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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수필
문학적 성취와 우회적 기법
- <산림문학> 겨울호를 읽고 -
작가는 글로 말하고 인간성으로 평가받는다.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로그인
수필의 경우, 문학성을 확보하는 한 방안으로 제일 먼저 우회성을 들 수 있다. 쉬클로프스키와 토마체프스키 등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하기도 우회성의 문학원리다. 입체적 구성을 통해 주제를 의미화해야 완성도가 있는 수필이 창작되는 본격수필은 전략적 차원에서 표현의 우회성 기술은 매우 중요하다할 것이다. 이미 문학론에서 이러한 우회적 표현 방식은 ‘실감의 유리’와 ‘실감의 보수’라는 용어로 문학가와 친숙하다고 하겠다. 제한된 지면과 언어의 부피 속에 부푼 표현 욕망을 십오 매 내외의 원고지 안에 압축하는 데, 그것은 더없이 좋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문예문은 ‘소통성’보다는 ‘전달 차단성’을 추구해야 할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현대수필의 잡문성이 바로 이 표현 기술의 부재에서 온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진단일까.
이번 봄호 수필 계간평에서 다룰 작품은 문학성을 우려내는 우회성과 낯설게하기가 드러나 문예미학을 안겨주는 다섯 분의 수필이다. 강인철의 <아! 이름이여>, 계간평을 통해서도 자주 얼굴을 내미는 옥형길의 <나무의 언어 나무의 문자>와 조철형의 <송설화>, 그리고 최용순의 <어머니의 기도>와 홍만희의 <한 겨울에 매화가 꽃 피듯, 감나무에서 감 맺듯>이다. 이들은 일상 속에서 자동화되고 상투화된 언어와 기법, 장치와 구조를 낯설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문학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개화되는 꽃이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서 삶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추구해 나갈 때에 그 자리를 견고히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문학적 기법을 통해 문예미학을 완성시킬 때 가능하다.
II. 클릭
강인철의 <아! 이름이여>는대단한 상상력의 수필이다. 이 수필은 사물을 인격화하여 사물과 대화함으로써 수필에 가장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상상을 착작과정에까지 끌어들여 문학성의 확보에 성공한 케이스다. 우리 수필가가 강인철처럼 사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오래 전부터 수필이 잡문이란 소리를 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러 나라를 여행해서 견문이 넓은 작가여서일까, 이 수필은 산속에서 느낀 예민한 감정선을 깊은 사색으로 다루고 있어서 큰 감동을 준다. 풍부한 감성과 새로움을 향한 사색이 정서를 표현함에 있어 ‘우회적 수법’과 잘 매치를 이루고 있어서, 미적 쾌감을 준다. ‘이름’에 대한 강인철의 탄탄한 사유로 붓을 잡으면서, 작가는 사물의 편에 서서, 이름에 얽힌 초목의 고통과 한을 대신 풀어내고 있어 재미를 줄 뿐만 아니라 지각과 인식의 시간을 늘려준다.
그래서일까 사물의 이름엔 상징성이 매우 크다. 더러는 이름으로 덕을 보기도 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 방구, 임신, 성기, 귀신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을 놀려댔던 기억과 어른이 돼서까지 최지옥, 나죽자, 구덕이, 박아지 등 지인들이 곤욕을 치르는 걸 보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은 법에 호소하여 구제라도 받을 수 있지만 초목들은 부르는 대로 불릴 뿐 하소연을 할 수 조차 없으니 나름, 분통이 터지고도 남을 일이었지 싶다.
<아! 이름이여> 중에서 -
위 인용단락은 전개부 첫 단락인데, 이 수필의 첫 문장은 ‘수목원에 가면 많은 친구들을 만나다.’로 시작된다. 이름은 사고의 방향타라서 잘 지어야 하고, 잘못 지으면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곤 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사람은 법으로 구제를 받을 수 있지만 초목들이야 무슨 힘도 없고, 하소연할 수도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랴. 자고로 훌륭한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수필에서 작가는 사물의 한탄을 물아일체를 통해, 또는 인격화를 통해 듣고 있다. 사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영적 귀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초목은 하소연을 할 수 없다’는 부분이 압권이다. 작가의 치밀한 사유 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우회성의 결과로 감동의 충격과 미적 효과를 증진시키는 데 성공했다.
옥형길의 <나무의 언어, 나무의 문자>도 대단한 수필이다. 낯설게하기를 최고의 창작원리로 꼽은 오에 겐자부로와 일물일어설의 플로베르가 생각날 정도다. 작가는 ‘TV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동물도 언어로 소통한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그 다양한 예를 보여주다가 관점을 갑자기 ‘나무’로 옮겨간다. 그러면서 나무나 풀과 같은 식물에도 동물의 뇌나 신경계를 대체할 다른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면서 그 예로 미모사를 비롯한 여러 초목들의 외부 자극 방어기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설득을 위한 근거를 경험과 지식을 통해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나무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 작가는 생각이 있으니 당연히 언어도 있을 것이라는 데까지 사유를 확장해 간다. 뿐만 아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나무에는 문자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머문다.
나는 나무도 언어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는 나무 잎들이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 삭품에는 추위에 파르르 떠는 소리, 잎이 피고 꽃이 필 때는 토닥토닥 톡톡 행복한 즐거움에 가지를 흔들며 춤을 추는 듯한 흥겨운 소리, 그러다 산천을 뒤흔드는 강풍에는 곧 쓰러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른다. 작은 마무들은 발버둥치며 앵앵대며 울고 등치 큰 상수리나무는 이를 막물고 버티며 우~우~장엄하게 운다. 이런 것들이 나무의 언어가 아닐까.
<나무의 언어 나무의 문자> 중에서 -
물론 위 단락 뒤에는 바로 ‘나무에게는 문자도 있는 것 같다.’는 문단이 바로 이어진다. 초목들의 소리 묘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좋은 예다. 시각과 청작을 통한 언어의 형상화는 우회적 수법의 한 방법이다. 좋은 수필가는 반은 시인이고, 반은 소설가여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언어를 감각적으로 활용하는 우회적 표현 능력이야말로 모든 문학가가 먼저 가져야 할 소질이 아닐까. 옥형길은 그런 능력이 충분해 보인다. 단순히 나무가 언어를 구사하고, 나무의 문자도 있을 거라는 상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작가는 ‘내 언젠가는 나무의 언어와 문자를 해독하는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한다. 언어는 결핍의 표현인 것이다. 그는 아마 ‘오늘도 산행길 어느 산자락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엉뚱하게도 나무와의 대화를 꿈꾸고 있을 것’이지만, 그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조철형의 <송설화>는 어머니 기제 날 고향을 가면서, 눈 오는 날 눈을 밟고 하늘로 가신 어머니를 작가가 그리워하는 사모곡이다. 고향 큰 아주머니의 회고를 축으로 해서 '사모의 정'이란 주제를 잘 헹궈내었다. 우리가 수필을 쓸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주제의 통일성인데, 다시 말해 구성의 각도와 초점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인데, 이 작품은 구성의 각도와 초점을 정확히 맞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백적 문학이라는 수필의 성격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어서 수필의 맛을 제대로 준다.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하는 수법도 그렇고, ‘눈’, ‘소나무’, ‘학’ 등의 소재가 전체 주제를 향해 일사 분란하게 응집되고 있는 등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전개능력이 탁월하다고 하겠다. 어머니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회고를 통해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잘 드러나지만, 작가의 우회적 문학원리를 만나 햇살 같이 어머니의 이미지가 밝게 빛난다. 목격자의 증언 형식의 객관화는, 내면심리를 더욱 긴장감있게 추론되고 작품의 진실성 순도를 고양시켰다. 이런 기법은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작품 속에 내재된 미의식과 상상력의 작동은 이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다.
새벽에 또 눈이 내려 솔 눈꽃이 만발이다. 귀가하여 멀리서 바라보니 송학산에 왈츠 복을 입은 무희들이 줄지어 뽐낸다. 학이 날아오면 한바탕 왈츠를 추려는 모습이다. 내년 송지호에 들러 연어를 마련하여 고향집에 오면 ‘송학산의 솔 눈꽃’이 다시 피어 반길 것이니, 덕목을 베푸는 소나무에 감사드린다.
<송설화> 중에서 -
이 수필은 ‘소나무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는 우회성을 통해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눈’ 이미지에서 다시 ‘학’이미지로, 다시 송학산의 ‘솔 눈꽃’으로 어머니를 이미지화하여 독자를 미적 사유 속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어머니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하는 작가는 마지막 문단을 장식하면서 송지호 연어‘를 언급, 수미상관에도 신경을 썼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그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산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귀가하여 멀리서 바라보니 송학산에 왈츠 복을 입은 무희들이 줄지어 뽐낸다. 학이 날아오면 한바탕 왈츠를 추려는 모습이다.‘는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어떤 특별한 정서를 환기하도록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조철형이 그려낸 송학의 이미지는 어머니의 강한 모습과 겹쳐진다. 송학산과 눈 그리고 학이 그리움이란 그림자 형상과 만나 멋진 수필의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최용순의 <어머니의 기도>가 무슨 생태수필과 관련이 있나 하고 제목만 보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어머니가 곧 자연이다’라는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다. 아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제는 ‘나와 내 주변을 위한 진정성 있는 기도의 필요성’이지만, 이 수필의 발단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작가의 고향인 느릅내 나무들에 대한 회억으로 전개되고, 발단부 말미는 ‘애면글면 아들 허기질까 젖무덤을 내어주시던 어머니도 안 계시는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닌 타향인 것을 어쩌랴’는 말로 귀결된다. 따라서 배경이나 공간 제재적 측면에서 산림수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작가는 과거의 회상적 공간에 서 있다. 작가는 어머니가 없는 고향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동네에서 고사를 지내던 때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해내는 데서 이 수필은 절정을 이룬다.
‘나약할 때 자신이 처한 입장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고 ,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결기를 주시옵고, 승리에 오히려 겸손하고 폭풍우 속에서도 살아남게 하시고,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뒤를 돌아보게 하시고, 웃을 줄 알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우는 범도 터득하게 하시고 즐기면서도 요행의 길로 빠져들게 하지 마시고, 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잇는 우리 아니들이 되도록 인도하소서’라고 간구하셨으리라.
<어머니의 기도> 중에서 -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잃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포근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유년기 고향 속에 있는 작가는 어머니의 기도문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억으로 되살려낸 어머니의 기도는 다락방을 비집고 찾아든 햇살처럼 얼마나 거룩하고 멋진가. ‘얼어붙는 칼바람 속에서도 어머니의 애끓는 기도는 이어졌다.’는 대목에서, 이 기도가 얼마나 작가에게 큰 강한 인상을 남겼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어머니의 기도가 작가를 눈물이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던 사실은 긴 시간의 간극 속에서 축척된 깨달음의 결과를 말한다. 이 서술구조의 힘 또한 우회성에서 나온다고 하겠다. 그는 바빠서 남을 위한 기도하기가 어렵다면, 나를 위한 간절한 기도라도 제발 해보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 속에는 바로 어머니의 기도가 녹아 있다.
홍만희의 <한겨울 매화가 피듯, 감나무에서 감 맺듯>은 시조 시향에 참석한 작가가 40여 년 전 아버지가 심은 감나무를 보면서 쓴 수필이다. ‘돌아가셨을 때 많이 울었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그리워도 울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부재와 그 부재에 대한 반응의 반어적 표현은 문학성과 미적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중요한 전개전략이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농장을 유산으로 이어받아 가꾸며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아버지가 그립고 생각나겠는가. 절절한 그리움이 한 편의 수필로 구체화되었는데, 감나무는 아버지의 상징이자 분신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종의 우회적 기법이다. ‘그리움이 아득하고 멀어서 외로움이 되고, 그 상처로 지은 집에 숨어살고 있다는 작가는 아버지의 삶을 감나무로 치환하여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어, 문학적 성취를 획득하고 있다. 삶의 폭과 깊이는 자신이 지닌 사유의 깊이와 폭을 넘을 수 없다. 외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신의 표현인 말을 ‘우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하는 생활이 아니겠는가.
감나무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 더 심오한 철학이 들어 있다. 작고 하찮은 미물이 속하는 감 한 알이 성숙해지는 데도 온갖 시련을 견디는 인고가 따른다. 그 모든 비바람 치는 세월을 품고 견딘 뒤에야 노랗게 둥글어질 수 있다. 제가 선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수행자와 같이 이 시련들을 견디고 열매를 맺는 것이 대견하다. 제 모든 것을 바쳐 열매를 얻는다. 그러니까 감은 시련을 견딘 보람이자 결실이다. 그게 감나무가 따라야 할 단 하나의 소명이자 꿋꿋하게 세워야 할 도덕이다.
<한겨울 매화가 피듯, 감나무에서 감 맺듯> 중에서 -
수필은 정의 문학이다. 문학의 행위는 맺힌 삶을 풀어가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아버지가 심은 감나무를 보면서 감나무를 어떤 책보다 더 심오한 철학이 들어 있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제재를 통해서 주제를 겨냥해야 한다는 본격수필작법을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고인을 생활 속에서 추도하는 것만으로도 이 분의 순수한 삶은 가치가 있다. 이 작품 속에 흐르는 일관된 그림자 심상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상이다. 아버지가 없는 ’외로움의 그림자’를 수필의 주제의식으로 구체화하려 했다면 구도가 밋밋한 수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작가는 이런 한계를 고려하여, 아날로지기법의 우회성을 통해 감나무란 제재를 적절하게 잘 선택해서 문학적 성취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아버지를 상징하고 함축하는 감나무에 이처럼 함축적 의미를 내포시킨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높은 문학적 안목과 구조능력이 만들어내는 힘이라 하겠다.
III. 로그아웃
모든 문학이 다 그러하듯이 수필 또한 우리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수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문학이란 시대와 사회의 구체적인 표출이어야 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인간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에도 있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학은 인생의 표현이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도 작품이 보여주는 내용이 작가의 주관으로 들어온 경험의 여과된 재현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수필가가 다루는 세계는 다양하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을 소재로 하는 수필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이번 작품평에서 다룬 수필들은 ‘인간’과 ‘자연’을 다루고 있다. 인간은 그 자체가 자연의 부분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종합된 하나의 ‘세계’이며 ‘시대’이고 ‘사회사’이자 ‘인간사’이기도 하다.
자기의 사상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수필에도 기교가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의 한 장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설명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되고 표현되어져야 하는 바, 그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기교가 없는 듯하면서도, 실은 없는 듯한 기교가 내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움은 수필의 생명이요, 최대의 강점이기 때문이다. 본론에서 인용한 작품들은 기교가 없는 것 같은 기교가 내재되어 있는 관계로 특별한 맛을 내며 은근한 향방, 즉 꽃다운 향기가 입술 속의 그 언저리에 감도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언어의 변화는 곧 정신의 변화요, 정신의 표현이다. 체험을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우회성’을 살리는 것은 문예미학을 위한 수사적인 전략임을 명심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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