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42】 10-1
雖樂觀察無言說法이나 而恒示現淸淨音聲하며
“비록 말이 없는 법을 관찰하기를 좋아하지마는 청정한 음성을 항상 나타내 보이느니라.”
▶강설 ; 비야리성에서 입을 닫고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면서 한편 아름답고 청아한 음성과 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 하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법문을 설해야 할 것이다. 보살은 언제나 이 두 가지 면을 잊어버리고 한 곳에 치우친다면 진정한 보살이 아니다.
雖住一切離言法際나 而恒示現種種色相하며
“비록 일체 말[言]을 떠난 법의 경계에 머물지마는 가지각색의 모양을 항상 나타내느니라.”
▶강설 ; 일체 말[言]을 떠난 법의 경계에 머문다는 것은 역시 유마거사가 비야리성에서 입을 다물고 불이법문을 설하는 소식이다. 그는 정작 입을 닫고 말이 없으면서 육신의 병고를 우정 보여서 온갖 이치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雖敎化衆生이나 而知一切法畢竟性空하며
“비록 중생들을 교화하지마는 일체 법의 성품이 끝까지 그 성품이 공(空)한 줄을 아느니라.”
▶강설 ; 보살은 오로지 중생을 교화하는 것으로 보살의 삶을 삼는다. 그러나 중생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보살의 견해가 아니다. 일체 법이 끝까지 그 성품이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텅 비어 공한 줄 알고 열심히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적인 중생교화다.
雖勤修大悲하야 度脫衆生이나 而知衆生界가 無盡無散하며
“비록 부지런히 대자비(大慈悲)를 닦아 중생을 제도하지마는 중생세계가 다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줄을 아느니라.”
▶강설 ;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보살은 중생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중생들을 다 제도하려고 서원한다. 그것이 보살의 큰 자비며 큰 서원이다. 그러나 중생은 결코 다하지 않는다. 중생이 다하지 않는 줄을 잘 알지만 세세생생 중생을 제도하면서 사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
雖了達法界가 常住不變이나 而以三輪으로 調伏衆生하야 恒不休息하며
“비록 법계가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줄을 알지마는 세 가지 바퀴[三輪]로 중생을 조복시키기를 항상 쉬지 않느니라.”
▶강설 ; 세 가지 바퀴[三輪]란 삼전법륜(三轉法輪)이다. 시전(示轉)ㆍ권전(勸轉)ㆍ증전(證轉)인데 석존이 세 번 4제(諦)의 교(敎)를 말씀한 것이다. 시전이란 이것은 고(苦), 이것은 집(集), 이것은 멸(滅), 이것은 도(道)라고 그 모양을 보인 것이다. 권전이란 고(苦)를 알라, 집(集)을 끊으라, 멸(滅)을 증득하라, 도(道)를 닦으라고 권한 것이다. 증전이란 석존이 스스로 고를 알아 집을 끊고, 멸을 증득하려고 도를 닦은 것을 보여 다른 이들로 하여금 증득케 하는 것이다. 보살이 법계가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줄을 알지마는 이러한 삼륜(三輪)으로 중생을 조복시키기를 항상 쉬지 않는다.
雖常安住如來所住나 而智慧淸淨하야 心無怖畏하고 分別演說種種諸法하야 轉於法輪하야 常不休息이니라
“비록 여래의 머무신 곳에 항상 머물지마는 지혜가 청정하고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며 갖가지 법을 분별하고 연설하여 법륜 굴리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삼매의 힘으로 이미 여래가 머무시는 곳에 머문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와 같은 경지에 머무르면서 다시 지혜는 청정하고 마음은 두려움이 없으며, 가지가지 법을 연설하여 법륜 굴리기를 쉬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의 일상이다. 달리 무슨 일이 또 있겠는가.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第九法界自在大三昧善巧智니라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아홉째 법계에 자유자재하는 큰 삼매의 교묘한 지혜니라.”
▶강설 ; 보살이 세상에 나아가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행을 행하되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행(行)에 걸림이 없는 행을 행해야 비로소 원융하고 중도적인 보살행을 행하는 것이 된다. 중생제도뿐만 아니라 사대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물과 사건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다 이해하고 다 수용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여기까지가 보살마하살이 아홉째 법계에서 자유자재하는 큰 삼매의 교묘한 지혜를 설해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