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zochen and the Emptiness teaching by Jackson Peterson
경험의 객관적 영역과 주관적 경험자는 둘이 아니다-잭슨 피터슨
인간의 삶은 아무리 성공적이거나 행운이 따르더라도 근본적인 불안감으로 물들어 있다. 행복한 순간에도 미묘한 긴장과 충족되지 않는 감각이 있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하다. 관계는 변하고, 건강은 흔들리며, 기쁨은 사라진다. 그 모든 것 아래에는 끊임없는 불안의 배경음이 깔려 있다. 고대의 가르침에서는 이를 두카(dukkha), 즉 ‘불만족’이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불편함을 외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관계, 성취, 신념, 혹은 오락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더 깊은 뿌리는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에 있다. 우리의 지각 방식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어떤 근본적인 무언가가 잘못 이해되고 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세상을 살아간다고 느낀다. “나”라는 경험자가 있고, “나”가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나 아닌 모든 것”이 있다. 이러한 주체와 객체의 분리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실재가 아니라면? 만약 이것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처럼 현실을 끊임없이 ‘관찰자’와 ‘관찰 대상’, ‘생각하는 자’와 ‘생각’으로 나누는 과정의 부산물이라면?
고대의 현자들, 예컨대 샹카라차리야(Shankarachariya, 인도 중세 베단타 철학자)의 스승이었던 *가우다파다(Gaudapada)*는 이 점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둠 속에서 불을 휘두르면 원, 선, 나선 같은 형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형상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단지 불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불이 멈추면 형상도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자아’와 ‘세계’의 분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개념적 사고가 만들어낸 착각이다. 이 움직임이 ‘자아’라는 환영을 만들어내며, 그것이 의식의 중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 습관, 그리고 뇌가 수많은 신경 발화를 통해 만들어내는 해석 방식이다. 뇌는 기억, 감각, 생각을 모아 ‘나’라는 이야기를 엮어낸다. 이것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꿈속의 등장인물이 꿈이 계속될 때만 존재하는 것처럼, 이 ‘자아’도 지속적인 사고 활동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자아’는 꿈을 꾸는 존재가 아니라, 그 꿈의 일부일 뿐이다.
과학도 이를 뒷받침한다. 신경과학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는 시스템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로 내면에서 ‘나’라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 시스템이 조용해질 때—깊은 명상 상태에서든, 특정한 신비적 경험에서든, 갑작스러운 통찰을 통해서든—개별적인 ‘나’라는 감각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상태는 무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놀랍도록 맑고 고요하며, 분리되지 않은 존재감이 남아 있다. 경험은 있지만 경험자는 없다. 오직 열린 존재의 장(field of being)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다.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믿음의 변화가 아니라 지각의 변화가 필요하다. 마음이 끊임없이 세상을 ‘이것’과 ‘저것’, ‘나’와 ‘타인’으로 나누는 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알 수 없다. 마음은 오직 개념과 이름표, 해석만을 알 뿐이다.
해탈(Liberation)—즉,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나 족첸(Dzogchen)과 같은 전통에서 말하는 궁극적 깨달음—은 어떤 새로운 통찰이나 상태를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려는 정신적 활동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가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 과정이 단순히 멈출 뿐이다. 불길이 멈추면 환영도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 그것은 공허한 무(無)가 아니라, 맑고 생생하며 고요한 인식(awareness)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발생하는 장(field)으로서의 존재. 즉, 그 자체로 모든 것과 분리될 수 없는 인식이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기능이 만들어낸 덧씌움(superimposition)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 물리학에서도 발견된다. 양자장 이론(Quantum Field Theory)은 우주가 개별적인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침투하는 장(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우주에는 ‘공간 속의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장의 파동(waves in fields)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단단한 실체’라고 생각하는 세계도 더 깊은 활동이 안정된 결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물리학이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확고한 경계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경험 속에서도 ‘의식’과 ‘세계’ 사이의 경계를 찾을 수 없다.
인간의 고통은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바깥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분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불길이 어둠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의 형상과 같았다. 개념적 사고의 움직임이 멈추고,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활동이 사라질 때, 거기에는 평온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이라는 환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고통의 구조 전체도 사라진다.
이것이 진정한 해탈이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어떤 높은 존재와 합일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잘못된 분리가 끝나는 것이다. 마음이 더 이상 경계를 그리지 않을 때, 존재의 장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어떤 것’이 세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과 알려진 것이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둘은 애초에 없었다. 오직 하나의 실재(Reality)만이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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