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부인 박지혜의 운명
북으로간 임재순
남으로간 박자혜
구한말 7살 이란나이에 저잣거리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임재순
이를 불쌍히 여긴 힌 여인이 비정한 아버지에게 몇푼의 돈을주고 소녀 임재순을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며 키운다
자라난 임재순은 16세에 길러준 여인의 큰 아들과 혼인한다 남편의 이름은 양세봉 1930년대 수천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다
박자혜 구한말 15세의 나이에 궁녀로 입궐한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침략 당하자 궁녀들이 해산되고 간호일을 배우며 살아가며 3.1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쫒겨 중국으로 망명한다
우당 이회영선생의 중매로 15년 연상인 홀아비와 25세에 결혼한다
남편의 이름은 40세의 신채호 였다
임재순은 1934년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다
박자혜 역시 남편을 읺고 과부가 된다
박자혜는 남쪽으로 내려와 지독한 생활고와 일경의 감시속에 아들마저 잃고 삭월세 단칸 방에서 굶어 죽다시피 가난한 고통속에 살다 세상을 떠난다
임재순은 서간도에서 네명의 아이들과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다 해방을 맞는다
어느날 임재순의 집앞에 서는 군용차
군인들이 내려 거수 경롓을 한다
북으로간 임재순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의 미망인으로 극진히 존대 받으며 자녀들과 특권층의 예우를 받으며 장군의 배려로성대한 환갑잔치도 치루며 천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가셨다
1943년 10월 남한의 서울 삭월세 방에서 두아들과 굶기를 밥먹듯 하며 몆달씩 방세가 밀려 독촉 받으며 처절히 살다간 박자혜여사
애국지사 가족임을 동아일보에서 알리고 도움을 요청 했지만 끝내 광복도 못본채 어린 자식을 궁핍해 걸린병으로 먼저보내고
남편 단재께서 가신길을 40대초 젊은 나이에 따라가신 슬픈 여인 박자혜여사
1934년 서간도에서 남편 양세봉 장군을 떠나보내고 네아들과30대초에 홀로된 임재순
일제의 눈을피해 위험을 무릅쓴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해방되는 11년간 네 자녀와 살아 남았고
북조선의 장군의 애국지사 미망인과 자녀들로 특별한 배려와 예우가 있었다
남쪽은 지대한 애국지사 단재 신채호선생의 미망인과 두자녀를 굶어 죽다시피한 비참함에 버려두어 결국 죽어갔다 민족사의 비정한 역사이다 ㆍ
북쪽은 독립투사의 미망인과 네 자녀늘 위험을 무릅쓰고 지키고 보살피고 해방후에서 오늘까지 특권층 애국지사의 가족들로 예우한다
남쪽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생가와 무덤을 출입 금지로 통재 해왔고 국무총리로 최초로 한명 이낙연이 비공식으로 방문하며 별뜻없이 왔다고 말하고간게 남쪽 정부에서 오늘까지 한 처사이다
북쪽은 애국열사능에 목없는 양세봉 장군의 유해를 정중히 모셨고 극진히 인민들에게 참배케하며 존대하며 추앙하고 후손들까지 특권층으로 예우한다 이글은 나의 말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 만주족 역사학자 조문기 선생의 서간도 독립운동사의 실증학적 기록과 신채호 선생의 사모님 박자혜여사를 검색해도 수없이 많이 가록된 많은 증인들과 동아일보의 보도내용등 증명된 사실을 옮겨 적은것 뿐이다
실증된 이기록을 옮겨 적음에 이런글을 밝히느냐 하시는분들 있다 남과북의 이데올로기를 떠나 친일청산 못한 현실을 옮겨 적은것 뿐이다
누구를 위해 너무나 확실히 증명된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 되묻고 싶다
민족을 배신한 반민족 친일숭미 부역자들을 위해 이 사실이 감추어야 한다면
나는 그리할순 없다
진실을 말하고 단재 가신길을 따라갈망정...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 누가 애국을 하려 하겠는가 ? 생각해보게 된다ㆍ
지대한 우리민족의 대학자 대스승 순국선열 단재신채호 선생을 우리 모두 결국 다 만나게 될것이다 다른 세상이 존재 한다면
어찌 뵈올 것인가 ? 어찌 얼굴들고 뵈올수 있겠는가?
가슴아픈 날들이다ㆍ제정신 가지고 이나라를 산다는게...
역사는 정신이다 역사를 잃으면 정신을 잃고 정신없는 나라를 만들게된다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조영건)
* 단재 신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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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부인 박지혜의 운명(우희종교수님페북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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