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우렁이의 역습]농사일 하랬더니 짝짓기만..죽지도 않는 '좀비' 왕우렁이
입력 2020.12.10. 11:40
따뜻해진 겨울 탓에 동면 해1년 1000개 알..왕성한 번식력고흥·해남·진도·완도 등 농지피해 면적 축구장 900개 크기잡초·벼 안가리는 왕성한 식욕왕우렁이 대체 친환경농법 전무최장 장마 등 예측 어려운 날씨참고하던 영농일지도 무용지물
벼논 가장자리 수로에 와글와글 모여있는 왕우렁이. 사진=신보경·안경찬 PD
“하라는 일은 안 허고…. 짝짓기만 하고 있으니 내가 환장할 일이죠, 보고 있으면.”
격한 목소리로 성을 내던 서 이장이 이내 멋쩍은 듯 말했다. “즈그라고 동면하고 싶겠어요? 근디 살기가 좋아지니까 죽지를 않고 자손 번식을 잘 허고…. 지구온난화로 날이 따뜻해져서 그런 걸 어떡하것어요?”
지난 10월 말 헤럴드경제 취재팀이 찾은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장촌마을. 이곳 이장을 맡고 있는 서일권(51) 씨는 급격히 늘어난 왕우렁이 때문에 아주 골치가 아프다. 그는 아무리 줏어도 논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게 왕우렁이라고 했다. “징글징글 허다”며 서 이장이 고개를 절레 흔들자 지나가던 마을 주민 박정례(67) 씨도 거친 목소리로 거들었다.
“거기 앞에! 그게 전부 다 왕우렁이예요! 농사 50년 만에 올해 같은 해가 없었어.”
박 씨가 가리킨 벼논에는 검지 손가락 길이만한 왕우렁이 수천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뜰채로 논 가장자리에 있는 수로를 한번 훑자 왕우렁이가 여아홉 마리씩 걸려 올라왔다. 길고 곧게 자라야 할 벼 잎에는 왕우렁이가 갉아먹은 상처가 역력했다.
10일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올해 왕우렁이로 인한 피해 면적은 전라남도 5개군(1262농가)에서만 660.1헥타르에 이른다. 대상농지(3788ha)의 17%에 달하는 수치로 200만 평에 이르는 면적이다. 축구장 900개 정도 크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라남도농업기술원 친환경농업연구소 최덕수 농업연구관은 “특히 올해는 전남 해안가인 고흥, 해남, 진도, 완도를 중심으로 왕우렁이 피해가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서 이장은 저지대에 위치한 벼논 가운데 쌀 생산량이 30% 가까이 떨어진 곳이 있다고도 했다. 수로를 타고 둥둥 떠내려온 왕우렁이가 낮은 지대에 있는 벼논에 밀집하면서, 해당 지역은 왕우렁이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는 설명이다.
“왕우렁이 두 마리가 벼 한 포기에 달라붙어서 갉아먹는데 걸리는 시간이요? 딱 한 시간이면 돼요. 얘네들 인정사정없어요. 얼마나 마구잡이로 먹는데….” 서 이장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마을 부녀회와 힘을 모아 2주 내내 왕우렁이 수거 작업도 해봤지만 “턱도 없었다”고 했다. “지도 살 것다고 기후 적응도 하는 것잉게, 그런데 아주 죽것습니다. 아무리 주워도 끝이 안 보입니다.”
실제로 벼논에 진입하는 아스팔트 길에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수거한 왕우렁이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커다란 성체부터 자그마한 새끼까지, 벼논에도 여전히 왕우렁이가 한가득이었다. “벼논에 제초용으로 쓰인 왕우렁이는 땅과 식물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을 섭취했기 때문에 식용으로 쓸 수도 없어요” 최 농업연구관이 덧붙여 설명했다.
올해 왕우렁이 피해가 컸던 데는 유독 따뜻했던 겨울 온도 탓이다.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기상관측 기록상 올해는 가장 따뜻한 3년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지난 겨울, 전라남도의 겨울철 평균 기온은 평년보다 1~2도 높았다. 최 농업연구관이 올해는 월동한 왕우렁이의 개체 수가 다른 해에 비해 월등하게 많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다.
지구 온도 상승을 피부로 느끼는 산 증인들은 바로 농부들이다. 전남 고흥에서 올리브를 재배하는 주동일(63) 농업회사법인 고흥커피주식회사 대표는 “교과서 내용을 바꿔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고흥에서는 한 겨울에도 뱀이 풀섶을 어슬렁 거린다고 했다. “24절기라는 것도 지금은 참고사항이지, 그걸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기후변화를 느낄 정도라니까요.”
이렇다보니 왕우렁이는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영하 3도에서 사흘만 지속되어도 살지 못하는 열대성 연체동물인 왕우렁이를 1983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데려온 건 분명 ‘인간’이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따뜻한 겨울을 만들어 준 것도 ‘인간’이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의 손에 왕우렁이는 그저 이 한국 땅에 정착했고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다.
처음엔 식용으로, 이후엔 친환경 농법으로 왕우렁이가 쓰였다. 논농사를 방해하는 잡초를 제거하는데 왕우렁이만큼 아주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왕우렁이를 논에 투입하면 잡초의 98%가 제거된다.
새로 자라나는 연한 풀만 먹는 습성 덕분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니 더할 나위 없는 벼농사 제초제다.
그러나 수명이 다해야 할 때 죽지 않게 된 ‘좀비’ 왕우렁이는 벼를 사정없이 갉아 먹었다. 왕우렁이는 1년에 1000여 개의 알을 낳는 데다 부화한 새끼도 60일이면 성체가 될 정도로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왕우렁이로 인한 피해 사례가 워낙 빈번하게 보고되다 보니,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결국 왕우렁이를 세계 100대 최악의 침입외래종으로 꼽았다. 환경부도 왕우렁이를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하려고 했으나 친환경 농가는 즉각 반발했다. 서 이장은 “왕우렁이 농법 말고 쓸만한 친환경 농법은 없다”며 “가격도 안 맞고 제초 효과가 그만큼 좋지도 않다”고 했다.
실제로 현재로서는 왕우렁이 농법을 대체할만한 친환경 농법이 사실상 전무하다. 이에 농촌진흥청을 비롯한 농업기술원에서는 월동한 왕우렁이가 벼논에 침입하지 않도록 수로에 철조망 등을 세우는 등 체계적 관리 연구에 돌입한 상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올해는 역대 최장기간 장마에 태풍까지 겹쳐 쌀 수확량이 1968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통일벼를 보급하기 전 수준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북극의 이상고온 현상이 벼논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52년 만에 닥친 최악의 흉년을 마주해야 했던 서 이장은 한숨을 푹푹 쉬며 “저처럼 영농 일지를 쭉 써온 사람도 과거의 것을 보고 올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고 했다.
“뭔 놈의 장마가 이렇게 깁니까, 비가 계속해서 쏟아부으니까 벼가 옆가지를 치기 시작허요. 이걸 막으려고 농민들이 물떼기를 급하게 한 거 아닙니까. 근디 그러면 사실 벼가 재대로 생육을 못 허요. 그래도 어쩝니까 비가 오는데….” 실제로 올 장마가 50일을 넘어가면서 농가 대부분은 계획과 달리, 물떼기를 한두달 정도 빨리 진행해야만 했고, 이는 쌀의 생산량에 영향을 미쳤다. 물떼기는 벼가 성숙하면 용수공급을 중지하고 논에 관수된 물을 빼내는 것을 말한다.
“올해는 도열병이 심하게 와서 잎들이 말라 죽기도 했고요. 벼멸구와 혹명나방 피해가 심했습니다. 올해는 긴 장마로 인해 병이 성행했던 해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 농업연구관이 설명했다.
그러자 서 이장은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다”며 연신 “모르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이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