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강릉(江陵)
<3> 진재(長峴) 안방마님의 셔유록(西遊錄)
대관령 옛길(半程) / 서울역과 화륜거(火輪車) / 와사등(瓦斯燈)
서울 유람기인 서유록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이던 1913년, 강릉 모산(茅山)의 진재(長峴) 뒷 큰댁 안방마님 김씨(당시 52세)가 남편(崔東吉)께 청원하여 지병이 있었던 둘째 딸 연아의 치료도 알아볼 겸 남편과 함께 셋이 다녀온 서울 여행기인데 총 56장 110면으로, 순 한글로 작성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구성과 유려한 문장력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여행 일정은 1913년 8월 3일, 강릉을 출발하여 9월 8일에 돌아오니, 꼭 한 달 닷새간의 서울 유람기(遊覽記)이다.
여행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가는 곳마다 지명과 얽힌 이야기들을 서술하였고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실감있게 표현하여 1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실제 모습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다.
대관령 반쟁이(半程) 부근의 ‘원울고개’의 고사(故事)를 보면 강릉으로 부임하던 원님이 고개를 넘으면서
‘이 험한 강릉에서 어이 원(員) 노릇을 할꼬?’ 그러나 임기가 끝나고 강릉을 떠나면서 ‘제일 좋은 강릉 땅을 버리고 간다’면서 울고 넘었다는 고개라고 한다. 또 평창 모로재(毛老峙)는 고개를 넘나드느라 너무나 힘이들어 ‘털이 세었다’고 모로재(毛老峙)라고 하였다는 고사(故事)까지 나온다.
‘할미골 주막에서 점심하고, 웃 대화 다다르니 <중략> 육년 전 정미년(丁未年:1907년)에 대한(大韓) 의병(義兵) 지냈다고 일본(日本) 군인(軍人)이 와서 인명(人命)도 살해(殺害)하고 인가(人家)도 불을 질러 소멸(燒滅)한 이후 이렇듯이 불성모양이라 하거늘, 여자(女子)의 마음에도 분탄(憤嘆)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한참 가다보니 길 곁에 선바위 위에 사람 형상 그렸거늘 물으니, 가군이 답 왈, “이전에 대관령 길을 낸 양반으로, 성명은 고형산(高荊山)이라 하는 사람의 화상(畵像)인데, 그 화상 이마 위에 돌을 던져 올라앉으면 과거한다 하기로 이전에 과거(科擧)를 보러 가던 선비 모두 한 번씩 던져보기로 무수한 잔 돌멩이가 지금까지 있다.” 하거늘, 다시 보니 과연 그러하도다.’
김씨 할머니는, 시댁과 친정 어르신들이 과거 보러 서울을 다녀가셨는데 이곳에 다다르면 돌을 던지셨을까? 또, 어르신들 여독(旅毒)은 없으셨을까? 낙제하시고 분한 마음은 여북(오죽)하셨을까?
또, 경진년(庚辰年)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셨던 증조부께서도 이곳에 이르러 돌을 던져 올리셨을까?... 그리고 덧붙이는 말은 기쁨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서글퍼진다.’ 였다.
떡소(德沼), 망우리를 지나 동대문에 이르러서는 ‘넓이는 상등(上等)이요, 바르기는 화살(矢)이요, 평(平)하기는 숫돌같다.’고 감탄한다. 서울에 이르러 첫인상은 이청목도(耳聽目睹)하니 처음이라 정신이 아득하다 하였고, 집 떠난 지 열흘 만에 오백 오십리 서울에 득달(得達)하였다고 썼다.
서울 거리는 ‘원산(元山)으로 왕래하는 화륜거(火輪車:증기기관차)가 번개같이 달아나고, 번갯불이 번득하며 수 칸 되는 유리옥이 굴러오니 전거(電車)로다.’라고 놀라움을 나타낸다.
서울 중학동에 사는 김해 진씨네서 일박을 하는데 그 댁 딸이 서울의 여학교에 다녀 큰 관심을 나타낸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을 물어보는데 국문(國文), 한문(漢文), 십자(十字), 도화(圖畵), 수신(修身), 산술(算術), 일어(日語), 영어(英語), 침선(針線), 방적(紡績), 편물(編物)이라고 하자 너무도 놀라고 부러워한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는 심중(心中)의 말이었었겠지...
‘강릉에도 여학교를 세워볼까?’ ‘참묵(慘默)하고 통분(痛忿)하다.’고 토로한다.
서울도 각 궁궐들과 거리들을 골고루 훑어보고 자세히 기록으로 남기는데 우리의 추억을 일깨우는 단어들이 많다. 삼개(麻浦), 을지로 1가의 옛 이름인 구리재(銅峴), 종현(鍾峴:명동), 와사등(瓦斯燈:가스등)....
서울 시내 곳곳을 빠짐없이 둘러보고 깨알같이 기록으로 남겼고 이어 인천으로 내려간다.
‘항구에 나가보니 화륜선(火輪船) 육칠채가 있고, 조선 목선 어선(漁船)이며, 일본 풍선(風船) 조룡선과 뽀루대는 몇 백 채인지 수가 없이 돛대는 대밭 같고, 뽀루대 우는 소리 황소 영각하듯 그칠 때 별로 없고, 바닷가로 돌을 때려 석축한 것은 철옹성(鐵甕城) 같더라.’ <뽀루대:바닷물고기 이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여행의 감회를 기술한다.
‘객지에 팔진미(八珍味)가 제 집안 장(醬) 만 못하고, 이층 여관 좋다한들 제집처럼 편할쏜가. 만리타국 유람하던 남녀들은 그 역시 문명사업인가. 한 달 객지 괴롭던가 집에 오니 날 것 같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는 구절을 보면,
‘단군께서 창업하신 삼천리강산, 사천 년 국가 오늘날 없어졌소. 아시오, 모르시오. 아무리 여자인들 국민이 아니라면 분하지 아니하오. 서양 강국 영길리(英吉利: 영국) 얘기 잠깐 들어보니, 여자도 왕노릇한 일 많고, 지금은 그 나라 여자가 나라 정사(政事) 다스리는 권리에 참여하겠다고 남자 사회와 다툰다니 그 나라 여자 계(界)가 여북이나 발달하였겠소.’
김씨의 여행기를 읽으며 언뜻 생각나는 것은, 강릉은 틀림없는 여인들의 고장이라는 생각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당신 자신도 재능이 뛰어났지만 걸출한 인물인 율곡(栗谷 李珥)을 낳아 이름을 후세에 남겼지만, 더 뛰어난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출생하고 자란 곳도 강릉이다.
그런데 이 김씨 부인의 글을 읽으면 그들에 비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근대의 신여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름(銜字)이 없을꼬? 족보를 뒤져보면 틀림없이 있을 터인데...
그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함자로 장현(長峴:진재)의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