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방
이의방은 전주(全州) 사람이다. 의종 말엽에 산원(散員)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는데 정중부, 이고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왕은 겁이 나서 즉시 이의방을 응양룡호군(鷹揚龍虎軍) 중랑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형 이준의는 승선으로 삼았다.
명종이 즉위한 후 대장군전중감 겸 집주(大將軍殿中監兼執奏) 벼슬을 주고 벽상(壁上) 공신으로 책봉하고 각상(閣上)에 그렸다.
원년에 대장군 한순(韓順), 장군 한공(韓恭), 신대예(申大譽), 사직재(史直哉), 차중규(車仲規) 등이 서로 말하기를
“이의방, 이고 등은 함부로 조정의 대신을 죽이고 또 충직하고 선량한 인사들을 살해하였다. 그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의방 등이 듣고 그들을 죽였는데 오직 차중규만은 평소에 이의방과 친하였으므로 죽음을 면하고 외지로 귀양 갔다.
이고는 이때 찬역의 뜻을 품고 은밀히 무뢰배들, 그리고 법운사(法雲寺) 중 수혜(修惠)와 개국사(開國寺) 중 현소(玄素) 등 과 결탁하고 밤낮 모여서 술 마셨는데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대사(大事)만 성공되면 너희들은 모두 다 높은 자리에 올라 갈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거짓(僞) 조정까지 꾸며 놓았다.
태자의 가관식을 거행하게 되어 왕이 여정궁(麗正宮)에서 연회를 배설하려 하였다. 이때 이고는 선화사(宣花使)가 되어 연회에 참석해야 하겠으므로 비밀히 현소를 시켜 무뢰배를 법운사 수혜의 방에 소집해 놓고 말을 잡아서 한 턱 먹인 후 각기 칼을 품고 담 사이에 숨어 있다가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런데 교위(校尉) 김대용(金大用)의 아들이 이고의 사령(使令)이었던 바 그 음모를 듣고 김대용에게 고하였고 김대용은 내사 장군 채원(蔡元)과 친하였으므로 드디어 그에게 말하였다.
이의방은 평소에 이고가 자기에 대하여 억압함을 미워하여 왔던바 이때에 와서 채원과 함께 이고 등이 궁문 밖에 오기를 기다려 그 자리에서 철퇴로 때려 죽이고 순검군(巡檢軍)을 풀어서 이고의 모친과 그 도당을 모두 잡아 죽였으나 그 부친만은 평소에 이고의 불초(不肖)함을 미워해서 자식으로 생각지 않았으므로 귀양만 보냈다.
채전이 조정 신하를 모조리 죽일 음모를 하다가 사전에 누설되었다. 그리고 또 이의방이 채원을 꺼리게 되어 드디어 채원을 조정에서 죽이고 그의 문객과 무뢰배들을 체포하여 모두 다 죽였다.
3년에 왕의 딸을 궁주(宮主)로 봉했는데 근신(近臣)들이 축하연을 하느라고 밤이 늦도록 파하지 않았다. 그때 이의방은 기녀(妓女)를 데리고 중방(重房)으로 들어가서 제장(諸將)들과 마음껏 술 마시면서 북 치며 노래하고 떠드는 소리가 임금의 내전까지 들렸으나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조심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아니 가서 위위경 흥위위 섭 대장군 지 병부사(衛尉卿興威衛攝大將軍知兵部事)가 되었다.
다음해에 귀법사(歸法寺) 중 1백여 명이 성 북문(城北門)으로 침입하여 선유 승록(宣諭僧錄) 언선(彦宣)을 살해하였으므로 이의방이 병정 1천여 명을 인솔하고 중(僧) 수십 명을 때려 죽였더니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갔는데 병정의 사상자도 많았다.
그 다음날에는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귀법사(歸法寺), 홍화사(弘化寺) 등 여러 절의 중 2천여 명이 성 동문 밖에 집결되었으므로 성문을 닫았더니 성 밖 인가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로 숭인문(崇仁門)까지 태운 후 돌입해서 이의방 형제를 죽이고자 했다. 이의방은 이것을 알고 부병(府兵)을 징집해 가지고 그들을 쫓았는데 중 1백여 명을 죽이었으나 부병도 또한 많이 죽었다.
그리고 부병을 풀어서 각 성문을 수비케 하고 중의 출입은 일체 금지하였다. 그리고 이의방은 또 부병을 파견하여 중광사, 홍호사, 귀법사, 용흥사(龍興寺), 묘지사(妙知寺), 복흥사(福興寺) 등의 절을 허물려 하는데 이준의가 제지(制止)했더니 이의방은 노하여 말하기를
“만약 네 말을 듣는다면 일이 안 된다”라고 하고 드디어 절에 불을 지르고 절의 재물과 기명을 약탈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중들은 중도에서 요격하여 그것을 탈환했다. 부병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준의가 이의방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에게 세 가지 큰 죄악이 있다. 첫째는 임금을 추방하고 또 살해한 후 그 집과 첩을 강탈한 죄요, 둘째는 태후의 딸을 협박하여 간음한 죄요, 셋째는 국정을 네 마음대로 독판 친 죄다”라고 하니 이의방이 대노하여 칼을 뽑아 가지고 죽이려 하였는데 문극겸(文克謙)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아우로서 형을 죽이면 그보다 더 큰 죄는 없소!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보겠는가! 만약 내 말을 못듣겠거든 나를 먼저 죽이라!”라고 하였다.
이의방은 문극겸과 친했고 또 그의 아우 이린(隣)이 문극겸의 사위였으므로 그의 말을 들었다. 이준의는 서문으로 달아 나갔고 이의방은 제 칼로 자기 가슴을 가르고 쓰러졌다. 정중부가 말하기를
“형제가 궁중에서 싸우다니 무슨 도리냐?”라고 하고 이준의를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정중부의 처가 듣고 사람을 시켜 전달하기를
“이의방의 형제지간의 일이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라고 하였으므로 이준의가 죽음을 면하였으나 이준의의 집에는 친구도 감히 방문하지 못했다. 찾아왔던 문객들도 흩어 져 갔다.
그 후 이준의는 이의방을 찾아가서 사과(謝過)했고 이의방도 남 모르게 찾아가서 사죄했다.
이의방이 좌승선(左承宣)으로 되고 그의 딸이 태자비(太子妃)가 되었다.
당시 서경 유수(留守)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동원하여 이의방과 정중부를 토벌하려고 하였으므로 원수 윤인첨(尹鱗瞻)이 방어하다가 패전하고 돌아오고 조위총의 군사가 서울로 향해 와서 서울 서녘 권유로(權有路)에 주둔했으므로 이의방은 대단히 노하여 서경 출신인 상서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잡아 죽여서 저자에 효수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출진하였는데 선봉으로 최숙(崔淑) 등 수십 기(騎)를 내보내서 적진에 돌입하여 몇 명을 쳐죽이게 하였다. 전군이 이 틈을 타서 진격하였더니 서경 군사들이 놀라서 혼란을 일으키고 대패하여 달아났다. 이의방은 승리의 기세를 놓치지 않고 패배자를 추격하여 대동강에 이르렀으며 조위총은 흩어진 군사들을 수집해서 다시 성을 수비하였다. 이의방은 성 밖에 주둔하고 한 달 이상이나 머물렀으나 추위에 시달려 싸움도 못하고 다시 서경군에게 패배당하여 돌아왔다.
이의방은 딸이 태자비로 된 후 더욱 기세를 남용하고 국정을 문란케 하였다. 뭇사람들이 이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 때에 윤인첨이 또다시 조위총을 토벌코저 서녘 교외에서 출병 준비를 하고 있었고 중들도 종군하게 되었다. 그때 이의방이 마침 선의문 밖으로 나갔는데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꼬임을 받아서 중 종감 등이 신소할 일이 있다고 핑계하고 이의방의 뒤를 따라가다가 틈을 엿보아 목을 쳐죽였다. 그리고 각처로 나뉘어서 이준의 형제와 그의 도당 고득원(高得元), 유윤원(柳允元)등을 체포하여 모두 다 죽였으며 또 중들이 적신(賊臣)의 딸이 태자비로 될 수 없다고 왕에게 청원해서 쫓아 냈다.
6년에 이의방의 문객들인 장군 이영령(李永齡), 별장 고득시(高得時), 대정(隊正) 돈장(敦章) 등이 이의방을 위해서 복수하고자 정중부를 암살하려고 음모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중방에서 이영령 등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추방했다.
한 때는 무관들이 모두 다 이의방의 부하였으므로 서로들 말하기를
“군국(軍國)의 권력을 중방(重房)에 속하게 만든 것은 실로 이의방의 힘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중 종감 등 10여 명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