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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묵상글 들 ( 대림 3주 수요일-행복이 더욱 행복이도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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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대림 3주 수요일-행복이 더욱 행복이도록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는데
저는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이란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봤습니다.
늘 즐겁고, 늘 기쁘고, 늘 행복한 것이 무엇이고 가능한 것인지.
늘 기쁜 것이 가능하고, 늘 행복한 것이 가능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늘 행복하면 지루할 것 같습니다.
특히 기쁨과 연관지으면 영원한 행복 또는 늘 행복한 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고, 가능하다고 해도 지루할 것만 같은 것입니다.
기쁨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 더 기쁩니까?
집을 샀는데 1년 만에 산 것과 10년 만에 산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정말로 사랑하고 그래서 너무도 보고 싶은데
1년 만에 보는 것과 10년 만에 보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우리는 잘 압니다. 힘들게 얻을수록 그 얻은 기쁨이 크다는 것을.
반면에 어제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오늘 사주면 기쁘긴 하지만
아이의 기쁨이 그리 크지 않고 거의 무덤덤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기를,
그러니까 기쁨이 즐거움과 짝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기쁨은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과 짝을 이룹니다.
기쁨은 고통만큼 그리고 고통의 길이만큼 큽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행복은 고통과 함께 사라지지만
기쁨의 행복은 고통만큼 큽니다.
늘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것이 큰 행복임을 모릅니다.
고통이 너무도 크고 오래 아픈 분들은 건강한 것만으로 행복하고
돈이 없어도 행복하고, 지하방 좁은 창문의 작은 빛으로도 행복합니다.
음악에서 협화음만 계속 되면 지루합니다.
불협화음이 있을 때 협화음이 살아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하느님께서 빛과 함께 어둠을 창조하시고,
행복을 주시며 불행을 일으키시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곧 행복이 더욱 행복이도록 불행을 주십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저는 오늘 너무도 병으로 고통받는 분들,
특히 제 주변에서 병고에 시달리는 분들을 생각하며 이 강론을 썼습니다.
이분들이 그 고통이 크고 긴만큼 기쁨과 행복이 크고 영원하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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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대림 제3주간 수요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일상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민감해지는 때가 있다면, 바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언급합니다.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을 우리의 구원자로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1-18 참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여쭙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라고 답하십니다.
한처음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과 비슷하게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고 이제는 직접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구원자이심을 알아본 목자들처럼, 또 하늘의 별을 보고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린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가난과 아픔 속에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하시고자 오시는 구원자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성령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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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대림 3주 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졌고,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다른 소식들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메시아에 대한 기존의 자기 표상과 관념으로 인해, 예수님께 대한 의혹과 혼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혼란과 의구심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 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 곧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내가 그다’라는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시고, 예언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이 “오실 분”임을 증언하십니다. 곧 당신이 손수 하신 일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증언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한자들아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3)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입니다. 곧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심을 품지 않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증언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의 실행을 통해, “오실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제가 당신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제가 누구인지를 증언하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깨달아 알도록 하셨듯이,
제가 하는 일을 보고 제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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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아, 의로움의 이슬을 내려라
“하늘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이사 45,8)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는 최고선 중의 하나는 정의인데, 그 정의라는 가치가 사람들이 구원되게끔
사회 현실에서 공정하게 구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공정한 사회’는 모든 예언자들이 전했던 메시지의 공통분모이기도 하지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실” 메시아께서
“성실하게 공정을 펴실 분”(이사 42,3)이심을 전한 예언자는 이사야입니다.
예레미야도 하느님의 백성 역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고 착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해 주어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고,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예레 22,3)고 전해 주었고,
에제키엘은 “악인조차도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덕분에 살 수 있으리라.”(에제 33,19)고 가르쳤습니다.
호세아도 “하느님께 돌아와 신의와 공정을 지키고 하느님께 늘 희망을 두어야”(호세 12,7) 한다고
호소했는데도, 사회의 불공정한 현실이 개선되지 못하니까,
당연히 이름 없는 백성들은 “주님께서 오시면 정의를 실천하셔서 억눌린 이들에게
공정을 베푸실 것”(시편 103,6)이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의 현인들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3)고 후세들에게 가르쳐왔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정함이 실현되는지 여부에 왜 이토록 민감했었을까요?
그 까닭은 공정함이 정의의 척도이고, 정의는 하느님의 가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공정함이 무시되면 하느님이 부정당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필두로 백성들은 메시아와 함께 공정한 세상을 기다려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을 시켜 예수님께 여쭈어 보게 했다고 나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기 전에 이미,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하면서
그분의 진면목을 알아 본 요한이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의문이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제자들도 자신처럼 예수님의 진면목을 확신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이 의도를 알아채신 예수님께서도 즉답을 하시는 대신, 당신의 복음선포 현장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메시아 시대가 바야흐로 실현이 되고 있다는 뜻으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에 오갔던 이러한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가 말해주는 바는,
사회의 불공정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온갖 불행한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이 회복되고 있으며,
따라서 공정함을 비롯한 하느님의 가치가 비로소 실현되고 있으니, 메시아 시대가 도랬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모든 질병과 장애, 죽음과 가난이 죄의 결과라고 여겨지고 있었고 흔히 힘세고
부유한 자들이 저질렀던 그 죄의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뒤집어 씌워지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가난은 그 모든 사회병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는데,
그 가난한 이들마저도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실현되고 있었던 이 메시아 시대의 징표들에 대해서,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등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질투하고
심지어 그 존재마저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루카 12,10)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시기에, 우리도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공정함이라는
하느님의 가치에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불의로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이 복음을 듣게
해야 합니다. 의로움이 공정하게 구현되는 일은 사회 공동선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아, 의로움이 싹트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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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대림 제3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19-23: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오늘 복음에 보면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9절) 하고 묻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분”을 예고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세례자 요한이 생각했던 그 오실 분은 마지막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내가 메시아다.’라고 대답하는 대신, 당신이 ‘오실 분’임을 보여주는 기적들을 일으키신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21절)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당신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당신의 권능과 능력에 감탄하게 만드셨다. 그리고는 깨달아 알도록 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22절) 바로 옛날 예언자들이 한 예언이 이루지는 것, 즉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을, 여러 시대에 예언자들이 예고한 일들이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하라는 말씀이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23절) 유다인들이 그분을 의심한 것은, 신비의 깊이를 몰랐거나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을 낮추시어 이 땅에 그 모습을 나타내실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지고 바위에 부딪혀 쓰러지고(참조: 이사 8,14; 로마 9,33),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참조: 루카 20,18)
그들은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통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그분을 보고도 그분께 돌을 던지며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7-38)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 곧 그를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도 역시 이 요한의 질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들어주시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 것 같다.”라고 불평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하느님이 우리를 따르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기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내가 변하는 기적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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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요한 7, 22)
희망을
별빛처럼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아픔에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시다.
보고 들은
것을 통해
비로소
알게되고
비로소
만나게되는
우리 삶의
기쁜 소식
복음이다.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오셨다.
사람답게
살게하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린다.
당신 삶으로
바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말씀과 진리는
예수님의
삶으로
드러난다.
이와같이
참된 진리는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보게된다.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만나게되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닌
이러한
주님처럼
스스로 살겠다는
마음과 실천이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길을
걸어가신다.
예수님을 통하여
보고 들은 것이
한낱 지식이
아닌 우리의
삶이 되는
대림이길 기도한다.
대림은
뜨거운
우리의
삶이다.
우리 삶이
예수님을 닮은
희망의 별빛이길
기도드린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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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새벽을 열며.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빠다킹 신부님.
어느 예비신자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성당에는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안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라고만 하니 오히려 마음에 평화가 사라집니다. 제가 계속 다녀야 할까요?”
주님의 말씀을 속박이나 간섭 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법은 이 세상을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건너는 신호등을 보고서 “누가 나를 구속하려는 거야?”라면서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커다란 혼란이 찾아올 것이고, 힘없는 사람은 더 큰 아픔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속박이나 간섭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따르면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서 함께 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속박이나 간섭으로 생각하면서 거부하게 되면 온전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토록 얻고자 하는 마음의 평화도 내게서 사라질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 한 말을 확인시켜 주려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제자들이 힘을 얻어, 목자 잃은 양들처럼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내가 메시아다’라고 대답하는 대신, 당신이 ‘오실 분’임을 보여 주는 기적들을 일으키십니다. 루카는 기적들을 강조함으로써 이사야가 예고한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행복한 사람이 어떤 이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속박이나 간섭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행복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기적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까요? 놀라운 기적을 한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또 다른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예수님 존재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적을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심을 버리고 믿었던 사람은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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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든 찻잔이 뜨거우면 그냥 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뜨겁다고 괴로워하면서도 잔을 놓지 않습니다(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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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이야기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공감에 가네요.
“판단력이 부족하면 결혼을 하고, 이해력이 부족하면 이혼을 하며, 기억력이 부족하면 재혼을 한다.”
“30대 교수는 어려운 것을 가르치고, 40대 교수는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50대 교수는 아는 것을 가르치고, 60대는 기억나는 것을 가르친다.”
“첫사랑이 잘 산다고 하면 배가 아프고, 첫사랑이 못 산다고 하면 가슴이 아프고, 첫사랑이 살자고 하면 골치가 아프다.”
웃긴데 공감이 가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첫 번째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혼 자체를 해보지 못해서. 그러나 두 번째는 크게 공감이 갑니다. 세 번째는 약간의 공감이.
아무튼 이 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거짓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이라고 했던 것도 집착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겸손을 강조하셨나 봅니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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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캠핑을 갔을 때입니다. 한 신부님이 식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저 어제 잠을 못 잤습니다. 캠핑 가는 것이 너무 기쁘고 설레어서 잠을 못 잤습니다.” 신부님은 미국에서 캠핑을 가는 것이 좋았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다른 신부님들의 모임에 함께해서 좋았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작년에 사제서품을 받았고, 미국인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습니다.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는 성당에서 있다가 한국말을 마음껏 사용하는 캠핑에 오니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 음식을 마음껏 만들어 먹으니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선배 신부님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캠핑 가는 것이 설레는 젊음이 부러웠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어린왕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약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야.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신부님의 마음이 어린왕자처럼 순수했기 때문에 캠핑이 설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황량하고 거친 사막에서도 싱그러운 우물을 찾는 사람이 있지만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에서도 늘 외로움과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일이 있다면 어린왕자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저도 생각만으로 가슴 설렜던 일이 있었습니다. 소풍 가기 전날에도 그랬습니다. 시골에서 어르신들과 사촌들이 오는 날도 그랬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날도 그랬습니다. 서품 받는 날도 그랬습니다. 첫 본당으로 가는 날도 그랬습니다. 모두들 가슴이 설렜던 추억들이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을 받는 날, 자녀가 대학에 합격한 날, 군에서 제대한 날이 있을 겁니다.
예전에 읽었던 노란 손수건도 기억납니다. 오랜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를 기다린다면, 나를 사랑한다면 마을 입구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 주세요.’ 가족들은 마을 입구 나무의 가지마다 노란 손수건을 걸어놓았습니다. 손수건을 걸어 놓았던 가족들도, 그 손수건을 보았던 당사자도 모두 가슴이 설렜을 겁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바로 그런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날을 이야기합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거라고 합니다.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고, 의로움이 싹틀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과 제자들은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요한의 제자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요한에게 돌아갔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설레는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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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대림 제3주간 수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 하느님!
- 하느님 체험, 하느님 자랑 -
20년전 수녀원 피정 지도시, “오, 하느님!”이란 주제로 피정 지도했던 적이 생각납니다. 이어 11년전 청담동 성당 대림 시기중 ‘하느님’이란 주제로 특강했던 적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역시 강론 주제는 ‘오, 하느님!-하느님 체험, 하느님 자랑-’입니다.
세례 받으니 “하느님!”이란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 좋다는 분도 생각이 나고, 투정 부릴 수 있는 분이 생겨서 좋다는 분도 생각이 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부를 이름이 없어 ‘어머니!’뿐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지요. 주님의 기도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글썽인다는 분도 생각이 납니다.
마음의 병의 뿌리에는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와 하느님을 잊은 망각을 이야기 하는데 하느님을 모르고는 마음의 병인 무지의 치유도 참 요원한 일이겠습니다. 문득 웬만한 병은 하느님 이름을 부르며 치유 받았다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예전 여러 번 나눴던 예화도 생각이 납니다. 초등학교때 친구가 수도원을 방문하여 장시간 이야기 했고 저는 듣기만 했습니다. 할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요지인즉 자식자랑과 돈자랑이었습니다. 일종의 인생 성공담이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나는 무슨 자랑이 있나? 생각하던 중 퍼뜩 떠오른 것이 ‘하느님 자랑’이었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자랑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 삶 자체가 하느님 자랑의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 자랑을 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사제서품후 32년 동안 매일 강론 역시 하느님 자랑에 속합니다. 새삼 무슨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지요! 이렇게 살아있음이 하느님 체험인데 말입니다. 지나번 대형교통사고시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저에겐 각별한 하느님 체험이었습니다. 사람눈에 우연이지 하느님 눈엔 다 필연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인간 무지의 병의 근원적 치료도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길뿐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체험의 공부는 평생 공부가 되겠습니다. 평생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아가면서 참 나를 알게 되고 비로소 무지의 치유도,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써놓은 ‘오, 하느님!’이란 시도 생각이 납니다.
-“날마다/한결같이
그 시간/그 자리에
찬란한/태양을 떠 올리는
하느님은/내 유일하고 영원하신/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자 경쟁자다
저절로 삶의 의욕 샘솟는다.”-
대담하게 고백의 시를 써놓고 나니 새 힘이 나는 듯 했습니다. 사실 아침마다 한결같이 그 시간 그 자리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은 저에게 하느님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여 여러 지인들에게 “사랑하는 형제님, 일출의 축복선물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말마디와 더불어 황홀찬란한 일출 사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얼마전 써놨던 ‘말씀 태양’이란 고백시도 나눕니다.
-“날마다
하느님보다 훨씬 먼저 일어나
하느님 아침 태양을 쏘아 올리기 전
새벽 일찍 강론 태양을 쏘아 올림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 행복, 이 기쁨에 산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요 치유의 구원이자 유언이다.”-
자주 강론을 통해 치유의 구원과 자유를 체험하니 저에겐 이 또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날 때, 하느님을 체험할 때 무지의 치유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와 구원임을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신비가이자 시인인 예언자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내가 하느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빚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이런 하느님을 잊으니 중심을 잃고, 길을 잃고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인간이, 세상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뿐인데 하느님 없이 답을 찾으려니 삶은 더욱 복잡해지고 혼란해지고 힘들어집니다. 하느님이 없으니 애당초 회개와 겸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으니 부평초처럼 뿌리 없이 표류하는 삶이요 무엇보다 허무와 무지의 늪에서 벗어날 길이 요원합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하느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하느님 체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뤄집니다. 그리스도와 일치의 체험은 그대로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 역시 이사야서의 하느님이 놀라운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지 않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치유와 구원과 자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된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 제자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참으로 예수님과 일치되어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 체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합니다. 동방 수도승에 대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수도승을 보며 어느 순례자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지 물었을 때의 답변입니다. “숴워요, 아주 쉽습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입니다.” 제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중 한연도 생각이 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오늘날 코로나19 팬데믹은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찾으라는,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넓이에서가 아닌 삶의 깊이의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불가의 돈오점수頓悟漸修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해 깨달아 알아 갈수록 우리의 수행도 자발적이 되어 탄력이 붙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일치를 통해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병을 치유해 주시며 참으로 온전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셨다.”(이사4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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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반영억 라파엘신부님. 대림 제3주간 수요일(루카 7,18-23)<근본에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우산 장수인 큰아들과 짚신 장수인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는 늘 걱정 속에 살았습니다. 비가 올 때는 작은 아들을 걱정하고, 맑은 날에는 큰아들을 걱정하니 하루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작은아들이 짚신을 많이 팔 것이니 좋고, 비가 오는 날에는 큰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이라 생각하니 늘 기뻤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여러분은 새소리를 들으면 ‘노래한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운다’고 하십니까?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어떤 이는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 불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항시 은총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으니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뻐해야 합니까? 그 감사와 기쁨을 잊어간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잃어버린 은총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근본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질병과 비참함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악령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화해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 그대로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29,18).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라”(이사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루카7,23).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데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내 비록 스승에게 속아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그리는 모습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본연의 모습에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걸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근심걱정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골치덩이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예비하시니 미리 감사하고 기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분명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흔들림 없기를 바랍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면 ‘살자’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나 자신을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히브11,1)해 주기 때문입니다. 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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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마치 복음서의 질문에 제1독서가 답을 하는 것처럼 짜여졌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20)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여쭌 이 질문이 복음 내용 안에 두 차례 반복됩니다. 제자들이 스승 요한의 질문을 그대로 직접 인용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질문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면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 것 같은데 이런 질문을 던지니까요. 이 질문에서 여러 가능성을 봅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와 예수님이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고 요한이 생각했을 가능성, 그리고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어서 당신의 일을 하시라는 촉구일 수도 있다는 것, 아니면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고 들음으로써 답을 얻게 하려는 산교육 방식...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22)
그런데 그 질문이 어떤 의도에서 나왔든, 예수님의 응답은 간명합니다. 이 답은 사도의 직무와 바로 연결되지요.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이는 머릿속 지식이나 남의 깨달음을 차용해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존재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수님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그 질문에 답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이사 45,6)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이사 45,20)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이사 45,21)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이사 45,22)
주님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시는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독서의 절마다 반복해 들려 주고 계십니다. 즉, 주님 외에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야 할 "다른 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이사 45,23)
하느님 입에서 나온 "의로운 말"은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한번 발설된 주님의 말씀을 되돌려 다시 삼킬 수는 없지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의로운 말씀"이십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계시의 완성으로서 인류는 더 이상 다른 계시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3)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의 기운을 북돋우시고 목숨을 살리시며 병을 치유하시고 장애를 치워주시며 악령에서 정화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이시기에, 그분 말씀은 단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완수됩니다.
단번에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고, 일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건 드러내시지 않건 세상 곳곳에 속속들이 스며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에 실제로 그리 하셨고, 이제는 성령께서 이어가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자신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하느님 현존의 자취를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저마다 길고 짧은 인생길에서 듣고 보고 만진 모든 것이 그분의 자취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듣고 보고 믿게 된 그분을 세상에 전하는 사도입니다.
믿음은 결단이고 용기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행복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고 보여 주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재촉합니다. 그러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창조하셨고 구원하십니다. 이를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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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이병우 루카 신부님.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7,19)
'세례자 요한의 질문!'
세례자 요한의 이 질문은 지금 와 계신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지, 만일 메시아라면 어떤 메시아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자신의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게 한 질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신 당신 자신이 심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와 계셨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세례자 요한 안에 자신이 각인시켜 놓은 메시아의 모습 때문에. 곧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하며,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귀먹은 이들을 듣게하는 구원자이신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실 분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을 자신 안에 각인시겨 놓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오늘 복음은,
지금 우리가 깨어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께서 '심판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고,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이유입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7,23)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께 대한 의심을 버리고 믿음 안에서 구원 받고, 그래서 구원의 표지인 행복이 우리 안에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아, 위에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이사45,8)
오늘도 함께 화이팅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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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고대 이스라엘 인접국가들은 다신(多神)을 믿는 봉건체제의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타의든 자의든 외국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외국의 신들을 숭배하는 신앙과 충돌하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정체성에 많은 혼란을 가져 왔습니다.
이사야는 토라의 첫 장에서부터 보여주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이야기를 회상시키며 그분의 유일하신 정체성을 다지고 있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이사 45,18)
예언자는 하느님만이 의로우시고 권능이 있으시기에 그분을 믿는 후손들은 그분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는 말씀을 또한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마태오는 세례자 요한이 이미 감옥에서 있었고 그곳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마태 11,2)
제자들은 예수님을 뵙고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그들의 스승께서 여쭈어 보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마침 많은 병자들과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또 눈먼 사람을 고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바로 ‘이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후에 오시는 분’이며 ‘세상이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0)이라고 말한 것을 전합니다.
여기에 비해 루카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여 메시아인지를 알아보게 합니다. 여기에서 공관복음 저자와 요한복음이 서로 보는 관점이 차이가 있음 알게 됩니다.
루카가 전해주는 이 이야기는 요한보다 역사적으로 더 오래되었고 예수님의 실제적 상황에 가까우리라 판단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들려오는 소문에 예수님과 그 일행의 행동들이 마음에 거슬리고 의심을 하는 기분이 드신 것입니다.
그분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마태 9,10-11), 그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9.10-11)
소문에 의하면 그분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안식일에 금하는 이삭을 짤라 비벼먹는 그들의 행동을 말리지 않고(마태 12,1), 또 스승이라는 분이 제자들이 손을 씻지도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도록 내버려 두기 까지 한 것입니다.(마르 7,2)
또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칩니다. (마태 12,13)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보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씀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자가 메시아에 대한 예언 내용을(이사 35,5-6)을 들어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전한 ‘구원의 기쁜소식’(이사 61,1)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목마르고 병으로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기쁜 구원을 순간순간 주시는 것입니다.
눈멀고 다리절고 나병에 걸린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죽은 이를 되살려주십니다.
영적으로 배고프고 목마르는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둠에서 빛이며 혼돈과 죽음에서 생명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주님의 때인 성탄과 재림이 더 가까워졌음을 알립니다. 신앙인은 그냥 시간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재림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가리는 심판에서의 기준을 ‘이웃에 대한 선행’으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입으로 머리로 사랑실천이 아니라 바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의 의미를 새겨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눈먼 이들을 보게하시고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죽은 이들을 되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기적을 베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둠에서 빛을 밝히듯,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서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행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사랑 실천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이웃, 가족, 친지, 이웃, 공동체의 형제, 직장의 동료들이 선행과 희생의 대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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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전삼용 요셉 신부님. 대림 제3주간 수요일(루카 7,18ㄴ-23)<공부 잘하는 가장 완전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며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보도록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말씀만 보면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할 때는 그분 위에 성령께서 머무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은 아직도 예수님께 가지 않고 자신에게 남아있는 이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예수님을 보고 나서 자신에게 증언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라고 하시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요한의 제자들 교육방법은 자신이 의심을 버리고 믿는 것을 넘어서서 누군가에게 그것을 증언함을 통해 그 믿음을 증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무언가 배울 때보다 그 배운 것을 남에게 전해줄 때 더 확실히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의도를 아시고 또 그렇게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시며 요한 제자들의 믿음을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교에 들어가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습니다. 무엇을 알아서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성당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수법을 배웠습니다. 어려운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하고 예화를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알아야 가르치니까, 더 많이 알기 위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를 사제가 되고 싶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가르치면서도 아이들의 순수함을 더 배웠습니다.
신학생 때는 똑똑한 신자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성경을 수십 번 읽어서 너덜너덜한 것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저는 그런 내용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신학생 때 어떤 교수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밖에서는 대학원까지 나오면 그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가 됩니다. 그런데 신학교 7년을 하고 나와도 성경을 신자들보다 더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신자들은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게 됩니다.
사제가 되니 신자들은 물론이요, 주일학교 교사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교리교사로부터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여름 신앙학교 때 제가 교사들에게 일을 시켜놓고 저는 게으름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 교사는 화가 나서 자식이 사제가 된다고 하면 혼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사제에게 실망한 것입니다. 행동도 모범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자에게 자기 머리를 밟으며 “교만한 아우구스티누스야!”라고 세 번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제자가 자신을 무시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공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가 흙이 들어간 밥을 먼저 먹는 것을 보고 알지도 못하며 화를 내서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할 때 제자보다 스승이 더 부끄러워집니다.
교수가 되니 기대치가 더 높아집니다. 어떤 사제는 ‘공부하고 들어와서 얼마나 하나 보자’는 식으로 말합니다. 또 ‘누구는 공부하고 들어왔는데 뭐 하는 게 없어’라며 저에게도 부담을 줍니다. 교리, 성경, 영성 등에서 사제들과 수도자들, 신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을 가르쳐도 교구에서 교리나 성경을 가르치는 봉사자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이미 귀가 고급이 될 대로 고급이 되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가는 따분해하기 일쑤였습니다.
만약 제가 강론을 꾸준히 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요? 아무리 공부해도 지금보다는 낫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억지로라도 전해주기 위해 묵상하고 또 좋은 예를 찾으며 저 또한 더 큰 확신으로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혼자라면 절대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에게 가르치며 더 명확히 알게 됩니다. 스승이 되어야 더 배웁니다.
저는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가졌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참 아버지이심을 의심할 때 이 세상에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행복하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남에게 그 믿음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게 좋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하던 아이들은 항상 친구들이 모르는 것을 잘 알려주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묻지 않으면 자신의 필기를 다 지우고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스승이 되어 알려주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르칠 때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스승이 되라는 뜻입니다. 알아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아는 것을 더 명확히 알기 위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복음도 전하려 할 때 더 확신하게 되고 그러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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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3주간 수요일<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희망해야겠습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고 각별한 총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눈만 뜨면 감사하며 하느님께 충실했어도 부족할 판인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배신과 반역, 우상숭배와 불충실의 길을 걸었습니다.
철부지요 애물단지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당부 말씀이 간곡하면서도 절절합니다. 하느님께서 반복해서 당신만이 유일한 주님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어떻게든 당신께로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한낱 미물같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어찌할 바 모르시며, 쩔쩔 매시는 모습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인간에게 싹싹 비시는 하느님, 인간에게 통사정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이사야 45장 6~7절, 21~22절)
하느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외치고 부르짖으심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이스라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멸망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배신과 우상숭배의 결과는 철저한 파괴요 함락, 유배요 종살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강한 벌을 내리시다가도 마음이 아파서 즉시 후회하시는 분, 그 숱한 우리의 반역과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키루스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나의 종 야곱 때문에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 때문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르고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너에게 칭호를 내린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너를 무장시키니 해 뜨는 곳에서도 해 지는 곳에서도 나밖에 없음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이사야서 45장 4~6절)
키루스는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왕으로서 당대‘핵인싸’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벌이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페르시아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고 지지를 보냈습니다. 정복한 나라 백성들에게는 유화 정책을 써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서 당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강대국 바빌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빌론은 천개의 성문으로 둘러 쌓여있었으며, 수많은 보화와 보물로 가득찬 황금의 도시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문과 성벽을 새로 세우고 튼튼하게 보수하고 증축했습니다. 성벽은 2층에다 높이는 6.5미터였습니다. 성벽은 일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열로 되어 있었는데, 두 성벽 사이의 폭은 3.72미터였습니다.
키루스는 이토록 강력한 바빌론을 함락하고 멸망시킵니다. 엉겁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를 통해 키루스는 주님 구원의 도구로 선포됩니다. 그는 주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인도하시어 그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결국 키루스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일이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경우 그분이 계획하시는 일을 우리의 좁은 안목과 머리로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그저 그분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해주시리라 낙관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희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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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송영진 모세 신부님. 대림 제3주간 수요일(루카 7,18ㄴ-23)<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하시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7,18ㄴ-20)”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질문은 요한 자신이 예수님을 못 믿어서 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질문으로 해석됩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직접 보아라.” 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예수님께 보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1-23)”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도 세례자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하다.’ 라는 말은 직역하면 ‘복되다.’인데,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복을 가리키는 말이고, 뜻으로는 ‘구원받는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사도들이 예수님을 ‘메시아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은 것은,
그리고 그 믿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믿음은 지식에서 비롯된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비롯된 믿음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어서 생긴 믿음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겪고, 깨달아서 생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단순하게 믿는 것 이상의 강한 확신,
즉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확고한 신념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일들을 요약한
말씀이기도 하고, 이사야서에 나오는 구절들을 인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이 구절들은 모두 메시아 시대를 묘사하는 구절들입니다.
메시아는 죄와 악의 억압을 받고 있는 인류를 해방하시는 분이고,
잘못되어 있는 것들을 고쳐서 바로잡으시는 분이고,
병들어 있는 인류를 치유하시는 분이고,
희망 없이 살고 있는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시는 분,
그래서 우리가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혹시라도 이렇게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 준 일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해도,
병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새로 생긴 바이러스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예수님이 오신 뒤로 무엇이 좋아졌는가?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께서 병 자체를 없애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긴 했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도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의학과 의술의 발전은
종교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세상과 오신 후의 세상은 분명히 다릅니다.
차이가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차이는 바로 ‘희망’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가장 큰 은총은 ‘희망’입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2).”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저 몸의 병이나 고치자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물론 몸의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치유의 은총을 간청하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은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몸의 건강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의 인생의 목적은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도, 즉 구약시대 때에도 희망은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언제 오실지도 모르고,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막연한 기대감.)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막연한 기대감이 확실한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은 희망’입니다.)
신앙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에서 무엇을 얻는지,
그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님 덕분에 알게 된 사람이고,
알고 있는 그대로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목적지 없는 유랑 같은 인생을,
즉 현세에 매여서 살다가 허무하게 끝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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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대림3-수) 은총, 기쁨을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 코로나 19시대를 살면서 참 많은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많은 은총을 받고 있었음에도, 그 은총을 미처 몰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그 기쁨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행복, 자유, 맛있음, 여행, 그리고 일하고 만나는 것 등등.
지금 저는 본당 사목은 쉬고 있지만, 여유를 가지고 더 많은 기도와 매일 거룩한 미사는 봉헌하고 영적독서도 꾸준히 합니다.
예전에는 본당 사제로 살면서 대림 시기나 사순 시기에는 항상 “바쁘다. 힘들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목포 연동 성당에서 사목할 때, 사순 새벽 40일 기도를 하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의 일과를 일찍 시작해도, 왜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피곤하다, 쉬고 싶다는 말을 마음속에 늘 담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무 일 하지 않고 방에서 온종일 책이나 보면서 누워서 뒹굴뒹굴하면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러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날도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병원에서 장례 사도 예절이 영안실 앞에서 있어서 이동식 앰프를 들고 가다가 제 허리가 삐끗했습니다.
장례 사도 예절을 거행하고 나서 온종일 방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에도 새벽 5시에 시작하는 새벽기도회를 7시에 마치고, 온종일 방에 누워있었습니다.
이렇게 이틀을 누워있어 보니까, 바쁘게 돌아다녔던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즉, 저는 그렇게 많은 은총을 받고 있었음에도, 그 은총을 미처 몰랐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은총인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총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매 순간 불평하거나, 기도회를 하면서 “내가, 왜?”라는 의심하며 사제로서 자신에게 힘들게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긴 오늘 복음에 나온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단식과 기도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자 요한도 의심을 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두 제자를 주님께 보내어 여쭙게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보낸 두 제자 앞에서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보고 들은 것을 세례자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이렇게 의심을 품는 순간 과연 세례자 요한이 행복했을까요?
별의별 생각다 하면서 아마 힘들었을 테고,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운님들의 삶 안에서 이러한 의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 결과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라 의심(?)은 버리셨으면 합니다.
지금의 이 코로나의 삶이 그렇게 힘들지라도, 주님의 사랑은 고운님들의 주위에서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을 것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고운님들과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물음표(?)가 아니라 마침표(.)이시길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아멘.
저 두레박 사제도 의심을 품지 않는 행복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간호하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의심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새 희망을 찾는 기쁜 마음으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입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충만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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