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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지상 명령(마28:16-20)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갈릴리의 한 산에 모여 있습니다. 16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그 산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로 그 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었던 여인들은 급히 제자들에게 뛰어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로 모이라는 명령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을 듣고 모이게 된 것입니다.
16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이 아니라 열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빠졌습니까? 자살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끝을 잘못 맺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잘합니다. 그러나 끝을 잘못 맺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예수님을 팔게 되었고, 그 결과 자살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첫째 이유는 교만입니다. 그는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바로 교만입니다. 본래 사탄은 교만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교만해질 때 사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둘째 이유는 가룟 유다의 생애를 살펴볼 때 자기 주장이 많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 자기 생각이 많습니다.
그리고 항상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었습니다. 그의 사고와 의지가 언제나 부정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셋째 이유는 가룟 유다가 야망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있었습니다. 말은 정의롭게 합리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 깊은 곳에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돈궤에 관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삼 년이 지난 후에 가룟 유다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맙니다. 16절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루살렘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부르셨을까요?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다윗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거기있었기에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곳도, 부활하신 곳도 예루살렘입니다. 기독교의 탄생이라 할 수 있는 오순절 사건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의 고향입니다. 제자들을 처음 불렀던 장소가 바로 갈릴리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거의 3년동안을 훈련받으며 함께 울며 함께 웃고 기적을 베풀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던 곳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갈릴리가 필요합니다. 일할 수 있는 예루살렘도 필요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거기서 영적 훈련을 받고 제자로 부름받은 곳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해변가를 거닐며, 제자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며,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약한 자를 일으켜 세워 주시며, 연약한 자들을 격려해 주시던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를 믿는 구원의 기쁨, 죄용서받은 기쁨,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격을 경험할 수 있는 곳, 바로 그 곳이 예수님의 갈릴리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외향적이고 사건 중심이라고 한다면, 갈릴리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건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제자들을 부르지 않으시고, 영적인 변화의 산실인 갈릴리를 택하셔서 제자들에게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실패했습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있습니다. 그 때 갈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구원받은 그 잘히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지금 그것을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두가 성공할 것이라고 큰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 십자가앞에 절망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국이 무엇인가를 몰랐습니다. 혼돈에 빠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실제 제2의 탄생이 있게 하시고, 제2의 사명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전의 모습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다시 제2의 선택, 제2의 부름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사명에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이 갈릴리에서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새롭게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 권능과 영장을 가지시고 우리를 새롭게 부르고 계십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은 어떤 경험을 합니까?
17절,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약속한 장소에 가 보니까 예수님이 먼저 거기에 와 계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일어난 사건은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보다 더 위대한 사건이 어디에 있을까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게 신앙입니다. 신앙은 긴장입니다. 긴장을 잃어버린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차가운 교리입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하나의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바로 이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않는 예수, 여러분의 성격 하나 고칠 수 없는 예수, 여러분의 습관 하나 고칠 수 없는 예수입니까? 그렇게 교회를 오래 다녔고, 그렇게 기도를 많이 했는데,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무슨 역사가 있었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의 신앙이 부활 신앙이기를 바랍니다. 살아 움직이는 신앙, 역사하는 신앙, 생동하는 신앙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자들에게는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17절,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제자들의 첫째 반응은 경배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 자리에 엎드려 발을 붙잡고 경배했던 여인들과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순간, 상상할 수 없는 경이와 기적의 현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 당신은 주님이십니다.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당신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하면서 경배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일어납니다.
두 번째 반응은 의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제자가 바로 도마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필이면 도마가 빠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못한 도마가 나는 예수님의 손과 발을 만져 보고 옆구리를 만져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살 수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못자국과 옆구리에 있는 창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니까?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님을 만나고 비로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마의 인생을 달라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명령입니다. 이제 제자가 무엇을 해야 할지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령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하시고 계십니다.
1. 가라!
우선 이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이 명령을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입니다. 누구에게 명령합니까? 3년 동안 훈련시켰던 제자들입니다. 어디로 보냅니까? 세상으로 보냅니다. 보내는 주체와 보냄을 받는 자와 보내야 할 곳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막연히 해서는 안되고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라고만 했지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테니까 가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전도하려면 돈도 필요하고 먹을 것도 필요하고 잘 곳도 필요하고 사람들도 필요할 텐데 전혀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이 20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연약하고 불완전하지만 인간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결같은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큰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여행을 떠날 때 부모님과 함께 가면 만사형통인 이치와 같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그의 백성을 인도할 때 그의 손에는 양을 치던 마른 막대기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막대기에서는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이 모세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들고 전도가 힘들고 봉사가 힘듭니다. 예수 안에 엄청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능력은 사용하지 않고 내 방법대로 내 힘으로 하려니까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가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있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배표를 사고 나니 돈이 없었습니다. 배 안에서 배가 고파서 물로 배를 채웠습니다. 미국 뉴욕에 도착하여 안 사실이지만 뱃삯에는 음식값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이미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인을 회개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탄을 결박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이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무슨 능력을 주셨는지 볼까요? 마가복음 16: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할렐루야!
주님은 친절하게도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확실히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의심없이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고 가장 불쌍하고 답답한 사람은 예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의 모든 권세를 우리 모두에게 다 주었습니다. 이 권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팔아 예수라는 보화를 샀습니다. 이제는 그 보화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기도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믿고 구하고 시행하면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주님께서 가라하실 때에는 내가 함께 가면서 너의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 줄테니까 너는 걱정 말고 나가라는 적극적인 보장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우리 모두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어디로 보내심을 받았습니까? 가정으로 직장으로 사업장으로 학교로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거기에 주님의 명령입니다. 보내어진 곳이 선교지입니다. 우리 한번 하나님앞에서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누가 함게 하시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떻게 함께 하십니까?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가운데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곳에 어디이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가슴깊이 새기고 그 사명을 잊지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세례를 주라
세례를 주라는 말은 생명을 살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늘 들은 것처럼 예수님처럼 천국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일이 바로 세례를 주는 일입니다. 그저 나가서 구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천국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라는 말입니다. 세례는 에수와 함께 죽고 예수님와 함께 사는 증표입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교회에 데리고 나와서 세례를 받기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세례란 예수님의 생명이 그 사람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세례는 구원의 증표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라 하면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전도자는 세례받게 하는 데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기를 낳으면 혼자 자립할 때까지 양육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영적인 자립은 세례받을 때까지입니다. 세례에는 물세례와 불세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세례를 경험케 해야 합니다. 성령을 충만케 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불신자들을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으로 만족을 하기 때문에 쭉정이 신자들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세례란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부활하는 경험을 말합니다. 이 경험이 없이는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었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체험이 이 시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고백은 언제 들어도 기쁘듯이 주님께 매일 매 시간 이 고백은 필요합니다. 이 고백이 있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 영혼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와 이웃, 부모님, 모두를 구원해야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친구로서 형제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생명사역에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가르쳐 지키케 하라
예수님께서 3년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제자 양육이었습니다. 제자를 양육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면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수님의 삼중사역에 세 번째 사역입니다. 천국복음으로 생명을 살리고 병든자 연약한자를 고치고 어린 신자를 바르게 가르쳐 제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일꾼으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 되어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대단히 무섭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대단한 사람들입니까? 아마도 평균을 밑도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직업만 보아도 어부, 세리 등 적어도 엘리트 계층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년동안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쳤더니 당시의 엘리트들은 물론이요 로마의 권력까지도 그들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훈련은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 1)경건훈련-묵상, 2)기도훈련, 3)예배훈련, 4)순종훈련입니다. 이러한 훈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바로 말씀이 인격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격훈련이 되면 성령의 열매가 맺습니다.
갈 5장에 보면 성령의 열매는 9가지입니다. (갈 5:22,23)“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처럼 성령의 열매는 인격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충만하여 여러분의 삶속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가르치면 내가 예전에 갖고 있는 것이 힘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바로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세상의 빛이요, 주님의 맞이하는 신부의 세마포 단장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모두가 이처럼 경건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지켜행하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제자 삼으라
첫 번째가 '가라'입니다. 두 번째가 세례를 주라입니다. 세 번째가 가르쳐 지키게 하라' 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를 삼으라 입니다. 어떤 분은 제일 먼저 나오는 '가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주동사가 '제자를 삼으라'입니다. 나머지는 분사형으로 되어 있어서 제자삼는 일의 보조역할입니다.
다시 해석하면 제자 삼기 위하여 가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 일이 주님이 말씀하신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부르고, 다른 말로 '대사명'(Great Command)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요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신 사명의 위임입니다. (어머니의 유언) 주님이 마지막으로 이 땅에 계시면서 하신 마지막 명령은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제자양육이었습니다. 제자를 양육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가서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훈련에 의해서 되어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훈련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대단한 사람들입니까? 아마도 평균을 밑도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직업만 보아도 어부 세리 등 적어도 엘리트 계층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년동안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쳤더니 당시의 엘리트들은 물론이요 로마의 권력까지도 그들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최종 목표는 직분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 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등록하여 세례받게하고 집사되게 하고, 권사되게 하고 장로되게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고 예수와 함께 죽었다가 산 경험을 갖게 하고 헌신된 제자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다가 죽으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죽음이나 어려움이 올 때에 십자가를 지는 순서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거의가 복음 전하다가 순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는 목이 잘려 죽었고, 산채로 껍데기가 벗겨 죽기도 하였습니다. 제자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도 함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지상명령을 내렸습니다. 가서 제자삼으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지금까지 남의 이야기로만 들었다면 이제 말씀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먼저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내게 붙혀주신 영혼을 구원하기위해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고 연약한 영혼, 병든 영혼을 비난하고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는 치유사역이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사명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고 그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또다른 예수님의 제자가 태어나는 생명사역이 이루어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