이 정자를 수옥정, 폭포를 수옥정 폭포라 부른다.
폭포 옆 암벽에는 ‘숭정후 2신묘 동강 조자직이 정자를 지었다. 조카 유수가 글씨를 새기다.(崇禎後二辛卯 東岡趙子直爲作亭者 姪裕壽書)’라는 각자가 있다. 이를 통해 정자가 1711년(숙종 32) 조자직(1640-1719)에 의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옥정이 지어진 후 바로 임수간이 지나간 것이 된다. 임수간의 『동사일기』에 조의중(趙毅仲)이 나오는데, 의중이 유수의 호다. 조유수는 1706년부터 연풍현감을 지냈다.
“5월 21일 맑음. 아침에 주인 조의중(趙毅仲)과 수옥정(漱玉亭)을 지나다가 폭포를 보았는데, 깎은 듯한 석벽이 3면(面)에 둘렸고 고목과 푸른 덩굴이 울창하게 뒤얽혔다. 공중에 달리 폭포는 어림잡아 10여 길이 넘고 비말(飛沫)과 튀는 물방울은 바라보매 마치 눈과 서리 같으며, 절구질하듯 석항(石缸: 돌로 둘러 싸여 항아리처럼 된 웅덩이)에 쏟아져 내려 그대로 조그마한 못을 이루었다. 그리고 못가에는 판판하고 널찍한 반석이 있어 마치 먹줄을 치고 깎은 듯한 체대(砌臺 궁중의 무대)같으며, 그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 하였다. 그리고 바로 곁에 조그마한 정자가 있으니 이는 의중(毅仲)이 창건한 것이다. 그 반석 위에서 의관을 벗고 상쾌한 공기를 쏘이면서 한두 잔씩 마시고 일어났다.”
수옥정 폭포는 높이 8m의 2단 폭포다. 신선봉 아래 조령 계곡에서 모인 물이 모여 이곳으로 떨어지는데, 수량과 높이 양면에서 장쾌함을 보여준다. 현재는 폭포 위에 수옥정 저수지가, 폭포 아래 수옥폭포 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물 제97호인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이 있다.
연풍 마애이불병좌상(磨崖二佛竝坐像)
보물 제97호로 연풍면 원풍리에 위치한다. 높이 30m의 암벽 가운데 약 6m×5.5m 의 방형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2구의 불상을 조각했다. 두 불상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 이불병좌상이라 부른다. 조각기법상 고려중기인 12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둥글넓적한 얼굴, 가늘고 긴 눈, 짧은 인중, 크지 않은 입 등 선각기법을 보여준다. 다만 오똑하고 뾰족한 코만 양각으로 높게 표현되었다. 얼굴 전체에 약간의 미소가 보이는 듯도 하고, 엄숙한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하다.
신체 또한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으로 형식화되어 있다. 통견의 법의 주름은 무딘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광배에는 화불(化佛)이 5구씩 조각되었고, 채색과 장식의 흔적이 남아있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것은 법화경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현세불인 석가여래가 영산에서 설법할 때, 과거불인 다보여래가 나타나 그 설법의진실함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두 부처님을 불상과 탑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