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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님 강단 설교
(01) 즐거운 날
(02) 잘 관리합시다
(03) 합당한 예배
(04) 나의 믿음을 도우소서
(05) 네가 어디 있느냐?
(06)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07)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업
(08) 지극히 높은 이름
(09) 한 나그네의 윤리
(10) 두세 사람이 모인 곳
(11) 치유 받고 시중 든 여인
(12) 깨닭지 못하는 사람
(13) 내가 서야 할 자리
(14) 나를 위한 언약의 말씀
(15) 명예로운 성도
(16) 승리의 비결
(17) 심지가 견고한 사람
(18) 이후에는 알리라
(19) 다니엘의 믿음
(20) 마음의 파숫군
(01)
즐거운 날
사58:13-14
<사 58:13-14>만일 안식일에 네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 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즐거운 날 보다는 불안과 공포와 긴장과 피곤한 날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날 보다는 고통 하는 날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사람들의 심신을 매우 피곤하게 합니다.
죄로 고통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안간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만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므로 우리 영혼이 새힘을 얻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심령에 안식과 평안을 얻으며 위험한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짐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의무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여 그날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창2:1-3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창 2:1-3>“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안식일은 인간에게 복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즐거운 날은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가만히 보면 성도들에게도 즐거운 날이 안식일이 아니라 추석 명절 같이 보입니다. 주일날엔 만사를 제쳐놓고 지키지 못하지만 세상 명절날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지킵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어쨌던 가장 즐거운 날이 바뀌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귀어 간다고하는 것은 인간이 점점 불행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는 증조가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할 것을 늘 힘써야 할것입나다.
성경학자 「버더」는“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한 주간의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전이된 것이 다를 뿐 안식일을 지키는 정신과 똑같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이 주일이 되었을 뿐 그날을 지키는 자세와 정신은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조명하면서 그날의 의미와 그날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안식일은 어떠한 날 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날입니다. 본문13절에 보면 “안식일”이라고 했습니다. 창2:2절 하반 절에 보면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했고 3절 마지막을 보면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13절에 보면 “내 성일”이라고 했고, 또 “여호와의 성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날이 사람의 날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모든 날은 다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낮과 밤 모든 날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도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물도 공기도 시간도, 그리고 우리의 생명...모두다 창조하셨습니다.
가을이 되면 특별히 오곡백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라만상, 오곡백과를 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친구에게 자동차를 빌려주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지기 것처럼 사용하는 것은 좋은데 가지고 올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뭐 그렇다고 해서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쫓아가서 “야! 너 정신이 있냐? 없냐?”라고 야단친다고 해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친구보다 더 하면 더했지 조금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다 우리가 그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므로 생명과 모든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므로 그날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십일조의 원리와도 비슷합니다. 열 가지를 다 주신 하나님이십니다만 주신 것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그러니까 재물은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시간은 칠 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드리므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즐거운 날입니다. 안식일이야말로 정말 기쁘고 즐거운 날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장엄하고 위대한 창조의 역사를 완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안식이란 일한 후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일없이 쉬는 것은 답답하고 한심한 것이요 일을 마치지 못하고 쉬는 것은 걱정이되고 고통이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안식이라고 하는것은 일을 마친자에게 주어지는 만족과 평안의 축복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다한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일없이 복된 안식이없고 안식없시 보람있는 일이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과 안식은 항상 함께 있는 것입니다. 구슬땀을 흘리며 일한 후에 시원한 물을 마시며 잠시 쉴 때 일한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겁니다. 일없이 놀고 있는 자들에게는 안식의 기쁨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쉰다는 것, 혹은 논다는 것과는 의미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화이트 로우(Whitelaw)는 “안식하시니라”는 말씀의 뜻을 “조용히 앉으셨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말입니다.
가령 애써서 집을 설계하고 준비해서 건축을 완성했다고 합시다. 그리고 준공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축하하기 위하여 둘러앉은 식구들과 친지들의 마음은 정말로 기쁘고 즐겁기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에 조금이나마 비유가 될 줄로 압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날 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구속의 대사업을 완성하신 날 입니다. 그날이 바로 주의 날입니다. 주님이 다시 사신 날이요 믿는 우리가 다시 살게 된 날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즐겁고 기쁜 날입니다.
2. 그날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먼저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존귀히 여긴다는 것은 높인다는 뜻이요 그리고 그날을 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한 나라에서도 큰 일을 하고 공일 세운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그 사람의 생일이나 혹은 그 일을 완성한 날을 기념하여 지킵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히 여긴다는 표가 됩니다. 반면에 그날을 소흘이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주일을 존귀히 그리고 거룩하게 지킨다고 하는 것은 곧 그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존중히 여기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날을 거록하게 지키지않는것은 곧 예수님을 무시하는것이 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님을 얼마나 무시하며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부모님의 생일만큼도 여기지 못한때가 얼마나만은지 모릅니다.
친구 만나기 위해서 주일을 범했고, 사업상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주일을 범했고, 누구 결혼식 때문에 주일을 바로 지키지 못한 적이 많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을 친구만도 못하게 여겼고, 사업만도 못하게 여겼고, 결혼만도 못하게 여긴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은 존귀한 분이십니다. 그의 날도 존귀한 날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앞으로 주님께 감사하며 존귀히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성일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의 백성이라면 주의 날을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께 감사하며 존귀히 섬길 수 있을까? 구체적인 방법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사 58:13>에 보면“만일 안식일에 네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습니다.
(1). 네발을 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네 멋대로 걷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발이라고 하는 것은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발을 금한다고 하는 것은 안식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제멋대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죄악과 향락과 태만과 육신의 안일로 치닫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예수님의 발에 우리의 발을 묶고 예수님과 내가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가시는 곳에 내가 가고, 주님 머무시는 곳에 내가 머무는 생활이 곧 네발을 금하는 생활입니다.
안식일에 네발을 금하라고 하는 것은 금족령이 아닙니다. 많이 뛰고 많이 걷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여심히 해야합니다.
(2). 오락을 행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락은 바쁜 시간에도 틈을 이용하여 자기의 취미에 따라 좋아하는 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신적, 육체적 리듬을 조절하여 건강하고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오락은 우리의 생활에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락을 할지라도 아무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 한때에 해야 합니다. 근무시간에 해서도 안되며, 식사하다가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적당 한때에 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일날에 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던지 다 해야 할 때가 있는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유익되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의사보다도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제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안식일에 오락을 구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존중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상시 적당한 때의 오락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만 주일날 오락은 오히려 우리의 심령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점점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재창조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와야 할 사람이, 하나님께 나와야 할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아니하고 다른 곳에 배회한다면 그 심령은 점점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사40:3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여호와를 앙망하고 그를 만날 때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되며 새로운 삶이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3). 혀를 삼가야 합니다.
본문13절에 보면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혀로 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히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 아는 사람과는 더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에도 할말이 있고, 안할 말이 있습니다. 또한 해야 할 때가 있고, 안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때나 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주의 날에는 세상 잡담이나 세상 돌아가는 말을 삼가야 합니다. 사사로운 말 때문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 던지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될 수 있는 한 성경을 이야기하고, 주님을 이야기하고, 선교를 이야기하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일과 선한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하고 형제를 위로하기에 전력하시기 바랍니다.
3. 약속된 복이 있습니다.
14절에 세 가지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1).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기쁜 날보다는 어려운 날이 더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물어 보면 다 비슷합니다.“지금까지 정말로 기쁜 날이 얼마나 있었습니까?”라고 물으면 한참 머뭇거리다가 겨우 대답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쁜 날이 있다 할지라도 그저 잠간입니다. 참 즐거움은 지속될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 즐거움을 여호와 안에서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어디에서든지 영원하고 참된 즐거움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하였습니다. 주안에 거하는 삶, 다시 말해서 주의 날을 올바로 지킬 때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그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지속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기서 높은 곳이라고 하는 것은 내 힘으로 올라갈 수 없는 곳,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어려운 문제 속에 빠져서 혜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너를 들어 높은 곳에 올려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믿습니다까?
주님을 존중히 여겨 그의 말씀을 순종하면 다시말 해서 주의 날을 올바로 지키고 주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들을 높은 곳에 올려 주십니다. 모든 문제를 결국 유익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강남에 있는 어떤 교회에의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 장로님은 현재 어느 회사의 사장입니다. 그는 10년 동안 매 주일 아침6시면 교회에 도착하여 일부 예배를 드리고, 저녁 10시까지 교회에 머물면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자동차 안내를 담당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주차장서 자동차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 약했던 간 기능이 악화되면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치 의사의 권면은 과로를 피하고, 휴식과 안정을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담임 목사에게 사정을 말씀드리고,10년 동안 맡아 온 주차장 정리를 쉬어야겠다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사정이 그렇다면 쉬는 도리밖에 없지 않겠느냐면서, 그러나 주의 일을 쉬면 아주 쉬게 될지 모를 테니 깊이 생각하라는 충고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그는 주일이면 늦으막하게 나가 예배만 드리고 곧 바로 집으로 돌아가 의사의 지시대로 휴식과 안정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채 석달이 되기도 전에 자신이 탈진 상태에 빠져 들어가고,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드릴 기력이 없어져 가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깨닫고 결심했습니다. 집에서 탈진하고 기진맥진하여 죽느니 성전 뜰에서 일하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결단으로 그 다음 주일부터 다시 새벽6시에 나와 전에 하던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힘이 솟아났고 어느 틈엔가 간이 정상화되면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지금 평일에도 교회 일이라면 모든 것을 뒤로 제쳐놓고 적극적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건강의 높은 곳에 올려 주신 것입니다.
주의 날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주의 일을 과소평가 하지 맙시다. 그날을 존중히 여겨 높은 곳에 세움 받기를 축원합니다.
(3).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모든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가나안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주의 날을 즐거워하는 자 에게 천국의 기업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즐거워하며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을 지키시던 것처럼 이 땅에서도 늘 켜 주시고 항상 함께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날을 부담스럽고 괴로운 날이라 하지 맙시다.
이날은 주의 날,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구원받고 승리하게 하신 날, 영원한 천국의 약속을 받은 날, 고맙고 즐거운 날로 성수 주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2)
잘 관리합시다
창1:26-31
우주 만물을 가장 아름답고 질서 있게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땅에 있는 모든 것과 생물들을 다스리고 관리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정말 복 있는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평안과 부요와 모든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평안 대신에 불안과 공포가 왔고 부요 대신에 빈곤과 궁핍이 왔으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오히려 저주처럼 인구 폭발의 문젯거리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유익을 주던 자연은 점점 파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복이 화로 바뀌어 젔는가? 그것은 창세기 3장의 나타난 봐 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초래된 것입니다. 창3:17 하반 절에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고 했고 18절에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관리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자기 중심의 삶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란 인간 타락의 결과 중 하나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아름다웠던 인간의 성품이 파괴되었고 이로 인한 관리 부주의로 자연 환경은 점점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에게 아무리 좋은 땅을 준다 할지라도 관리를 잘못하면 쓸모 없는 땅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늘 술이나 취해 있고 늘 화투 놀이나 하고 있다면 그것이 땅이던 집이던 다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땅이던 집이던 관리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인간은 한 마디로 말해서 좋은 관리자가 아니라 바로 파괴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형상을 파괴했습니다. 양심을 파괴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에덴 동산을 파괴했고 환경마저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등지고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인간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탄은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의 화목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심지어는 천국까지 파괴하려고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1972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크홀름에서 국제연합 인간 환경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 환경 선언문을 선포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후인 1992년 6월에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유엔 환경 개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계속 지구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여전히 지구를 파괴해 왔습니다.
지구 환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일 인류가 10년내에 지구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지구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 도처에서는 매 일분마다 6개의 축구장 크기 만한 열대림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30년 안에 지구상에 있는 열대림의 3분의 2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렇게 될 경우에는 지구에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이 올 것입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우리가 지구를 실려 내는데 주어진 시간은 10년 정도 일뿐이며 이것은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오존층의 파괴로 이상 기온 현상이 일어나서 지구는 사막화되어 가고 있는가 하면 빙하가 녹아 내려 바다 수면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땅 넓이는 점점 좁아 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오존층의 파괴로 살인 광선을 막아 주지 못하므로 결국 인간은 무서운 질병으로 죽어 가게 될 것입니다.
열대림의 소실로 1년에 5만종, 하루에 140여종의 무척추 동물들이 멸종해 가고 있으며 결국 다른 생물이 그런 식으로 죽는다면 그 다음은 인간의 차례가 되는 것입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잦은 한발과 홍수의 교차 현상을 일으키고 태풍까지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 요번에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으로 인해서 한 도시가 쑥밭이 될 만큼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23일, 그러니까 지난주 금요일입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중국등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 이변으로 인한 재해가 발생하여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건물과 고속도로와 철도 등이 파괴되었다는 신문 보도를 보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지구가 자꾸 죽어 갑니까?
마구 버린 공장 폐수의 중금속,쓰레기,프레온깨스,자동차매연,합성세제,그리고 막 뿌려 대는 농약과 살충제...등 결국 우리가 버리는 것들 때문에 지구가 병들고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20:19절을 보면 “너희가 어느 성읍을 오래 동안 에워싸고 쳐서 취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작별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수목이 인간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왜 인간들이 지구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타락하고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를 보면 그 당시 애굽은 중동 지역의 곡창 지대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마다 그 민족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살았던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이렇게 애굽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에집트는 한발과 흉년이 반복되는 사막입니다. 그래서 모든 필수품들을 거의 다 외국에서 수입해 다가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불모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백향목으로 울창했던 레바논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풀 한 포기도, 나무 한 그루도 물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서 자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되면 자연도 바로 되고 인간이 썩으면 자연도 썩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관리를 인간에게 맡겨 주셨기 대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운전사 잘못 만나면 얼마 가지 못해서 고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좋은 운전사 만나면 새 차처럼 든든하게 오래 사용할 수 있은 것입니다. 자동차도 사람 잘 만나야지 사람 잘못만 나면 망치고 맙니다.
환경 학자들은 「환경 난민」이라는 새로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그곳에 살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인간이 썩으면 자연도 썩고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그곳에 발붙이고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에덴에 발붙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인류역사 최초의 환경 난민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범죄하면 썩게 되고 썩게 되면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마5:5절에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되고 복 있는 자가 될 때 땅도 복을 받고 또한 사람을 용납할 땅도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그가 쓴 「지구를 구하자」라는 책속에서 우리는 지구를 단기간 빌려쓰는데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개인의 책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 지구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만들지 않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만드신 후 거기에 살면서 지구를 잘 관리하라고 잠깐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지구를 잘 관리해야 할 청지기들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교회의 선한 청지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땅을 잠깐 빌려쓰는 인간으로써 지구의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1. 새사람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연과 땅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그대로 두고 제아무리 땅과 자연을 고치려 해도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가없을 것입니다. 잠깐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위궤양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빨간 약을 배에 발라 주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또 좀 나은 방법이겠지만 좋은 소화제를 먹는다 할 찌라도 그것은 그때 뿐일 것입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가없을 것입니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사람을 고쳐야 합니다. 그것은 교육만으로도 안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교육 방법과 교육열은 전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점점 악하여지고 썩어져 가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치닫는 인류의 발걸음을 그 어떤 사람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슥4:6절에 보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써는 거의가 다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러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도움을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이럴 때 새 사람이 됩니다.
시104:30절에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 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되면 땅도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후5:7절에 보면“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될 때에 자연도 땅도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구 회의 또는 환경 회의 구호나 표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변해야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양심이 되살아나고, 가치관이 되살아나면 더불어 환경도 땅도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공장 폐수를 강으로 내보낼 수 있으며 못 쓸 쓰레기를 몰래 버릴 수 가 있으며 공해 물질을 마구 버릴 수 가 있겠습니까?
양심이 되살고, 윤리가 되살고, 도덕성이 되살려면 성령님의 능력이 역사 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자신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에 인도해 내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먼저 예수를 믿되 올바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심령이 변화됩니다. 한 가정이 변화됩니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는데 이것은 히11:12절을 보면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자녀,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자녀를 만이 주실 것을 말합니다.
그저 숫자적으로만 많이 낳는 것이 복이라면 사람이 아니라 “나방이”일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공해와 기근 문제가 더욱 더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인구 증가도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숫자적인 생육과 번성도 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땅도 자연도 파괴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한 범위 안에서 얼마든지 창대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 보호의 첩경은 바로 인간 회복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될때에 자연환경도 점점 회복될것입니다. 그러나 하나 명심해야할것은 사회복음주의자들과 같이 이런식으로 지상낙원이 이루어 진다고 하는것은 비성경적이요 또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날 까지는 완전 회복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옳바로 믿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사회도,환경도 좀 나아질것입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중요한 사명은 바로 전도입니다. 많이 전도하여 믿음의 자녀를 많이 얻는 자가 복 있는 자요 또한 자연 환경 회복에 큰 몫을 감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 모두가 관리자의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와 모든 자연계를 잘 사용하고 다스리라고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맡은 자요 관리자요 청지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잘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관리하지 못하면 사용권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었어도 우리 믿는 성도들은 환경 보전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찬송 소리만 크고 기도 소리만 크다고 훌륭한 믿음은 아닙니다. 훌륭한 믿음은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철야 기도 다녀와서 남몰래 연탄재나 오물을 아무데나 버린다면 그건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령 받고 은혜 받았다면서 산업 폐수를 강으로 흘러 보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귀찮더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따르고 실천해야 합니다.
관리인은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다음은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자신을 위한 일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을 위해서 살려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요 이웃을 죽이며 결국 자기를 죽이는 살인과 자살 행위입니다.
출애굽기 15:23절 이하를 보면 쓴 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모세가 순종하였을 때에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먹을 수 없게 된 물이지만 모세가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에 목말라 죽어가든 이스라엘 백성이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마음껏 마시므로활기를 되찾게 된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맡음으로 순종할 때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 같이,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된 것처럼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때에 역사도,자연도,인간도 단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환경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19절 이하를 보면 여리고 지방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씨를 부리지만 토질이 나빠서 곡식이 자라지 못하고 결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물 근원에 뿌렸습니다. 그럴 때에 물이 치료되었고 그후로 농사가 잘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소금을 뿌렸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마5:13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곧 소금입니다.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지나가는 사람에게 짓밟힐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소금입니까? 맛 잃은 소금입니까? 맛있는 소금입니까?
우리는 쓴 물을 단물로, 죽어 가는 땅을 생명이 기식하는 땅으로 만들 소금의 사명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여 내 자신이 복을 받고 이웃이 복을 받고 이 땅이 복을 받아 땅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3)
합당한 예배
마5:21-26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 생활입니다.
예배 생활이 충실치 못하면 성도의 신앙이 병들었기 때문이요, 예배 생활이 충실하면 그의 신앙이 건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줄로 압니다.
‘예배’란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모든 행위와 정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영적인 만남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가장 큰복이요, 귀중한 시간입니다.
예배 중에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성도들이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격과 기쁨을 더하게 합니다. 천국의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특히 예배 중에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심령을 강건하고 윤택케 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고통하며 근심하는 자에게 평안을, 실망하고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매우 적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은 너무도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갈한 심령에 생수와 같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내려 주시는 만나와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된 은혜를 어떤 사람이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그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열망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식욕이 없을지라도 음식은 때에 맞춰 먹어야 합니다. 건강 비결 제1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때를 건너지 말아야 합니다. 제때에 먹는 식사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항상 입맛이 좋겠습니까? 또 음식을 만들 때에도 어떻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입맛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이 이미 절반은 병들었다는 것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무 때에든지,어떤 음식이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탈나서 입맛이 떨어진 줄은 알지 못하고, 차려 놓은 음식만 타박하는 사람은 참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입맛이 없다고 음식을 거르면 그는 정말로 중병에 걸립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명곡을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의 국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국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지라도, 자꾸 듣다 보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이라도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먹으면 입맛이 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더욱 열심히 만나십시오. 자꾸 만나다 보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철천지원수라도 한 감방 안에서 사흘만 같이 지내면 친구가 된답니다. 그런데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멀리한다면 자꾸 자꾸 멀어지는 것입니다. 영영 못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다면 그것은 무언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딘가 병이 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고, 주저하게 된다면 정말로 깊이 병들고 맙니다.
여러분! 자녀가 부모를 대하는 것이 기분에 관한 겁니까? 사람은 기분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자기 기분과 감성을 억제하는 것이 위선인 것처럼 생각하고, 기분대로 사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분대로 사는 것은 짐승에 불과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고 예배에 열심히 나오고, 기분 나쁜 일이 생겼다고 예배를 등한히 하는 병폐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배는 언제나 꾸준해야 합니다. 감정을 초월해야 합니다.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야말로 건강한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 자의 마음에 감격이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를 빠지게 되면, 그 심령은 점점 병약해지고, 결국은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날 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인간의 진실한 응답이 바로 예배이다.’그렇습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응답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을 알게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의 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2: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배 자의 절대적 조건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화평’을 소유해야 합니다. 서로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과 행위에 화평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마5:9절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예배 자의 도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의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을 들을 만한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일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동생으로 태어난 것이 불평이요 불만이었습니다. 마침내 간사하게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서를 속이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 드립니다.
이 사실은 알게 된 에서는 야곱을 죽일 결심을 합니다. 결국 야곱은 고향에서 쫓겨나고, 형과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그렇게 20년이 흐른 후에 야곱은 다시 얍복 강을 건너와서 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형과 동생이 목을 안고 서로 입을 맞춥니다. 그때 야곱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창33:10절에 보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형과 만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은 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남을 원망해서도 안되며, 또한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어서도 않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원망 죄’입니다.
환경이나, 이유가 어쨌던 간에 원망은 바로 불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원망이란 자기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고, 내가 실패한 것은 환경 때문이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다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 때문에 신세 망쳤다는 사람, 아내 때문에 출세하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 보면 원망은 절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에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책임을 나 자신이 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말했던지 간에, 부부 싸움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했던지 간에, 적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잘못의 책임은 다 내게 있습니다’라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한 예배 자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내가 불행한 것도 내 책임이요,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도 바로 내 책임이요, 세상이 잘못되는 것도 내 책임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마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23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합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남들에게 원망을 듣게 됩니까? 누군가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면,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예배드린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거지 한 사람이 어떤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아무리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구걸하러 온 거지 인줄 미리 알고 안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 할 수 없이 돌아서면서 있는 대로 욕을 합니다. ‘분명히 아까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내다보지도 않다니, 그럴 수가 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다가 설상가상으로 우연히 대문에 붙어 있는 교회 팻말을 보았습니다. ‘흥 그 꼴에 교회에도 나가시는가 보구먼....그래서 천당에 갈 수 있나...어디 두고 보자’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나갑니다.
이게 또 웬 망신입니까? 그 교회 목사님이 심방 오시다가 이 꼴을 다 보고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곧바로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밖에서 한참 기다렸다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문울 얼어 주었습니다. 어쨌던 그 목사님은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원망을 듣게 되면 기도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원망하지 말 뿐더러 내가 원망을 들어서도 안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원망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네 아버지나 나나 가난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하고 해서, 이 만큼 성공하지 않았느냐....그런데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 하는 것이냐’고 한참 늘어놓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저를 나아 달라고 했어요? 왜 나아서 이 고생을 시킵니까? 그리고 제 자식 자기가 키우면서 무어가 그렇게 말이 많아요?’하며 도리어 대듭니다. 이것이 또 문제입니다.
또 남편을 원망해 보십시오. 남편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습니다. 아내를 원망해 보십시오. 아내도 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원망은 언제나 원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굳이 아이들에게 말하려거든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저 너희에게 미안하구나. 내가 돈을 못 벌어서 용돈도 제대로 못 주고 하니 말이다. 또 내가 이 모양으로 못생겼으니 부모 닮은 너희도 잘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미남 미녀로 만들어 주지 못하니 미안하다.’ 그렇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저쪽에서도 ‘죄송합니다.’하고 나올 것입니다.
이 쪽에서 고맙다고 말하면 저쪽에서도 고맙다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나는 남을 원망하면서 정작 남보고 나에게는 감사하라고 합니다. 앞뒤가 통 맞지를 않습니다. 보세요! 원망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내가 저들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 앞에 감사하고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도 내게 고마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원망을 해서도 안되고, 또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을 해서도 안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가 합당한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귀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3-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해결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할 때이면, 원망들을 만한 일은 언제나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내 잘못이오, 내가 잘못했소’라고 먼저 사과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합당한 예배의 도리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대개는 진실해 집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놓고 말씀하시기를 ‘얘야!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느냐, 참으로 미안하구나’라고 하면 눈물이 글썽 글썽하여 조용히 듣고 있는 며느리가 ‘아니오, 나 때문에 어머님께서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르실 거예요’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 ‘너 때문에 나만 고생했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마지막 순간이지만 미안하다는 이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하고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그때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자의 마음은 항상 예배드릴 때마다 늘 그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즉시 가서 내가 잘못했노라고 사과하고, 화해하고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가 예배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오로지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예배 자는 용서와 화해와 사랑, 그리고 거리낌이 없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참으로 깨끗하게 비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예배가 은혜가 없고, 왜 예배가 힘이 들고, 왜 예배가 무기력해졌습니까? 바른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점점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 자 된 바른 자세를 찾으십시오. 바른 예배가 이루어질 때에 내 영혼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도 강건해지고, 육신도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합당한 예배를 통해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며, 사회생활을 복되게 하는 성도의 삶에, 새로운 활력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4)
나의 믿음을 도우소서
막9:14-29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실 믿음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하루에 8시간씩 열심히 일한다고 합시다. 지금 아무 소득이 없어도 꾸준히 일을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업주와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업주와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아무도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업주를 믿기 때문에 약속대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차나 버스를 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가는 표를 사서 부산이라고 쓰여진 버스를 타면 정한 시간에 틀림없이 부산에 도착한다는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기 때문에 누구든지 버스나 기차를 안심하고 타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믿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버스라도 타지 않을 것입니다.
교통신호도 그렇고, 나라의 모든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은 모두가 약속과 믿음의 관계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관계가 파괴된다면 이 사회는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도 공존 공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발소에도 마음놓고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따 죽이고 내 귀중품 다 빼앗아 가면 어떡하나’ 음식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약이든 음식이 아닌가, 나를 독살하고 내 금반지, 금시계 털어 가면 어떡하나’ 이렇게 이발사나, 음식점 주인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이발소도 갈 수 없고, 음식도 사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사업주나, 이발소 주인만큼도 못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은 믿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약속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사람은 믿으면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은 믿고, 꼭 믿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어지럽고, 험하고, 불행한 것은 바로 믿음과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불신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상실할 때 사랑은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떠난 곳에는 미음과 시기와 싸움과 다툼과 모든 악함과 불행이 찾아 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고,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며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고, 남편이 아내를 서로 서로 믿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이미 파괴된 가정이요 불행한 가정입니다. 행복한 가정이야말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바로 행복한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많이 있지만 가운데 가장 귀한 약속이 무엇입니까?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요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약속입니다.
그 뿐입니까? 요일1: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도 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나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죄 씻음을 받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셔서 기도하시던 중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거기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기쁨으로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때 산아래 있던 다른 제자들은 큰 무리가 모여 있는 가운데서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무리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변론을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였습니다.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이 아이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새파랗게 죽어 갑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쫓아 달라고 하였으나 쫓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데려 오라’
그래서 그가 아이를 데려 왔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보자 그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니이다. 귀신이 이 아이를 여러 번 불 속에 던지고 물 속에 던져 죽이려 했나이다. 하실 수만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주소서’그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그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 높여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1. 아버지의 믿음을 통하여 자녀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부모의 믿음 때문에 이렇게 자녀들까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보아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의 장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줄로 압니다.
시37:25절에 보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부모의 기도가 있는 자손은 망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기도대로 자손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막2:5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중풍병으로 꼼짝하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을 그의 친구들이 그를 들것에 메어 가지고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중풍병 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정에 믿지 않는 남편과 부모님이나 자녀들 가운데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는 없습니까? 어떤 사업으로 인하여 절망 속에 빠진 자는 없습니까? 또한 어떤 말할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니 낙심하지 맙시다. 절망하지 말고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지금도 살아 계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응답해 주실 줄 확신합니다.
2. 믿음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믿음은 모든 축복의 첫 단계입니다. 기도 응답의 열쇠가 됩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한 사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이요,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물질이나 건강이나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이차적인 것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셔서 이차적인 것들은 필요 적절하게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보다는 먼저 물질이나, 건강이 있어야 되는 줄로 압니다.
물론 물질이나 건강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우선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주시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지 큰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의 귀중성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실 때에 그는 무어라고 말하였습니까? ‘내 아들 고쳐 주시면 믿겠습니다’그랬습니까? 아니면 ‘주님! 돈 많이 주시면 이 병을 고치게 될 줄로 압니다’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믿음만 있으면 다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건강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치료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될 줄로 알았습니다.
‘나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불쌍히 여기사 나에게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이렇게 그는 예수님께 먼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시고 믿음도 주시고 병도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신앙생활도 올바로 할 수도 없고, 주의 일도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도 없고,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예비해 놓으신 만가지 은혜와 복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의 믿음에 관해서 나옵니다.
한번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쾌히 허락하였습니다. 그때 백부장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님께서 저의 초라한 집에 들으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나의 하인이 나을 줄로 믿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기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셨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집에 가 보았더니 그의 하인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백부장의 믿음대로 그 하인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3. 사는 길이 바로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 바로 예수를 믿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길은 오직 믿음의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경찰서 열개 짓는 보다는 교회를 하나 짓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범죄가 없고, 살기 좋은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를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질 때에 가정도 새로워지고, 이 나라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는 우리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전도하는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천하 보다 귀하고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나의 구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믿나이다’이렇게 확실한 믿음의 사람은 어려울 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와 모든 것을 마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복된 성도의 모습니다.
(예).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떤 교인 한 사람이 새 예루살렘 성에 가 보게 되었습니다. 황금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민 영광이 가득한 성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말로만 듣던 천국에 가까이 왔구나’ 생각하면서 한 거름, 한 거름 점점 올라가 보았더니 큰문이 있는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대로 진주로 된 문이 있었습니다.
‘야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에 왔구나’생각하면서 진주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이 척 얼리더니 베드로가 내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인은 너무 반가워서 베드로에게 ‘저는 아무개 교회에서 온 아무개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다시 묻습니다. 여기 새 예루살렘에 들어오려면 믿음의 표가 있어야 하는데 가지고 왔습니까?
그때 그는 ‘예 가지고 왔습니다’하면서 속주머니를 뒤져보았더니 믿음의 표가 없어졌습니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다 찾아보았습니다. 분명히 있는 줄로 알았는데 이거 웬 일입니까?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에게 그 사정을 하나 하나 말했습니다. ‘나에게 지금 믿음의 표가 없지만 나는 30년간 교회에서 헌신 봉사했습니다. 그러니 좀 들어 갈 수 없습니까?’
그런 것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30년 아니라 50년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큰 일 났습니다. 그래서 사정합니다. ‘베드로 사도여! 제가 그래도 10년간은 집사로 교회에 충성하였고,20년은 장로로 헌신하였는데 그래도 들어 갈 수 없습니까?’
바로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아니 장로로 20년씩이나 믿음이 없이 했으면 말썽꾸러기 였겠구먼’하고는 문을 탁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베드로는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문을 쾅하고 닫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더랍니다. 그것이 꿈이었기에 다행이지, 만약 꿈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옥행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자신의 신앙을 한번쯤 점검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고, 내 멋대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직도 세상 근심 걱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래서 주일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고 또 그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점쟁이나 어떤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리고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 저리 방황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 점검하고, 믿음의 표를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세상을 의지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처럼 우리 앞에 당면한 모든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신 주님께 나와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간구하는 여러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 갈 수 있는 믿음의 증표를 다 소유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당면한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5)
네가 어디 있느냐?
창3:7-13
오늘 봉독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 물으신 말씀이요 그리고 그 다음은 그 질문에 대한 아담의 대답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몸은 흙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흙이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복합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지혜와 능력과 권세가 있었습니다.
아담은 우리 인간의 대표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의 내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함께 하실 때에 비로소 참된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삶의 형상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고,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요, 그리고 복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탄의 유혹을 받고 그만 범죄의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흙에서 낳으니 흙에서 난 것을 먹고, 흙 위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남자는 땀흘리며 일하여 먹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와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와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범죄한 아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은 두려움에 쌓여 동산 안에 있는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범죄했으니 죽으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은총적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대해 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지금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르셔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네 영혼이, 네 인생이 어떤 형편에 있느냐?’하는 것을 물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스스로 자기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대단히 깊은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는 줄을 네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으면 하나님이 찾으실 때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숨바꼭질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숨바꼭질 할 때 ‘어디 있니?’하면 ‘나 여기 있다’하고 대답하는 것 보셨습니까? 숨어 있으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니, 아담이 ‘내가 여기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아담의 대답이 너무 복잡합니다. 원래 진실이 담긴 말은 단순한 법입니다. 설명이 길고 복잡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무언가 잘 못되어 있기 때문에 변명이 많고 말이 복잡한 것입니다. 사실을 말할 때에는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결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분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사무엘에 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삼상3: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입니까?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있사오니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고 순종하겠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이 없습니다.
진실하게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실 때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옵소서’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아담도 하와도 ‘내가 먹었나이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아담이 이렇게 비굴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까?
그 중요한 원인은 바로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을 가장 처참하게 만듭니다.
첫째로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하게 됩니다.
잠5:7-9절에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말하고 말 못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오,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다른 점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짐승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짐승보다 더 추악한 동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렘17: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존귀와 영광과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센 사자나 짐승들도 아담과 하와를 두려워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영광과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짐승들까지도 사람을 무시하고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짐승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담은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그 원인을 모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을 이미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결과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조건 원인을 부인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한 인간의 가련한 모습니다.
(예).영국에 와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옷가게에 들어가서 주인 부부를 살해하고 많은 돈을 빼앗아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도 낳고 돈도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는 고향 생각이 간절해져서, 꿈에도 그리던 런던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런던의 이곳 저곳을 돌라 다니면서 실컷 구경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백화점 안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소매치기가 진열대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곧바로 순경이 뒤쫓아가면서 ‘저놈 잡아라!’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들 어떻게 되나 하고 그 쪽을 바라보는데, 유독 와인 혼자만이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합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순경이 그를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문책한 결과 20년전에 지은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범죄하면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는 언제나 소리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에도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잠을 갈찌라고 발을 쭉 뻗고 편안하게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존 엘 비커스토크는 훌륭한 학자요 뛰어 난 정치가입니다. 비커스토크는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책상을 살펴보았습니다. 책상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고, 다만 책상 위에 커다란 글씨로 쓰여 있는 기도문만이 있었습니다. ‘오! 주님! 오직 주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를 내게 주시옵소서’ 그것은 그가 평생 외던 기도문인 동시에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 할 줄 모르기에 쓸데없는 일, 시시한 일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은 짐승보다 추악해지며,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공포로 떨고 사는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질구질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가장 구질구질한 인생은 변명하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돌리는 자 입니다. 정말 멋있는 사람은 책임을 질줄 압니다.
아담은 덮어놓고 변명하려고 듭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이 모습니다.
잘못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선악과를 왜 먹었느냐고 하나님께서 물어 보실 때에 제 아내가 주어서 먹었노라고 대답합니다. 여자에게로 책임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무로 내가 먹었나이다’-----하나님께서 주신 여자라고 감히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와 때문이라는 말은 또 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와의 아름다움과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 여자가 못생겼다든지 막돼먹은 행동을 한다든지 하면, 아무리 선악과를 먹으라고 해도 ‘너나 먹고 죽으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하와를 주셔서 그 호의를 뿌리치지 못했다는 식입니다. 사실 아담은 하와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담은 하와를 사랑하였습니다.
이제는 사랑이 원망스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책임을 전가하며, 변명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할 때에는 모든 것이 좋다고 하고, 자기가 불리할 때에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담은 나 아닌 다른데도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내때문이요,가정때문이요,행복때문이요,그리고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도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의 근성입니다. 노예성을 말하는 것이요, 종속적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변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영원히 자유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보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때문이요,정치때문이요,환경때문이요,부모때문이요,.....그저 책임을 미룹니다. 자기만이 피해자라고 합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가해자라’고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삶이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부 사이에도 마주 앉아서 이야기 할 때에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는 소리는 아예 해서는 안됩니다.
‘미안하오, 나 때문에 모두에게 불행을 주었소 참으로 미안한 마음뿐이오’라고 할 때에 그 순간 마음속에 엄청난 자유와 평안히 깃들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에’라고 변명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둠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 왕이 하나님의 큰사랑과 복을 받게 된 것은 그는 언제든지 변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회개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 은혜 없고, 회개 없이 축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생 동안 라헬 때문이라고 변명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넷째로 숨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동산 숲 속에 숨었습니다. 숨었다고 숨겨지는 것입니까? 영적으로나 육신 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숨겨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양심을 속일 수 없고,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벗은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마는,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살펴보십니다. 그 앞에 드러나지 없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의 잘못을 숨기려 하는 위선과 거짓은 오히려 인간을 어리석게 하며,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모습 이대로’ 솔직하게, 진실하게 주님 앞에 엎드릴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오히려 사랑과 긍휼로 감싸주시는 것입니다.
(예).어떤 젊은 의사가 갑자기 체중이 줄면서 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동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 결과는 위암이었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1개월 정도밖에는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는 위암을 전공한 의사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지난 10년 동안에 단 한번도 암에 대한 진찰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암에 걸린지 벌써 3년이나 되어 이제는 손 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6개월 전에만 알았더라도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진단에 모두들 안타까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항상 자기는 예외 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환자를 보면서 나도 환자요,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나도 죽을 것이요, 다른 사람이 죄지은 것을 보면서 나도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자신을 본다고 진정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종일 내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하더라도 나를 알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 속에 자신을 투시시켜 보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 나타난 아담을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나를 알고, 역사를 보고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보고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을 보고 우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변명도 소용없습니다. 다 헛된 일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저 사람의 죄도 내 책임입니다’라고 말했더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그랬더라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도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모두가 내 책임입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 때문에 모두가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인하는 순간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불안이 살집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평안히 그 마음속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 묻고 계십니다.
위선과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고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바로 응답할 때, 하나님의 더욱 부드럽고 더욱 은혜롭고, 인자하신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06)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 14:6-12
겁이 없다는 것과 용기가 많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겁이 없는 사람을 봅니다. 대체로 겁이 없는 사람은 무식한데다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집은 절대 용기가 아닙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이유로 텃없이 만용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용기가 있다는 것은 참된 지식과 충분한 이해에서 비릇됩니다. 이래에 될 일까지를 알고 용기를 낼 때 참 용기가 됩니다. 참 용기란 확실한 믿음을 가진 적극적인 의지가 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인 것을 모르게 때문에 생기는 착각입니다.
누구든지 충분히 행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힘있게 뛰는 것만 봐도 행복합니다. 그리고 나도 옛 날에는 저렇게 힘이 있었는데--- 그 때는 참 좋았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나이에는 그 좋았던 때를 잊고 사는 일이 많습니다. 그 좋은 젊은 시절에 필요 없는 고민을 많이 하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용기가 아닌 만용을 부리면서 허튼 객기에 사로잡혀 그 좋은 때를 허송 세월 합니다. 늙어 후회하는 사람도 그런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건강한 사람은 그 건강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모두 충분히 행복할 이유와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보다 불행을 더 가까이 느끼고 삽니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자기에게 충분하다는 것을 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개탄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지혜의 기치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등에 엎은 아이 3년을 찾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가 못한다고 해서 자기를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해서도 안됩니다. 가령 음악을 못하는 사람이 무능한 사람이냐 하면 절대 그렇소 없는 것입니다. 음악을 잘 못해도 다른 것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주셨고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시시하다고 안하든지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하려 듭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힘이 비록 미치지 못해도 자기의 최선을 다 합니다.
절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의 모든 능력을 다 했다고 자만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들 자신의 능력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본디 사람은 내 능력, 자기 힘으로 살게 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무엇 하나가 내 마음대로 잘 안된다고 절망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던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방자한 사고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에 대한 교만이 사람을 실망시키고 절망시킵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므로 옛 날에도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실한 믿음으로 가진다면 절망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을 가만히 보면 거의가 자기 능력을 오판하거나 자기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힐튼 호텔'이 있습니다만 호텔 왕 콘드라 힐튼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5달러 짜리 평범한 쇠막대를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그냥 두면 아무 쓸모 없는 5달러 짜리 쇠막대입니다. 그러나 이 막대로 막 발굽을 만들면 10달러 5센트를 벌 수 있고 바늘을 만들면 3,250달러를 벌 수 있으며 용수철을 만들면 250만 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우리들에게 원 자제가 부족한 것입니까? 아직도 가능성이 없습니까?“
우리는 나라고 하는 원자재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으로 충분합니다.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고 하는 원자재를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갈렙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뛰어 나지 않은 사람이 여서 사람들에게 많이 말해 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사실 뛰어 난 사람입니다. 그의 나이는 85세입니다. 그럼에도 가나안을 점령하는 정복 성업을 종료하는 마지막 마당에서 헤브론 산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혜브론은 산악이 험한 지역으로 옛 날 아브라함이 살던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넓은 땅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세겜 왕에게 무덤 쓸 동산 하나를 돈을 주고 샀습니다. 이것을 막벨라 굴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 일족의 선산이 되였습니다. 이 막벨라 굴에는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리브가, 레아가 묻혀 있습니다. 또한 다윗이 헤브론을 도읍으로 삼아 7년을 왕으로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헤브론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도라 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산지입니다. 전쟁하기에는 아주 분리하고 적들의 요세가 많은 곳입니다. 그곳에는 체구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큰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고 여리고에 들어갔다가 온 정탐꾼들은 이 아낙 자손들을 보고 "우리들이 그들과 비교해 보니 우리들은 메뚜기 같았다" 했습니다. 이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헤브론은 아낙 자손들의 본거지인데 그들은 체격이 큰 장사들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그들이 살고 있는 그 헤브론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는 이제 85세가 되였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은퇴를 할 나이입니다. 쉬고 싶을 나이입니다. 사람들에게 힘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갈렙은 편히 쉬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절대적인 공을 끼친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가나안을 점령할 때 그의 서열이 두 번째입니다. 그가 그렇게 노력을 하고 애를 쓰지 않아도 여호수아 다음으로 가나안의 가장 좋은 땅을 분배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쉬운 일을 택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시키고 자기는 그 사람의 수고의 열매를 따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일을 쉽게 하려는 것입니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에 불만이 많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적당하게 살아도 많은 것을 얻는 그런 사람이 영리한 사람처럼 되여 버렸습니다. 돈은 그렇게 쉽게 벌 수 있을지 모르나
인생의 행복을 얻는 길에는 그런 지름 길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 행복을 얻기 위한 정당한 투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행복은 허울 좋은 개살구 행복입니다.
생활이 점점 편이해 지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 누르는 것도 귀찮아져서 인지 기침을 하면 기계가 작동을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편하다 보니까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운동량이 적어져서 자꾸 살이 찌고 병이 생깁니다. 아이들도 성인병이 많습니다. 아이들조차도 기본적인 운동량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가급적 자식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합니다. 군대도 안 보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군대를 가는 아이들의 부모는 꼼짝없이 무능한 부모가 되여 버립니다. 일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삼수를 하고 대학을 들어가 졸업을 한 학생이 미국 유학을 갔는데 공부를 너무 잘했습니다. 교수가 공부 잘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한국에서 삼수를 할 때 워낙 기초를 잘 닦아 놓아서 이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공부하는데 너무 참견을 맙시다. 삼수한 사람이 세상에서는 일 수 할 수 있고 한번에 들어 간 사람이 세상에서는 살수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쓴 고난 때문에 흘린 눈물은 공짜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되 모두 그 사람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미국 링컨 기념관 앞에는 링컨의 전신상이 조각이 되여 있는 데 그의 눈은 미국 국회 의사당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눈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링컨에게 당신이 이렇게 존경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제가 다른 사람에 비하면 더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영광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산지를 내게 주시옵소서" 내가 가서 그들을 쫓아 내리 이다" 85세의 갈렙은 이렇게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노인이지만 전쟁이나 출입하는 일에 조금도 지장이 없이 건강하다고 말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모두 건강합니다. 그의 이 건강은 그가 자신을 하나님에게 바침으로 된 건강입니다. 그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평생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산 결과입니다. 그의 헌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적극적인 헌신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헌신입니다. 그는 가나안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우리들의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반대하는데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둘째, 희생적인 헌신입니다. 이 희생적인 헌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헌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린 헌신으로 살거나 죽거나를 가리지 않는 헌신입니다. 셋째, 신앙적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네발로 밟는 땅을 다 네게 주리라"라는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땅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넷째, 순전한 헌신입니다. 자기 것을 챙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읍을 찾이 하였는데 다른 지파에게 많은 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자기 것을 챙긴다고 해서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다 놔두고 가는 것입니다.
필아델피아 대학에 있었던 일입니다. 방학을 마치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 와
모두 좋은 기숙사 방을 얻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 학생은 일찍 왔음에도 그렇게 노력을 안했습니다. 총무 처장이 그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좋은 방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안하나" " 그 학생은 말하기를 "다른 학생이 다 들어가고 남은 방을 주십시오. 어떤 방이던 상관 안하겠습니다." 처장은 그 학생이 돋보여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나중에 그 학생은 그 대학의 총장이 되였습니다.
다섯째, 계속적인 헌신입니다. 지속적으로 헌신합니다. 이 또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한 두번하고 다른 소리하는 사람과는 근본적인 자세와 태도가 다른 사람입니다. 일이 다 이룰 때까지 헌신하는 사라입니다. 그 지경을 다 점령하고 그것을 다른 지파에게 나누어 줄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사람입니다. 여섯째, 온전한 헌신이 있습니다. 본문 8절, 9절, 14절에는 "온전히 쫓았음으로" "온전히 쫓았으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입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하는 헌신이 아닙니다. 관망을 하면서 잘 되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간사한 헌신이 아닙니다. 이것이 강건의 비결입니다.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굳은 심지가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하나 실천을 위한 용기는 미흡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말만 잘하지 실제로 행동은 안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치명적인 약점은 무기력이요 핑계요 행동 없는 말장난입니다. 자기 실망이요, 불신이요, 교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존 웨슬레는 1년에 25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4000번 이상의
설교를 했으며 40년간을 꾸준히 그렇게 살았습니다. 400권의 저서를 남기고 10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83세가 되여서도 매일 15시간씩이나 글을 썼습니다. 86세 때는 그가 하루에 두번씩 설교를 했는데 그 일을 심히 부끄러워했습니다. 또한 나이 때문에 5시 30분에 일어났는데 이를 두고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 5시 30분까지 누워 있는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성공한 사람은 남보다 30분에 일어나는 사람이 아니라 3시간 전에 일어 난 사람들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헤브론을 정복할 것입니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신앙의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있게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이 용기를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해야 합니다. 우리 성전 건축은 이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생활과 경건함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07)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업
엡1:11-14
여러분,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우리 솔직하게 한번 말해 봅시다. 지금 이 시간 내게 무엇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결혼입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출세입니까? 아니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창15:1절에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5장 이하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 믿고 천국의 유업을 소유한 자가 복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소유한 자가 가장 복 있는 자임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구속의 은총이며 사죄의 은총입니다.
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가장 큰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까? 건강이니까? 결혼입니까?......세상에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죄용서는 받고 옥에서 나와 자유 함을 얻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결혼도 될 수 있고 건강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특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가장 큰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용서뿐입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입니다. 죽을죄에서 용서받고 풀려나올 때처럼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한부 인생들인 우리에게 가장 큰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금이 제아무리 많다고 할 찌라도 금의 귀중성을 아는 사람에게 금은 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천국의 복을 아는 사람에게만이 천국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복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것이 제아무리 풍성하였을 찌라도 그에게는 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탕자와 같은 인생들이 어떻게 잃어버린 기업을 회복할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올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딤전1:14절에 보면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와 천국의 축복은 오직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관계가 없는 자에게는 언제나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들어도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자, 다시 말해서 천국의 기업과 관계가 있는 자는 그 비밀의 내용과 중요성을 알려 줄 때에 즉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원하시고 기쁘신 목적에 대한 신비한 계획,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사죄의 은총을 받고, 영생을 기업으로 얻게 된다는 놀라운 계획을 깨달아 알 때에, 그는 너무 감격하여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아버지’라고 외친 것입니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며 누릴 수 있는 비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 은총입니다.
엡1:3,4,6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비한 계획에 대하여 엡2:11-22과 3:1-13,그리고 6:19절에서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눈은 오직 믿음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1절에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하였는데, 원문에는 ‘그 안에서 우리가 또한 기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천국의 기업뿐이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 용서함과 하나님의 비밀을 깊이 알 수 있게 되고 또 성령의 조명을 받아 지리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과거의 죄의 권세에서의 해방되었으며, 앞으로 미래의 영광에 대한 권리를 받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업이란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모든 축복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기업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받는 축복과 미래의 받을 축복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복의 실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복의 근원으로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누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복의 근원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십니다.
애3:24절에 보면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우리의 기업은 물질도 아니오, 사업도 아니오, 출세도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여호와는 우리의 상급이 되시며, 현재와 미래의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기업으로 자랄 수 있는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복된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복되고 영원한 기업을 받은 성도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 입이니까?
12절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복된 삶, 즉 세상의 빛과 소금의 생활을 말합니다.
가령 자녀들 가운데 하나가 막나니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한 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큰 욕이 되는 것입니다. ‘저놈이 누구의 자식인지...저것을 낳고도 멱국을 먹었겠지.....’이것이야 말로 그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녀는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서든지 그의 행실을 보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저 아이가 누구의 자녀인지 참 부럽기도 하다 내게도 저런 딸이 하나 있으면....내게도 저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거야말로 그 부모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인정받고, 칭찬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어제든지 꾸준하고 충성 되다고 하는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우리의 적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말과 행실이 달라서는 안됩니다. 일치해야 합니다.
렘9:8절에 보면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 도다” 그랬습니다.
말로는 사랑과 화평을 부르짖지만 그 마음에는 여전히 미음과 시기와 악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어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있습니까?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지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성수 주일, 십일조 생활, 예배와 감사 생활, 봉사 생활 그리고 전도 생활에 즐거움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기업이요, 생명이요, 복의 근원이요, 기쁨의 근원이라면 우리 하나님이 좋아서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기업이 세상과 물질처럼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실 이것은 적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런 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업과 관계 있는 사람은 그 기업을 사모합니다. 기뻐합니다. 좋아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일 보다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사랑의 대상이 되며, 영원하신 기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시온에서 찬송하기를 기뻐하며, 주의 일에 시중 들기를 즐거워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자들은 성경에 보면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에 있을 것이니 그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얻을 것이며, 슬픔과 한숨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복되고 영원한 기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받은 믿음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의 약속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므로 영원토록 불변한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된 기업을 이제 부터 영원토록 누리시는 진정한 행복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8)
지극히 높은 이름
빌 2:5-11
주님은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을 제자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곳은 중동 지역을 총괄하는 로마 군대의 본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이 위풍 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그들이 부럽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는 이 말에 선득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그를 칭찬하시기를 “대답을 잘 했다마는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하십니다.
이 대화가 있고 나서 즉시 주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3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씀을 잘 알아 듣지를 못하고 무조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만류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심하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그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말한 고백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시키시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꼭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존재, 주님의 되심, 알고 있는 예수, 고백하는 예수님이 반드시 같은 예수님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어디까지나 변함이 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눈을 형형 색색이 여서 파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파랗게 보이고 빨간 마음을 가진 사람 눈에는 빨갛게 보여서 주님의 존재와 주님을 아는 인식에 큰 차이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의 보도를 그대로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떤 때 신문에서는 ‘이것은 그것이라고 한다’라고 보도가 되었는데 그 말을 한 당사자는 ‘그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말한 것을 신문이 오보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도 그런 식으로 잘못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에는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과 그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과히 신적이지만 그의 만류는 순전히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에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로, 억눌린 사람들은 혁병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피부 색깔도 자기들의 피부 색깔과 같이 봅니다. 예수님은 원래 피부가 우리와 같은 황색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백인으로, 흑인들은 예수님을 아에 흑인으로, 우리 나라 김기욱 화백은 예수님을 큰 갓을 쓴 양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편견, 사람들의 편견, 신학자들의 편견으로 예수님의 원래 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엄마가 자식을 키웠습니다. 15살이 되는 생일에 그 엄마는 방성 대곡을 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 엄마의 대답은 비참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를 15년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알다 싶이 이 아이는 백치요 저능아입니다. 15년을 키웠는데 지금도 나를 자기 엄마 인줄 모르고 엄마라고 부를 줄을 모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15년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볼 줄을 모릅니다. 3, 4년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을 줄 모릅니다.
외정 치하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분이 평생에 예수님을 우리 나라를 해방시켜 주실 분으로 믿다가 죽을 때에서야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유관순 누나 정도로 생각을 하다가 죽을 때에야 겨우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원한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원수 갚아 주는 싸움 잘하시는 중국 배우 ‘이 소령’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당신을 늘 “인자가---- 인자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라든지, 선생이라든지, 랍비라고 부르면서도 한 번도 “인자”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여기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니엘서 에서는 심판자라는 말로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러도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닌데 인자라고 예수님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스데반이 이 말을 합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도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는 거의 100세가 되도록 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순교를 하고 난 한참 후에 요한 복음을 씁니다. 그는 요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의 고백은 참으로 예수님을 바로보고 말씀하신 고백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신앙 고백이 뼈 속에서, 그 인격에서, 그 살 속에서, 그 영혼에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과 가르침과 사랑과 헌신과 믿음의 증거들과 세월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는 바울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의 ‘기독론’이라고도 합니다. 즉 바울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모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알아야 참 모습의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신 이름, 모든 피조물로 그 앞에 무릎을 끓게 하시는 이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주라 시인해야 하는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잘 났다고 자기 이름을 들어내는 사람,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지 아니하는 교만한 사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사람이 되셨으되 종으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 본체라는 말과 형체라는 말은 모두 ‘모르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본체가 따로 있고 예수님은 형체로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 시고 형체십니다.
정리를 하자면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을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본체를 알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예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한 신부가 신랑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그 선물이 남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는 은혜일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아시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셔도 없으신 것처럼, 의인이 시면서도 죄인인 것처럼, 하나님이 신데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이야기에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 모양을 해 가지고서도 왕 노릇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는 거지의 생활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 서도 죄인이 되려 하신 것이 아니고, 죄인처럼 죄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기꺼이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해도 왕 노릇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하고 찬송을 해도 어린 나귀를 타시고 길을 가십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왕을 찬양하세”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님을 부르던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에 모두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입으로 “왕”이라 부른 것이지 마음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입에 있고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있고 우리들의 영혼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들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을 할 때 주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 가르침을 받아 온전케 될 수 있고,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지나가신 분이 아니라 역사 속에 현실로 살아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고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할 때 그곳에 기적이 나타나고 이적이 나타납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허상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신기루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6.25 때 전장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죽어 가는 미군들은 대게 ‘신선한 우유 한컵’을 달라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인들은 죽어 가면서 ‘어머니’를 부르고 죽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우유를 먹고 자라서 그렇고 우리 아이들은 어머니의 젓을 먹고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부를 이름이 누구의 이름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스데반을 보십시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외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까지 함께 사시고 그 영혼을 받아 주시고 때가 되면 우리 몸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부를 마지막 이름은 예수님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이름을 높이고, 이 이름을 의지하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의 생활을 합시다.
(09)
한 나그네의 윤리
벧전 2:11-12
지혜로운 사람은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할 줄 압니다.
첫째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을 아는 것 보다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나이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는 사실 자기 나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은데 늙은이가 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늙었으면서도 아직 철이 덜든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애가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를 알고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기의 나이를 잘 알아야 할 것 해서는 안되는 것, 가질 것, 가져서는 안되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인 사람이 편하게 사는 길입니다. 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다 가진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본래 성과 긍극성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즉 뿌리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온 곳과 갈 곳을 정확히 알고 인생을 산다면 인생 길에 방황이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평범하면서도 흘려 보내서는 안되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하고 간단 명료하게 비유해서 하신 말씀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같은 행인이다 - 이 나그네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로이코스’라는 말인데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 낮선 사람을 말합니다. 외국에 이민을 가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행인이라는 말은 ‘파레피데모스’라는 말인데 ‘지나가는 길손’이라는 뜻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 과객을 말합니다.
어느 과객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집 대문을 두두렸습니다. 주인이 나와서 야속하게도 “우리 집은 나그네가 머무르는 여관이 아니니 여관을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나그네가 묻기를 “당신은 이 집에서 몇 년을 살았느냐”고 했습니다. 그 주인은 “우리는 이 집에서 16대를 살았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그럼 그 전에 살던 사람은 다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주인이 “다 돌아 가셨다”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흠 모두 잠깐 머물러 가는 집이 이 집이구려, 나도 잠깐 머물러 갑시다” 주인이 할 수 없이 나그네를 맞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잠깐 머무르는 곳으로 우리가 영원히 사는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사는 것처럼 이 세상살이에 집착을 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떠들지 말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너무 낙심하지 맙시다. 지나 놓고 보면 맷산처럼 엄청난 일들도 먹장구름에 불과하고 태산처럼 큰 문제도 조그마한 언덕이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 때 그 일 때문에 죽을 것 같았던 고통도 지나면 즐거운 한갓 추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나그네요 행인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우리의 이 땅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남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삽니다. 다른 사람은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들을 죄라고 회개하며 삽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헌신과 사랑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듣고 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니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천국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임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임시적으로 살지만 우리들에게는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입니다. 제어한다라는 말은 다스린다 컨트롤한다 라는 말입니다. 육체의 정욕이라는 이 세상의 죄악에 끌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갈 5:19,20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들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하면 육체 주도적인 인간과 성령 주도적인 인간이 다릅니다. 같은 세상에서 같이 먹고 같이 산다고 해도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시는 사람이요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전혀 다르면서도 한 곳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육체를 제어하라는 말은 임시적이요 가변적이요 순간적인 것들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속한 마음, 가시적인 것, 시시하고 별 것이 아닌 것을 자랑하지 맙시다.
어느 누군가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지만 시시하지 않는 걱정이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다. 인생의 종말을 생각한다면 시시하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는 어렸을 때 딱지를 잘 쳤습니다. 헌 종이로 만든 딱지를 많이 따서 앉은뱅이 책상 서랍에 가득 넣어 두었습니다. 서랍에 책도 없고 공책도 없고 연필도 없이 헌 종이로 만든 크고 작은 딱지만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가득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소중한 딱지를 몽땅 밖에 내 버렸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은 딱지 때문에 울지 않습니다. 그 보다 훨씬 소중하고 값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딱지를 만든다 든지 그것을 따기 위해 손가락이 터지도록 용을 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 보다 훨씬 소중한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책상 서랍에 가득히 차 있는 그것은 휴지에 불과했습니다. 휴지를 얻자고 손끝에 치가 나도록 땅을 치고, 얻었다고 의기 양양하여 잘난 척하고, 없어졌다고 울고불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바보들이 너무 많습니다.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이라는 말은 ‘아가소스’라는 말과 ‘칼로스’라는 말이 있는데 아가소스는 단순한 선을 말하고 칼로스는 사랑으로 충만한 선을 말합니다. 아주 아름다운 선, 매력적인 선, 사랑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사랑스러운 나그네로 세상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언어 때문에 고통이 많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는 어느 고을에 가서 그곳 힌두교 신자 한 사람에게 “돈을 달라는 데로 줄 테니 말을 가르쳐 주시오”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거절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당신하고 함께 있어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데 그래서 싫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선교사하고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기독교인이 되어 버린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선을 행하고 산다는 것은 성도로서 아름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나그네 길을 매력 있게, 아름답게 삽시다. 사랑하며 삽시다. 그렇게 살아도 모자라고 짧은 인생을 미워하고 싫어하면서 살지 맙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정신 세계나 자연 세계가 온통 더러워지고 추해졌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삽시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아름답게 살아도 비방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악하고 나뿐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 진짜 아름다운 것입니다. 미움이 가득 차고 증오가 가득해도 그 속에서 사랑하며 사는 그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대할 때 노예라도 형제라고 한다고 비난하고 부도덕하다고 욕을 했습니다. 주인은 사람이고 노예는 사람이 아닌 노예일 뿐인데 주인과 노예를 같이 취급한다고 비방하고 욕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이요 부도덕한 생각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욕하고 핍박했습니다. 성도들이 사랑하므로 핍박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식인종이라고 비방했습니다. “네 피와 내 살을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 따라 성찬식을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성찬식이나 노예를 사람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비방하고 욕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노예를 사랑하고 성찬식을 해서 주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욕 안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얼마나 이 동네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은 우리들을 욕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동네를 사랑하고 위해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가 악행을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아름다운 것은 찬양을 받고 승리를 할 것입니다. 오해는 오해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지 오해를 받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아무리 독한 말로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성도를 비방해도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시니 우리들도 언제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머지 않아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버스가 굴러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부상을 했습니다. 갑자기 한쪽에서 한 청년이 소리를 지릅니다. “의사 선생님 내 피는 0형입니다. 내 피를 뽑아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여보 자기도 다 죽어 가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요” “나는 원래 사람을 때리는 깡패로 이제까지 온갖 못된 짓을 다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어 가면서라도 좋은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내 피를 뽑아 다른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 인생 길을 아름답게 살도록 하십시다. 썩어질 육체만을 위해 살지 맙시다. 하나님을 위해 인생들을 위해 값있게 아름답게 멋있게 삽시다.
(10)
두세 사람이 모인 곳
마 18:15-20
신혼 여행에서 막 돌아 온 새 색시가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기가 막힌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금 신랑과 결혼하기 전에 한동안 친하게 지내던 남자가 있었는데 결혼할 생각까지 있었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결혼을 못하고 이 남자와 결혼을 했답니다. 그런데 신혼 여행을 가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남자의 꿈을 꾸었답니다. 신부는 너무 괴로워서 고민을 하다가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과거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 모양인지 하도 고민이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구나 하는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한 평생을 살아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50이 체 못되어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하는 말이 25년을 함께 살았어도 나는 우리 집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합디다.
가정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현대인의 비극은 함께 사는 동숙 인은 있으되 가정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필요에 따라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는 학생들처럼, 내무반에서 함께 사는 군인들처럼 아무런 매력도 통하는 것도, 끌리는 것도 없이 그저 사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서글프고 처량하고 쓸쓸하고 고독한 일입니까?
지금 처럼 사랑을 많이 말하면서도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하고 메마르고 짜증이 나고 괴로운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얼굴을 해 가지고 마주 앉아 회담을 하는데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고 생각이 달라서 차라리 말이 다른 외국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겠다 하여 미국 사람들을 중간에 넣어 이야기를 해 보려는 우리 남북 문제들이 오늘 우리들의 사는 이 사회인 것 같아서 안탑깝습니다.
오늘의 말씀에 주님은 “두 새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하십니다. 즉 “두 사람이 하나가 되기만 하면 그곳에 내가 있으마”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은 큰 축복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뜻이 있고, 그러나 두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은 쉽지 않다라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즉 사람이 주님을 항상 모시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사람은 태여 날 때부터 인간 관계 속에서 태여 납니다. 그 인간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살다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니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여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사를 아름답게 하고 풍부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인간 관계가 잘 되여 있으면 인생의 저의 90% 이상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잘 되여 있으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같고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인간 관계가 잘 되여 있지 못하면 아무 것도 거지지 못한 사람과 같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인간 관계가 돈 때문에 깨지고 시지 질투심 때문에 깨져서 불행에 불행을 낳고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 오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 가운데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물리적인 모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계적이고 구조적이고 상호간에 이해 관개가 있어 만나는 모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관계에서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만남에 대한 더 구체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내 형제에게 원망 받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화해 없이, 용서 없이, 내 이웃과 형제와 성도와 사랑해야 할 사람과 하나 됨이 없이 예배드리는 것도 헛된 일이요 제물을 드리는 일도 헛된 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사에 하나 됨이 없이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거나 다름이 없는 처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삼춘이며 장인인 라반의 집에서 살지만 그 가족들과 하나가 될 수 없어서 마지막에는 노예 생활을 했다고 말하고 도망치듯 그 집을 뛰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사람과 화목하여 하나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① 마 18장을 보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상대방을 견제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없이 만나야 상대방과 사이에 진정한 화평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변변치 않은 일을 하면서도 칭찬 받기를 좋아하고 도도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과 하나 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찾아 왔을 때 “네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중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도도해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경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자세로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겠다는 말인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고 천진해야 합니다.
② 12절에는 어린양의 비유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어린양에 대한 말씀입니다. 목자는 일어 버린 어린 양 한 마리 때문에 편하지 못합니다. 그 양을 찾기 위해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 하는 것입니다. 99마리 가지고는 목자의 마음이 편할 수 없더라는 말입니다.
③ 15절에는 “한 사람이 범죄하거든”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그 사람이 곧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어린 양입니다. 주님은 그 죄를 범한 사람에게 대하여 “너는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 권면하되 말을 듣지 않거든 친구를 데리고 가서 증참케하고 그래도 안 듣거든 교회로 하여금 권면하게 하고, 그래도 안 듣거든 세리와 이방인으로 여기고 말라”하셨습니다. 그렇게 몇 단계를 거치도록 간절히 권면하라는 말슴입니다. 너의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잘 안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마끼라는 말씀입니다. 말도 안해 보고, 사정도 안하고, 권면도 안하고 다르 사람을 정죄하고 교제를 끊고, 죽일 사람 취급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 되기 위해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진정한 하나됨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모였다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있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며 함께 산다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 죄가 끼어 있으면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쇠에 쇠를 붙이는 것을 용접한다고합니다. 그런데 쇠 사이에 녹이 있으면 용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녹을 모두 없에야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서로 피차에 회개하여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싸울 때도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서로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피차에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겠지 하고 끝을 내면 다시 옛 날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재탕을 하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두 새사람이 주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이루어 집니다. 기도하는 곳에 주님이 계시겠다는 말씀이고 그곳에서 회개가 이루어 지고 참 화해가 이루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합심하여 하는 기도를 즐겁게 들어주시는 하나님에게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은 대단히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입니다.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몇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을 위하여”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아서 먼저 화목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참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용서하게 되고 참게 되며 그리고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6.25 전쟁 때 어떤 목사님이 북한 군에게 사로잡혀 폐광에 갇혔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잡혀 와 있었는데 모두 말없이 고민하고 공포에 떨고 허기와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어둡고 시계도 없어 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누군가가 휘파람으로 “죄짐 맡은 우리 구주---”라는 찬송을 조용히 불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그늘이 가득한 그곳에 그 찬송 소리는 신비하게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 찬송 소리에 맞추어 여기 저기서 같은 찬송을 휘파람으로,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목사님도 그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을 점점 크게 불렀습니다.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소리와 기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라들은 생기를 얻었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기를 가지자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지옥에서 살아 날 수 있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성전에 모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장소가 어디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새사람이 모이고 사로 용서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요, 화평이요, 희락이요, 능력이며,용서와 위로입니다.
오늘 이 무섭고 삭막하고 죄가 가득한 세상에 “두 세사람이 모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와 사랑의 용서와 위로가 있을 때” 진실한 행복을 가질 수 있습니다.
(11)
치유 받고 시중 든 여인
막 1:29-31
오늘은 치유 받고 주님을 시중 든 여인에 대해 생각하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그 여인은 베드로 장모입니다.
성경에는 마가복음에 이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 고치신 일, 오병이어의 기적, 귀신을 쫓아내신 일등 어떻게 보면 마가복음은 온통 이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적이라는 것은 예수가 행하신 초자연적인 일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이적을 고대하면서 믿음의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상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병이 들어 고질화 되였을 때, 아이들의 문제, 법률적인 문제들, 우리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오해했을 때....... 여러 가지 사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을 기대할 때가 있습니다.
이적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는데 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 앞에 나타남으로써 하나님을 믿게 하고 더 큰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한 세밀하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적 속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적을 기대할 때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 이적 보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이 고침 받은 이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 여인의 병을 고처주신 목적이 이 말씀을 전하고자 하시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1. 안식일을 거룩이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 이적은 안식일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날이 아니라 “(막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라 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베드로의 장모 집에 야고보 요한과 함께 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귀신이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떠들며 난동을 부렸기 때문에 귀신의 떠듦을 정지시키신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 앞에 귀신은 자기를 숨겨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방금 전에 이런 귀신이 나가는 것을 목도한 후에 베드로의 장모 집에 오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 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에 예수는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하여 주님을 수종들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는 것과 병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무엇을 하는 날입니까? 그 날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날이요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신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①. (마12:10-15)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하셨습니다.
②.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하셨는데 이 날도 바로 안식일이 였습니다.
③. (마14: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④. (마19:2)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⑤. (눅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⑥. (눅7:2) 백부장의 사랑하는 병들어 죽게 된 종을 고쳐 것도 안식일에 하신 일이요
⑦. (눅7: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 지라”하셨는데 이 일도 안식일에 하신 입니다.
⑧. (눅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⑨. (요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하셨으니 이와 같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많이 고치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주일입니다. 그 날은 무엇을 하는 날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인식일 치유에서 예배는 회당 예배가 많았는데 그 회당 예배는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예배입니다.
김익두 목사는 원래 황해도 깡패요 그 당시 소도둑으로 소문난 사람일뿐만 아니라 술김에 하는 행패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갑자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선한 사람이 되어 전도하러 다니니 전에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참으로 의아해 하며 물었습니다.“도대체 자네는 그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고 이런 모습으로 요즘 어떻게 살아가나?”그 때 김익두 목사의 대답.“나는 요즘 약 두첩씩을 매일 먹고 있다네.” “뭐야? 약을 두첩씩 먹고 있다고?” “그렇다네! 이 약을 먹으니 술과 담배와 향락보다 더 즐겁고 좋은 엄청난 축복이 쏟아지네 그려.” 그러자 친구들이 무척이나 궁금해하며“우리도 좀 가르쳐 주게나.” 하며 졸라댔습니다. “정 그렇다면 가르쳐 주지. 그 두첩의 약이란 신약과 구약이라는 약일세. 이 약만 먹으면 몸과 마음의 어떤 병이라도 모두 고칠 수 있지”라고 했습니다. 그후 그는 친구들에게 정성스레 신약과 구약을 먹여 그들의 몸과 정신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병고침을 받기 위해 많은 찬송과 열성적인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은혜 많은 사람에게 기도를 받으면 되었지 꼭 찬송하고 말씀을 들어야 하느냐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병 고치기를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오늘의 이적은 베드로의 집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베드로는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가정이 있고 장모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전도를 다닐 때도 자기 부인을 대리고 다닌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보아서 베드로는 대단히 가정적인 사람이 였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모든 것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베드로는 누가복음 5:11에 보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즉 그는 아내에게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했고, 장모에게 사위 노릇도 제대로 못했을 것입니다. 물른 그의 부모에게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한 사람임에는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주님을 열심히 따르는 만큼 가정 일에 정성을 달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한참 재미있게 성장을 하고 생기 넘치는 교회가 되었을 때는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른데 정신을 쓸 기회가 없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정성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맡은 일을 잘 감당하려면 일주일에 15번 정도는 교회를 나와야 했었습니다. 그 15번은 새벽 기도회 7번, 주일에 2번, 수요일, 금요일에 각각 1번. 각종 모임에 2번 이상, 성경 공부에 1번, 전도하는데 1번. 교회 청소하는데 1번 그 외에 1-2번 정도 그래서 15-17번을 교회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친척집에 갈 시간도 없고 시장 가서 오랬 동안 다닐 시간도 없고------- 그래서 집안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고----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잘 사는 방법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잘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집사가 전도회 일을 맡았는데 너무 머리 쓰는 일이 많고 힘이 들어 가정을 돌보기 위해 전도회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대통령의 비서가 자기 가정을 돌보기 위해 그 직책을 소홀히 했다 던지 아니면 사표를 냈다는 말을 들어보신 일이 있습니까? 어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자기 집안 일을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었다면 그 사람을 사람들이 보고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상 일도 그렇지 못한데 더욱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돌보시기 위해 졸지도 아니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밤낮으로 하나님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일을 가정을 돌본다고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이 가정을 버리거나 소홀히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가정 일에 다소간 소홀히 되는 것을 자책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막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결코 가정 일 보다 소홀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가정을 버려도 하나님께서 가정을 지켜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잘 하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민수기 2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고 안식일에 제자를 드리고 월삭에 제사를 드리고 유월절과 777절에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생활은 온통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였으며 그들이 받는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만이 참 축복이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위해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원리가 이 말씀에 나타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막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는 믿음이 축복을 받는 믿음이요 기적을 볼 수 있는 믿음이며 최고의 믿음이라 할 것입니다.
3. 베드로는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고 초조히 재촉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당신의 집에 모실 때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 보신 것인지, 아니면 피곤하신 주님을 쉬게 하려고 모신 것인지, 자기 집 근처에 왔음으로 차나 한전 대접할 생각이 였는지 모르겠으나 장모의 병 때문에 주님을 모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데”하였으니 장모가 불편한 것을 베드로가 말한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환자가 나 이렇게 몸이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옆에 식구가 우리 아무 게가 이렇게 몸이 아파 고생을 많이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도 예수는 미리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행동에서 예수는 베드로 집에 들린 목적이 장모의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차나 한잔 대접받기 위해 오긴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주님은 우리 교회에 찾아 오셔서 우리 성도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맙시다. 주님의 은혜 받는 일만 생각하고 예수께 나아 옵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말하여 병을 고침 받았으니 환자들이 말하지 못해도 우리가 그들 대신 말을 하여 사랑하는 식구들의 병도 고침을 받도록 하십시다.
4.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의사들간에 쓰는 은어 중에 ‘G. O. K'라는 은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God Only Know)'라는 뜻으로 의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수단과 방법을 다 쓴 후에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뜻으로 쓴다고 합니다. 몇 년 전 만해도 불치병으로 생각되던 많은 병들이 현대 의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점차 그 위세가 꺾이고 상당수 많은 병들은 간단한 약물 치료로 완치가 가능할 만큼 현대 의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최첨단 시설에서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들이나, 첨단 장비로 환자들을 진찰한 많은 의사들이 마지막 장벽에 부딪치면 ‘G. O. K'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의사들의 치료 대상인 사람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손을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크라테시스’라는 말인데 ‘움켜쥔다’는 말입니다. 그 뜻은 가만히 손을 얻는다든지 손을 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있게 잡아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셔도 병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손을 데시기만 해도 되는 일입니다. 집에 오시지 않으셔도 멀리서 병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여인의 손을 잡아 힘있게 낚아 체여 벌떡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점을 우리가 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여인의 병에 대하야 의사인 누가는 그가 쓴 복음서에서 “(눅4: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 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열병은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합니다. 아마도 요세 병 가운데 심한 장티부스같은 병일 수가 있습니다. 말을 해서는 알아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강한 텃칭을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은 의식이 없는 환자라고 해도 강력한 힘을 그에게 전하여 벌떡 일어 날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실 때 모두 같은 방법을 쓰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여러 가지 형편과 믿음을 보시고 가장 적절한 처방을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는 그렇게 해서 당장에 병을 고침 받았는데 나는 그렇게 했는데도 병이 낳지 않더라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져서 고친 사람, 말씀으로 고친 사람, 명령을 하여 순종함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 집단적인 치료를 하신 경우, 한 사람을 치료하신 경우,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신 경우, 각각 그 방법이 다르니 모두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도록 마음의 준비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이 병든 사람을 고치신 이유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행동에 목적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없을 수 없으며, 선하신 뜻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여자는 병고침을 받은 후에 예수를 시중 들었다고 했습니다. 장모는 몸이 낳자 큰 즐거움 속에 예수를 시중 들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기적이 있기 전에도 몇 가지 이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사람들은 예수를 알 고 있었고 또 예수를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시중 든다는 것은 자기 집에 온 많은 사람들을 대접했다는 말입니다.
손님이 왔으니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과, 심한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메이고 있었는데 몸이 날아 갈 것처럼 가뿐하여 수종을 드는 일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행동입니다. 큰 기쁨과 감사가 넘쳐 정성을 다해 주님과 주님을 중심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주님을 중심한 사람들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는 그들을 성도라 하고 교회라 합니다.
예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마음에 감동과 감격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시중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알고 교회를 섬기며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장모의 병을 고침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그의 근심 한가지를 완전히 덜어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잘 대접하고자 했을 때 주님을 잘 대접할 수 있는 여건을 주님은 그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체증 걸린 것처럼 그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시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잘 섬길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여 섬기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어려운 문제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섬김과 축복의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성도의 행복입니다. 이번 집회에 우리 모든 상도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2)
깨닭지 못하는 사람
시 49:1-20
사람이 아는 것과 까닭은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지식을 얻음이요 깨달은 것은 지혜를 얻음입니다. 지식이 칼이라고 하면 지혜는 그 칼을 쓰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많다고 해도 지혜가 없으면 그 지식으로 사람을 헤치고 자기를 헤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지혜를 지식 보다 더 낳게 여깁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을 무지하다고 하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안다는 것은 이성의 기능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이해를 말하고, 지혜는 깨달은 것을 종합적으로 분석 결산하여 좋은 방법을 터득한 것을 말합니다. 지식은 과거 지향적이나 지혜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교육학에서는 깨달을 지적인 것, 받아들이는 것, 실천하는 의지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여 지. 정. 의가 합해진 그런 지식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잡한 모든 문제는 사실 알고 보면 깨달음의 부족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오 깨달음인 지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행복한 일인지---- 이 길이 죽는 길인지 사는 기인지를 알고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인간은 깨달음을 축적하면서 지혜를 얻어 오늘의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
(약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거울을 보고 자기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 얼굴을 금방 잊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건방 증이 심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거울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금방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지식을 빗대 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라, 한 번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의 흠짐을 보면 다시는 그 흠집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하여 얼굴을 간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의 아집과 고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며 율법의 말씀에 귀를 귀우리면 이해의 깨달음 즉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생각이 없이 몽롱한 정신 가운데 체험하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일입니다. 생각과 경험이 합해지고 여기에 믿음이 플러스되면 놀라운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요즘 자녀들이 교육이 아주 심각합니다. 이 일에 대해 어떤 사람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수고를 잊어 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 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해산의 수고는 대단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이 없이 낳은 자식은 자기 자식이 아니오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 그 사람은 극한 말까지 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므로 생명의 존귀함과 자녀의 소중함을 알고, 부모의 고마움이 생기는데 그것이 없으니 무언가 잘못 되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출발부터 모든 것을 쉽게 시작한 사람이 자라서 어떻게 이 어려운 인생을 힘있게 살아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합니다. 마치 누에가 고치에서 나올 떼 자기 힘으로 나오지 않으면 날아 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생의 고난과 승리를 수술로 간단히 해결을 해 버리고 말았으니 그런 아이가 장차 어떻게 힘있는 아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취 중에 아이를 낳은 경험은 진실로 생명을 탄생시킨 거룩하고 숭고한 경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어떻게 지혜를 배우며, 어떻게 인내와 극기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에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우선 보기만 해도 까닭은 사람이 있고, 듣고 까닭은 사람이 있으며, 매맞고 까닭은 사람, 그리고 잊어버리고, 손해보고, 낭패 당하고 까닭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많은 사병들을 데리고 있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성수라는 사병이 있었는데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군대에 온 사람입니다. 얼마나 사람이 영리하고 지혜로운지 그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너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같이 있는 사람 하나는 얕은꾀가 무척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까지 속이고 거짓 말로 돈을 훔쳐 가는 사람이 였는데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마낄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사람은 간사한 사람이 였는데 그 사람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였고 한 사람은 어찌나 미련한지 대학까지 다니다 온 사람인데 정말 화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였습니다.
사람은 대게 어떤 강력한 자극을 받으면 깨달음을 얻어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되는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자극을 받았는데도 깨닭지 못하는 사람은 구제 불능의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있는데 부자는 한평생을 살아도 돈 모으는 것만 알았지 잘 사는 것을 몰랐다가 지옥에 가서야 잘 사는 것이 무엇이며 못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그 지혜는 아무 쓸데없는 후회만 남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당히 지혜로운 줄 알고 사는데 옆에서 보니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지혜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혜는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경험은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있습니다. 직접 경험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말하고 간접 경험은 다른 사람이 체험한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사건건 그 말씀이 내게 직접 경험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경험에 있어서 부분적인 경험이 있고 전체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병든 사람이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면 그 사람은 부분적인 경함으로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모든 재산을 다 잃고 하나님께 돌아 왔다면 그 사람은 전체적인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경험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이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10가지 재앙을 다 경험한 후에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닭습니다. 멍청한 사람들이지요.
본문에서는 이렇게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으나 께닭음이 없어 지혜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시4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소는 자기가 한 번 빠진 구덩이에 두 번 빠지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사람이 한 번 잘못을 저질러 죄를 짖고 다시 죄를 짖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할 두 가지 지혜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는 재물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 재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째,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죽 은사인 것입니다.
둘째,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얻을 기회도 있지만 그것을 써야 하는 기회도 있습니다. 재물을 얻을 줄만 알았지 써야 할 좋은 기회를 놓치면 그 재물을 선용해 보지도 못하고 잃게 됩니다. 아무튼 재산이란 많고 적든 우리에게 주신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셋째, 재물은 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입니다. 특별히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나쁜 일을 해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꼴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자유입니다. 내게 주신 경제적 여유만큼 나는 자유롭게 경제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은 이 자유가 보장 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쓰고 싶을 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 그것 참 좋은 것입니다.
다섯째, 책임이 따르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 축복에 따르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지므로 자유를 누리려 하면서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빈축을 사고 멸시를 받는 것입니다. 부자는 사회적인 책임, 경제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내 돈을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잔소리를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은 부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런 법에 따라 재산을 잘 관리하고 써야지 하나님께 계속적인 축복을 받지 그렇지 못하면 지옥에 간 부자처럼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 서에 저주받고 책망 받은 부자들에 그리스도 대한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약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약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약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약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약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런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늑탈하여 재물을 모을 줄만 알았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 재물을 쓰지 아니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재물은 악으로 기우려 지는 큰 함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黃金黑邪心을 말하고 淸貧樂道를 말했습니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짖는 죄가 무엇입니까?
① 재물을 신임하여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면 자기가 똑똑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자기는 이 시대에 특혜를 받은 귀족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교양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돈만 가지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돈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나빠하고 저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② 재물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난할 때는 하나님을 잘 믿던 사람이 재물이 생기니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 저지른 모든 사악한 일들은 부자가 됨으로 그 악함이 다 소멸 되였다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 이기심을 가집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짓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종종 갱 영화에서 많은 재물을 훔친 자들이 그 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신의가 없어지고 서로 죽이고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자식들이 그 재산 때문에 의리가 없어지고 서로 원수가 되어 사는 것을 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엄청나게 많아서 평생 호화 호식하며 살아도 다 쓸 수 없는 재산인데 더 많이 가지자고 형제가 싸우고 부모와 자식이 원수되는 것을 봅니다.
④ 재물을 우상화합니다. 돈을 섬기고 자기는 그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돈이란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남을 돕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인데 그것이 신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건강이 있고 자식이 있고 명예가 있고 돈이 있는데 그 중에 한가지만 포기하라고 하면 요새 사람들은 무엇을 포기할 것 같습니까? 이중에 가장 시시한 것은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틈엔가 사람의 생명 보다 더 중한 것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봅니다. 그런 사람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돈이 귀해서 아이들을 마음대로 먹일 수도 없고 입힐 수도 없고 공부시키기에도 힘든 세상에 집안에서 마다리 부대에 담아 놓은 돈이 수억이 나왔단다 하니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그런 사람이 구청장----????”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재산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서민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어 그가 당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별로 동정심이 가지 않습니다. “(시49: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극하는 자는 (시49:7)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시49:8)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둘째의 깨달음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종말이 순간 순간 닦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시49:10)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 도다----(시49:13)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셀라) (시49:14)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시49:15)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셀라) (시49:16)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시49:17)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시49:18)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시49:19)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주님의 이 말씀을 깨닭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모은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될 것이며 지혜로운 자가 무지한 자도 다 망하여 음부에 내려가 그 아름다움이 다 소멸하여 보잘 것이 없어질 터인데 사람이 치부하여 영광을 얻으려 하고 생시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 하니 그 영광과 재물을 가져 갈 수 없고 그 칭찬이 무익한 것이라는 것을 깨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깨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았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나간 일들과 세월을 생각하지 말고 닦아 오는 하늘 나라를 더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송나라에 사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귀한 보석을 재상에게 뇌물로 진상했습니다. 그는 재상에게 말하기를 “이 보석을 감정해 버니 대단히 희귀한 것이라 재상에게 바집니다”하며 보석을 내 놓았습니다. 그때 재상은 “그것이 귀한 보석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내게는 그 보다 더 귀한 보석이 있소. 그러니 그 보석을 가져가기 바라오. 내가 당신에게 그 보석을 받으면 당신도 보석을 잃게 되고 나도 내 보석을 잃게 될 것이요 그러니 당신의 보석을 가져가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재상의 보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세상에 가장 귀한 보석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귀한 보배는 바로 생명입니다.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것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시49:1)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시49:2)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시49:3)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13)
내가 서야 할 자리
잠 4:20-27
우리는 때때로 복잡한 환경 가운데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혹은 모르면서 잘못된 일에 개입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주변에 좋은 친구의 충고도 있고 신실한 사람들의 삶의 모범도 있고 교회를 통한 신앙 교육도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일이 잘못되어질 경우 환경을 탓하는데,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고 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설자리를 바로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밤늦게까지 긴 시간 설교를 할 때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 걸터앉아 설교를 듣다가 졸아 그만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사도 바울이 뛰쳐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를 붙들고 기도해서 살려 놓았습니다.
왜 유두고가 창가에서 떨어져 죽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앉을 자리에 앉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쯤 창가에 걸터앉아 자리가 잘못된 까닭에 설교를 듣다가 희생을 당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즘과 같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는 내가 어느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잠4:23,27)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마음을 강하게 정립하고 어느 시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시한 삶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설자리가 어디인가? 내가 어느 자리에 서야만 될 것인가?' 를 지혜롭게 판단하고, 그 삶의 바탕을 바로 정하는 사람이 남에게 빛을 발하고 어느 시대든지 성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의해서 오늘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1. 공의의 바탕 위에서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의로운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까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고 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회와 국가에 대해 공의와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자기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못하는 불성실하고 가증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정의를 부르짖고 아무리 공의를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자기 개인의 생활이 신실치 못하고 올바르지 못하면 그 말에 권위가 없는 법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기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공의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이 대의 명분이 서지 않는 그릇된 일을 범한 까닭에 정권이 바뀌거나 시대가 바뀔 때에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른 자리에 서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번 트리니티 성서 연구 시간에는 다니엘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포로로 끌려간 유대 소년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유대 소년들을 데려다 3년 동안 교육을 시켜서 술사, 술객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궁중에서 먹는 훌륭한 음식을 내주면서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신실한 다니엘은 "아닙니다. 우리는 유대인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왕이 먹는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채소와 물을 주십시오. 열흘 동안 그것만 먹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먹었는데, 그 후에 바벨론 소년들과 비교해보니까 채소와 물만 먹은 다니엘과 그의 치구들이 더 윤기가 돌고 광채가 났습니다.
나중에 다니엘은 지혜와 명철을 발휘해서 왕의 꿈을 해석하는 등 왕을 돕게 되어 그의 인기가 상승했습니다. 마침내 다니엘은 바벨론 왕의 신임을 얻어 총리 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벨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니엘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모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얼마나 충성된지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기 때문에 모함할 길이 없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법에 의하면 바벨론 왕 다리오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절하지 못하게 되어있었으며, 그것을 어기는 사람은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런데 그 때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벧론 사람들은 다리오왕에게 가서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합니다. 당신의 어명을 어겼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은 하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었습니다. 모두들 다니엘이 사자들에 의해 먹혔는 줄 알았는데,아침에 왕이 가서 보니까 다니엘이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자들이 입을 다문채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사자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해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은 4대 임금을 섬겼고, 85살까지 장수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기 쉽습니다. 또 이렇게, 저렇게 치우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오직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바른 관계를 맺고 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언제나 바르게 산다는 말입니다.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은 왜 강단을 통해 정부에 대해 공격을 하거나 위정자를 향해 질책의 화살을 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좌우에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에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라는 선교사가 있었는데, 전에는 프로야구 선수였습니다. 24살 때에 회심의 체험을 하고 변화되어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34살에 뉴욕에서 큰 집회를 열게 되었는데, 그때 백만 명의 미국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신앙의 선배가 권고하기를 "빌리 군, 절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의 비결을 알려 주겠소. 매일 15분 동안 성서를 읽고, 15분 동안 기도를 하고, 15분 동안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빌리 선데이는 일생 동안 그의 충고를 충실히 지켰기 때문에 미국 교계에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설자리에서야 합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나 바른 자리에 서게 될 때에, 충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들어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바탕 위에서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 일서 4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공의를 넘어서는 법입니다. 사랑은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인 것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신실한 교인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병중에서 "하나님,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계시해서 보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편 그의 아내는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보았습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눈치로 알아서 남편을 편하게 해줍니다. 그는 처음으로 아내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교인들이 찾아오고 구역 식구 찾아오고 선교회 친구들이 찾아오는데, 그 사랑이 마나 뜨거운지 '과거에 내가 이런 사랑의 빛을 몰랐구나.' 하고 감격해 했습니다. 그 사람은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마술적으로 병을 고쳐 주실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아내의 뜨거운 사랑, 친구들의 우정어린 사랑, 교인들의 기도와 사랑을 체험하면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여기 계시는구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것을 병중에 깨닫고 치유 받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이 사랑을 체험할 때 하나님이 지금 임재하고 계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표정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권고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사랑의 힘, 사랑의 지혜입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 때에 그 사랑이 내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느 호텔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그 안에 붙어 있는 거울에는 '삶은 거울과 같습니다. 이 앞에서 웃으면 그 웃음은 당신에게로 돌아오고 노한 표정을 지으면 노한 표정으로 돌아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을 베풀 때에는 그 사랑이 내게 돌아오고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이 풍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지성 청년이 교회에 와서는 목사님 설교만 듣고 예배만 드리면 되지 선교회고 속회고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목사님의 설교만 듣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설교를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도 합니다.
종종 저는 미국인 목사님이 설교한 카세트 테이프를 듣습니다. 얼마 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목회 하시는 척 스미스(Churk Smith)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젊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입니다. 그런데 척 스미스 목사님이 해외에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이렇게 묻곤 합니다.
"오늘 누가 설교를 하십니까?"
"척 스미스 목사님은 해외에 나가시고 안 계십니다. 오늘은 다른 분이 설교하십니다." "그럼 난 돌아가야겠군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집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척 스미스 목사님은 "예배는 설교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1주일을 바치는 것이 예배입니다."라고 강조한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설교가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것은 이기적인 자기 중심의 신앙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세 가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아주 지성적이고 똑똑한 청년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만을 믿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에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한 분밖에 없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습니다.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아내가 속해 있는 선교회 회원들이 찾아오고 또 주변의 교인들이 찾아와서 격려를 하고 위로를 할 때 뜻밖의 사람들이 모여 와서 사랑을 베풀고 밤을 새워 주는 것을 보고 '내가 언제 이런 사랑을 베풀었나. 내가 언제 남의 가정을 찾아가 봤던가. 내가 교회를 착각하고 있었구나.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이런 사랑이 내게 베풀어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하고는 그 다음부터 교회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있든지 앞장서서 사랑의 부채를 갚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더욱 헌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사랑의 바탕을 바로 두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 인격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3. 적극적인 믿음의 자리에서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간곡히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4절에 보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다른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 네가 믿는 하나님을 끝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믿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우상을 믿는 만치 저속한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고상한 종교를 믿으면 인격이 고상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믿는 만치 그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집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대로 하여금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믿음의 바탕 위에 있을 때에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믿지 못할 때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이 '남북 대화'를 많이 운운하고 있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이북에서, 공산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전에 남북 대화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리 해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그들의 인격을 믿을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대인 관계에서 있어서 서로 믿고 신뢰하는 관계가 될 때에 문제가 해결되고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S.Kierkegaard)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이란 시대적인 장벽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란 공간과 시간과 개념을 초월해서 현대에 살지만 예수님 당시의 시대상을 가지고 여기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11:1)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말씀의 바탕 위에서야 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곳에 귀를 기울이라"(잠4:20)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이 진리의 말씀을 내 생활 속에 응용하고 실행하며, 또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800년 전 이스라엘 요시아라는 왕이 있었는데, 종교가 부패되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수리하다가 잃어버렸던 신명기 성경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요시아왕은 그 성경을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에게 읽게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백성들의 생각과 정신과 신앙이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워졌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진리로 돌아왔을 때 신앙 개혁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충북에 어느 큰 강가에서 대학생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오늘날 기성 세대가 대학생들에 대해서 오해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모인 대학생 7천명은 천막을 치고 한데 모여 성경 말씀을 듣고 기도했습니다. 시간만 나면 조용하게 앉아서 명상을 했습니다. 충청도에서 온 대학생과 강원도에서 온 대학생이 서로 부둥켜안고 이 나라를 염려하고 조국의 복음 화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를 했습니다. 7천명의 대학생들이 왔다갔다하는데 담배꽁초 하나 떨어진 것 없이 깨끗합니다. 나중에 그 집회에 초청된 강사가 대한민국은 선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중국에 선교사로 갈 사람이 누구냐고, 일본에 선교사로 갈 사람이 누구냐고 할 때에 수백 명의 대학생이 일어나서 저마다 중국에 말씀을 갖고 선교사로 가겠다고, 일본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새로운 결단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공의의 바른 자리에서야 합니다. 사랑의 반석 위에서야 합니다. 적극적인 신아의 바탕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앙 위에서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무너지지 않는 신앙의인격을 갖추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4)
나를 위한 언약의 말씀
신 30:14-16
성서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30:15,16)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더라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이 언약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신앙의 체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쌍방이 지켜야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시시때때로 실족하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언약이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언약의 대상인 우리 인간이 신실한 삶을 살 때에 성경에 약속된 모든 축복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언약의 말씀에 대한 책임을 질 때 이에 따르는 특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태인 2천만 명이 학살당한 비극을 추모하기 위해 곳곳마다 기념탑을 세웠는데, 그 중 어떤 탑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유태인의 눈물이라고 말합니다.
왜 유태인들에게 눈물과 고통과 박해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뿐만 아니라 받은 바 특권을 감당하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는 백성이 되고 모범이 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본문을 중심으로 "나를 위한 언약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나에게 약속하신 말씀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이나 어떤 집단에게 주신 약속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늘날 나에게 개인적으로 언약하신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말씀을 나에게 개인적으로 하신 언약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 곁길로 나갑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기 전에 먼저 개인과 약속하신 것이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에 보내면서 그로 하여금 선택받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그의 후손은 축복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1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자기가 100세에 이삭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보게 되면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4)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 믿음의 관계를 통해서 언약의 말씀이 성취된다고 강조하신 것이 성경의 여러 곳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8세기에 유럽에서는 철학이 크게 발달했는데, 그 중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유신론적 철학이 성행했습니다. 그러나 유신론적 철학처럼 이성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인정하는 그런 철학은 우리에게 구원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성으로 인정하는 것이지 우리를 향한 구원의 언약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철학자의 하나님이지 우리의 하나님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네가 생존하고 번성하리라"는 약속된 축복의 말씀이 내 삶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얼마 전에 휴전선 가까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텔레비전으로 방영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휴전선 너머에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기에 휴전선이 무너지기만 하면 빨리 들어가 자기 땅에서 살 것을 기대하면서 40년 동안을 휴전선 남쪽에서 고생하며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은 40년 전에 피난 나오면서 가지고 온 다 해진 땅문서를 보여 주면서 휴전선이 무너지기만 하면 그 땅문서를 가지고 자기 땅을 찾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분명히 믿고 받아들일 때에, 40년, 50년 후의 미래가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육간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구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격적인 성숙이 찾아오고 평화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결혼 생활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만일 결혼한 어떤 사람에게 "당신 결혼했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는"예, 결혼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때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라고 물었다면 "000 씨와 결혼했습니다."라고 서슴없이 미래를 약속한 사람의 이름을 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글쎄, 누구와 했는지..."하며 자기와 결혼한 사람의 이름을 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결혼 생활이 자기 아내와, 남편과 일생 동안 해로하기로 약속하고서 피차 헌신하는 삶이라고 할 때에, 우리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지키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현대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도, 진리에 대해서도 아무런 약속이 없이 매일같이 허무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외감 속에서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고독하게 사는 것은 미래에 대한 약속도, 언약도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을 나, 개인에게 주신 약속으로 믿고 살아가는 까닭에 그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면서 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신명기 7장 9절에 보면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 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면서 인애를 베푸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나 개인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이행하면 3,4대가 아니라 천대까지 축복을 약속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고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언약의 말씀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나를 위한 가장 좋은 약속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나를 향하신 최선의 계획을 이 언약의 말씀 속에 포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약속의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우리의 계획과 장래가 성취되는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키우는 부모님은 자나깨나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식의 미래를 깊이 생각하고, 염려하면서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돌보는 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먼 나라에 떨어져 있어도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그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계획을 세우며 모든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 뜻과 계획을 믿고 순종할 때에 최선의 결과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5월에 미국 시카고 교회의 재미 교포 2세들 30명이 우리 교회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의 문화, 전통을 배우고 관광도 하고 돌아갔습니다. 주일이면 우리 교회에서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 갈 때 제가 보니까 너무 지친 듯 힘들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번 모국 방문이 그들에게 얼마나 좋은 교훈이 됐을까'하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시카고에 들를 기회가 있어서 시카고 교회를 찾았더니 그 부모님들이 기뻐하면서 "우리 자녀들이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이 내년에 또 한국 우리 교회에 오겠다고 들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 공헌하고 싶다고 한결같이 얘기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 중 한 부모는 자기 자녀들이 국민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미국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어울려 지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그 배인 친구들이 자기를 멀리하고 소외시키는 것을 볼 때에 영어도 미국 아이와 똑같이 하고 생활 방식도 그들과 똑같으니까 자기가 미국 사람인 줄 알았다가 가구들의 태도에 그만 소외감 속에서 낙심하고 좌절하며 심지어는 정신병까지 일으키는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다녀오고서는 자기가 한국의 뿌리를 가진 한국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기뻐하면서 앞으로 성공해야겠다고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흡족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좋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이 있는 줄 아시고 그 계획을 최선의 계획으로 믿고 내 지식이나 경험이나 지혜를 앞세우지 말고 순종해 나갈 때 풍성한 삶,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저는 종종 조용한 시간을 지내면서 과거의 내 생활과 오늘의 내 생활을 비교해 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왜 나를 이런 시련 속에 두시는가 하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3,40년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서 나를 연단 시켜 오늘 주의 종이 되기까지는 빈틈없이 진행되어 왔다는 깜짝 놀랄 만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 하나 틀림없이 성취됩니다. 여러분의 삶은 물론 여러분의 자녀들과 2대,3대, 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 실현되어 나갑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는 겸허한 자세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 (BluePrint)과 설계도와 계획이 틀림없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계획이 여기 있구나' 또 낙심이 될 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나를 연단 하시는 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그 언약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오늘 성도들의 복된 삶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죠지 뮬러(Jeorge Muller)라는 사람이 21살에 거듭난 후에 고아들을 위해서 헌신하기를 작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무일푼이지만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며 헌신과 봉사로 일생을 바쳤습니다.
조지 뮬러의 전기에 의하면 뮬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응답을 받은 것이 무려 2만5천 번이나 되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늘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틀림없이 우리의 미래에 나타나고 진행되는 것을 믿으시고 성실한 마음으로 이 약속의 말씀을 지키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죽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들 미래에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에 우리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하나님께 다 있는데, 내가 그분을 거역하고 나의 적은 지식으로 모든 것을 거슬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할 때에 하나하나 틀림없이 성취된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내가 약속의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언약은 쌍방이 다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점 일획도 어김이 없이 성실하게 지키시는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곁길로 나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약속하신 말씀을 우리는 믿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불성실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 때 우리에게 화가임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인데,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에 갖가지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스탠리 죤스(Stanly Johnes)는 말하기를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지 않고 준행하지 않으면 역시 죄를 범하는 경우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언약의 말씀을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고 몸소 행할 때에 하나님 축복이 아낌없이 임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Bartholdy) 이 아직 세사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의 일화입니다. 그가 어느 날 거리를 지나다가 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오르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안에 들어가 보니까 어떤 사람이 파이프 오르간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가 작곡한 곡을 열심히 연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작곡한 대로 연주하지 못하고 있기에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에게 가까이 가서 "죄송하지만 내가 그 오르간을 한번 연주해 볼 수 있을까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어이구! 안됩니다. 방문객은 이 오르간을 쓸 수 없습니다."하고 답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은 거절을 당하자 밖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그것은 자기가 작곡한 곡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한참 있다가 다시 들어가 "내가 한번 오르간을 연주해 보면 안될까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안됩니다. 이 오르간은 방문객이 연주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들어가서는 오르간을 사용하면 안되겠느냐고 간청을 했습니다. 여러 번 집요하게 부탁을 하니까 그 젊은 오르가니스트는 마침내 허락을 했습니다. 멘델스존은 파이프 오르간에 앉아 훌륭하게 곡을 연주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오르가니스트는 깜짝 놀라면서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내가 바로 이 곡을 작곡한 멘델스존입니다." 그때 그 젊은이는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고 멘델스존으로부터 곡의 참된 연주 방법을 배웠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래의 언약의 말씀을 주셨는데, 우리는 젊은 오르가니스트처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삶의 건반을 함께 눌러 주실 때에 우리 삶의 하모니(harmony) 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십니까? 우리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신 선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십니까? 왜 내 계획을 앞세우려고 하십니까? 얼마 되지 않는 내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능가한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신실한 마음으로 준행할 때에 약속된 온갖 풍성한 영적 구원의 역사가 날마다 성취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5)
명예로운 성도
잠 22:1-9
노르웨이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숲속에 놀라갔다가 이상한 새알을 하나 줍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알을 집에 가지고 와서 거위가 품고 있는 알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마침내 부화가 되어 새끼들이 나왔는데, 그 알에서 나온 새끼는 다른 새끼들과는 달리 부리가 뾰족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 새끼는 거위 흉내를 내면서 어미 거위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얼마가 지나자 이 새끼는 날개가 크게 자랐습니다.
어느날, 독수리 한 마리가 저공비해을 하면서 거위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때 이 새는 '나도 저 독수리처럼 날 수 있을 것이다.'로 생각하고 날개를 쭉 펴더니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그새는 바로 독수리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세상적인 것과 어울려 사는 바람에 날개를 펴지 못한채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고상한 목표를 보여주실 때에야 비로소 날기를 쭉 펴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명예로운 크리스챤의 삶을 상징해 주는 말씀인 것같이 느껴집니다.
잠언서는 우리에게 도덕적 윤리적인 규범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잠언 22장 1절에 보면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는 우리나라의 속담은 명예롭게 사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간의 고귀한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재물을 선택한 까닭에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통계에 의하면 알코올과 마약중독, 10대의 범죄, 인신 매매 등은 인간의 명예나 자존심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명예나 자존심을 잃어버렸을 때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국 육군 사관학교가 있는 웨스트 포인트 (West Point)에 가면 '의무(duty), 명예(honor),조국(country)'이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적을 거둔 생도라 할지라도 생도로서의 명예가 손상되는 일이 발생하면 즉각 퇴교당해서 하사관으로 강등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명예롭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크리스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챤이란 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명예롭게 사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슨 소망을 가지고 사느냐?" 는 물음에 대하여 항상 대답할 준비를 갖추라고 말씀하시면서 명예로운 크리슬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을 먼저 명예롭게 섬기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벧전 3:15)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며 하나님을 명예롭게 섬기는 사람이 명예로운 크리스챤이 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일 첫머리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명예롭게 존귀히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고 명예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자를 축복해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청년기에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에게는 온갖 유혹도 많았습니다.그에게는 온갖 유혹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세븐 '하나님의명예를 위해서 나는 죄를 범할 수 없다'라고 결심하고 끝까지 자신을 지켰습니다. 명예롭게 살기를 원했던 요셉이었기에 후에 높은 지위에 올라 애굽으로 구원하고 형제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궁궐에서 주는 음식을 먹으라고강요당할 때에, 그는 이방 나라의 임금이 먹는 음식은 먹을 수가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며 채소와 물을 먹으면서 유대인의 명예를 지켰습니다. 그에게는 사자굴 속에 들어가는 위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보호하셔서 후에 바벧론의 총리대신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명예롭게 섬기는 사람을 명예롭게 대접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난 후부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까닭에, 우리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잠언 22장 4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조셉 파워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낮추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높이기 위해서 오셨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그에게는 명예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명에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예수님께서는 명예롭게 대접하시고 그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명예를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모든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받던 창녀였지만 그가 예수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하나님의 딸이 되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적 규율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인격체와 사귀는 가운데 그안에 있는 무진장한 자원을 공급받아서 보다 나은 명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지난번 중국 선교여행 때에 인상적인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 믿는 것 때문에 21년 동안이나 옥에 갇혔던 사무엘 목사님과 23년 동안을 옥에 갇혔던 왕명도 목사님을 만나서 눈과 귀가어두워진 그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 했던 일입니다. 저는 그때 '나는 이분들처럼 예수님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옥에 갇혀 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명예롭게 섬겼던 까닭에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이 선물을 보내오고 빌리 그래함 목사가 와서 예배를 드리며 명예로운 대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는 자가 바로 명예로운 크리스챤이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아니하도록 명예로운 크리서챤이 되기 위해 예배하고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가지라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15-16) 그리스도인은 포악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 모든 사람을 존귀히 여기며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민주사회도 온유한 마음과 부드러운 성품을 갖고 남을 존중히 여길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짓밟는 것이 민주사회가 아닙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 라는 책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아니하고 인간의 됨됨이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명예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날마다 호화열락하면서도 자기집 대문 옆에 앉아 구걸하는 가난한 나사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있고 명예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8가지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고차원적인 도덕관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가정과 가족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셋째, 인간관계가 매우 좋습니다.
넷째, 그들의 성공 비결은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아니하고 높은 인격에 있습니다.
다섯째, 직장에서 남보다 더 능률적으로 일합니다.
여섯째, 중독에 이르는 알코올이나 마약을 멀리합니다.
일곱째, 지역 사회에서 사교적인 활동에 남달리 참여하기를 좋아합니다.
여덟째, 자선 단체에 대하여 남달리 관심을 가지고 아낌없이 돕습니다.
현대인은 자존심을 가지고 명예롭게 살기보다는 선한 양심을 다저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채 불명예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집시다. 남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선한 양심을 가집시다.
지난번 중국 연변에 갔을 때에 저희 일행은 점심 초대를 받아서 '두만강 호텔'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마침 다른 쪽에서는 김일성 뺏지를 단북한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남한에서 온 줄 알고 자꾸 곁눈질을 하면서 우리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치고 일어서려고 할 때, 장로님 한 분이 그들에게 가서 먼저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도 일제히 벌떡 일어나더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우리가 먼저 온유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하면, 아무리 완악하고 거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따뜻하게 대하게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온유한 인격과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선한 양심을 가집시다. 이것이 명예로운 크리스챤이요 명예로운 민주시민의 삶입니다.
신명기 6장의 '쉐마'의 말씀은 모세의 이스라엘을 향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그리하면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거니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시리라"(신6:10-11) 고 하시며 명예로운 가나안 땅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이는 존귀한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될 때에, 그의 인격을 갖게 될 때에 존귀히 여김을 받는 명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선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라.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3)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당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때에도 고통을 당하지만 선한 열매를 맺으려고 할 때에는 그 선행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명예로운 크리스챤의 삶의 열매라고 말씀했습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날마다 무엇인가를 심고 거두는 생활입니다. 오늘 무언가를 심어 놓으면 내일 반드시 거둡니다.
오늘 포악한 살인을 심어 놓으면 내일 그것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을 심고 선한 결심을 맺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선한 열매를 맺는 데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번에 북경 사태를 지켜보면서 매우 감동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천안문 광장으로 탱크가 밀려오고 있는데, 그 때 흰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양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탱크를 막고 선 것이었습니다. 수십 명의 탱크에 깔려 죽은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유 시민의 용기 있는 모습으로 탱크를 가로막고 서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 용기와 결단이 우리 크리스챤에게도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탱크 앞에 서 있는 저 용감한 젊은이 편에 서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선을 얻기 위해서도 우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기적이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선한 훈련을 받고 명예롭게 사는 교육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은 선한 눈을 가지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22:9).
남에게 베푸는 행위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사람은 선한 습관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 앞에 나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결실을 맺는 습관을 가질 때에, 어떤 환경에서든지 늘 신실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떤 교인이 봉투 몇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목사님, 우리 가정은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감사할 줄 모르는 죄를 범하며 산 것 같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원합니다. 선한 일에 써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가족들마다 기도 제목을 쓴 헌금 봉투를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같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선한 결심을 맺는 용기와 결단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자기가 소유한 것에 만족할 줄만 알지 나누어 주는 것에 인색한 까닭에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줍는 나사로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람파보네라는 조그만 동네에 나치스 군대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이 동네에 숨어 있는 유태인들을 잡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많은 희생을 당하면서도 선한 양심에 의해서 유태인들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켰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많은 유태인들이 그 작은 동네에서 살아나왔습니다. 그때 기자들이 그 동네 사람들을 찾아가 "어떻게 그렇게 영웅적인 일을 해 낼 수 있었느냐?" 고 물었을 때 소박한 그 동네 교인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영웅심도 없는 그저 소박한 농부들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성전에 가서 선한 결실을 맺어야 된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것이 습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습관화된 것을 그대로 행한 것 뿐입니다." 선한 습관을 가진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씨앗을 심고 선한 결실을 맺는 우리들이 될 때에 명예로운 크리스챤의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과 존경과 선한 양심을 가진 인격자, 선한 결실을 맺는 명예로운 크리스챤의 삶이 계속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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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비결
수 1:1-9
우리는 때로 텔레비젼 프로를 통해서 서커스를 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맹수를 길들여 가지고 서커스에 나오는 아가씨를 볼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굉장히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무서운 사자, 표범 등의 맹수들을 잘 길들여 가지고 나와서 그들을 껴안고, 쓰다듬고, 심지어는 입맞추고, 타고, 놀고, 마구 뒹굴며 어울려 지내는 것을 볼 때 에덴 동산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것과는 얘기가 틀립니다. 총으로 쏘고 몽둥이로 치고 해서 다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연약한 아가씨가 맹수를 다루는 것과 힘으로 다루는 것과는 힘의 차원이 다릅니다. 아나운서들은 반드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 맹수들을 이렇게 잘 다스리며 이렇게 사이가 좋으냐고 말입니다. 대체로 대답하는 말이 꼭 한마디입니다. "믿음과 사랑입니다." 내가 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저들이 알고, 저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그 사랑을 서로 믿는 것이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관계가 이루어지면 이렇게 서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겠습니까만 우리가 결과적으로 볼때에 정말 믿음과 사랑, 그것은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폭군적이고 파괴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위대한 능력이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 그것으로서 다스리고 그것으로서 정복하고 그것으로 하나 되고 어울리는 화목한 관계, 거기에 힘의 위대함이 있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힘이 근원에는 몇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경제적인 힘입니다. 돈의 위력은 사실 대단합니다. 옛말에 [장사도 무일푼이면 안색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 돈은 필요하고 부자가 힘의 상징으로 나타나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둘째로 이보다 더 큰 힘은 지식의 힘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옳습니다. 현대는 기술 세대로서 아는 자가 결국 모르는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모르면 무능력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경험의 힘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다해도 처음하는 일은 자신이 없습니다. 익숙하도록 경험한 일은 자신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힘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니다 한 차원 높은 또다른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힘입니다. 사람은 불의할 때 약합니다. 의롭지 못한 일을 할 때에는 겉으로는 목소리가 커지지만 마음은 약합니다. 떳떳하지 못하고 양심이 성원해 주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울 때, 정결할 때,양심의 성원을 받을 때 우리는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아무리 돈이 있고, 지식이 있고, 경험이 있어도 더러워진 인격은 힘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지혜마저도 빼앗아 어리석고 우둔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봉사와 희생적일 때에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이기심은 생의 원동력을 다 빼앗아 갑니다. 남이야 살든 말든 나 하나만 잘 되자는 이기심은 사람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사람은 대체로 비겁합니다. 그러나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자신은 남을 위하고, 이웃에 봉사하고, 나라를 위하여, 세계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고 스스로 느끼는 확실한 명분이 있으면 힘이 솟아나고 용기의 사람이 되가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만을 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또다른 힘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4가지의 힘이 다 중요하지만 이 위에 플라스 알파의 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힘입니다. 정치적인 여건이나, 경제적인 능력이나, 자기의 긍지, 결백, 도덕적 용기 위에 믿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결백의 도덕적 용기란 독선과 고집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힘은 진실의 힘이요, 겸손의 힘으로 힘의 근본입니다. 이 힘에 바로 승리의 비밀이 깃들여 있습니다. 요한일서 5:4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본문 가운데 믿음의 대표적인 사람, 승리의 사람 여호수아를 봅니다.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40년 동안 그의 백성을 인도했습니다만 그는 가나안 땅을 멀리 바라보며 죽었습니다. 이제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게 됩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암담했습니다. 상대방은 강하고 포악합니다. 그런데도 이 60만 대중들은 오합지졸입니다. 걸핏하면 모세를 죽이겠다고 하던 사람들이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불평하던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형편이 없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이야기가 안되는 사람들입니다.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고 불안했습니다. 또한 두려웠고 고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라" 승리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별도로 주시지 않은 채 말입니다. 옛날 모세도 백성들이 나를 믿지 않으니 무엇인가 달라고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히 신기한 어떤 것을 주시지 않고 모세가 늘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막대기였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실 때 뱀이 되고, 생수가 터지며,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는 막대기도 없습니다. "그저 가라."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그 어떤 것도 가진 것이 없고 하나님이 주신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가라"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길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승리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힘의 원천은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나라의 군사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도 걱정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은 불신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끝입니다. 군사가 백만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경제가 아무리 부흥한들 무엇합니까? 믿을 수 없다면 다 끝난 것입니다. 믿음이 힘이 원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문에 어떤 기사가 실렸을 때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이래가지고야 나라가 어찌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까?정부가 백성을 믿어야 하고, 백성이 정부를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거짓이고 불신 투성이면 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가장 약한 것은 의심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불신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힘의 원천이 군사나, 경제나, 지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고 약속하십니다. 약속 속에 또 명령이 있습니다. 가라, 강하게 하라, 담대하게 하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약속을 하십니다."네 발바닥으로 밟는 땅은 다 내게 주었노라."[주었노라]는 과거입니다. 땅문서나 마패 등은 없습니다. 다만, '그 땅을 내가 내게 주었노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약속 위에서 가라고 하십니다. 이제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오직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안됩니다. 나는 나약하고 허물과 죄로 가득찬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지난 날의 실패들을 아무리 들추어 보아도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분석해도 조그마한 가능성마저 없습니다. 또한 세상을 보아도 난감합니다. 이 세상 어느 구속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누구나 소망을 말하는 자도 없습니다.꽉 막혔으며 절망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먼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더 깊은 곳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저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어떤 지독한 무신론자 이발사가 목사님과 같이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강도, 죄인, 부조리 등 이런 모순을 왜 그냥 세상에 두느냐고 하나님이 없음을 주장했습니다. 마침 그때 맞은편에서 아주 보기 흉한 장발족의 청년이 오고 있었습니다. 듣고만 있던 목사님이 "여보, 자네 이발사가 아닌가? 저 보기 흉한 장발족들을 왜 그냥 보기만 하는가.이발 좀 해 주시오. 저런 모두 당신 책임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목사님, 저들이 나한테 와야 내가 깍아줄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하나님도 같은 마음이십니다.당신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야지 안 나오니 방법이 없지 않소." 자, 누구 책임입니까?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행하는 길에만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순종입니다. 감상이나 관념이나 명상이나 이론이 아니며 자기 수양도 아닙니다. 믿음은 곧 행동입니다. 여리고를 함락하라 하시면 가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라 하시면 건너가는 겁니다. 가라 하면 갈 수 있음을 의미하고, 점령하라 하시면 점령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다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능력의 요소와 신비가 깃들여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말하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망합니다. 끝났다. 끝났다 하면 끝이 납니다. 말함으로 생각이 좌우되고, 생각함으로 운명이 좌우됨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에서 말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말에서 생각이 바꾸어집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말을 하지 맙시다.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욕하고, 비난하고, 절망하고, 한숨쉬던 그 입으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외우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시다. 그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 우리 마음이 허망한 것으로 가득 차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꿈을 꾸어도 예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저 무의식 상태에까지 말씀만으로 가득 채우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굳게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더하지도 말고, 감하지도 말고,자기 마음대로 풀이하지도 말고, 이성주의로 해석해서 이성주의자가 되지도 말고, 자기 주관에 매여 신비주의자도 되지 말고, 곧게 따라가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망조의 길을 가면서 흥하기를 바라고, 심판받을 일을 행하면서 승리를 바라고, 멸망의 길을 가면서 승리를 꿈꾸고 있습니다. 승리의 길에 서야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승리는 선물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서두르지 맙시다. 좋은 나무가 되면 열매는 맺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고,약속을 믿으며, 순종할 때 그 말씀의 능력이 나를 승리케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사 나로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승리의 신비로운 비결이 있습니다. 모쪼록 이 승리의 찬송을 계속 부를 수 있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7)
심지가 견고한 사람
사 26:1-21
지금은 벌써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월남전은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전쟁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방과 후방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요, 둘째는 아군과 적군이 뒤섞였다는 점입니다. 전쟁이란 전방과 후방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얼마나 진격하고 후퇴하였는가를 알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이 싸움의 성패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월남전은 전혀 전. 후방이 구별이 안 되었기 때문에 싸움의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어 사람들이 낮에는 아군이요 밤에는 베트콩으로 돌변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참전하는 미군들은 불안하여 잠을 잘 수 없었고 계속적인 긴장의 고통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전방이고, 누가 적군인지 알아야 싸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 저기에서 총소리가 들려 전방인가 하면 돌연 피리 소리가 들리니 이들은 그만 견딜 수 없어서 한사람 두 사람씩 아편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통계에 의하면 미군 100명중 28명이 아편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총을 들이대면서 "손들어 "하면 빙글빙글 웃으면서 두 손을 번쩍 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던 전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과연 당면한 고통과 위험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타조 사냥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타조란 날지 못하는 대신에 힘이 세고 다리가 매우 길어 그 뛰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고 합니다. 타도는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쫓아가면 사력을 다하여 빠른 속도로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하다가 힘이 빠지고 지치면 머리를 모래 속에 묻고 꼼짝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을 탄 사냥꾼들이 가까이 가서 사로잡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아마도 그 새는 보지 않으면 위험은 다가오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성경 본문에는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보통 강한 표현을 할 때에는 똑같은 단어를 두번 반복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도 '평강의 평강, 평화의 평화(peace of peace:샬롬 샬롬)에로 그를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말합니다. 첫째는 원심, 복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ambition)때문이며, 셋째는 질투심 때문이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재질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형편만을 보고 질투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마음에 분노가 있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안할 수 없는 요인 중에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칼빈도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요인을 한마디로 교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 신앙적 교만은 모든 번민과 고민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들의 마음이 평화를 잃고 불안에 싸여 있다면 자신을 한 단계 낮추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그 불안과 고민은 절반으로 감소될 것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쟁취하는 방법입니다. 나의 평안을 해치고 상대방을 죽이고 항복시킴으로써 얻는 이 방법은 너무나도 허무한 것입니다. 둘째는 타협입니다. 첫 번째의 싸움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해를 입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보다는 서로 타협함으로써 평화를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타협이 얼마나 불안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인지 현대 정치에서 흔히 보지 않습니까? 타협이란 어느 편이든지 50%는 양보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망각입니다. 이 방법은 불교적인 처세로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예를 든 월남전의 미군 병사나 사냥꾼에 쫓긴 타조와 같이 망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안을 해소시켜 주거나 평안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끔 인간은 소유에 의하여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강이란 많이 소유했다는 것에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소유는 불안과 근심만을 더하여 줄뿐입니다. 어느 지역의 땅값이 오르고 내림에 대하여 혹은 증권 시세가 내렸다던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못 가진 자들이 아니라 가진 자들입니다.
다음과 같은 웃기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큰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재물이 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때 멀리서 이 불을 구경하고 있던 거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 사람들 참 안됐습니다."라고 하니까, 아버지 거지는 "그것 봐라, 우리들은 불 타 없어질 집이 없어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게 다 이 아비 덕인 줄 알아라"라고 큰 소리 치더랍니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소유한 자는 점점 더 많은 소유를 원합니다. 더 많은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에게 걱정과 불안만을 더하여 줄뿐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전도서 1장 18절에서는 지식을 더하면 근심을 더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아는 것이 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알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필요 없는 지식만을 많이 알아서 근심을 더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거나 복잡해지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소박하게 사는 것이 제일 평안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평강은 인간의 소유나 지식, 명예에 의해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이것을 아주 시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하나님의 성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옛날 성을 생각해 봅시다. 성밖에는 도둑과 맹수들이 있는 아주 불안한 지역 있으나, 성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주 평안하고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제 성밖에 와서 문을 두드릴 대에 주인이 그 문지기에게 명령을 내려 열어 주라고 하여야만 그는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평안은 성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문은 주인이 명령해야만 열립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샬롬'은 '화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려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 말씀을 듣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그 누구도 그 고통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우리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만사를 왜곡하여 보거나 해석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미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절대로 평강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그는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왕도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여 결국은 사망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강퍅하게 된 심령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 때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때에 우리는 비로소 구원함을 받고 평강의 평강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信을 잘 지키는 사람, 믿음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충성을 다짐한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정말로 귀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그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기록도 공약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불신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금석 같은 맹약도, 두 원수가 함께 발표한 공동 성명도 어떤 때는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고 말기도 합니다. 그러니 누가 그 공약을 믿으며, 그 공동 성명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온 세계가 이처럼 흔들리고 정부도 역시 이렇게 흔들립니다.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사건 중에 가짜 교원증 발급 사건이 있었을 때, 이 사건에 관한 풍자를 그린 어떤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숙제하라고 했더니 이 학생이 말하기를 "우리 선생님은 가짜야"하는 것입니다.
정말 현대는 스승도 제자도 믿을 수 없는 슬픈 시대입니다. 나라가 튼튼하기 위하여는 공신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信을 지키는 나라, 믿음을 지키는 사회와 개인에게는 평안히 있습니다.
둘째는 義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義보다도 더 강한 것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 의를 마치 공로처럼 내세우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언젠가 신문에 택시 기사가 손님이 택시에 놓고 간 몇 십만 원을 파출소에 갖다 주었다는 기사가 큼직하게 실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실려 있는 그 기사를 보고 어쩐지 제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돌려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결코 신문에 날 만큼 선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 돈을 남에게 내 놓았다면 마땅히 선행이 되겠지만 자기 돈이 아닌 남의 것을 돌려주었다는 것이 어찌 선행이 되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선행이라고 불러야 하는 현대 사회의 풍조가 심히 가슴 아플 뿐입니다. 또 요즈음 한창 거리 질서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새치기하지 않기, 줄 똑바로 서기 운동 등은 사실 우리가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법적인 제재가 없어도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의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의 4대 성현 중의 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 분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 중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장 소중히 여깁니다. 그 분은 아무 죄도 없이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석방이 되지 않게 되자 소크라테스에게 탈옥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사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아무리 잘못된 법이라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죽어 간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너무나 실리적이고 또한 의를 떠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가 부족하고 의가 없기 때문에 현대인은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는 매우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 닥쳐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평강으로 지킴으로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란 마음이 한결같은 사람으로서 변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그래서 공자님은 여자와 소인은 가장 다루기 어렵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변덕스러움이란 아직도 마음에 믿음이 없어 스스로 불안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말하고 저녁에는 저렇게 말하는 변덕은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요즈음 결혼 서약에는 "부부의 대의를 지키겠느뇨?"라고 합니다만 20년전에 사용했던 결혼 서약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이 모든 경우에도 아내를 사랑하겠느뇨?" 이 얼마나 귀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처할지라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견고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러한 변덕스러운 인간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일단 믿겠다고 결심했으면 믿는 것이고 또 일단 교회 나오겠다고 작정했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와야 합니다. 제가 주일날마다 하는 고민이 바로 그것입니다. 날씨가 어둠침침하거나 비라도 와서 땅이 질면 "오늘 교인이 얼마나 교회에 나올까?"하고 고민합니다. 지난주에도 시작할 때 교인들 수를 헤어 보니 별로 많지 않아"역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후 그런 대로 자리가 차츰 채워지기는 했습니다만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나오겠다고 결심한 이상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아져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비참한 현실 중에 하나가 '학습'이란 제도입니다. 세례 받기 6개월 전에 행하는 이 제도는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오늘 예수를 믿겠다면 그날 즉시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제도가 한국 교회에서만은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변덕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믿겠다고 해 놓고는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단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들의 씨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사회와의 결별을 뜻하며 심지어는 자기 가족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에는 소개하는 정도로 끝내지 않고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그를 중심에 놓고 빙빙 돌아가며 환영의 춤을 춥니다. 굉장히 성대하게 환영을 합니다. 그들은 일단 믿었다 하면 절대로 죽을 때까지 변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으로 인도되는 길입니다.
숙주나물의 명칭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 이조 시대에 수양 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대신 왕위에 오를 때였습니다. 이때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 성삼문 이하 여러 집현전 학사들이 죽음으로써 항거하였지만 그들과 함께 동문 수학한 신숙주만은 변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름에 하루만 지나면 쉬어 못 먹게 되는 녹두 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변절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을 끝까지 지키는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을 허락하십니다.
평강은 승리의 열매입니다. 죄를 이기고 나약함을 이기고 교만과 게으름을 극복하고 변절을 이겨서 얻어지는 평강입니다. 이 평안은 이제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한결같고 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꾸준히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직스럽고 튼튼한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이 보다 귀한 것을 넘치도록 담아 주실 것입니다. 지식이나 재주보다도, 두뇌나 아름다움보다도 더 귀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함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18)
이후에는 알리라
요13:1-11
우리는 지금 몹시도 피곤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계와 더불어 살지만, 때로는 기계와 싸우며 살아갑니다. 요란한 기계 소리와 더불어 경쟁을 하듯이 다투어 가며 사는 피곤한 생입니다.
가끔 시간에 쫓겨 5분,3분,1분을 다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인지 시계가 주인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또한 물질에 시달리고, 많은 공해에 시달리며, 특별히 사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만납니다. 반가운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반갑지 않는 사람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만 하는 그런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몸도 피곤하지만 사실 마음이 더 피곤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습니다. 산이 높다고 우리는 탓합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산이 높을 수록 더 좋다고 합니다. 스릴이 있고 영광과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거칠고 험하다고 우리는 탓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자는 오히려 거친 세상이라고 더 살 만하고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싫어합니다. 사실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잘하며 어떤 시험이든 잘 치러 내고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학생이라면 시험은 어려울수록 좋습니다. 많이 볼 수록 좋습니다. 자, 이렇게 새약하면 이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상이 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합니다. 세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합니다. 결국 이렇게 심약한 나 자신이기에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고 그래서 피곤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하는 일에 자신이 없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손에 쥐었어도, 은허에 맡겼어도 내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눈에 보여도 안 되고, 보증을 세웠어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재벌이 되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기도 하니 내일 일을 모릅니다. 무엇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아주 피곤한 생입니다. 이것을 현대 철학가는 허무(nihlism)이라고 말합니다. 보람도 없고 의미고 없습니다. 물론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너무 근시안적이고 너무 소아병적입니다. 왜냐하면 가을을 기다리는 인내가 없습니다. 가을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조와 불안과 불신 때문에 한 시간이 바쁩니다. 너무 즉각적으로 만사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반사를 기다립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가 되어지기를 바라고만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들이 한결같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입니까? 불과 몇 분간의 그 경기를 위해서 그들은 10년 내지 그 이상의 기간을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이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긴 기다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놓고 긴긴 설교를 하십니다.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중요한 행사를 치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 요한은 뒤늦게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가지 사랑하시느니라"(요13:1) 끝가지 사랑하셨다는 의미는 비록 내일 아침에 십자가를 질망정 오늘은 사랑했다. 즉, 죽기까지, 생명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가롯 유다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크리소스톰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기셨다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아주 딱하기만 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결정적인 시간에도 그들은 자리다툼을 하고 허영에 들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못난 제자들을 주님은 끝가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먼저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이 사랑과 수고와 봉사가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고 제자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을 예수님은 아셨고, 예고하셨습니다.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순교하게 될 것이다.""그 믿음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자기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전혀 공부한 적이 없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녀들을 앞에 놓고 유언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단다. 그런 줄 알아라."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훌륭한 어머니십니다. 어떤 여자는 한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서는 세상 남자 다 못 믿겠다고 말합니다. 몇 사람이나 경험을 했는데 그런 말을 합니까? 한 사람에게 배신당하고는 이 세상 사람 다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보편화라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보고서 다 보았다고 합니다. 한 사건을 통해서 전체를 다 아는 것처럼 보편화하는 것은 소아병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을 주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를 믿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오늘 뿌리는 씨가 반드시 결실하게 될 것이라고 가을을 믿었습니다.
또한 가롯 유다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아십니다. 불과 몇 시간 후에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신할 것도 훤히 알고 있으면서 그의 발을 씻기셨고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깨끗하니라. 다는 아니니라." 만약 예수님께서 감정적으로 혼돈을 하셨다면 가롯 유다에 대한 미움 때문에 다른 제자들까지도 다 나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가령 "내 제자들 다 못 믿겠다. 한심한 것들이다"라고 말씀하셨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는 가롯 유다요, 베드로는 베드로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가롯 유다 하나 때문에 나머지 열 한 제자들에게 결코 실망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나무라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롯 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그들 역시 한심한 상태였습니다. 네가 크냐, 내가 크냐 하며 서로 시기와 질투와 욕심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자기 다툼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는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고 그들을 믿었습니다. 여기에 신앙이 있습니다. 이 신앙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이었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믿음입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하고 자식들을 낳게 되면 그 때는 부모들의 진실된 마음을 알게 됩니다. 후에는 반드시 알게 됩니다. 너무 초조하게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지 맙시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미래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 그리고 허무한 희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의미가 있고, 믿음이 있고, 아니 믿음을 주고 그리고 봉사하며 사랑하는 사람은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발을 씻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 훗날 제자들이 당신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으시며 그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신 것입니다. 짐작컨대 이제 9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런 절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위해 끝가지 봉사하셨습니다. 그가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고, 저가 할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신 것뿐입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오늘 하셨습니다. 응답이 없는 무지한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물러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거절을 합니다. 제자인 자기가 먼저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지 못한 죄책감이었습니다. "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좀 다혈질이라 성미가 급합니다. 상관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만 머리도 씻기 주옵소서."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조급하게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제자인 네가 지금 나를 모르고 있다고 책망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고 믿으시며 부지런히 씻겼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탓하지 맙시다. 반응이 없다고, 인사가 없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무라서는 안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 지금 내가 하면 족합니다. 아내가 되었습니까? 아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십시다. 남편 일까지 뭐라고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남편입니까? 남편 구실만 착실하게 하십시다. 좋은 아내니, 나쁜 아내니, 평가하지 맙시다. 부모의 위치에 있습니까? 부모 노릇만 잘 하십시다. 먼 훗날 자식들이 고맙게 여러분의 노고를 알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대상을 원망치 말고 지금 할 일말 열심히 합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나무라시지 않고 이후에는 알 것을 믿으시며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고민으로 옆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란 큰 고민이 앞에 있었지만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지금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끝가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봉사였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고 주님이 하실 일만 하셨을 뿐입니다. 마치 농부가 부지런히 씨를 심고 가꾸듯이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와 능력에 완전히 위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 것이고, 깨달을 것이고, 보답할 것이며 그리고 위하여 순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썩어지는 밀 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새 밀 알은 말이 많습니다. 썩어지지 않고 썩어질 것이라고 소리만 지릅니다. 말없이 썩어지는 밀 알이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가운데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언젠가 먼 훗날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가끔 오늘 당장 수고하고 내일 바로 기념비를 세우고 있습니다. 기념비란 그분이 돌아 가신지 몇 백년 뒤에 세워야지 산 사람의 기념비를 세우고 있으니 될 법한 일입니까? 너무 조급하게 서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신 "이후"라는 말은 결코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막역한 기대를 거는 운명론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시간입니다. 이후에 라는 말은 사건 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죽은 바로 후에 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모르나 내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성령 강림하면 그 때는 알리라는 뜻입니다. 이 복음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의 밀 알이 썩어져 죽어 가면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희생하고 나면 그 때는 압니다. 아직 희미한 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또는 알고자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깨끗이 죽어지면 반드시 이후에는 알 것입니다.
우리는 피곤한 시대에 삽니다.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확실하게 들어보십시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십자가 뒤에 있는 능력, 십자가 뒤에 있는 놀라운 주의 역사를 우리는 바라보면서 주의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19)
다니엘의 믿음
단 6:18-20
I. 다리오 왕은 아주 괴로운 밤을 지새웠다.
A. 그는 악한 자들에게 속아 그가 사랑하고 친애하였던 그래서 왕을 돌보는 자로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는 다니엘을 죽음으로 몰아 놓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저들은 왕의 허영심을 부추겨 30일 동안 왕 외에는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경배하거나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칙령을 왕으로 하여금 서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만일 이를 위반하는 자에게는 그 벌로써 그를 사자 굴속에 던져 넣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2. 저들은 자신들이 탐하는 고위 관직에 다니엘이 내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질투심에 불타 있었다.
a. 그들은 다니엘이 진실하고 그의 업무 수행에 있어서 어떤 흠도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b. 그들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계속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c. 결국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 하에 그와 같은 칙령을 내리도록 도모하였던 것이다.
B. 다니엘은 그 칙령이 다리오 왕에 의해 서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하는 기도를 계속하였다.
1. 이 명령을 위반한 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다리오 왕은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 친애하던 다니엘임을 알고는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한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2. 왕은 법의 허점을 찾아 그 칙령을 취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메데 파사 법에 의해 한번 조인된 칙령은 다시 변경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3. 저녁에 사람들이 왕에게 와서 그 법을 시행하도록 촉구하였다.
C. 왕은 함정에 빠졌으며 다만 다니엘에게 큰 후회를 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 사자 굴에서 너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다니엘을 격려했다.
1. 하나님은 가끔 이상한 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격려의 말씀을 보내신다.
2.아주 사랑스런 젊은이가 몇 년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그는 약 중독과 사고로 정신이상과 언어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a. 하나님은 그를 특별한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그가 오렌지 카운티 병원의 정신과 병등에 있던 어느 날 그를 담당한 정신과 의사 한 사람이 교회로 전화를 걸어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 병원에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아는 것 같다. 그는 항상 나에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도 이 예수를 알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b. 그때쯤 나의 아내 케이가 상당히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에 청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장애로 인해 정확하지 못한 알아듣기 힘든 말투로 "케이 자매님"이라고 불러 놓고 아주 정확하고 선명하며 지극히 정상적인 발음으로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즉시 다시금 불투명한 말더듬이로 돌아갔던 사실을 경험한 적이 있다.
D. 왕은 이러한 말로써 다니엘을 격려했으나 자신은 전적으로 믿어지지 않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1. 그는 저녁 식사와 음악을 전폐했다.
2. 그러한 칙령에 서명한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하면서 밤새도록 괴로워하며 지새웠다.
3. 이른 아침에 왕이 사자 굴을 향하여 달려갔다. 돌들을 굴의 입구에서 치우라고 명령한 그는 굴을 향하여 슬픈 목소리로 "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사자로부터 구하시기에 능하셨느냐?"고 외쳤다.
4.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할 때에 왕의 마음은 안심을 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II. 네 하나님이 능하셨느냐?
A. 다니엘서의 전반부에 보면 세 히브리 소년들이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풀무 불에 위협을 받았을 때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당신의 풀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십니다. 라고 말했는데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B. 우리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시기에 능하시다. 풀무에서 흑은 사자들에서도 마찬가지다.
C.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있나?
1. 하나님이 거짓말 이외에 하실 수 없는 것이 또 있는가?
2. 비율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 후에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들을 하시기를 구하였는데 지각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함이 가득 차도록 구하였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넘어 풍부히 지나치게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선언했다.
3.하나님의 능력은 당신이 요구하고 생각하는 능력의 범위를 초월한다.
4.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여호와라 모든 육체의 하나님인 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D. 아브라함의 믿음의 열쇠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었고 또한 능히 행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1.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다고 할 것이라고 하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러면 문제가 무엇인가? 왜 염려하는가?
2 .많은 경우 우리는 다리오 왕과 같다. 그 말씀으로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며 하나님이 모두 다해 주신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확신이 없다. 그는 아침에 물었다.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하는데 능하셨느냐?"
III. 당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가?
A. 하나님이 당신을 넘어지지 않게 붙드시며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 흠도 없이 당신을 그의 앞에 세워 주실 것이다.
1. 비율은 묻기를 "너는 누구 관대 다른 사람의 종을 판단하느뇨. 그의 일어서고 넘어짐이 제 주인에게 있거늘 하나님이 그를 일으켜 세울 능력이 있으리라."
2.다른 이가 당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도 약점을 판단해도 하나님은 당신을 세우실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신다.
B.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며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1. 오 놀라우신 예수님의 은혜는 나의 모든 지은 죄보다 더욱 크시다. 2.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넘치게 하심을 생각해 보라.
C. 바울은 디모데에게 영광스런 확신의 말을 하기를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내가 아노니 그가 그날까지 나를 보호하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그에게 나의 생명을 보호해 주실 것을 다 맡겼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실 능력이 계심을 나는 안다.
1. 나는 연약하나 그가 나를 보호해 주시며
2. 내가 넘어지나 주님이 나를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신다.
3. 내가 실수하나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나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 나는 주님이 구하실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
(20)
마음의 파숫군
잠 4:20-27
어느 비오는 날 아침 학교에 출근하기 위해 부지런히 차를 몰고 잠수교를 건널 때였습니다. 쏟아지는 비속에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노란 운전 기사복을 입은 사람이 몹시 다급한 듯 손을 흔들며 차 태워 주기를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급한 길이긴 하였지만 비를 맞아 가며 간청하는 그분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차를 세워 태워 드린 후 그 사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 분은 영업용 택시 운전 기사인데 그만 차에 휘발유가 떨어져 잠수교 한가운데에서 멎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유소로 휘발유를 사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약간 어처구니가 없어 '차가 멎게 되도록 몰랐느냐'고 짓궂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다 떨어져 가는 줄은 알았지만 적어도 잠수교는 무사히 건너 주유소까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각기 나름대로의 인격과 교양, 수양과 신앙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 인생을 이끌고 가는 자동차의 휘발유와 같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고 방심했다가 뜻밖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그만 당황하여 쓰러지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각자의 인격과 신앙의 상태를 재 정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겠는지 아니면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처럼 우리의 인격적인 면으로나 신앙적인 면에 수양과 성령의 은사가 좀 더 필요한지를 말입니다.
성경 본문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더욱 더, 네 마음을 지키라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음을 파수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전주 어느 고등학교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묵기로 한 호텔 옆에는 아주 멋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제 방이 3층이라서 그 집을 환히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넓은 정원에 잔디가 곱게 깔려 있었고, 여기 저기 신경을 써 가며 훌륭하게 손질을 해 놓은 나무와 돌등이 보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그 집 담은 철장과 가시 철망으로 씌워져 있었고, 말 만한 개 두 마리가 집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빈틈없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그 날밤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었습니다. 집을 전부 부수는 것같은 요란한 부부 싸움 소리였습니다. 어찌나 요란한지 집을 전부 두드려 부수는 줄 알았습니다. 비록 집은 철조망에다 사나운 개까지 동원하여 철저하게 지켰지마는 정작 잘 지켜야 될 마음을 지키지 못해 한 밤중에 소란을 피워 잠자는 이웃 사람들을 깨워 놓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돈을 지킵니다. 또는 건강을 지킵니다. 명예를 아주 소중히 다룹니다. 심지어는 누가 내 기분을 해칠까 봐 상당히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이 침입해 들어와 결국 우리의 모든 인격이 깨어지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외부의 도적은 막았지만 마음속에 들어오는 원수 곧 악마는 막지 못한 것입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읍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을 빼앗고, 경제계를 주름잡고, 국가와 사회의 운명을 한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세대에 걸쳐 여러 성현들이 강조한 것은 극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어떤 때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과거의 실수를 돌이켜 기억해 내고는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때로는 꼭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떠오르지 않아 얼마나 고심했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일 것입니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마음먹고 싶은 대로 마음먹고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계적인 영웅 나폴레옹은 전쟁에 패하여 세인트 헬레네 섬에 정배 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생에 행복한 날들을 손꼽아 헤어 보니 겨우 엿새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장님이요 벙어리요 귀머리였던 헬렌 켈러 여사는 세상을 떠날 때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여 보십시다. 한 사람은 돈, 권력, 명성과 지위 또 뛰어난 경륜을 가지고 있던 세기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용기 있고 위대했던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불과 엿새도 행복하지 못하였습니까? 그와는 반대로 가진 것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또 말할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는 생을 마치는 순간 "내 생애는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모두 그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행복한 어떠한 것을 가졌느냐 하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언제나 마음이 먼저이며 중심입니다.
솔로몬 왕은 본문에서 네 마음속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네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온 육체의 건강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현대인들의 병중에 70-80%가 신경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병자 중에 75%가 정신적 요인에 의한 것이고 말을 합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정신 분석학이나 각종 심리학이 발달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현대인들이 저지르는 각종 범죄 사건의 요인 역시 정신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 교통사고 같은 경우 운전 기사의 사고 요인 중 아침에 부부 싸움을 하고 나온 것이 90%로 나타났고, 교통사고 요인의 40%는 음주에 있다고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정신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정신이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마음이 기울어지는 곳으로 육체는 따라 갑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월남하신 분들이 종종 음식점에 가서 냉면을 잡수시면서 평양이나 함흥에서 먹던 것과는 맛이 틀리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통일되어 고향의 냉면을 언제나 먹을 수 있다면 어느 쪽이 더 맛이 있겠습니까?
또 이런 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잠은 폭신한 이불 위에 편안히 누워 자야만 편한 것인데, 어린아이들은 어머니 등에 업히거나 무릎에 앉히어 불편하게 잠을 잡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어머니의 따스한 체온과 사랑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한 자세이지만 가장 편하고 행복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양이나 함흥에서 먹었던 냉면이 더 맛이 있었다고 느껴지는 것은 거기에 갈 수 없다는 간절한 그리움과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가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극히 동기론 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살인한 것이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살인은 우리 마음에 있는 미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간음은 음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인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비약해서 말씀드린다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도 악도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은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위 이전에 마음을 지켜 그 마음에 죄된 생각을 품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정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는 막지 못하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새는 막아야 한다." 슬쩍 우리의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를 계속 맴돌며 어지럽히는 생각은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스라엘에서는 해가 지면 벌써 다음 날입니다. 우리 같이 아침부터 날을 헤아리지 않고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를 하루로 칩니다. 그러므로 "해가 지도록'이란 표현은 화를 다음 날까지 끌고까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일 화를 계속 며칠 동안 풀지 않으면 마귀가 틈탈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분노와 미움 등의 죄된 생각이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는 상태를 가장 좋아합니다. 마치 파리가 지저분한 곳을 좋아하듯이 마귀는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졌을 때를 최상의 기회로 여기고 달려와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달래 주는 척하며 유혹을 합니다.
솔로몬은 훌륭한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40년 동안이나 전쟁도 없이 평화스럽게 나라를 다스리며 온갖 부귀와 영광을 누렸습니다. 건강하였고 명예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가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죄악에 빠지고 나라는 둘로 갈라지는 비극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에게 오늘의 이 말씀을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 말씀은 그의 깊은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입을 지키라." 그렇습니다. 첫째로 입을 지키는 것, 바로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나 말을 하지 맙시다. 아무리 내 마음에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을지라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차 있을지라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미움은 거기서 머물고 말 것입니다. 만일 말을 하면 미움은 자신도 감당 못할 정도로 점점 굳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더러워서 입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을 다물어 더러운 말을 하지 않으면 그 더러운 마음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좋은 말을 하도록 합시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그 교회에서 경영하던 학교가 있었습니다. 이 학교 학생들이 만날 때마다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하는 것이 좋이 않게 생각되어 "반갑습니다"고 바꾸어서 하도록 제안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해 하였지만 학생들에게 그대로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얼마 후에 학생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학생들은 "반가워요"라고 인사를 하다 보니 정말 반가운 마음이 생기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괴로움이 있을 때 그 괴로움을 말하지 말고 행복하고 즐거운 말을 하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 그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오. 그 괴로움으로 상한 마음을 사랑으로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많은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 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를 아노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입으로 증거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로, 눈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볼 수 있다고 하여 아무 것이나 함부로 보지 맙시다. 언뜻 눈에 보이더라도 빨리 고개를 돌려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추한 것 더러운 것은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도덕적으로 악한 행동도 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눈은 마음의 창문이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은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또 생활을 어지럽히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보며 부러워하지 맙시다. 권모 술수와 죄악을 자꾸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거기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본문 말씀대로 "네 눈을 바라보며 네 눈까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똑바로 앞만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얼마 동안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후 5시 퇴근 시간이 되면 그 공장 앞에 수백 대의 자동차가 꽉 들어섭니다. 남편들을 마중하러 나온 아내들의 자동차 행렬입니다. 남편이 공장 문을 나서면 자기 남편만이 아는 휘파람을 크게 붑니다. 그러면 자기 아내를 찾아 달려가서 차를 타고 곧장 집으로 갑니다. 남편이 한 눈을 팔 수 있는 시간의 여유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것, 이것이 바로 남편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셋째는 행동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네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지탱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차를 몰고 갈 때 반드시 차도에 그어져 있는 선대로 곧게 나아가야 하듯이 어느 것에든지 치우치지 말고 네발을 지켜 악에서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죄를 짓게 되면 내 신앙적인 체질이 악의 타성에 젖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한번 죄를 지은 사람은 또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고 또한 죄에 대하여 둔감해집니다. 역시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발의 첩경을 곧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단정히 빗고 몸가짐과 눈을 똑바로 하면 우리의 마음 자세가 바르게 되듯이 바로 지탱할 때 그 마음은 곧아집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이 흐트러지고 신앙적인 인격이 무너지고 맙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격은 마음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의 성정이며 여기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으로 하여금 항상 우리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 함을 얻을 것이며 아무도 우리를 구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참된 자유의 길이며 행복의 길입니다.
카톨릭에서 행하던 임종 예식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죽은 시체에 마치 우리의 세례식과 같이 기름을 가지고 다섯 군대에 바른 다고 합니다. 눈, 코, 입, 귀, 손과 발에다 기름을 바르는 이 예식을 종유예식이라고 하는데, 천주교 칠성례중에 하나입니다. 다섯 군데에 기름을 바르는 이유는 죄가 이곳들을 통하여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눈으로 죄를 지었고, 귀와 코, 입과 손발로 잘못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기름을 붓고 거룩하게 씻는 예식을 거행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다섯으로 죄를 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눈과 입과 발을 삼가해야 하겠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새영이 되며 그 온 육체에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을 우리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출처] 하용조 목사님 강단 설교|작성자 성경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